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187)
188화 독립
“사숙!”
구운소가 대경실색해 앞으로 나서며 연검을 휘둘렀다.
슈슈슉.
사곡의 곡주라서 그런지 그녀의 검도 검술도 뱀을 닮아 있었다.
“흡.”
차창!
당진철은 구운소와 검술을 섞으며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달았다.
‘겨우 절정지경에 이르러 놓고 세상을 다 가진 듯 오만하였구나.’
오래도록 일류고수의 반열에 머물렀다가 꿈에 그리던 절정에 입문하여 들뜨고 말았다.
성취감과 고양감이 독이 되었다.
절정의 반열은 지구에서 손에 꼽히는 고수의 반열이나, 구천행성에서는 여전히 차이고 차이는 수준이다.
만충 도사 또한 화경의 고수.
경지를 무시하고 상대를 죽이는 것이 당가의 독공이고, 또 그것이 싸움이라 하나, 너무 안일했던 것이 사실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거늘.’
지구에서는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고수가 적다 생각하여 자신있게 추적했는데, 화경의 고수와 절정고수가 세트로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당진철은 검을 크게 떨치고 뒤로 훌쩍 물러섰다.
“웬 놈이냐!”
“미친놈!”
쳐들어온 놈이 누구냐고 물으니 구운소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혈교의 마인이라 그런지 뻔뻔하기 그지없구나.”
“쳇.”
당진철은 가만히 구운소의 기색을 살폈다.
‘절대 나보다 하수가 아니다.’
절정지경에 입문하고 나서는 세상을 발아래 둔 것 같았는데, 큰 착각이었다.
지구에서 손에 꼽을 고수라고 생각했건만…….
‘이토록 해이해진단 말인가.’
당진철은 스스로를 질책하며 빠르게 상황을 살폈다.
프프프프픗!
만충 도사는 몸에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며 운기조식에 빠져있다. 지금이라도 공격한다면 주화입마에 빠트릴 수 있겠으나, 구운소가 문제다.
절대 얕잡아 볼수 없는 여고수다.
“그렇군. 야수문의 사곡주가 그리 미인이라던데…….”
“헛소리 마라! 원수의 졸개!”
구운소가 일갈하며 연검을 내질렀다.
캉, 카앙!
당진철이 연신 뒤로 물러나며 검을 섞었다.
‘낭패군.’
슬쩍 찔러봤는데 진짜 사곡주다.
사곡주면 야수문주의 동생.
이들이 왜 지구에, 그것도 수호성 근처에 머무르는지 모든 게 설명된다.
당진철은 빠르게 행동을 결정했다.
“두고 보자.”
진부한 말을 남기고 발을 빼는 그를 보며 구운소는 쫓으려다가 발을 멈췄다.
“칫!”
만충 도사가 독을 다스리는 동안 호법을 서는 게 먼저다.
은신처가 발각된 이상, 놈이 혈교의 고수들을 데려오기 이전에 서둘러 자리를 떠야 한다.
“후우.”
당진철은 추격이 없자 한시름 놓은 얼굴로 속도를 줄였다.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쳐 도망쳤으니, 꽤 모양 빠지는 모습이었다.
“이건 전진을 위한 후퇴다.”
만충 도사라면 은거한 전대 고수다.
무려 화경에 이르렀다고 알려진 그라면 당진철이 쓴 독은 결국 극복해 낼 터였다.
만충 도사가 정신을 차리고 합류하기 전에 발을 뺀 것은 백번 생각해도 잘한 결정이었다.
“무슨 수로 잡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한참 궁리 중이던 당진철이 슬쩍 웃었다.
“내가 더 강해져야겠군.”
복수를 위해 살았던 그다.
수호의 손을 빌려 복수를 마친 그에게 남은 건 공허함뿐이다.
다시금 복수의 대상이 생기니 외려 살아있음을 느낀다.
몸 안의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것 같다.
이번엔 남에게 맡기지 않는다.
“구천 행성행에 따라 나서야겠군.”
대신 단련은 남의 손을 빌린다.
복수만 내가한다.
당진철이 단순한 생각을 끝내는 사이 어느새 수호시티에 도착해 있었다.
“엄마 미안.”
당장 이숙자를 불편케 한 원흉들을 제거하지 못했다. 그래도 한동안 벌레들의 습격은 없을 터니 만족하기로 했다.
*
태사신니는 격렬한 논의 끝에 결국 합의를 이끌어냈다.
마몬족들은 쉴 틈 없이 세력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을 벌이니 무림인들의 입지가 점차 줄어드는 것은 별수 없었다.
저쪽에서는 작정하고 몰아치는데, 전력의 상당부분이 증발한 무림맹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임시 무림맹주 중언개로서도 혈마와 손잡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니, 꼭 그리 하고 싶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내부의 목소리.
혈마를 원수로 생각하는 많은 무림세가에서 반대하는데, 아직 정식도 아니고 임시무림맹주의 직권으로 몰아붙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작정하고 달려드는 마몬족들로 인해 위기의식이 더 해지지자, 혈마로 하여금 마몬족들의 주요 세력들을 잡게 하자는 이이제이의 안건이 통과되었다.
혈마가 아예 마몬족들과 원수지고 싸워주면 고맙겠지만, 놈은 단 10명의 수급만 약속하였다.
그 대가가 되는 것이 혈교 본단에 아미파의 분타 건설.
아미파 지구 분타의 총 책임자로 나서는 태사신니와 아미파 제자 15인은 무림을 위해 희생한다는 각오로 포탈을 넘었다.
파팟.
익산 게이트를 통과한 태사신니와 아미파 제자들은 게이트 관리요원의 지시에 따라 등급을 측정하고, 잠깐의 검사가 있은 후, 임시대기소로 향했다.
소식은 포탈관리과를 거쳐, 각성자관리국을 지나 수호 길드 부사장실로 흘렀고, 김미소는 직접 익산으로 향했다.
수호 길드에서 유일한 통역 아티팩트를 소유하고 있어 언어의 장벽에 자유로운 김미소지만, 통역을 구실로 장취아를 대동했다.
“정심아!”
태사신니는 물론 아미파의 고수들도 정심을 보고 크게 반가워했다.
한결 부드러워진 그들의 표정을 보고 김미소가 미소지었다.
“먼 거리도 아니니 분타로 곧장 가시지요.”
“그리합시다.”
대한민국이 구천 행성 고수들에게 뭔가 숟가락 걸칠 새도 없이, 그들을 태운 수송 드론은 곧장 수호시로 향했다.
김미소와 함께 따라온 비서실장 이소진이 조용히 귓속말했다.
“관리국에서 조용하네요.”
“왜?”
“아니, 그렇잖아요. 태사 스님 빼고도 U급이 계신데…….”
태사신니가 90레벨의 SSSS급. 개정된 명칭법으로 L급이다. 구천행성으로 따지면 화경의 고수.
레전드급의 태사신니야 예전에 이미 측정되어 유명해졌다지만, 이번에 새롭게 지구로 온 아미파의 고수들 중에서도 초절정 고수 둘에, 절정고수만 넷이다.
모두 지구로 치면 80레벨, 70레벨 대의 U급, SS급의 랭커들.
나머지 제자뻘의 인사들도 최고 하수가 A급이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국가급 전력이다.
U급은커녕 SS급도 보유하지 못한 여러 길드나 대한민국 정부입장에서는 탐낼 만한 인재임에도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은 게 의아했다.
이소진의 그런 의문에 김미소는 조용히 속삭였다.
“네가 관리국장을 몰라서 그래. 그 양반이 눈치는 빨라.”
“예?”
“힘들일 필요 없다 이거지.”
고수들이 모여드는 수호 길드다.
수호 길드만 꽉 붙들고 있으면 그 모든 혜택이 떨어질 것인데 괜히 들쑤실 필요가 없다 판단한 게 틀림없다.
관리국장의 성격을 훤히 꿰고 있는 김미소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눈에 선했다.
멋모르고 접촉하려는 길드나 다른 정부 인사들의 요청을 국장이 알아서 다 잘 막았을 것이다.
띠리리리.
“이 양반도 참.”
때마침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니 관리국장이다.
“네, 국장님.”
[어후, 너네 길드 왜 그러냐.]“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뭐 각성자를 어디 자판기에서 찍어내냐?]볼멘소리를 내뱉는 걸 보니 정부 인사들의 요청이 꽤 거셌던 모양이다.
“이분들이야 그쪽에서도 이미 고수들이에요. 저도 함부로 할 분들이 아니죠.”
[내 말이. 그런 사람들이 갑자기 막 넘어오고, 어? 대체 무슨 관계냐?]“고생하셨어요.”
[어휴, 뭘 알아야 내가 눈치 없는 노인네들한테 변명이라도 하지.]“앞으로 수호시티에 거주하실 분들이세요. 곧 망명 신청할 테니 잘 처리해 주세요.”
[망명?]게이트를 건너온 외부 행성인들에겐 죄다 임시거주증인 관광비자가 발급된다.
“네, 대한민국 국민이 되실 겁니다.”
[으음, 알았다. 일단 끊자.]“네, 빠른 처리 부탁드릴게요.”
김미소는 전화를 끊고 살풋 웃었다.
수호시티의 전력강화가 곧 대한민국의 전력상승이다. 이를 모르지 않을 관리국장이다.
생각이 굳은 윗방석 노인 몇이야 손에 쥐고 있어야 제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이게 어디 쥐고 싶다고 쥘 수 있는 물건인가.
수호시티는 이미 그들의 손아귀에 들기엔 너무 커져 버렸다.
*
타이베이.
야수들은 도시를 휩쓸었고, 밤의 존재들은 그들의 사냥감이 되어 찢겨나갔다.
최수영의 팀은 생존자들을 찾았고, 척 봐도 질 나빠 보이는 약탈자 무리를 처단했다.
신도 아닌 개인이 어찌 법의 집행을 대신할 수 있겠냐만은, 이미 나라도 도덕도 무너진 이 세상에서 죄를 단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쌓여 가는 마음의 혼란에, 명진은 단순명쾌한 말을 뱉었다.
“모든 것은 내 업이로다.”
수라가 되기로 한 명진이다.
악을 죽여 중생을 구하는 일이다.
악이 어찌 종을 가리겠나.
인두겁을 쓰고 괴물보다 더 한 일을 저질렀으니, 몬스터보다 더 흉악한 마귀다.
명진의 창에서 몬스터의 피보다 사람의 피 냄새가 더 짙게 밸 때쯤.
야수들의 사냥이 끝났다.
휘리릭.
“다 모이시랍니다.”
수호의 전령 역할을 자처하는 차이가 홀연히 나타나 말을 전했다.
“후, 돌아가자.”
최수영이 말했고 동수가 찝찝한 듯 물었다.
“아직 못 돌아본 곳이 더 많은데 어쩌죠?”
이 큰 도시를 고작 4명이서 돌아다녔다.
최수영의 감지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워낙 면적이 넓어 아직 확인하지 못한 지역이 더 많다.
“손닿는 데까지. 여기까지가 한계야.”
“…….”
최수영의 말에 박용필이 수긍했다.
“돌아갑시다. 대장이 부르잖아요.”
“그래요. 가죠, 스님.”
“…….”
네 명의 용병들이 아쉬움을 뒤로하고 수호에게로 복귀했다.
파파팟!
일행이 도착하자 이미 비룡이 소환되어 탑승구를 열고 있었다.
“빨리 와!”
“헉, 헉.”
“사장님. 숨 좀 돌리고 타죠. 허윽.”
철인으로 거듭난 각성자들도 지치기 마련이다. 자동차보다 더 빠른 속도로 뛰어온 상태라면 더더욱.
“후우우우, 후우우웁.”
명진은 심호흡한 뒤 수호에게 고개 숙이며 말했다.
“소승은 여기 남겠소.”
“응?”
수호가 의문을 표하자 명진이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악을 멸하는 것이 선을 구하는 길이 아님을 알고 있소.”
정부가 없는 도시다.
약탈자 무리들이 많이 죽었다지만 이후 일어날 일들이야 뻔하다.
새로운 약탈자와 피해자가 생겨날 뿐이다.
적어도 이곳에 새로운 질서가 생기거나, 생존자들이 타 도시로 안전하게 대피하기까지만이라도 이끌어 주리라.
수호는 명진의 말을 듣고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좋아.”
“정말이시오?”
쉬운 승낙에 명진이 외려 되물었다.
“막을 이유가 뭐야?”
다 자란 새끼가 무리에서 독립해 새로 무리를 이루겠다는데 어찌 막는단 말인가?
이곳은 수호시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영역이 겹칠 일도 없다.
“수호 길드에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소.”
“그래. 잘해 봐.”
수호는 명진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쿨하게 비룡에 탔고, 나머지 용병들이 갈팡질팡했으나 수호를 따라 비룡에 탔다.
이미 한자리 차지하고 있던 웨이중은 눈을 질끈 감고 내렸다.
“나, 나도 스님을 돕는다!”
먼 나라 한국 땅에서 온 승려가 저렇게 몸을 던지는데, 자국민이 되어서 어찌 외국으로 도망갈 수 있단 말인가?
이래서야 이 나라는 평생 속국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웨이중의 결단에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짧은 인사와 응원이 오갔고, 비룡이 날아올랐다.
멀어지는 비룡을 보며 명진이 다짐했다.
“얼른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가겠소이다.”
무리를 나선 명진이 혼자 복귀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