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483)
484화 묘지기 (2)
제단이다.
돌을 쌓아 올린 제단은 중간까지 피라미드를 닮아 있었다.
그 위는 평평하게 만들어 놓아 무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단의 정상에 올랐다.
타탓.
“와우.”
평평한 돌바닥을 딛고 주변을 둘러보니 막히는 시야가 없다.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 위에 만들어진 제단이다.
“제단이 맞나?”
멀리서 볼 때는 작았는데, 그 위에 딛고 서니 제법 넓었다. 축구장 크기 정도 될까?
이 정도로 넓은 돌바닥을 굳이 왜 깔아 놓았을까.
정사각형의 네 귀퉁이엔 커다란 석상이 하나씩 서 있었다.
호랑이 수인, 거대한 사슴뿔을 가진 수인, 대머리에 딱딱한 등껍질을 가진 수인, 몸 전체가 불타는 듯 이글거리는 모습의 수인까지.
네 귀퉁이에 자리 잡은 거대한 석상을, 수호는 차례로 둘러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신이네.”
현무, 주작, 백호, 청룡.
네 수호신이 수인의 형태로 변하면 이런 모습일까?
상상력을 자극하는 모습의 석상들이었다.
네 석상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범상치 않은데, 그것들도 여전히 검게 변해 있었다.
침식은 죽음의 공간.
모든 멈춰버린, 시간을 빼앗겨버린 정지된 모든 것들은 죽어있기 마련이다.
제단이 마련된 이 높은 산이 모두 검듯, 이 제단도 검은 일색의 침식공간인데 그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생기발랄한 모든 생명에게서 느껴지는 조화력과는 조금 다른 기운.
“신성력이네.”
아루카.
어머니 나무 야누르 부족의 숲에서 보았던 신전의 주춧돌에서 느낀바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파괴되지 않는 그 신물들과 같은 기운인데, 어찌하여 이리도 침식당해 있단 말인가?
“신도 죽나…….”
아니, 이건 신이라고 부르기엔 어폐가 있다. 신물이라 부르는 게 맞다.
하여튼 신기한 일이다.
아루카의 신물은 신이 없어도 여전히 존재하는데, 루나의 모든 것은 죽어있다.
지구에도 신물이 있다면 당장 떠오르는 게 세계수뿐이다.
조화력에 의해 커다랗게 자란 대장나무는 엘프 공주의 영혼과 만나 신물이 되었다.
‘내가 죽으면 세계수도 죽을까?’
궁금하다 하여 죽어줄 수는 없는 일.
수호는 넓은 제단의 경계까지 다가갔다.
두두두두두!
미친 듯한 속도로 달려오는 호랑이 인간이 보인다.
수인종들의 왕.
녀석은 분명 이 제단에 목적이 있어 오는 거다.
“이게 네트워크 장치겠지?”
이만한 신성력을 품고 있는 신물이면 세계수에 비견할 만하다. 죽어서도 제 성질을 잃지 않는 신물이 시간을 찾을 때, 이 행성은 신계와 연결되리라.
제사를 왜 지내는가?
하늘에 고하고 땅에 알린다.
좀 더 원시적인 문명이라면 산 제물을 하늘에 바쳤으리라.
그것이 매개가 되어 하늘과 땅이 이어졌을까?
“이어졌겠지.”
수호는 벌써 산 중턱이나 오른 호랑이 인간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쿠로.
이행성의 왕으로 추앙받던 자.
수호가 콧김을 뿜었다.
“네가 제물이 되어줘야겠다.”
나를 하늘로 올려 보내 줄 제물.
땅을 딛고 선 이곳이 이 행성의 네트워크 장치다.
저 야만왕을 제물로 바쳐 하늘에 올라야겠다.
‘죽으면 부활하겠지.’
자신이 그러했듯 저 호랑이 인간도 신계에서 눈을 뜨리라. 그때가 되면 아무것도 모른 척 친하게 지내볼까?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녀석과는 양립할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지구와 루나가 그러하듯.
어느 하나는 죽어야 하나가 산다.
파파파팍!
산을 모두 오른 녀석이 제단의 계단을 박차며 올라왔다.
팡!
올라온 관성에 쏘아진 총알처럼 솟구친 녀석이 하늘 높이서 반대로 떨어져 내렸다.
쾅!
수호는 제단 중앙에 굉음을 내며 착지한 호랑이 인간 주변을 보았다.
‘멀쩡하네.’
침식된 구역은 색이 없는 검은색이며 시간이 정지된 공간이다.
이 신전의 공간도 침식은 피할 수 없었지만, 내구도는 신성력을 품은 신전으로서 그대로 기능했다.
“쿠로로로.”
특유의 괴상한 으르렁과 함께 침을 질질 흘리는 녀석을 보며 혀를 찼다.
“너, 아예 맛이 갔구나.”
“쿠로로로로.”
“내가 알던 쿠로가 아니네……. 어?”
자신이 알던 쿠로는 어떤 쿠로인가?
지금 수호의 자아를 이루는 인생의 경험만 수십이다. 몇 개의 마석을 흡수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마석이 아니라, 블랙맨을 죽인 그 순간 자동으로 흡수되는 녀석도 있었으니까.
수십의 자아가 가진 기억 속에 대면한 쿠로의 모습도 전부 다르다.
몇몇은 같은 쿠로를 만났겠으나, 서로 다른 인격의 수호와 쿠로가 긴 시간을 두고 서로 다른 인연으로 얽혔다.
그 복잡한 자아가 붕괴를 이겨내고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한 것이 지금의 수호.
“그렇네. 너는 그냥 쿠로네.”
쿠로 또한 다르지 않다.
살짝 위험해 보이는 눈깔을 하고 있는 것만 빼면, 그도 쿠로다.
수십 개의 자아가 뒤섞여 아직 스스로를 뭐라 정의하지도 못했지만, 그는 쿠로일 뿐이다.
얽히고설킨 기억들이 워낙 많아, 수호도 쿠로와의 인연을 하나로 정의하기 쉽지 않았다.
어떤 때는 녀석을 죽였고, 또 많이 죽은 기억도 있다. 서로를 죽여본 기억과 사이좋았던 추억들이 혼재하며 복잡한 감정이었다.
생사대적이자 동시에 친구다.
신계의 신으로서 느낄 수 있는 고통과 외로움을 가장 이해하는 것이 둘이다.
속마음이 그렇다 하더라도, 녀석을 대하는 데 있어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이만 죽어줘야겠어. 쿠로.”
수십 개의 마석을 한 번에 섭취해 자아가 붕괴된 상태라도 쿠로는 쿠로다.
그저 녀석은 자신에게 죽어, 기억이 리셋된 채 신계에서 다시 눈을 뜨리라.
“깔끔하게 죽고, 프레시하게 다시 만나자.”
“쿠로오오오!”
호랑이이가 튀어올라 인간에게 덤벼들었다.
콰앙! 쾅!
거대한 앞발을 피하며 주먹을 내질렀으나, 전처럼 녀석이 날아가는 일은 없었다.
이마로 주먹을 받으며 우악스런 손으로 인간을 잡아버린 호랑이는 인간을 그대로 바닥에 꽂아버렸다.
콰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깔린 인간은 재빨리 몸을 굴렸다.
콰직!
호랑이의 발이 내려찍으며 제단 자체가 진동했다.
“미친놈이네, 이거.”
수호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자세를 잡았다.
쿠로는 지체 없이 달려들어 잡아채려 했다.
휘익!
수호는 재빨리 몸을 옮겨 녀석의 사정권에서 벗어나며 주먹을 날렸다.
퍽, 쾅!
두꺼운 호랑이 가죽은 둔탁한 소리를 냈고, 녀석의 뼈에 맞은 손은 부러질 듯 아팠다.
무식한 맷집이고, 무식한 힘이다.
그나마 속도에서 수호가 미세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면 지금 피떡이 되어 쓰러졌으리라.
‘초기화 당해놓고 뭐가 이리 무식하게 세?”
쿠로는 루나에 오며 기절했었다.
자신이 지구에 오며 겪었던 일과 같다.
분명 신계에서 성장한 모든 스탯은 초기화 당했다.
‘같은 1렙이라도 다르다 이거냐.’
자신은 대학생으로 신계에서 눈떴는데 쿠로는 애초에 루나행성의 왕으로 저항하다가 잡혀왔다고 하였다.
어쩌면 쿠로의 무력은 신계에서 눈뜬 순간 완성형이었는지도 모른다.
신계에서 사천 년을 보냈던 쿠로다.
‘그 사천 년 동안 성장한 건 미미하다는 건가?’
자신이 신계에서 구르고 경험하며 성장한 것과 다르게, 쿠로는 애초에 그런 것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수호가 성장하여 호적수를 이루고 나서야 서로 싸우며 조금씩 성장했을 뿐.
애초에 종이 달랐다.
나약한 인간과, 태어날 때부터 왕의 운명을 타고난 맹수종의 피지컬 차이는 컸다.
거기에 지구에서 20살까지 자란 인간의 강함과 야생의 수인종들이 사는 루나에서 왕으로서 커온 야수왕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출발이 다르기에 같은 1레벨이 아니다.
‘동격.’
수호의 100레벨이 쿠로의 1레벨쯤 될까?
그런 쿠로가 수십 개의 마석을 섭취했다.
수호가 더 많은 마석을 먹었지만, 애초에 나약한 기억과 힘을 가진 마석이 대다수 끼어 있었다.
얼마나 나약했는지, 스스로 삶을 포기한 녀석들이 다수.
“쿠로로로.”
침을 질질 흘리며 다가오는 붉은 눈의 호랑이를 보며 인간이 씩 웃었다.
애초에 인간은 맹수를 맨몸으로 이길 수가 없다.
“호랑이 새끼……. 너만 털 있냐?”
드루이드 직업 스탯은 둘.
조화, 야성.
수호는 이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고 있다.
‘요정왕과 야만왕.’
아마 수호의 신계 숲 생활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신격의 영향이리라.
조화 스킬의 가장 끝인 ‘왕의 대지’를 구입하며 사두었던 야성 스킬의 마지막.
야수왕 앞에 모든 야수들이 경배합니다.
이들은 왕의 위엄에 순종적이며, 마땅히 명령을 따릅니다.
변신 스킬의 최종진화형이다.
여러 마리 야수와 합체할 수 있는 ‘변신2’와 비슷했지만, 하나 다른 게 있다.
‘자아상실의 리스크가 없어졌다.’
이제 백구와 합체해도 꼬리를 안 흔들 자신이 있다. 짭쿠로와 합체해도 덜 건방질 수 있으며, 고양이들 수십 마리와 합체해도 귀찮아지지 않을 수 있다.
무엇을 망설일까?
“다 튀어나와라.”
수호의 명령에 수십 가닥의 연기가 솟구쳤다.
이대로 소환되게 둘 수는 없다.
침식된 공간에 야수들이 들어서면 어떻게 될지 짐작할 수 없으니까.
“들어와.”
그것들은 실체화하기도 전에 연기째로 수호에게 흡수되었다.
회색빛깔의 연기가 수호에게 스며들며 늑대의 갈퀴가 생기기 무섭게 갈색의 연기가 버무려져 곰의 덩치만큼 커졌다.
수십, 수백 가닥 연기들이 스며들며 수호의 몸 여기저기 줄무늬가 새겨졌다.
야수들의 특징이 발현되며 어느 것은 털을, 어느 것은 딱딱한 발톱을, 또 어떤 것은 등껍질을 주었다가, 다시 다른 빛의 연기에 묻혀 날개가 돋아나기도 했다.
쐐애애애액.
연기의 소용돌이가 수호의 몸을 휘몰아치며 그를 강화했다.
“쿠로로로.”
쿠로는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보지 않았다.
돌개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연기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쐐애애액, 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쿠로의 발차기는 소용돌이 사이에서 튀어나온 하얀 손에 잡혔다.
흰털이 돋아난 손은 원숭이처럼 긴 손가락에 백구의 흰 털이 수북하게 나 있었다.
“쿠로오오오!”
쿠로가 자신의 발차기를 막은 손바닥을 향해 앞발을 휘둘렀으나, 유연하게 피한 하얀 손은 쿠로의 손목을 낚아채 던져버렸다.
콰앙!
현무의 수인 석상에 부딪힌 쿠로가 제단에 다시 내려섰을 때 수호의 변신도 끝이 났다.
회리리릭.
모든 연기가 갈무리되며 야수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쿵.
아까만 해도 쿠로의 절반 정도 되는 키였는데, 이제 쿠로보다 머리 하나는 크다.
“쿠로로로.”
쿠로는 아까처럼 덤벼들지 못하고 으르렁거렸다. 본능적으로 느끼는 거다.
자신보다 더 커져버린 저 인간은 눈빛부터 바뀌어버렸다.
인간인 듯, 맹수 같은 저 눈동자는 뱀을 닮기도, 독수리를 닮기도 했다.
전체적인 털은 흰색과 검은색, 회색과 갈색, 노란빛깔까지 제멋대로 얼룩덜룩한 모습이지만 전혀 잡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머리에 난 두 개의 뿔은 사슴을 닮았으나 삼지창처럼 날카롭게 뻗어있어 그저 상징적인 표식처럼 보이진 않았다.
윤기 나는 얼룩덜룩 털에, 길고 강한 꼬리, 위엄 서린 뿔까지 가진 녀석의 얼굴만은 아직도 인간 그대로의 모습인데 히죽 웃고 있었다.
“이거, 느낌 끝내주는군.”
수호가 쿠로를 향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