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433)
434화 엘프 퀸 (2)
당진철은 수호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도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이제 와서?’
그간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는데,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실수한 것이 있었나?’
당진철은 곰곰이 지난날을 반추해봤으나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구천 행성에 있는 천외천의 고수들이 얼마나 괴팍했는지 새삼 상기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종잡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아예 대놓고 괴팍하든가, 겉과 속이 다른 음험한 자들이 많았다.
형님은 왜 의형제까지 맺은 자신을 죽이려 함인가?
‘저 웃는 얼굴로…….’
세상사 모두 마음에 달렸다더니, 지금이 그 꼴이다.
헤퍼 보이던 박수호의 웃는 얼굴이 더없이 비정하게 느껴졌다.
당진철은 원인을 찾기보다 당장의 위급함을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털썩.
“살려주십시오. 형님.”
“응?”
넙죽 엎드린 당진철을 보며 수호가 웃음을 지우고 고개를 갸웃했다.
“누가 죽인대?”
“우화등선시킨다면서요?”
“내가 언제?”
“신선 만들어 준다면서요?”
“그게 왜?”
당진철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고수들이 괴벽이 많다지만, 형님 이건 너무하지 않소?”
죽음이 눈앞이라 생각하니 무림인 특유의 기질이 발동했다. 두려움을 지고 가만히 순응하는 건 무림인의 방식이 아니다.
내가 죽더라도 한 수 먹여주고 갈 정도의 독심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동귀어진은 어지간한 고수들에게 있어 필수적인 마음가짐이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미는구려. 구태여 날 죽이려면 왜 살리셨소? 복수는 왜 도우셨으며, 왜 아우로 받아주셨소?”
죽음을 각오하니 용기가 생겼다.
다다다 쏘아붙이는 당진철의 말에 수호의 손이 날아왔다.
‘흡!’
당진철은 계속해서 수호를 주시하고 있었기에 그가 출수하는 것을 보았다.
고수의 싸움은 보고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느끼고 미리 행동해야 한다.
피할지, 막을지, 반격할지.
경우의 수를 미리 생각해 두어야 즉각적인 반응을 해낼 수 있었고, 그렇기에 고수들의 싸움을 수 싸움이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진철은 어떠한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대단한 수다.’
천천히 날아오는 것 같은 손아귀를 보며 몸을 피해내려 했으나 움직이지 않았고, 막으려 했으나 늦어버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따악.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함께 고개가 숙여졌다. 반사적으로 치켜들곤 소리쳤다.
“아오!”
소리치는 당진철의 얼굴은 묘한 기쁨이 서려있었다. 맞아놓고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다.
‘살았다.’
사실 수호가 살심을 품었다면 피할 길이 없다.
거창하게 동귀어진의 마음을 품었으나, 그것도 잘해봐야 생채기 수준일까?
의미없는 일이긴 했다.
“형님은 아우 목숨을 가지고 농을 하고 싶으셨소?”
“농은 무슨 농.”
따악.
뒤통수가 다시 화끈거렸다.
“아니, 근데 왜 자꾸 때리시오.”
“죽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따악.
“아닛! 죽일 거면 죽이지, 왜 욕보이고 그러시오?”
“그럴까?”
당진철은 오싹한 느낌에 목을 움츠렸다.
천천히 움직인 그의 눈이 수호를 쫓으니 웃는 얼굴이 보였다.
‘농인지 진심인지.’
진의를 알 수 없으니 당진철로서는 괴로운 마음이 들었는데, 어느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무슨 상관이랴.’
상대는 신이 되어버린 사내다.
내 마음이 어떻든 간에 상대가 나를 죽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살리고자 하면 살 것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것은 운명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죽음과 무엇이 다른가?’
삶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죽음의 기착을 향해 달려간다.
나고 죽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지만, 온전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죽음의 순간에는 누구나 삶에 미련을 가지기 마련이고,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따름이다.
‘미련이구나.’
긴장으로 잔뜩 굳었던 당진철의 표정이 풀어졌다.
하늘의 뜻이라 여겼을 때는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신의 뜻이라 여기니 느낌이 남달랐다.
신은 지금 인간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눈앞에 있으니까.
막연히 상상하고 생각한 것과 직접 듣고 느낀 것은 경험적 측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부질없구나.’
복수도, 가문의 재건도.
아등바등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당진철의 미소가 인자해졌다.
레벨 84 초절정 고수 (U)
암살자
레벨 85 초절정 고수 (U)
도사
“음?”
갑자기 혼자 히죽 웃던 당진철이 빠르게 레벨업을 하자, 수호는 뒤통수로 향하던 손을 거두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뭔가 해탈한 표정의 당진철의 얼굴은 계속해서 풀어지는 중이었고, 레벨도 빠르게 오르는 중이었다.
레벨 90 화경 (L)
진인
레벨 91 화경 (L)
진인
암살자가 도사가 되고, 진인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30초 남짓이었다.
“저, 사장님. 뭔가 좀 심상찮아 보이는데요?”
김미소가 당진철의 변화를 느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수호처럼 그의 레벨을 직접적으로 볼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당진철은 아무런 기운도 갈무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기감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정도로 아무런 경계심 없이 본인의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무림인에게 이는 마치 속을 꺼내 보일 정도로 어리숙한 행동이지만, 해탈한 당진철의 표정을 보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어때 보여?”
“음, 마약이라도 한 것 같은데요?”
“크큭.”
수호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큰 깨달음을 얻어 빠르게 레벨업 중인 무인을 보고 마약이라니.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눈빛이나 히죽이다 만 것 같은 얼굴은 꽤 설득력 있었지만, 지금도 당진철의 레벨은 오르는 중이었다.
“기다려봐.”
수호는 김미소의 걱정을 뒤로하고 당진철의 변화를 기다렸다.
당진철을 구천 행성 관리자로 임명해 신선으로 만들어 주려 했던 박수호다.
수호에게 있어 구천 행성 관리자 권한은 있으나 마나 한 계륵이다.
죄다 봉인된 터라 있으나 마나 한 능력을 묵혀 두느니, 구천 행성 출신인 당진철에게 이양해 어떤 변화가 있는지 지켜보려는 심정이다.
봉인의 이유가 지구인과 무림인 차이인지, 아니면 부족한 무언가가 또 있는지 확인해 보기 좋은 기회다.
관찰로 보이는 당진철의 레벨은 점점 더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99레벨이 끝이다.
적어도 지구 레벨, 인간계에서는 그것이 최고의 영역이다.
백사도 99에 한참을 머물렀고, 신수를 사냥하고 나서야 그도 신수급에 올랐다.
신수들이야 등천해 하늘에 오른다지만, 무림인은 우화등선해 선계에 든다.
‘그것도 궁금하긴 한데.’
그 선계가 신계를 말함인지, 다른 제3세계를 말함인지는 모른다.
후자라면 당진철과 재회할 길이 없으니 호기심을 억눌렀다.
쏴아아아.
수호의 눈에는 주변에서 휘몰아치며 몰려드는 자연의 기운이 보일 정도다.
‘세계수처럼 빨아들이는군.’
근처 부족인 세계수 이스트로 향하는 기운보다 지금 당진철에게 향하는 기운이 더 많을 정도다.
지금 당진철의 체내에 쌓인 기운은 순수한 자연지기.
수호가 내뿜는 조화력과도 다를 바 없는 에너지였고, 세계수들이 빨아들이는 마력과도 마찬가지였다.
가공되지 않은 태초의 기운이 그의 단전에 쌓이며 어마어마한 레벨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레벨 99 화경 (L)
진인
마침내 레벨 99까지 도달한 당진철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부들부들 떨며 그의 몸이 서서히 떠오르자 김미소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사장님?”
이 정도면 뭔가 말리든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김미소의 불안함에도 수호는 태연하게 당진철을 보며 말했다.
“저번보다 훨씬 안정적이네.”
“저번 언제요?”
“쟤 드래곤하트 먹을 때. 그때 죽을 뻔했잖아.”
주화입마와 우화등선 사이의 한 끗 차이일까?
그때도 운이 좋았다면 벽을 넘었을 것이고, 운이 나빴다면 죽었을 것이다.
죽느냐, 신선이 되느냐.
두 가지 선택지뿐이던 상황에서, 수호의 개입으로 다시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다.
지금은 그보다 훨씬 안정적인 상황.
뒤틀린 기의 흐름도 없고, 더없이 안정적이며, 점차 기운이 더해지고 있었다.
“사장님. 이쯤에서 뭔가 조치하시는 게…….”
당진철의 몸은 벌써 마차 위에 한 뼘이나 떠올라 있었다.
슬슬 그의 몸 주변으로 빛이 피어오르며 은은한 오로라마저 보이기 시작했다.
“이야, 진짜 우화등선하겠네.”
“어어? 사장님, 무지개!”
당진철의 어깨 위로 오색찬란한 빛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김미소는 다급한 마음에 벌떡 일어섰다.
뭔가 심상찮은 게,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뭐, 관리자 임명은 99에도 됐으니까.”
이대로 100레벨까지 기다리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긴 했지만, 정말 신선이 되어 훨훨 날아가버리게 둘 마음은 없었다.
“진철아.”
수호가 당진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곤 쫓듯이 몰려드는 조화력을 흩어버리니, 희번덕거리던 당진철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아.”
당진철은 뭔가 벽을 넘던 와중에 내려앉은 기분이 들었다.
흩어진다.
자신을 위해 모였던 기운이 스르르 흩어지는 것을 보며 욕심과 미련이 덕지덕지 붙어 그의 마음을 괴롭게 했다.
“뭘 아쉬워하냐?”
수호의 입장에서는 99레벨로 주저앉으며 그 이상 모였던 경험치가 흩어지는 것뿐이었다.
“선계 문이 보였소.”
“어떻더냐?”
“그냥 호수 같았소. 아니, 일렁이는 커다란 거울 같았지. 음, 일렁이는 물 위의 세상을 보는 기분이었소.”
“음.”
수호는 당진철의 말에 혹시 싶었다.
당진철이 봤다는 문이 쿠로의 영역에 있는 호수인 ‘천지’가 아닐까?
쿠로는 호수를 통해 지구 아래를 내다보는 것을 유희로 삼고 있었으니까.
수호가 백사로 위장하고 승천한 것도 그 천지를 통해서다.
천지는 명백히 지구와 신계를 이어주는 통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뭐가 보였어?”
“마중 나온 선배들이 보였소.”
“음? 쿠로가 아니라?”
“그게 누구요?”
“어, 아무튼 무슨 선배?”
“우화등선은 실재했소.”
당진철은 무림인들 사이에서 흔히 하는 그 말들이 모두 꾸며낸 말이라 생각했다.
선계는 구전되어 알려지지만 누구도 실체를 본 적 없고, 그저 꿈과 같은 이상향에 대한 이야기였다.
무공이 하늘에 닿은 고수들도 한순간 주화입마에 드는 것이 흔한 일이고, 그들이 죽으면 비유적으로 우화등선에 들었다고 하는 것이 상투적인 표현이었다.
“내가 틀렸소.”
실제로 신선이 존재했다.
모든 무림인들이 바라 마지않던 무릉도원은 실재했다.
그렇기에 더 아쉬웠다.
그 입구가 보였음에도 끝내 한 발 더 딛지 못하고 이 인간계에 머물러 있음이.
큰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진한 미련이 가득했다.
“아, 그러고 보니.”
들뜬 마음이 가라앉고 보니, 조금 전 상황이 떠올랐다.
그 잠깐 사이에 초절정 고수가 화경의 끝자락에 닿아버렸다.
시야도, 사고의 폭도 넓어져버린 당진철이 용케도 이 사건의 발단을 기억해냈다.
“형님께서 내게 신선을 만들어 준다고 하지 않았소?”
신이 되어버린 이 의형은 신선의 존재를 알고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닌가?
애초에 죽이려는 의도가 아니라, 진짜 신선을 만들어 준다고 했던 것인가?
“어, 맞아.”
“허어, 내가 크게 오해했소.”
오해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
그 한 번의 오해와 다급함, 절박함, 삶에 대한 미련이 버무려져 단숨에 벽을 넘어 화경의 고수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현경의 초입만 보고 온 것이 못내 아쉽지만 말이다.
“될 거야?”
“가능하다면 해주시오. 내 선배들을 만나 꼭 하고픈 이야기가 있소.”
전대 고수들이 분명한 그들 틈에 그분이 있는지 꼭 뵙고 싶었다.
‘개파조사께서도 필시…….’
사천당문을 일으킨 그도 무림에 큰 획을 그은 절대고수.
분명 계실 터였다.
수호가 의지로 허하자, 한 움큼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묘한 공허함에 어색해하는 것도 잠시.
털썩.
당진철이 마차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