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420)
421화 정령왕 (2)
자카르타 동쪽 장벽.
이미 장벽 위는 기관총 포대가 빼곡히 정렬되어, 곧 있을 몬스터 대군을 맞이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들 사이사이 통일된 복색의 시민군과는 다르게 저마다 개성있는 자들이 눈에 띄었는데, 모두가 용병이다.
가진바 능력에 따라 커다란 지팡이를 든 자들도 있었고, 갑옷에 대검을 무장한 자들도 있었다.
장벽 위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장벽 너머 필드에도 용병들과 시민군들이 빼곡했다.
그보다 더 앞에는 오래전부터 준비된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있었고, 그 너머에는 시민군들이 부비트랩 설치에 한창이었다.
벌써 보름 전부터 시작된 작업이지만 여전히 마치지 못했다.
8성 던전이 생성된 포탈부터 시작된 지뢰 매설은 바리케이드 앞까지 진행 중이고, 중간중간 클레이모어를 비롯한 매설 폭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쐐애애액.
하늘을 날던 가즈라의 속도가 천천히 줄더니 그대로 멈췄다.
허공에 발판이라도 있는 듯 꼿꼿히 선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은 조금의 위화감도 없었다.
적어도 이곳 자카르타에서 날개 없이 날아다니는 엘프의 모습은 그리 특이한 것이 아니었다.
용병들은 대부분 인간의 한계를 까마득히 넘는 신체능력을 가졌고, 기감 또한 발달했기에 머리 위에 접근하는 존재를 먼저 발견했다.
“가즈라 님이 오셨다!”
“우와! 선지자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아루카 행성과 지구 행성의 게이트가 생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프들을 데리고 지구에 터를 잡은 하이엘프.
대마법사 가즈라의 등장만으로도 이미 승리가 확정된 것처럼, 대기하고있던 용병들과 시민병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우아아아아!
가즈라의 시선은 발아래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있지 않았다.
저 너머.
삼중, 사중으로 급조한 바리케이드와 그 요소마다 대기중인 시민군들보다 더 너머.
크롸아아아아!
멀리서도 또렷이 들리는 괴수의 포효.
이미 터져버린 던전은 존재감을 찾을 수 없으나, 그보다 더 또렷한 존재감을 표출하는 거대한 동체를 가진 괴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드래곤…….”
가즈라는 덜덜 떨리는 손을 가만히 둘 수 없어 아공간에서 지팡이를 꺼내 쥐었다.
“후우.”
드래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지나친 경계심은, 엘프들에게는 종에 심어진 특질이나 다름없었다.
“후웁, 후우우우.”
긴 숨을 뱉으며 마음에 따라 요동치는 마력을 안정화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이 두려움은 영혼에 각인된 것이기라도 한 듯,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하이엘프에 대마법사 칭호로 불리는 그가 이러할진대 다른 엘프들은 오죽할까.
장벽 위에 도열한 몇몇 엘프들의 동요가 여기까지 전해져 오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종의 사명이자 숙원.
드래곤으로부터 아루카 행성을 지켜낸다.
‘의미 없는 건 아니군.’
8성 던전이 터지면 신급 군주가 나온다.
여러 신수 중에서 하필 이곳에 등장한 게 드래곤이다.
드래곤을 잡기 위한 싸움인데, 이 목숨 바치는 게 의미 있는 일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살아온 세월이 아니다.
피를 깎는 수련 끝에 대마법사가 된 것은 이날을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정령왕의 계약자가 된 것도 어쩌면…….
“후우우.”
정령왕을 생각하자 마음이 평온해졌다.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두려움에 몸이 굳어서 하지 않아도 될 실수를 할 정도는 아니다.
‘얼마나 버틸까?’
정령왕의 소환은 고작 엘프의 몸으로 버티기엔 무리가 있다.
정령왕이 소환되면 필시 자신은 죽을 터.
그간의 수련이 헛되지 않았다면 적어도 저 드래곤을 해치우는 순간까지는 버틸 수 있지 않을까?
‘1분. 길어야 3분 정도?’
한 번도 소환해본 적이 없어 가늠할 수 없으나, 대략적인 예상은 된다.
소환하지 않았다고 해도 교감은 하고 있으니까.
“드래곤은 내가 맡겠다!”
어차피 막아낼 수밖에 없다.
도시 안의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이대로 도망쳐 드래곤이 혹여 게이트를 통해 아루카 행성으로 가기라도 하면…….
끔찍한 일이다.
종의 부흥을 이끈 선조들을 뵐 면목도 없을 만큼.
“오오오!”
“선지자께서 신급 군주를 해치우신다.”
시민군의 사기가 올랐다.
신급 군주만 처치하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지금의 전력으로 충분히 방어해낼 수 있다.
시민군들을 이끄는 사령관인 조나단은 가슴을 꾹 누르던 돌덩이가 치워진 기분이었다.
하이엘프 가즈라가 드래곤을 맡아준다면 이번 사태의 진정은 한결 쉽다.
신급 군주의 등장과 함께 그 휘하에 몰려들기 시작하는 군주 몬스터들만 해치우면 된다.
군주 몬스터라 하더라도 만만한 것은 아닌지라, 어지간한 화력으로는 사냥할 수가 없다.
전술핵 정도 된다면 군대의 힘만으로 잡을 수도 있겠지만, 거리가 너무 가깝다.
‘용병들이 해치워준다.’
자카르타는 대격변 이후 가장 먼저 아루카 행성과의 게이트가 열린 도시이고, 이종족과의 교류도 가장 먼저 시작한 곳이다.
당연하게도 엘프들과의 교류도 잦았고, 그들의 마법과 검술을 배운 각성자들도 여럿이다.
세계적으로 자카르타의 용병 전력은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다.
압도적인 물량의 몬스터 대군들만 어찌 처리한다면, 도시로 접근하는 군주급들 정도야 여럿이 합동 사냥하면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
시민군의 역할은 드래곤과 함께 던전에서 튀어나온 수천 마리의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드래곤의 포효 아래 몰려드는 수만 마리의 몬스터들.
“포대 일제 사격 개시해.”
“목표물 설정은 어찌합니까?”
“바꿔.”
드래곤을 타격하려 해봐야 어차피 신성방어막에 막힌다.
“드래곤을 제외한 모든 놈들을 타깃으로 한다.”
“넵.”
곧 명령이 전달되었고, 포신들이 불을 뿜었다.
아쉬운 게 있다면 거리가 너무 가까워 미사일 세례를 쏟아붓지 못한다는 것.
콰콰쾅!
산발적인 공격이 몬스터 무리를 향했고, 그들이 진격해오기 시작했다.
*
“쿠어어어!”
오우거 하나가 포효하며 날아오는 포탄 하나를 잡아챘다.
콰아아앙!
오우거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면, 그것이 터지며 어깨까지 모조리 날아가 버렸다는 것.
외팔이가 되어버린 녀석이 핏발선 눈으로 포효했다.
“쿠오오오오!”
고통을 참고 더욱 박차를 가해 달렸으나.
콰앙!
오른쪽 발에서 이질적인 소음이 들리더니 그대로 터져 버렸다.
무릎 아래가 터져 사라져버린 오우거가 쓰러졌고, 뒤따르던 몬스터들이 그를 넘어 진격했다.
“취직!”
리저드맨 무리들이 버둥거리는 오우거를 피해 진격하며 투창을 날렸다.
콰쾅, 콰아앙!
인간들의 성이 가까워질수록 여기저기 바닥이 터진다.
알 수 없는 돌덩이가 쉴 새 없이 날아오는데, 마치 마법의 힘이라도 담긴 듯 폭발한다.
투두두두두.
긴 막대기가 불을 뿜으면 작은 돌멩이가 쉴 새 없이 쏟아지는데 동족의 투창보다, 화살보다 더 파괴적이다.
더 나아갈 수 없다.
벌써 주변엔 동족들의 시체뿐이다.
리자드맨의 진격 속도가 현저히 낮아졌다.
“그르르르.”
머리가 둘 달린 사자가 으르렁거리자 리저드맨들이 깜짝 놀랐다.
군주.
아니, 이제 새로운 군주를 받들게 된 군단장.
신급 군주의 휘하에 모여든 군주 몬스터들이 몬스터들 틈에 합류해 진격을 돕기 시작했다.
“크허어엉!”
포효와 함께 달려든 이두사자를 향해 기관총 포대가 일제사격을 퍼부었으나, 억센 터럭 하나 어쩌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쿠어어엉!”
사자의 포효와 함께 벌어진 아가리로 불덩이가 뭉치더니 쏘아졌다.
콰아앙!
장벽의 기관총 포대를 향해 날아간 불덩이가 폭발했다.
“으아아악!”
기관총사수가 불길에 휩싸여 발버둥쳤다.
콰아아앙, 콰아앙!
대가리가 둘이나 달린 녀석은 한쪽에선 불덩이를 내뿜고, 또 다른 입에선 물줄기를 날렸다.
“어어어어?”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물줄기였으나 맞은 시민군들이 속절없이 나자빠졌다.
“우리가 막자!”
“산개해서 접근해!”
장벽 아래 대기중이던 용병들이 나서서 이두사자를 향해 접근했다.
강맹한 힘이 깃든 화살이 날아들었고, 검을 가진 용병이 접근하는 사이, 마법 각성자들이 엄호사격을 퍼부었다.
신급군주도 아니고, 군주급 몬스터 정도야 7성 던전만 들어가도 보스로 만날 수 있는 몬스터다.
예전이었다면 모르겠지만, 7성 던전의 잦은 리젠으로 세계적으로 각성자들의 전력도 올랐다.
위협이 커진 만큼 인류도 조금이나마 성장했다.
“좋아. 속박했어!”
원래 한 팀인 듯 손발이 척척 맞는 용병들이 이두사자를 어렵지 않게 제압해 피해를 누적하고 있었다.
가즈라는 허공에 뜬 채 그들의 싸움을 얼핏 보고는 안도했다.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괜찮다.
이 도시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내 몫을 다 하리.’
자신만 잘하면 된다.
드래곤만 막아내면 남은 이들이 훌륭히 도시를 지켜내리라.
쿠우우웅! 콰아앙!
여기저기 울리는 폭음과 비명에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대부분의 피해는 몬스터들의 진영에서 일어났으나, 군주 몬스터들이 길을 트며 앞서는 사이 몬스터 대군이 이미 꽤 많이 진격해왔다.
저 수천수만의 몬스터들이 장벽을 넘어서면 입게 될 민간인들의 피해는…….
‘조금만 마력을 써도.’
대마법사라는 칭호는 허투로 얻은 게 아니다. 마력을 소비하자니 정령왕의 소환 시간이 줄어들까 봐 걱정이고, 아끼자니 당장 눈앞의 피해가 불 보듯 뻔하다.
“끼에에에!”
저 멀리서 새 같은 것들이 군집을 이루며 날아오고 있었다.
꽤 먼 거리임에도 새처럼 보일 정도로 덩치가 큰 녀석들이다.
“좋지 않군.”
드래곤보다는 작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비행 몬스터.
와이번 떼의 출몰에 가즈라의 안색이 굳어졌다.
수천의 몬스터들이 떼죽음하는 와중에도 드래곤은 날개를 접고 지구에 발을 디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녀석은 자신의 휘하에 모여든 몬스터들이 모조리 죽어도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저 녀석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나?
아니, 드래곤이 엘프 대마법사 따위 신경 쓸 리가 없다.
경계하고 있다면 정령왕의 소환이겠지.
저 멀리서 정령의 냄새를 맡기라도 하는 걸까?
가즈라는 온 신경을 곤두세워 드래곤을 관찰했고, 길지 않은 고민 끝에 결론 내렸다.
“움직이지 않겠군.”
대대로 구전으로 들어온 드래곤들의 행태와는 조금 다르다.
흉포하고 겁 없는 녀석들은 성격이 급해 모조리 파괴하려 든다고 들었는데, 눈앞의 드래곤은 신중해도 너무 신중해 보였다.
몸을 감싼 날개는 전혀 펼 생각이 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결론이 났다.
신중해 보이는 놈의 성향을 이용해 잠깐 힘을 쓰자.
곧 몬스터들이 장벽 코앞까지 다가오게 생겼다.
어찌저찌 막아내고 있지만, 저 멀리 와이번 떼가 당도하면 곧 전세가 급격히 불리해진다.
저놈들이라도 해결해 주어야겠다.
가즈라의 지팡이에 마력이 모여들었다.
무형의 기운은 밀도를 높이며 아지랑이가 되어 주변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지팡이의 머리로 모였다.
“너구나.”
“……!”
가즈라는 난데없이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랐다.
모든 신경을 드래곤에 집중하여 경계하며 마력을 끌어모으느라 잠깐 부주의하긴 했지만…….
“네가 가즈라야?”
“…….”
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게 아니다.
가즈라가 굳은 얼굴로 천천히 뒤돌아보니, 사람 하나를 낚아챈 커다란 매 하나가 날갯짓하고 있었다.
“뉘, 뉘시오?”
분명 남자 목소리 같았는데 매의 발톱에 달린 사람은 여자다.
“나 몰라?”
물음에 대한 대답은 발톱에 매달린 사람이 아닌, 매의 부리에서 나왔다.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말하는 동물에 대한 추리는 적어도 이곳 지구에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간신!”
인간들의 신이자, 108번째 세계수 가이아의 족장.
박수호.
“너, 정령왕 소환한다며?”
그가 자신의 정체에 대해 물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