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233)
234화 서클
지구인들을 뒤로하고 숲에서 부족장을 위시한 장로들이 모였다.
“합시다.”
“지구의 부자 도시에서 온 듯하오.”
“맞습니다. 이런 거래를 안 받으면 드워프들도 비웃을 것이오.”
“…….”
모두가 찬성을 내뱉으며, 침묵하는 삼장로를 보았다.
로이소는 모여든 이목에 침음성을 삼켰다.
“고, 고귀한 엘프들이 어찌 이리 물욕이…….”
“어허, 이건 물욕이 아니오.”
물욕을 따질 정도의 레벨을 넘어섰다.
안 받으면 병신이 되는 거래다.
“우리, 비웃음거리는 되지 맙시다.”
“맞소. 좀 타락하면 어떻습니까.”
“어허, 오장로! 그 말은 좀 심하시오.”
“허허, 사과합지요.”
산처럼 쌓인 마나석을 보곤 이미 마음만은 부자가 된 오장로다.
“삼장로. 우리 이건 합시다.”
“으음. 저들이 저리 많은 마나석을 내놓았다는 건, 필시 어려운 부탁을 하기 위해서일 것이오.”
“어차피 빈 땅이야 넘치는데 뭐 어떻소.”
“맞소. 삼장로, 그냥 한 번만 넘어갑시다.”
“아니, 당신들도 반대하지 않았소?”
“쯧쯧, 어찌 그리 생각이 굳었소. 다 우리 부족을 위해서 결정하는 일이 아니오?”
“맞소. 그때는 반대하는 게 맞지만, 지금은 찬성하는 게 맞소.”
“흥, 다들 재물에 눈이 멀었군.”
“눈이 멀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소? 호구는 일단 잡는 게 상책이라 했소.”
“어허, 고귀한 핏줄께서 어찌 말이 그리 경박하시오?”
“아 나도 모르게 그만.”
너무 많은 마나석을 봐서 눈이 돌아간 모양이다.
“내 사과하리다.”
사장로가 사과하며 무언으로 삼장로를 압박했다.
“후, 모두가 원하시는데 내 더 이상 고집 부릴 수 없구려.”
“오! 만장일치요.”
이게 만장일치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의견이 한데 모아졌다.
숲에서 걸어나오는 여섯 명의 늙은 엘프를 보는 수호는 피식 웃었다.
그의 어깨에 붙은 바람의 정령이 쉴새없이 조잘거리고 있었다.
‘호구는 이이이일다다다단, 자아아아아…….’
바람의 정령 실프가 말하는 게 아니라, 바람을 타고 흘러가는 소리를 잡아와 전해주는 거다.
자아의지를 가진 실프지만 언어를 구사할 정도로 지능이 높지는 않았다.
혹은 아직 어려서 그럴지도 모르고.
수호는 엘프들의 회의를 다 들었다.
“흠흠, 부족장으로서 회의의 결과를 전하겠소.”
지구에서 온 수호 일행은 물론, 모여든 하이엘프들의 이목이 모두 집중되었다.
“오룬 부족의 발전과 수호시티의 식량 수급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미사여구가 길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교역에 임할 것을 고합니다.”
하이엘프들 몇이 환호했다.
특히나 희생이 많은 마법사들의 시선은 마나석 더미에 가 있었는데,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눈빛이었다.
“좋아.”
수호와 부족장이 악수를 나누자 환호가 퍼져나갔다.
이소진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가 곧 웃었다.
‘내가 들러리였네.’
나쁜 부사장.
모든 전권 다 주고 자신을 보낸 것 같더라니…….
애초에 말이 안 된다.
비서실장에게 전권을 줬든 아니든, 모든 전권을 쥔 사장이 함께 가니 책임자가 누군지는 명백했다.
혼자만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부 물량 논의는 이 사람이랑 하면 되요.”
수호가 이소진을 소개했고, 부족장도 장로 중 하나를 불렀다.
“오룬 부족 마법사들의 수장이오.”
소개받은 오장로는 빙그레 웃으며 수호를 시집 온 며느리 보듯 했다.
“허허, 오장로 이스로입니다.”
그는 해마다 갈려나가는 마법사와 실수로 죽어나가는 제자들을 보며 늘 안타까워했다.
지구와 직접 교역해 많은 마나석을 수급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오룬 부족 영역엔 지구로 통하는 게이트가 없었다.
‘신이 내린 축복이리라.’
오장로 이스로는 진심 그렇게 생각했다.
게이트도 없어 교역로가 길어져 불편할 터인데 이렇게 찾아와 준 것만 해도 감사할 지경.
거기에 마나석은 얼마나 많은지 집보다 크게 쌓인 저 물건이…….
“이건 교역 기념 선물이오.”
“아이쿠! 선생님.”
수호의 말에 이스로의 허리가 납작 숙여졌다.
“뭘 또 그렇게.”
“제가 370년 평생 이렇게 감격한 일이 없습니다.”
보통 엘프들은 200년을 산다더니, 하이엘프들은 수명이 최소 두 배는 더 되는듯 싶었다.
이스로가 늙은 외모를 가지고 있긴 했으나, 아직도 정정한 모습이니까.
아무튼 오장로 이스로가 수호에게 가장 큰 호감을 가지고 있다.
“수호 길드는 우리 오룬 부족의 형제와 같습니다.”
이야, 재물이 좋구나. 형제도 뚝닥 생기고.
“그래서 말인데, 부탁할 것이 있는데.”
“말하시지요.”
“세계수를 좀 구경할 수 있을까요?”
수호의 물음에 싱글벙글하던 이스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건 들어줄 수가 없소.”
생각해 보겠다도 아니고 아예 없다고 선을 그었다.
‘강제로 봐야 하나.’
수호가 잠시 고민하는 그때 이소진이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아니, 사장님 왜 그러세요.”
“뭐가?”
“왜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고 그러세요. 일단 협상부터 마무리하자고요.”
“그것만큼 중요해.”
이세계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인 세계수를 관찰해야 한다. 수호에게 있어 이것은 수호 길드의 안위만큼이나 중요했다.
“후, 그냥 나중에 몰래 가셔도 되잖아요. 꼭 싸우실 거예요?”
“아하.”
수호는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잠시 멍해졌다.
‘몰래 봐도 되는구나.’
어느 순간부터 정면승부만을 추구해 왔다.
아마 최상위 포식자가 되고 나서부터일 것이다.
그쯤 되면 눈치 볼 것도, 제약도 없으니까.
그런 삶이 너무 익숙해졌나 보다.
“좋아. 협상해.”
수호가 오장로 이스로에게 다가가 빙긋 웃었다.
“농담이었어요.”
“아하하하! 참 짓궂으십니다. 세계수를 언급하는 건 엘프들 사이에서 신을 입에 담는 것과 동일한 모욕입니다. 앞으로는 주의해 주시지요.”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모욕이라니.
자기들끼리는 되고 외부인은 안 된다.
저건 니가 같은 마법의 단어인가.
“오늘은 거하게 대접할 터이니, 선생님께서는 편히 즐기시지요.”
“그럽시다.”
수호가 시원시원하게 답했다.
저 정도 마나석 무더기를 줬는데 대접이 나쁘면 쓰겠나.
수호 일행은 하이엘프들의 축제에 끼어들었다.
여관에서 맛보던 것보다 훨씬 더 고급의 요리들이 극진히 대접되었고, 수호는 먹고 마시고 즐겼다.
‘아니, 너무 즐기시는 거 아냐?’
세부 협상을 끝내고 연회에 참석한 이소진은 외려 걱정되어 물었다.
“사장님, 너무 노시는 거 아녜요?”
“뭐가? 이거 먹어봐. 엄청 맛있어.”
“아니이!”
이소진이 조용히 귓속말을 전했다.
“몰래 세계수 보고 오신댔잖아요.”
“그거야 언제든 가면 되지.”
“…….”
뭔가 기회를 노리고 해야 하지 않나?
“이거 술이 이름이 뭐지?”
“아, 가지술이오. 야채로 술을 담그는 비법은 엘프들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것이라오.”
“오, 가지로 이런 맛이라니.”
수호는 옆에 앉은 오장로 이스로와 죽이 맞아 술을 주고받고 있었다.
“아까 그 서클 이야기 더 해봐요.”
“지구에서 오신 선생님께서는 마법에 관심이 참 많으시군요.”
서클.
원으로 된 마법의 고리다.
이스로가 오른손을 펴 보였다.
위이잉.
그의 손바닥에 원형의 마나 고리가 생겨나 맹렬히 회전하고 있었다.
“이게 서클이오.”
“오오!”
“하나의 서클은 마나를 만지고 느낄 수 있다오.”
마법의 입문이자 가장 중요한 서클이지만, 1서클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하지만 두 번째 고리를 만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
이스로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바닥에도 마나 고리가 하나 생겨났다.
위이잉.
“마나를 느끼고 가공할 수 있는 게 2서클부터.”
오른손바닥 위에 생겨난 불덩이가 왼손의 서클의 도움을 받아 하늘로 솟구쳤다.
파이어볼트.
불덩이가 바람의 힘을 빌려 쏘아졌다.
“세 번째 고리는 여기라오.”
이스로가 가슴을 탕탕 쳤다.
마나 고리의 밝은 빛이 옷을 넘어 비춰졌다.
“이것은 마법을 더욱 강화한다오.”
이스로의 발밑에 마나의 고리가 하나 더 생겨났다.
“이것이 네 번째, 다섯 번째의 서클이오.”
양쪽 발에 하나씩 생겨난 서클이 겨울에 신는 설피처럼 바닥에 닿았다.
“헤이스트 마법과 플라이가 가능해지는 것도 이때라오.”
이스로의 이마에 밝은 빛이 떠올랐다.
“여섯 번째 서클부터는 무한한 상상력으로 마법을 발전시킬 수 있지요.”
이스로의 손바닥 위에 생겨난 불꽃이 용의 형태로 변했다.
“이것은 고대에 사라진 드래곤이라오.”
“사라져?”
“드래곤의 전설에 대해 듣고 싶소?”
“말해줘요.”
“허허허, 이를 말이겠소. 자자, 일단 한잔 더 받으시오.”
이스로와 수호의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고, 장순필은 옆에서 메모까지 하며 귀를 쫑긋하고 들었다.
*수호 길드 부사장실은 전망이 좋다.
서쪽으로 보면 푸른 숲이 쭉 이어져 있고, 동쪽으로 보면 내성이 한눈에 내다보인다.
창가에 서서 머그잔을 들어올렸다.
호로록.
“하, 좋다.”
이제 완연한 겨울의 초입이다.
어쩌면 몬스터보다 더 혹독한 것이 자연인지도 모른다. 올 겨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고픔과 추위에 죽어나갈까?
적어도 수호시티엔 그런 사람이 없겠지만, 이미 수호 길드는 시티 외의 더 넓은 세상을 걱정할 위치에 놓여 있었다.
“사장님은 잘 하고 계시려나.”
“다녀올까?”
김미소의 뒤엔 뱀파이어 차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비서처럼 종일 따라다니는 그녀는 김미소의 새로운 경호를 자처했다. 본업무는 김미소나 길드에 위협이 생기면 당장 수호에게 알리는 역할이다.
“아니, 괜찮아요. 사장님이 부르시면 가요.”
괜히 일하시는데 방해할 수야 없지.
호로록.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태블릿을 들어 살폈다.
세계 주요 이슈를 체크하는 건 본래 비서들이 하지만,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행동이다.
‘천문 대신 이거라도 읽어야지.’
먼 옛날 삼국시대엔 천문으로 대강의 판세를 읽곤 했다.
점성술에 의존하는 건 구식이다.
진실과 거짓이 난무하긴 하지만, 세계의 주요 동향은 인터넷에 기사로 모두 떠돈다.
속보들 위주로 뉴스를 체크하던 김미소가 눈길을 잡아끄는 헤드라인 하나를 터치했다.
“8성 던전에 대하는 자세?”
세계 최초 8성 던전이 생겨났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
인류가 정복할 수 있는 던전은 7성이 마지막이다.
8성 던전의 던전마스터(보스)는 군주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
7성까지의 던전이 탐험이었다면, 8성 부터는 전쟁이다.
광활한 8성 내 모든 몬스터들이 군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생태계?
그딴 건 없다.
모두 몬스터들이 종을 가리지 않고 군주의 부하이자 군대다.
던전에 진입할 수 있는 건 30명 남짓.
각성자들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그 인원으로 국가급의 전력을 가진 몬스터 군단에 맞설 수는 없다.
8성 던전의 브레이크?
이것이야말로 종말의 시작이다.
거대 해상군주의 출현은 애교에 불과했다.
진정한 거대 육상군주의 출현으로, 인류가 영위할 수 있는 영토는 더욱 줄어들게 될 터.
발악하고 발악해도 피할 수 없는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
“뭐야.”
흔하디흔한 종말의 예언서다.
시대가 혼란하다 보니 이런 종류의 저주 같은 예언이 판을 치는 세상인데, 메이저언론사에서 헤드라인으로 다루다니.
김미소는 출처를 확인하곤 인상을 굳혔다.
“허, 이성우?”
은신중인 전 챔피언과의 인터뷰 중 발췌.
김미소는 스크롤을 다시 올려 내용을 마저 읽었다.
강릉에 출현하는 8성 던전이 최초다.
고작 10회 남짓의 그 던전은 공략이 불가능하다.
던전 보스 두꺼비군주의 두꺼운 표피는 전술핵도 견딜 정도의 견고한 방어막을…….
“강릉, 겨울, 출현 시기는 불분명…….”
8성 던전을 예고했다.
그냥 루머로 치부하고 지나치기에는, 그가 회귀자인 게 마음에 걸렸다.
대관절 숨어 살던 놈이 이딴 인터뷰는 왜 했을까?
“주인께 알릴까?”
“아뇨. 다음에 부르시면 그때 알려줘요. 급한 건 아니니.”
회귀자도 모르는 게 있다.
여기, 국가와 전투를 벌이는 일개 개인이 있다는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