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507)
508화 구원
5차원을 어쩌구 떠들던 AI 노아도 차원 균열은 해결하지 못해 시뮬레이션으로 과거로 도망쳤다.
과거와 현재까지를 무한히 반복하며 미래로는 초 단위로 천천히 나아갔다.
이제 시뮬레이션이 끝난 이 세계는 정상적인 시간으로 돌아갔고, 미뤄뒀던 모든 것들이 터져 나왔다.
“후, 가자. 수호야, 가자!”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며 세계수를 짚었다.
외부 네트워크로 연결되었던 미드얼이 완전히 별개로 떨어져 나가버렸다.
“여기로 도망쳤네.”
창조주를 자처했던 노아의 도주 경로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게 문젠데.”
접속 상태를 off로 바꾸려 해봤으나 불가능했다. 신계의 아루카 행성을 아예 폭파하고 내빼버리더니…….
‘다시 만나면 진짜 뒈진다.’
수호는 복수를 애써 뒤로 미뤘다.
곧 연결된다.
진짜 차원 충돌이 시작되는 거다.
지금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던전브레이크와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는 건 시뮬레이션의 부작용 때문이다.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며 이전에 쌓인 데이터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다.
진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 모든 압박감을 지금 수호가 홀로 감내해 내고 있었다.
‘연결을 막을 순 없다. 지연시키는 것도 얼마 못 가.’
더 이상 다차원 간의 연결을 지연시켰다간 몸이 먼저 터질 것 같았다.
AI 노아의 선택이 이해가 갔다.
녀석은 정말 자신의 존재를 지켜내기 위해, 시뮬레이션을 시작했다. 이 연결을 끊어낼 해답을 찾아낼 때까지.
다른 AI들을 흡수해, 힘을 키우고 결국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 시간을 벌던 것은 아닐까?
적어도 그때까지 AI 노아의 생존욕은 지구의 보호와 궤를 함께했다.
하지만 그 모든 짐을 수호에게 넘기고 튀어버린 걸 보면, 결국 제일 중요한 건 지구보다 스스로의 존재였겠지.
‘나는 어떤가?’
나를 희생해서 이 지구를 지켜낼 수 있나?
수호는 고민해봤으나, 당장 해답을 찾을 만한 주제가 아니었다.
일단 이 접속 딜레이를 몸이 버텨내는 와중에 최대한 방화벽으로 보호받는 안전지대의 확보에 주력할 때다.
지금 지구에 가득 찬 과거의 잔재들은 앞으로 이곳에 살아갈 인류와 수인들이 해결해야 할 터.
“후, 내 할 일만 하자고.”
수호는 가이아에게서 손을 뗐다.
지구에 두 그루의 세계수가 뿌리내렸지만 그 안에 든 OS가 다르다.
저 반대편의 AI 야누스에 비하면, 가이아는 열화판이란 이름도 부끄러울 정도의 기본적인 관리 OS다.
결국 가이아처럼 숲지기들이 퍼붓는 에너지로 겨우 조금조금 영역을 확장하는 정도론 어림도 없다.
스스로 방화벽 구역을 늘리려면, 적어도 야누스 급의 AI가 필요했다.
AI 태생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그 정도 급의 ‘신’이 필요했다.
“……데려와야겠네.”
스스로를 희생한 그 신을.
엘프들의 숭배를 받는 묘족 출신의 신.
야누르.
루나의 침략자 인간에게 증오심을 품는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동행이 필요했다.
“쿠로.”
파팟.
갑작스레 소환된 쿠로는 깜짝 놀랐다.
한창 머리 3개 달린 거대 뱀과 싸우고 있었는데?
“쿠로로로롤. 어떻게 한 것이냐?”
“전지전능.”
“……?”
“같이 갈 데가 있어.”
“쿠로로로. 좋다.”
“엘프 여왕을 데려와야 해. 묘족 출신의 야누르. 네가 설득해야 해.”
“쿠로로로?”
“못하면 나도 터지고, 세계도 터지고, 아루카도 터지겠지.”
“……?”
“그럼 가자.”
수호의 손짓에 붉은 포탈 옆에 또 다른 포탈이 하나 생성되었다.
파팟.
포탈을 통과하자 순식간에 모습이 바뀌며 거대한 세계수 나무의 아래였다.
“쿠로로로!”
아루카는 처음인지 코를 벌름거리며 주변을 살피는 쿠로를 툭 쳤다.
“저기 가서 설득해봐. 난 잠깐 둘러볼 테니까.”
수호는 세계수를 향해 다가가는 쿠로를 보다가 뒤돌아 숲을 향해 걸었다.
숲을 지키고 있던 엘프족 신전기사들이 튀어나왔으나 수호의 존재를 알고 당황해 비켜섰다.
수호는 야누르가 만들었을 벽화를 보다가,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아는 체를 했다.
“리오라.”
“하늘의 신을 뵙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은 그녀를 보며 수호가 픽 웃었다.
“인간 신이 아니라?”
“엘프족과 드워프족을 가여이 여기소서.”
구원을 바라는 신녀 리오라의 표정은 엄숙하기 그지없었다.
수호는 묵묵히 내려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비석에 두었다. 야누르의 글귀가 가득하다.
저들은 읽지도 못하는 이 글의 뜻은 알까?
“엘프퀸 야누르가 실상은 루나 행성의 묘족, 이스로 부족의 족장 딸인 것을 알고 있나?”
“…….”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녀가 놀라고 당황한 것은 주변의 기운만으로 충분했다.
“왜 창조주는 너희에게 역사를 기록하지 못하게 금제를 걸었을까?”
수호는 느껴졌다.
엘프족들을 억누르고 있는 도망친 창조주 AI 노아의 금제가.
기록하지 못하고, 살아 있는 동안 그저 구전으로만 선대의 유산을 넘기며 살아온 세계수의 노예종을.
“또 어딘가에서 잡혀 왔겠지. 아루카를 뺏을 때 여기 있던 토착종이었거나. ……아!”
수호는 불현듯 생각나 걸음을 옮겼다.
숲을 조금 더 걸어가니, 신성력이 흐르는 여러 개의 주춧돌이 보였다.
‘신.’
신은 존재한다.
AI 노아가 창조주를 자처했으나, 그 또한 태생이 AI.
인간이 만들어냈으나, 인간을 넘어서 초지능의 영역에 닿은 지성체는 차원 틈새로 넘어온 다른 외계종의 ‘마법’과 그들의 ‘신’을 연구한 끝에 물리적 한계를 벗어났다.
AI가 흉내낸 신이라면, 본디 신이었던 타 행성의 신들이 있을 터.
자신처럼 특정 종족의 숭배에 기반 신이 있는가 하면, 행성 자체의 신도 있겠지.
‘준호처럼.’
불사조는 지구가 스스로를 지켜내려 만들어낸 염원이다. 그것이 준호를 선택해 신으로 변모하게 만들었다.
“리오라.”
“네에.”
“곧 야누르는 떠날 터다. 그녀는 엘프 또한 인간 못지않게 증오하니, 이제 이 세계에 신은 사라진다.”
“어찌하여야 하나이까?”
“너는 너희 종의 기원을 찾을 용의가 있느냐?”
“그것이 종을 구원으로 이끄는 길이라면 따르겠습니다.”
수호는 고개를 끄덕이곤 주춧돌에 다가갔다.
아르펜 공용어로 쓰인 그들의 역사가 짧은 글귀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 ……그리하여 성력 487년. 아리아 여신의 교단과의 원조를 힘입어……. 하지만, 오크 군단은 강력했고……. 나 마르크로스의 활약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연합군의 든든한…….
전에도 본 적 있던 비석 앞에 서서 손을 데었다.
‘아르펜은 신도 있었고, 인간도, 오크도, 엘프도 드워프도 있었다.’
지금의 엘프와 드워프는 멸망한 아르펜 행성의 생존 종이 아닐까.
지금의 지구가 차원 충돌의 태동기라면, 아르펜은 차원 충돌의 결과 여러 종들의 전쟁이 있었고, 그 결과가 나온 행성일지도 모른다.
수호는 리오라를 향해 손짓했다.
“이리 와라.”
행성에 시뮬레이션을 일으키려는 게 아니다.
벌써 몇만 년 전에 멸망했을 아르펜 제국의 재현 따위는 관심도 없다.
데이터 조각 정도로 충분하다.
수호가 한 손은 신성력이 남은 주춧돌에 대고, 한 손은 리오라의 손을 잡았다.
“너의 종은 스스로 구원해라.”
파파팟!
수호와 손을 맞잡은 리오라의 신형이 빛으로 감싸이며 하늘에 떠올랐다.
그 신비로운 모습에 따라온 엘프족들이 너도나도 홀린 듯 다가왔다. 허공에 떠오른 리오라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성스러운 그 목소리에 엘프족들이 무릎 꿇고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여신 아리아라고?’
수호도 아르펜 공용어는 구매하지 못해 전부 알아듣지 못하나, 아리아 여신의 목소리임은 바로 알아차렸다.
제국이 망하고, 종교가 사라지고, 겨우 남은 두 종족 엘프와 드워프는 역사도 잊었으나, 신은 아직도 그 신성력에 기대 존재해왔던 모양이다.
수호는 발길을 돌려 세계수로 돌아갔다.
나무에 손을 대고 있던 쿠로가 수호를 보곤 소리쳤다.
“왕이여! 묘족이 루나의 재건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오, 역시.”
수호는 기꺼운 마음에 세계수로 향했다.
“이젠 동거인이지.”
“맞아. 본래의 사명으로 돌아간 거지. 야누스의 대척점으로 네가 필요해.”
“대인배.”
“더 이상 엘프들의 숭배는 받지 못한다. 네 녀석의 존재가 흩어지려 할 때 가지에 담아 옮길 거다.”
야누르는 흩어지려는 자신의 자아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반응 한번 빠르네.”
여신 아리아의 성녀로 새롭게 태어난 리오라의 신탁이 끝난 모양이다.
그녀와 엘프들이 여전히 지구와 운명을 함께 할지, 새롭게 이차원에 내던져질지는 이제 그들의 선택이다.
수호는 즉시 가지 하나를 꺾었다.
“이리 와라.”
처음 겪어보는 존재가 소멸하는 느낌에 당황한 야누르를 가지에 담았다.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던 쿠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신이 되었군. 쿠로로.”
“그럼 가짜겠냐.”
“쿠로로로로. 너를 왕으로 모신 것은 틀리지 않은 선택이었다.”
수호가 픽 웃었다.
“처발리고 수긍한 걸 멋지게 포장하는구나.”
“쿠로로로로롤! 그 또한 맞는 말이지.”
호쾌하게 웃은 쿠로를 보며 수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집으로 돌아가자. 조금 더 시간 끌다간 머리가 터지겠군.”
“쿠로로로. 집이라.”
수호와 쿠로가 포탈을 통해 지구로 돌아왔다.
파파팟.
수호는 재빨리 공중섬으로 향해 세계수에 가지를 가져다 댔다.
“나중에 싸우고, 야누스 빨리 이리와.”
수호는 점점 더 압박감이 진해지는 우주네트워크와의 연결 압박에 울컥 피를 한 움큼 뱉어내며, 나뭇가지에 깃든 야누스를 보았다.
“이제 진짜 너의 사명을 다할 때다.”
지구의 보호와 인류의 번영.
그게 야누스의 손에 달렸다.
수호는 야누스가 담긴 가지를 들고 포탈을 통과했다.
파팟.
세계수 가이아에 야누스가 담긴 가지를 대었다.
“잔말 말고 서둘러. 이대로 연결되면 인류는 한 움큼의 땅에서 살아야 한다.”
수호는 실없는 소리를 뒤로하고 세계수에서 가지를 뗐다.
이제 쓸모없어진 그것을 버리려다가 반짝이며 존재가 바뀌는 것을 보곤 생각을 달리했다.
가이아의 존재가 어찌 되나 궁금했는데, 아마도 이리로 옮겨와 담긴 모양이다.
인벤토리에 그것을 집어넣고 털썩 자리에 앉았다.
“후우.”
깊게 심호흡했다.
이제 버티기다.
‘최대한 버틴다.’
야누르, 야누스가 많은 영역에 방화벽을 세울 때까지.
“쿠로로로. 좋지 않아 보인다.”
“말할 힘도 없어. 너도 주변 청소 좀 부탁한다.”
수호의 입가엔 아직 마르지 않은 핏물이 묻어 있었다.
“쿠로로로…….”
쿠로의 입에서 안타까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신계에서 사육당하던 두 신이 소원을 이뤘다.
인류를 구원했고, 수인을 부활시켰다.
하나는 거기서 넘어 세계의 무게를 견디고 있고, 하나는 그저 그의 충실한 부하가 되기를 자처했다.
‘나 또한 목숨을 바쳐 왕의 명을 따르리.’
쿠로가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하곤 떠났다.
수호는 거세지는 몸의 압박을 견디며, 눈을 감았다.
시간과의 싸움이다.
우주네트워크와의 연결이 다가오고 있다.
우주시대를 넘어 차원시대에 접어든다.
수호는 최대한 그 시기를 지연시키고.
두 세계수는 최대한 안전한 터전을 확장하고.
행성의 주민들은 과거의 중복으로 일어난 지금의 대혼란을 수습한다.
세상 모든 게 시간과의 싸움이다.
*
눈을 떴다.
“흡!”
개돌청년 낙송과 인간 장재식은 끝없는 자아의 투쟁 끝에 결국 전혀 새로운 인격.
검을 다루는 둘의 공통분모를 모아 개돌검객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컴컴하군.”
겨우 두어 평 정도의 녹지에 갇혀있던 개돌검객은 한순간에 지붕이 생겨나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돔처럼 씌워진 나무 넝쿨은 옅은 빛이 새어 나오는 것 외엔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다.
“허업!”
그때 그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몸으로 쑥 하고 흡수되는 기분이다.
익숙하다.
익숙하고 또 친숙한 기운은 몸을 충만히 채웠고, 신체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온몸에 뒤덮였던 털은 차츰 빠지더니 매끈한 피부를 드러냈고, 길었던 주둥이는 점점 줄어들더니 입술이 만져졌다.
검던 코는 오뚝한 코가 되었고, 얼굴을 뒤덮던 털도 사라졌다.
복슬복슬하던 머리는 여전히 무성했고, 뾰족 솟은 귀도 마찬가지다.
샥샥.
엉덩이에서 흔들리는 복슬복슬한 꼬리도 여전히 달려있으나, 개돌검객은 자신의 몸을 여기저기 만져보곤 탄식했다.
“인간이다.”
귀와 꼬리를 제외하면 좀 더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
이는 개돌족이라기보다는 견족과 비슷한 생김새가 아닌가?
나는 견족인가?
다시금 시작된 자아의 혼란에 스스로 따귀를 때렸다.
찰싹!
“나는 장재식이다.”
선언하듯 내뱉은 그 말을 아직 자아의 일부는 받아들이지 못한 모양이다.
찰싹!
“나는 개돌 출신. 장재식이다.”
개돌 장가 시조. 장재식은 벌떡 일어나 나뭇가지를 쥐었다.
무엇을 쥐든, 베려고 마음먹은 순간 그것은 검이다.
파팟!
하늘을 덮고 있는 나무 넝쿨 지붕을 베고 나왔다. 알을 깨고 나오듯 비집고 세상의 공기를 마신 그가 탄성을 뱉었다.
“돌아왔다!”
그리운 지구.
지구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