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398)
399화 분열 (3)
“너네 신이 아무 말도 안 하더냐?”
“인간들의 신이여…….”
박수호의 입에서 나온 유창한 오크어에, 파둔은 대답을 더 미룰 수 없었다.
모든 오크들이 따르는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하는 대주술사라 하더라도 신의 압박은 상당한 부담이다.
애당초 신격을 지닌 존재 앞에서 인간계의 강함 따위는 하등 쓰잘데기 없는 비교다.
무엇을 하든 신의 터럭 하나 다치게 하지 못할 테고, 무엇을 당하든 피해내지 못할 테니까.
“드래곤 새끼들, 안 되겠네.”
드래곤 로드에게 오크들 데리고 돌아가라고 직접 이야기까지 하고 왔는데, 아직 오크들에게 전달을 안 했다.
“이거 그냥 싹 쓸어버려?”
어차피 지구 땅을 밟은 놈들.
전쟁하자고 온 녀석들인데, 밟아버려도 되지 않을까?
아량을 베풀어 주었으면 넙죽 받을 것이지, 이것들이…….
“시, 신님을 뵈올 기회가 없었나이다.”
눈치 빠른 파둔이 납작 엎드렸다.
인간들의 신은 미드얼 행성에 가서 드래곤을 만나고 온 것이 틀림없다.
“응? 꼭 보고 말해야 해? 신탁 같은 거 안 돼?”
“…….”
아무런 신탁을 받은 적도 없다.
그 이전에 새롭게 대주술사가 되어 신께 인사조차 드리지 못한 파둔이다.
“아직 정식 인정도 받지 못한지라…….”
“허, 참.”
그때 그 녀석을 괜히 죽였나?
은낙이 죽고 나서 파둔이 대주술사가 되며 인수인계가 제때 이뤄지지 않은 모양이다.
어쨌든 수호가 드래곤에게 한 경고는 대주술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엎드려 바들바들 떨고 있는 파둔에게서 전투의지를 읽을 수 없었다.
주변을 가득 메운 오크 전사들도 잔뜩 겁먹은 얼굴.
전투의지가 꺾인 놈들의 목을 베어 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괜한 학살극이 될 뿐이다.
“다 죽기 전에 돌아가라.”
“신의 아량에 감사를…….”
대주술사가 엎드린 채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수호의 신형이 훌쩍 날아올라 명진이 쓰러져 있는 구덩이로 갔다.
얼마나 세게 밟아놨는지, 애가 푹 파묻혔다.
다행이라면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다는 것.
“쿠르르.”
수호의 착지에, 주변을 메우고 있던 오크들이 분분히 뒤로 물러서며 자리를 만들었다.
거인 둘을 눈 깜짝할 새에 해치워버린 수호의 신위를 본 터다.
아무리 호전적인 오크라 하여도, 덤빌 견적이 나올 상대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고 물러났다.
파파파팟.
수호는 주위의 조화력을 끌어모아 명진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으으.”
급속도로 회복된 명진이 벌떡 일어나며 튀어올랐다.
팟!
구덩이에서 솟구쳐 착지한 명진의 옷은 피와 흙으로 더러웠으나 그 눈빛만은 맑았다.
“후, 열반할 뻔하였소이다.”
명진의 말에 수호가 피식 웃었다.
“가자.”
“예에.”
수호가 천천히 걷자, 이미 말을 마쳤는지 오크 주술사 은낙의 주변 부족부터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딜 가나 튀고 싶어 하는 이는 있고, 생존본능보다 호승심이 앞서는 별종은 있기 마련이다.
“전사의 목을 신께 바치리!”
날랜 오크 전사 하나가 대검을 들고 짓쳐들었다. 그는 달려들면서도 자신이 죽을 것을 알았다.
알면서도 덤빈다.
적어도 자신의 용기에 형제들이, 동족들이 호응해 놈을 공격하리라!
이 전장에서 사라져버린 투쟁심을 끌어올리는 마중물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이 한 목숨 바치리!
용감한 오크 전사는 무방비한 인간신과의 거리가 1미터에 이르자 그래도 헛된 죽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한 방 먹이고 갈수 있겠군.’
이미 내려쳐진 대검은 관성이 붙었다.
손목이 잘려도 인간신의 몸에 생체기라도 생기겠지.
아쉬운 게 있다면 투쟁의 행성, 미드얼엔 역사가 없다는 것뿐.
신을 상처입힌 자로 기록될 뻔한 대사건은 어디에도 남지 않으리.
파지직!
뭔가 눈앞에서 번쩍인다 싶은 순간, 오크 전사는 사고를 더 이어 나갈 수 없었다.
대검에서 시작된 스파크가 주변으로 흐르며 일대에 전격이 퍼져나갔다.
꾸르르릉!
뒤이어 공기를 찢어발기는 천둥소리가 퍼져나갔고, 달려들던 오크와 더불어 일대가 번개 맞은 듯 초토화되었다.
파스스.
주변에 쓰러진 오크들만 해도 수십.
쇠붙이에 남은 전격이 살아 있는 듯 꿈틀거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겨우 봉변을 피한 오크들이 분분히 뒤로 물러났다.
이것은 투쟁심으로 해보고 말고 할 것이 아니다.
재해.
“맙소사. 벼락이야.”
자연재해다.
태풍이 오면 피하는 게 진리다.
아무리 호전적인 오크라도 태풍에 맞서 싸우겠다는 멍청이는 없다.
“애들이 말귀를 왜 못 알아먹냐?”
수호가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오크들 소리가 가득하다.
순순히 부족을 이끌고 퇴각하는 무리가 있는 반면, 대주술사 파둔의 명임에도 거부하고 완강히 버티는 부족도 있다.
수호의 신형이 허공으로 슬쩍 떠올랐다.
파지지직.
그의 주변으로 둥실 떠다니던 구름들이 회색빛을 띄며 뇌운으로 변했다.
살려고 기회를 줘도 주저하는 이 우매한 오크놈들을 죄다 튀겨버릴까?
심상찮은 분위기에, 벼락에 즉사한 오크들 주변부터 소요가 일었다.
잔뜩 겁을 집어먹고 내빼는 모습을 보곤 수호는 감정을 다스렸다.
달려드는 개미가 귀찮다고 모조리 죽여버리는 건 무의미하다. 그냥 쫓아내기만 해도 된다.
이렇게 공중에 뜬 채로 분위기만 잡고 있어도 오크들이 알아서 도망치겠지만, 일사분란하게 물러나기에는 군집한 수가 너무 많았다.
수만의 오크 군영은 질서 없이 혼란 그 자체였다.
휘리리릭.
수호의 신형이 연기에 휩싸였다.
백색과 청색, 적색의 연기가 피어올라 저들끼리 뭉쳤다.
백색과 적색의 연기가 서로 뭉쳐 길쭉해지더니 백염룡이 되었고, 청색연기가 청룡이 되었다.
수호의 앞에 난데없이 나타난 커다란 두 마리의 용에 오크 진영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드, 드래곤이다!”
“맙소사! 신이다.”
확실히 드래곤을 신으로 모시는 미드얼 행성의 오크들 개념에선 용들이 더욱 신과 같은 모습이었다.
두 개의 길쭉한 뿔을 가졌던 수호의 모습은 외려 거인족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지금은 사라지고, 변신이 풀리며 인간 그 자체의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타탓.
수호에게 날개라도 있지 않은 이상 하늘에 떠 있는 재주는 없다.
구름을 다스리고, 하늘을 날아다니는것은 청룡의 권능.
그 힘을 잃었으니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모, 괜찮아?”
“괘안심더.”
구름 위에 타고 있던 이숙자도 바닥에 내려섰다.
뒤따르는 명진과 함께 성벽으로 찬찬히 걸었다.
벽에 튕겨 바닥을 구르던 제임스는 천천히 걸어와 수호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 마이 갓!”
“…….”
*파둔은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대족장이라는 직책의 무게가 그를 머무르게 했다.
“어서 돌아가시오!”
은낙이 죽고 뒤를 이어 대주술사가 된 파둔이다.
그의 영향력은 지팡이에 달린 해골의 개수 차이만큼이나 약했고, 오크부족들을 아우르는 결속 또한 전보다 못했다.
은낙의 말이었으면 부족의 손해는 조금 감수하고서라도 종족을 위해 기꺼이 따랐을 명령도, 파둔의 명에는 망설여지는 것.
오크 부족들은 수호의 등장과 거인 둘의 죽음으로 변한 전장의 상황과 파둔의 후퇴 종용에 따르면서도 저마다 불만을 품었다.
“치욕적이군.”
“저 성 안의 인간들을 죄다 잡으면 오크 대왕이 탄생했을 것이다.”
“아쉬운 일이군.”
“분하군. 신은 무엇을 하는가?”
오크들은 인간신의 등장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나면서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거인족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인 드래곤이 나타나 신끼리 서로 상대해주면 오크들은 얼마나 편했겠나?
나고야에 모인 인간들의 목을 치다 보면 전쟁 와중에 오크 대왕이 탄생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서 물러가라. 어서!]주술의 힘이 담긴 파둔의 목소리가 오크들에게 널리 퍼져나갔다.
[신이 명하셨다. 미드얼로 돌아간다!]대주술사는 수호와 대화한 게 있어 드래곤로드의 뜻을 알고 저리 말했지만, 대부분의 오크들은 대주술사가 인간신을 두려워해 그 명을 듣는다고 생각했다.
“흥, 오크족이 언제부터 인간신을 모셨는지 모르겠군.”
인간신의 등장에 잔뜩 겁먹었던 오크들이지만, 나고야를 벗어나 오사카로 돌아가면서 투덜거림이 잦아들었다.
호전적이라는 게 별게 아니다.
두려움은 금방 희석되고, 투쟁에서 승리했을 때의 과실은 달콤하니 오크 전사들은 싸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어이, 빨리 가라.”
“누구에게 명령이냐!”
“느려터진 네놈 부족 덕에 길이 밀리지 않느냐?”
“크르르, 누가 감히 검은부족 전사를 모욕하는가?”
치욕감.
전장을 두고 싸워보지도 않고 후퇴하는 오크들의 마음이 그랬다.
그 모멸과 치욕, 분노가 애꿎은 동족을 향해 터졌다.
“흥, 겁쟁이 새끼가 말이 많군.”
“전사의 결투다!”
도망치던 겁쟁이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소요는 여기저기서 일어났으나, 뒤에서 이따금 두 마리의 용에게 비명횡사하는 오크족들의 후퇴 행렬에 떠밀려 오사카로 모여들었다.
후퇴한 오크들이 오사카 인근에 모여들었을 때는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다.
“흥, 저 겁쟁이 새끼들.”
“목은 전장에 두고 오는 것이 전사다.”
“동족의 수치군.”
미드얼 게이트가 열린 오사카는 여전히 수만의 오크들이 점령한 상태였고, 인간신의 신위를 경험하지 못한 오크들은 그저 도망쳐온 동족들을 비난하기 바빴다.
“쿠루룩. 신은 신과 붙어야 한다.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게 겁쟁이라는 거다.”
“네놈이 가봐라.”
“흥, 인간신이란 것은 별것도 아니더만.”
수호가 지구로 귀환할 때 어디로 왔겠나.
미드얼 게이트를 통해 나타난 수호가 군집해있는 오크들을 향해 ‘돌아가라’는 경고성만 남기고 떠났다.
그래서 오사카에 주둔중이던 오크들은 인간신의 무력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신격을 지닌 이라 그 목소리가 두렵고 마음을 흔들긴 했으나, 그 한마디 말 때문에 당장 미드얼 게이트를 통해 행성으로 귀환하는 오크 부족은 몇 없었다.
“전장이다. 전장에 나선 전사가 어찌 살아서 돌아가랴?”
“그런 문제가 아니다. 우리도 신의 가호가 있어야만 전장에 나아갈 수 있다.”
드래곤이 나타나야지 저 인간신을 상대하고 오크들은 인간들을 사냥할 것이 아닌가.
“흥, 겁쟁이들은 행성으로 돌아가라. 내 도끼는 전장에 묻힐 것이다.”
지구 땅을 밟은 오크 부족장들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오크 대왕.
대왕은 전장에서 태어난다.
죽이고 죽여, 전사의 목을 쳐 투쟁을 이어나가다 보면 단 하나의 오크만이 대왕으로 인정받는다.
“흥, 잿빛바위부족 따위가 날 감히 겁쟁이 취급하다니.”
“그렇게 듣기 싫으면 덤벼봐라. 겁쟁이.”
“좋다! 내 도끼를 받아라!”
신의 등장이야 재해에 가까운 일이니 피한다 치더라도, 이 정도의 비난과 멸시는 견딜 수 없다.
그것이 동족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명예를 건 겁쟁이들의 결투가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제길! 우리 부족장이 밀려.”
“우리도 가자!”
“결투는 부족장들의 몫이다.”
오크 종족들 간의 분쟁 해결은 오로지 부족장들의 결투로 판가름 난다.
종족간의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장치였으나, 그것을 감독할 대주술사도 없다.
그것을 강제할 신은 어디 갔는지 강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격한 오크들은 드래곤들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신이 보살피지 않는 전장이다. 여긴 미드얼 행성도 아니고, 종족의 규율은 없다.”
“쿠루룩. 그거 마음에 드는군.”
부족장이 아닌 오크 전사들도 여기저기서 싸움이 벌어졌다.
안전하게 오크 종족의 후퇴를 돕기 위해 진영의 가장 끝에 남았던 파둔이 돌아왔을 땐 이미 혼란을 걷잡을 수 없었다.
“이, 이게 대체…….”
오사카 시티 안팎으로 성난 오크들이 서로 무기를 겨누며 싸우고 있었다.
“루타 록가!”
아니, 전사의 목을 치며 저마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