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412)
413화 누락 (1)
수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단번에 바뀐 그의 기세에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갑작스레 중력이 두 배는 되어버린 듯한 변화에, 알리어드는 숨이 턱 막혔다.
“흐읍.”
“누가 떠난다 그래?”
“예? 히끅.”
냉막해 보이는 수호의 표정이 두 눈을 통해 머릿속에 박혀버리는 기분이다.
저 무심한 얼굴이 그 어떤 이의 화난 얼굴보다도 무섭고 두렵다.
“내가 포기할 것 같아?”
“……?”
알리어드가 겨우 고개를 흔들었다.
그 느리지만 간절한 부정에, 주변을 내리누르던 분위기가 조금 옅어졌다.
여전히 뚱한 얼굴이지만 아까처럼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표정이야 조금 전과 같지만, 기색을 느낄 수 있었다.
알리어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급히 말을 뱉었다. 아까와 같은 압박감이라면 입을 열기도 쉽지 않았으니까.
“족장님께서 뭔가를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뭘?”
수호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우리들의 신은 떠나셨습니다.”
“야누스?”
“야누르입니다.”
“……다른 거였어?”
“음, 애초에 야누스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허, 걔가 걔 아냐?”
“……?”
영문을 몰라 하는 알리어드와 로매드를 보며 수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야누스가 엘프들 신 아니었나?’
태초의 정령.
신계에 머무르는 야만신 쿠로에 더해, 유일하게 대화가 통하는 존재가 정령신 야누스였다.
“너희들 모시는 신이 정령신 아냐?”
“……엘프들은 태초의 어머니 나무, 야누르를 따릅니다.”
“나무를?”
“어머니 나무요.”
“그러니까 나무.”
“어머니요.”
“…….”
“…….”
수호는 굳은 표정의 알리어드와 로매드를 보며 더 말하지 않았다.
한 번 더 물었다간 하극상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세계수를 따른다는 거네.”
“으음, 그렇지요.”
수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세계수는 그저 행성의 네트워크 기능과 방화벽 기능을 아우르는 툴이 아닌가?
“족장님께서는 엘프들의 기원이 이곳 지구에서 시작한 것을 알고 계십니까?”
“모르지.”
수호의 기억에 지구에서 살아온 엘프에 대한 기억 따위는 없다. 그렇지만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해는 가네.”
“예?”
“내 기억 속 지구는 한정적 시대뿐이니까.”
지구에서 수호의 나이라 해봐야 고작 20년 남짓이다. 그 이후는 신계에서 살았고, 회귀 이전을 다 합쳐봐야 비슷한 동시대를 살아온 기억뿐이다.
하지만 그가 겪지 않았다고 해서 지구의 역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역사 이전의 시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쥐라기라 불렸던 원시지구부터 이어져 온 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종이 멸종과 부흥을 겪었는지 알지 못한다.
원시지구 자체가 모든 생명의 경쟁이 시작되는 시작점이기에 분명 엘프도 있었고, 드워프도 있었으리라.
거기에 고블린, 오크, 수인들도 있었겠지.
“어쨌든 그래서?”
“예에, 어머니께서 우리를 아루카 행성으로 인도하시어 엘프는 그곳에서 부흥하게 되었지요.”
수호는 턱을 쓰다듬었다.
‘경쟁보다는 이민을 택한 건가?’
지구는 신의 요람이다.
긴 생존경쟁을 거쳐 탈락된 종을 뒤로하고 가장 오래도록 살아남았으며, 가장 번성한 종족.
그 종이 떠받드는 존재가 신이 된다.
가장 처음 번성한 고블린들이 떠받들던 두꺼비가 그러했고, 두 번째로 번성한 리자드맨이 모신 거북이가 그러했다.
‘엘프들이 생존해 번영을 이뤘으면 무조건 그 어머니란 자가 신이 되었겠군.’
아니, 이미 신으로 떠받들고 있으니 그리된 셈인가?
다른 게 있다면 지구에서 신으로 탄생해 신계로 간 것이 아니라, 아루카 행성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신이 된 것이지만 말이다.
“어?”
수호가 벌떡 일어섰다.
“이거 드래곤하고 비슷한데?”
“예에?”
드래곤도 오크들에게 숭상되어 신이 되었다.
신계에 머무르지 않고 각자의 행성에 머무르는 것도 닮았다.
미드얼 행성의 드래곤.
아루카 행성의 야누르.
수호는 아루카 행성을 방문했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엘프들이 성을 쌓고 마법을 익히는 건 드래곤의 침략에 대비해서라지?”
“예에. 본디 아루카 행성은 드래곤의 것이었으니까요.”
지금에 이르러서야 아루카 행성에서 엘프족과 드워프족이 번영을 이루었다지만, 과거에는 아니었다.
엘프는 확실히 아루카 행성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이었다.
드래곤에 대한 막연한 적대감과 두려움은 모든 엘프들이 가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드얼도 본래 지구였는데…….”
지구5.
다섯 번째로 번영한 지구5가 독립한 것이 미드얼 행성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아루카 행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역사에 한 줄 기록되는 것을 평생의 영광으로 여기는 마몬족과 무림인이 양분한 구천 행성은 또 무엇인가?
‘얘들도 지구 복사판인가?’
신계에 떠 있는 두 개의 달.
아루카와 구천의 이름을 따라 짓고, 두 개의 달을 본떠 만든 것이 아루카, 구천 행성이라 생각했건만.
“가보자.”
“예에?”
“야누르를 만나봐야겠다.”
아루카 행성의 최초의 세계수.
엘프들의 신.
세계수 야누르를 만나봐야 할 것 같다.
지난번 아루카 행성의 방문에서 만나보고 왔으면 좋으련만, 그때는 오룬 부족의 세계수와 간신히 접촉하고 왔을 뿐이었다.
그때에도 접근 권한이 없다 하여 그저 잊고 있었는데…….
최초로 아루카 행성에 뿌리내린 세계수 야누르라면 아루카 행성의 기원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엘프들이 이주한 아루카 행성의 당시 상황이라도 알 수 있겠지.
본디 드래곤들이 살았다는 그 행성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어쩌면…….’
창조주의 안배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수호도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수호를 숭배하는 인간들을 보전하기 위해.
멸망을 피하기 위해.
원시화되는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에 정착하게 될지도…….
‘드래곤은 글렀고.’
지금의 드래곤 로드는 멍청이다.
신룡대전 때 겨우 해츨링을 면한 애송이였던 녀석이다.
겁쟁이 블랙 드래곤은 역사도 잊고, 최초의 드래곤 에인션트의 의지도 잊었다.
멸망의 수순을 밟고 있는 미드얼 행성은 침몰하는 배다.
방향타를 잡은 선장은 아는 게 없고, 대책도 없다.
수호가 얻을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조화력이 고갈되면 행성이 죽는다.’
수호가 나무정령을 부리듯 조화력을 부릴 수 있긴 하지만, 신계와 단절되어버리면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야누르라면 알 것 같은데.’
아루카 행성은 생명력이 넘친다.
덩치 큰 짐승도 없어, 엘프에게도 드워프에게도 위협거리는 없다.
그들이 죽음의 그림자와 죽음의 돌이라 부르는 블랙맨과 마석이 존재하지만, 세계수의 복원력으로 침식은 일어나지 않는 행성이다.
‘미드얼은 외부, 아루카는 내부다.’
지구에 뿌리내린 세계수 가이아를 통해 본 행성관의 관계가 그렇다.
내부 네트워크와 외부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는 이제 느낌이 온다.
‘신계.’
모든 것은 신계로부터 비롯된다.
조화력이 샘솟으며 신격을 가진 짐승, 신수가 생겨날 정도의 신력이 넘치는 곳.
신계와 엮여있으니 내부이고, 단절되어 있으니 외부인 것이다.
조화력이 나날이 고갈되어 가는 미드얼 행성은 충전하지 못하는 배터리와 같다.
긴 시간이 흘러 이제는 언제 전원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
그에 반해 아루카 행성은 충전기를 꽂아준 배터리다. 전원이 나갈 일이 없지만, 침식이 일어날 가능성은 남아 있다.
신계와 연결되어서 그렇다.
무한한 에너지를 받지만 죽은 신들의 무덤과도 연결되어 있기에…….
아루카 행성은 세계수의 방호력으로 위험부담을 상쇄시켰다.
“뭐하냐? 안 가냐?”
“예에? 저희도 말입니까?”
알리어드와 로매드가 깜짝 놀랐으나, 생각해 보면 따라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길 안내 안 해?”
“해, 해야지요.”
수호는 즉시 차이를 불렀다.
휘리릭.
검은 코트의 그녀가 나타나 수호의 앞에 공손히 시립했다.
“부르셨습니까.”
“미소 어딨지?”
“본사, 부사장실에 계십니다.”
“으음.”
그녀를 데려가고 싶지만, 수호 길드 내에서 그녀가 담당하는 업무를 생각할 때 빼내기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수호 길드의 주요 임무인 신급 군주 사냥도 중요한 일이다.
세계의 각 도시들과 정보를 교류하며 8성 던전의 위치를 특정하고, 던전 브레이크 시기를 예상하며 신급 군주의 사냥 스케줄을 짜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실무야 어차피 전략팀에서 한다지만, 수호 길드 부사장이라는 직함이 가진 무게도 필요한 일이다.
수호 길드 부사장 자리가 가지는 위상은 세계적으로 보아도 절대 가벼운 위치가 아니다.
어쩌면 각 도시정부의 수장들을 능가할 정도.
“흐음, 부사장이 하나만 더 있었어도…….”
수호가 이리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도 김미소에게 모든 전권을 위임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힘을 발휘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지만, 그렇기에 새로운 인물을 내세워 놓기엔…….
“있었네.”
수호는 불현듯 떠오른 존재에 표정이 밝아졌다.
전혀 새로운 사람을 임명해 들여 놓을 필요도 없는 자다.
이미 오래전부터 부사장 직함을 달고 있던 사람이 하나 있었다.
“준호 어딨어?”
수호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2인자가 되었지만, 실질적인 실세는 김미소라는 이유로 거의 3인자 취급받고 있는 인물.
그렇지만 수호의 동생이라는 것만으로도 각 도시정부에서 쉬이 얕잡아볼 수 없는 인물.
차이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타이베이 개척마을에 있습니다.”
그녀의 고향이자, 인간으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뱀파이어로 태어난 장소.
“당장 오라 그래.”
“예에.”
수호는 뒤돌아 세계수 가이아를 보았다.
그리고 그 앞에 누운 장재식을 한번 보곤 손을 휘둘렀다.
그 대수롭지 않은 손짓에 장재식의 몸이 들썩이더니 가는 나무넝쿨들이 자라나 그를 떠받치는 침대 모양으로 자라났다.
*
주변에 큰 도시 없이 필드에 덩그러니 생겨난 개척마을이기에 몬스터를 상대로 치열한 나날을 보낼 것 같지만, 실상은 달랐다.
오두막처럼 지어진 타이베이 개척마을 본부.
주둔중인 공격대의 총 책임자 박준호는 의자에 기대 앉아 책상에 다리를 얹고 팔베개를 하고 있었다.
눈이 가물가물하는 것이, 오침이 들락 말락 하고 있었다.
“대장, 북쪽에 거미군주와 외눈거인군주가 충돌 중입니다.”
“어, 다른 건?”
“없습니다. 조용합니다.”
이곳 개척마을에선 일상적인 일이다.
군주 몬스터들끼리의 싸움이야 흔한 일이다.
외려 군주 몬스터 덕에 주변의 몬스터들이 통제되고 있었다.
저들끼리 영역을 이루고 몬스터들끼리 싸우기 바쁘니, 간혹 용감하게 개척마을로 진군해오는 군주 몬스터만 말살하면 이 주변은 조용한 편이다.
진짜 조심해야 할 것은 신급 군주의 출현뿐이다.
신급 군주가 등장하면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던 군주들이 휘하로 들어가 군대가 되어버리니 말이다.
뚜루루루.
“전화 받아라.”
오침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 책상에 올린 발을 까닥하며 말했다.
“어휴. 대장, 심심하면 나가서 사냥이라도 좀 하세요.”
“아, 전화나 받아 임마.”
“눼에, 눼.”
길드원이 전화를 받곤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요?”
-부사장님 계시냐구요.
“아, 전화 잘못 거셨어요. 본사로 연락하세요.”
뚜욱.
전화를 끊은 연락병을 보며 의자에 기대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있던 박준호가 물었다.
“뭐래냐?”
“아니, 무슨 개척마을에 전화해서 부사장님을 찾네요.”
“허, 미친놈이네. 본사에 계신 양반을…….”
팔베개를 하고 있던 준호가 급히 일어나느라, 바퀴 달린 의자가 뒤로 쏘아져 벽에 처박혔다.
쿠다앙.
“하이고, 깜짝이야. 대장, 왜 그래요?”
“나.”
박준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나 부사장이잖아.”
“어?”
“…….”
“그르네. 대장 부사장님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