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470)
471화 활성화 (4)
아키코는 잠깐 망설였다.
확실히 도발에 말려들었다곤 해도, 지금 히로를 제거하는 게 인류를 위해 좋지 않을까?
순간 섬뜩한 기운에 시선을 올린 아키코는 덜컥 몸이 굳고 말았다.
“거둬라.”
뱀 앞의 개구리 심정이 이러할까?
어떤 반항도 무의미하다.
나의 생사여탈권이 타인에게 넘어가는 경험은 결코 유쾌하지 못했다.
‘죽는다.’
이번에도 경고를 어기면 그리될 것 같다.
아키코는 슬그머니 단검을 품에 넣었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이는 차갑게 말했다.
“생각하지 마라. 쓸모 여부는 신께서 결정하신다.”
“아!”
아키코는 깨달았다.
인류를 위해, 수호 길드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결국 자신의 사감을 버리지 못했구나.
자신은 그저 히로가 미워 대의를 끌어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해 왔구나.
깨우친 순간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이 그녀의 고개를 아래로 향하게 했다.
“죄송합니다.”
차이의 맹목적인 믿음과 충성심 앞에 자신은 그저 흉내내기에 불과했음을 깨우쳤다.
아키코가 마차 한구석으로 물러나자, 차이는 꿈틀거리는 이성우를 밟았다.
“아까 한 이야기가 뭐지?”
“뭐, 뭐 말이냐?”
“신이 널 죽이지 않는다고?”
“…….”
뱀파이어 차이는 이성우의 눈빛이 흔들리는데도 한쪽에 담긴 안심을 읽었다.
‘진짜 그렇게 믿고 있군.’
차이는 쪼그려 앉아 이성우의 몸을 앉혔다. 그의 몸을 휘감고 있는 나무 넝쿨은 유연하게 움직이면서도 절대 풀리지 않아 단단히 옭아매고 있었다.
그를 강제로 앉힌 차이가 물었다.
“네가 말한 신이 누구지?”
“…….”
이성우의 흔들리던 눈빛은 이미 안정을 찾은 뒤다. 그를 보며 차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스윽.
묶인 이성우의 허벅지에 올라간 그녀의 손은 뱀파이어답게 하얗다 못해 투명할 정도의 창백함이 담겨 있었다.
“뭐, 뭐지?”
볼이 살짝 빨개지는 그를 보며 차이는 무표정하게 손가락을 눌렀다.
꾸욱.
날카로운 손톱이 피부를 찢고, 엄지손가락 두 마디가 살을 파고들자 이성우가 미친 듯한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악!”
파고든 손가락이 꿈틀거리며 근육을 헤집자 이성우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널뛰었다.
“끄어억!”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이성우가 기절하자, 차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따귀를 때려 깨웠다.
“으으으으으!”
“아직도 신이 지켜주시는가?”
뱀파이어 차이의 음색은 마치 조롱 같았다.
아니, 무표정하던 그의 입매가 살짝 올라간 걸 보면 명백한 조롱이다.
“너의 신은 너를 보호하지 않으시는가?”
“크크크크. 이 또한 시련일 뿐인데 어찌 오실까?”
“시련?”
“분명 감내할 만하다 여기니 내버려 두는 거겠지. 너는 실제로 날 죽일 마음이 없지 않나?”
고통에 핏발선 눈동자엔 독기가 가득했다.
“크크, 고문해 봐! 맘껏 고문해 봐라. 결국 난 살아 복수할 것이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너부터 씹어 죽일 거다! 아니, 네년이 아는 모든 사람을 죽이겠다. 대만에 살아있는 건 개미 새끼 하나도 남김없이…… 끄아아아!”
차이의 손톱에 이성우의 허벅지를 다시 파고들었다.
꽈드득.
다섯 손가락이 전부 들어간 그녀의 손가락은 한 움큼의 허벅지 근육을 쥐었다.
“끄어어어어!”
핏발선 눈동자는 튀어나올 듯했고, 펄쩍 뛰던 몸은 너무 고통스러워 잘게 떨기만 했다.
독사에게 뒷덜미를 잡힌 쥐새끼처럼 그저 고통과 두려움에 떨었다. 독니가 파고들까 두려워 크게 반항하지도 못하는 쥐새끼같이.
“내가 너를 죽일지 살릴지 너의 신은 어떻게 알까?”
“그그으으으, 네 잘난 신도 네년이 죽는 건 신경 안 쓸 거다.”
이젠 숫제 독기만 남은 이성우의 말에 차이는 히죽 웃었다. 그녀답지 않은 풍부한 감정 표현이었다.
“신을 위해 죽을 뿐. 바라지 않는다.”
“그으으으.”
“너는 나약하구나.”
보살핌 속에서 꽃 피워온 영웅은 이리도 나약하구나. 죽음의 순간에 신의 구원을 바라는 자가, 누굴 구원하겠다는 것인가?
의지 없는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차이는 죽음의 순간 그녀의 신을 위해, 그리고 그가 바라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죽어줄 수 있다.
‘이미 나는 구원받았다.’
인간이었던 차이가 뱀파이어가 되어, 몬스터가 될 운명에서 그녀는 수호를 만나 구원받았다.
이 생은 이제 더는 미련이 없다.
영웅은 스스로 이루는 자다.
누군가의 지시를 따르는 건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너는 가짜다.”
진짜는 나의 신이다.
그분만이 지구를 구하고 인류를 구원할 자다.
*
보고를 받은 김미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랬단 말이죠?”
“네.”
“신이 구해주었다라…….”
김미소는 턱을 쓸었다.
비굴한 도망자인 줄 알았더니 아직도 재기를 노리고 있을 줄이야.
‘회귀라면 이제 더 이상 소용없을 텐데.’
이성우의 회귀법은 기억을 돌을 이용해 역사의 눈에서 회귀하는 방법이다.
‘기록의 열람은 아마도 역사의 눈에서 가능할 거야.’
이미 이름도 ‘역사의 눈’이다.
구천 행성의 수많은 증명의 비석 중에 역사의 눈은 둘 뿐이다.
마몬족 진영의 역사의 눈에서 이성우가 회귀를 한다.
다만, 그 시도는 한번 실패했다.
그 회귀를 ‘허락’해 주는 게 다름 아닌 신인 박수호니까.
‘아니, 이제 당 장문인이려나?’
구천 행성의 관리자 권한이 당진철에게 이양되었다.
아직 그가 의식불명이니…….
‘조심할 필요가 있겠어.’
무림맹의 역사의 눈에서 당진철이 의식을 차리면 다행인데, 만약 그가 여전히 의식이 없어 마몬족 진영으로 향하게 되면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신이 부재중인 이때, 괜히 방심하면 안 된다. 필요하다면 미리 그를 제거하거나 다른 곳에 격리하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차이 님. 사장님께 지금 말한 이야기들을 전해주시겠어요?”
“제가 어찌 감히 그분께 청하겠습니까? 저는 그저 부름에 응할 뿐입니다.”
차이의 음성은 더없이 공손했다.
“무례가 아니에요. 그분도 흔쾌히 허락하실 거예요. 필요한 일이에요. 일단 말을 전해 보세요.”
소환수와 소환자의 관계.
둘이 타 차원에 떨어져 있어도 대화가 통하면 가장 베스트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소환에 응해서라도 지금 사실은 전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차이는 의식을 집중했다.
주인과 사역마는 의식의 한쪽이 어우러져 말을 하지 않아도 뜻이 통했고, 명령할 수 있었다.
그 역인 사역마의 요청에, 수호가 응답하길 바라며 간절한 의지를 담아 불렀다.
‘주인님.’
간절한 기도가 닿았는지 의식의 저편에서 신호가 왔다.
수호와 대화에 그치고 싶었지만 그의 부름에 불가해한 힘이 있어 자신을 감싸는 것이 느껴진다.
파팟.
차이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며 김미소가 아쉬움을 삼켰다.
“양방향이면 좋은데…….”
수호가 소환하면 차이는 그곳으로 갈 수 있지만, 돌아오는 건 할 수 없다.
역소환하면 야수 쉼터로 지정된 수호시티로 가게 될 테니까.
일회성 전령이지만, 별수 없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
답신은 수호에게서 직접 올 것이다.
‘신탁’이라는 스킬로 대사제인 자신에게.
김미소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그곳엔 아키코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지 마시라니까요.”
“길드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피해를 끼쳤으니 벌 받아 마땅합니다. 속죄할 수 있도록 벌을 내려주십시오.”
“어휴.”
김미소는 일본인다운 아키코의 고집에 고개를 절레 저었다.
“이성우를 철저히 감시하세요. 그게 벌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명하면 따르는 기계가 되겠다는 의지인지, 가타부타 말없이 곧장 마지막 마차로 향하는 그녀다.
“쯧, 안타깝네.”
그녀가 겪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혼란은 김미소도 충분히 공감이 갔다.
‘끔찍하긴 하네.’
이성우가 회귀한 그 세상에서의 자신은 어떤 역할이었을까?
‘하등 쓸모없지.’
쓸모없는 생각이다.
이성우가 겪은 세상 속 자신이 어땠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궁금해할 필요도 없는 사실.
김미소에게 중요한 건 지금의 이 순간이다.
‘미래일기 자체가 이젠 계륵이네.’
이성우의 경험과 그를 보좌해온 아키코의 구술로 정리된 미래일기는 이제 그 이름만큼의 가치가 없다.
이제 미래일기 속 상황은 미래가 아닌 과거의 일일 뿐이다.
박건우는 8악으로 악명을 떨치지 않아도 되고, 이성우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으로 고군분투하지도 않는다.
지금의 세상에서 박건우는 그저 신의 조카일 뿐이고, 이성우는 주인공 놀이에 빠진 망상가일 뿐이다.
“아키코!”
“네!”
이성우를 가둬 놓은 마지막 마차로 향하다가 뒤돌아보는 그녀의 모습은 지나치게 아름다워 보이긴 했다.
이성우의 전리품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매겨 불행에 빠진 일본인 출신 연구자.
“길드에는 당신이 필요해요.”
“…….”
“돌아가면 다시 연구소에 복귀하세요.”
“……하잇.”
대답하는 그녀의 음성이 습기로 가득했다.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뒤로하고 김미소가 마차에 올라탔다.
이제 코앞이 무림맹이다.
‘깨어나면 좋은데.’
구천 행성에 단 두 개뿐인 역사의 눈.
행성의 서로 극점에 있기에 이곳에서 당진철이 깨어나지 않으면 정확히 행성의 반대까지 향해야 한다.
동수가 있어 와이번으로 변해 비행해 가더라도 긴 여정이 될 터였다.
‘어찌 처분하실까.’
김미소는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싣고, 수호가 이성우에 대해 어떤 처분을 내릴지 조용히 기다렸다.
‘신탁’이 내리길.
*
숲길을 걷던 쿠로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움찔.
그의 몸이 잘게 떨렸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은 그의 몸과 커진 눈, 벌어진 입.
호랑이 얼굴의 수인은 큰 충격에 휩싸여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움찔.
‘쿠로오오오오!’
들린다.
아니,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들었다는 건 잘못된 표현일지도 모른다.
깨달았다.
그래, 그게 정확한 표현이겠지.
“고향…….”
존재했다.
아, 분명 이 존재감은 그것이다.
깨닫는 순간 쿠로의 앞에 불가해한 일이 일어났다.
지이이잉.
붉게 변한 포탈의 등장에 쿠로는 조용히 투덜거렸다.
“쿠로로…….’
난데없이 생겨난 붉은 포탈에 쿠로의 호랑이 얼굴이 꿈틀거렸다.
이제 가던 길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가 붉은 포탈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쿠로로……. 인간 녀석의 고뇌가 이해 가는군.”
그 인간 녀석은 한 달이나 고민했었지.
쿠로는 그때 수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땐 부러웠지.’
고향으로 돌아갈 관문이 열렸는데 어찌하여 고민하는가?
돌아갈 길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정작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처하니, 그때 수호가 겪었을 고심이 이해가 되었다.
‘저 너머가 나의 고향이 맞는가?’
자신은 이곳에서 수천 년을 존재했는데……. 아니, 지금 인벤토리에 담긴 수많은 마석이 전생을 증명하니, 족히 그 수십 배 수백 배는 더 되는 시간이 흘렀을진대.
고향 행성으로 돌아간들, 그곳에 자신을 기억하는 이가 하나도 없다면, 그곳은 나의 고향이 맞는가?
쿠로는 고심했으나 고민이 인간만큼 길진 않았다.
이성보다 본능.
야생의 삶대로 살아온 그에게 도전보다 생존이 언제나 우선시되는 가치였으나, 그 생존은 언제나 육감의 지시를 따라왔다.
본능적인 위기감지.
지금 가지 않으면 언제고 죽는다.
생존을 위한 도전이다.
먹이 없는 영역에 머무른 야수는 굶어 죽기 마련이다. 쿠로는 무거운 엉덩이를 털어내고 포탈에 발을 디뎠다.
파팟.
붉은 포탈이 사라지자 초록빛 반딧불 같은 나무 정령들이 뭉쳐 작은 요정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결국 또…….]요정왕 야누스의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잔뜩 곤란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