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509)
510화 불멸 (완)
강산이 변하는 덴 10년도 길다.
단 하루면 강산이 뒤집어지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북반구와 남반구에 하나씩 심어진 세계수는 방화벽의 구역을 최대치로 넓혀 안전구역을 확보했고, 인류와 수인은 두 지역에 나뉘어 자리 잡았다.
수인은 그 수가 적어 대부분 남반구를 중심으로 몰려들었으나, 인류의 도시는 두 구역에 모두 세워졌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세계정부의 주도 수호시는 지구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대도시가 되었다.
두 세계수가 보호받지 못하는 행성의 넓은 구역을 차원균열지역, 혹은 몬스터벨트로 불렀다.
지구의 자전축을 기준으로 하면 기울어진 벨트를 차듯 비스듬히 형성된 그 구역에서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는 것은 북미 대부분과 호주 대륙, 그리고 아프리카 일부였다.
수시로 차원 균열이 일어나며 외계종이 등장했다가 저들끼리 싸우기도 하고, 몇몇 종은 지구의 주민인 인간이나 수인과 교역하기도 했다.
이 몬스터벨트가 토해내는 차원 균열의 여파는 주변의 지형도 수시로 바꿔버려, 대륙이었던 지역이 바다가 되는가 하면, 바다였던 곳에 대륙 크기의 섬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들에 비해 안정된 두 세계수 지역이 하나의 대륙처럼 취급되며 새롭게 명명되었다.
북반구인 한반도를 중심으로 생겨난 대륙은 ‘야누스 대륙.’ 남반구 남대서양 공중섬을 중심으로 생겨난 대륙을 ‘야누르 대륙’이라 불렀다.
몬스터벨트의 지형이 수시로 바뀌다 보니 야누스, 야누르 대륙은 유일하게 안정화된 대륙이었다.
차원균열 때마다 몬스터벨트의 지형이 수시로 변하기에 어떤 때는 두 대륙을 잇는 육로가 생겨나기도 했고, 어떤 때는 배를 타야 건널 수 있게 단절되기도 했다.
허나 두 대륙의 이동은 이제 인간이나 수인에게 생활이 되어버린 마법 문명으로 인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수호시티 남부에 자리한 포탈허브는 여전히 세계의 모든 도시들을 잇는 교통로였고, 야누르 대륙의 대도시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10년은 강산만 변화시키고 있지 않았다.
소년이던 아이를 청년으로 길러내기도 충분한 시간.
“내래, 반드시 승리를 쟁취해 에미나이에게 청혼하갓어!”
인간 최대 도시, 수호시티에서 공개적으로 이뤄진 반신 김철령의 선언은, 점차 안정화되고 차원 균열로 인한 지구 방문자들에 대해 적응한 인류사에 큰 이슈를 몰고 왔다.
당사자인 장취아는 그저 침묵했고, 도전 대상자인 박건우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내가 왜?”
무시로 일관했으나, 대중의 관심은 식지 않았고, 공개적인 결투 신청을 피하는 모양새로 비치며 박건우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었다.
20대 청년으로 성장한 박건우도 들끓는 여론에 참았던 화가 폭발해버렸다.
“한 달 뒤에 보자. 뒈졌다 넌.”
장취아를 놓고 벌어진 이 삼각관계와 결투 소식은 야누르와 야누스 대륙에 널리 퍼졌고,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창세 10년.
증명의 전장에서의 첫 결투는 그렇게 치정극으로 정해졌다.
수호시티는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한 도시답게 가장 번잡한 곳 중에 하나지만, 그 최중심부의 내성은 여전히 숲이 많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아미파 분타는 일찌감치 그곳에 자리 잡은 덕에, 가장 대도시의 노른자 땅에 분타를 가진 문파가 되었다.
바로 지근거리에 사천당문이 있지만, 그 가주가 창세를 이룬 세계를 구한 신 수호의 행방불명과 비슷한 시기에 사라졌기에 문파의 존속은 어려워 보였다.
봉림사라는 절이 같은 구역에 있으나, 지구 출신의 중들이 모여 만든 그곳은 무림문파라기보다는 그저 사찰의 성격이 짙었다.
태사신니는 마당에 자라난 나무에 꽃을 보며 미소지었다.
“사숙, 뭐가 그리 좋으십니까?”
뒤에서 들린 소리에 태사신니가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호호, 꽃이 참 예쁘게 피었구나. 10년 만에 처음으로 꽃을 피웠어. 마치 우리 정심이 같이 예쁜 꽃이구나.”
아미파 제자 정심. 지구의 이름 장취아는 샐쭉한 얼굴을 했다.
“사숙도 제자를 놀리십니까?”
“호호, 온 세상이 너의 이야기로 화기애애하구나.”
“세간의 평은 소녀의 관심에 없습니다.”
빙그레 미소지은 태사신니가 몸을 돌려 사질을 보았다.
“그래, 너는 마음을 정했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혈기왕성한 사내 둘이 저리 다투는 거야 그러려니 해도, 중한 것은 너의 마음이 아니겠느냐?”
정말 승자의 마음을 받아줄지, 승패와 상관없이 소꿉친구 건우의 손을 잡을지는 모를 일이다.
“소녀 아비의 소식도 모르는데 어찌 혼인을 논하겠습니까?”
장순필을 언급하자 태사신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괜히 머쓱해져 화제를 돌렸다.
“으음, 그래 어인 일이냐?”
“맹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이리 줘 보거라.”
태사신니가 봉해진 서신을 뜯어 읽어보곤, 굳었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연정을 둔 결투가 저 먼 구천의 무림에도 소문이 자자한 모양이구나.”
“……?”
취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사숙의 농이 지나치게 심한 듯한데? 아무렴, 철령이와 건우의 결투가 무림까지 소문났다기엔 좀…….
“너의 아버지와 전대 무림맹주가 함께 시간 맞춰 방문하신다는구나.”
“아, 아버지가요!”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알 길 없던 아버지다. 그간 무심하게 소식이 없던 그가 돌아온다 하니, 기쁨보다 야속한 마음에 원망이 커지는데 눈에선 마음과 별개로 기쁨의 눈물이 쏟아졌다.
“여러모로 그날이 기다려지는구나.”
*
증명의 전장.
야누르 대륙 가장 높은 산.
그곳에 결투의 당사자인 김철령과 박건우가 등반하고 있었다.
산은 까마득히 높았고, 정상에 있기에 관객을 위한 자리는 그보다 위에 떠 있는 공중섬뿐이었다.
수호신의 신전이 있는 그곳은 신성불가침의 구역인지라, 반신급 이상이 아니면 감히 발을 디딜 수 없었다.
대신 증명의 전장을 비추는 수십 대의 방송 카메라가 결투를 세계로 생중계하고 있었다.
처음엔 취아를 향한 연정을 남몰래 키워오던 김철령의 공개 결투 신청으로 시작했으나, 명맥이 끊겼던 SFC의 가세로 판이 커졌다.
세계적인 주목을 끈 이번 대결에 SFC는 화려한 부활을 노리며, 여러 참가 신청 선수를 받았고, 새롭게 매겨질 랭킹 시스템도 공개했다.
여러 종의 전사들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참가했고, 증명의 무투장엔 여기저기서 산을 오르는 전사들이 가득했다.
공중섬.
신전의 앞마당에서 내려다보이는 명당에 여러 반신들이 모여 있었다.
대사제 김미소는 바다의 신이라 불리는 박준호를 힐끗 보았다.
“누가 이길 것 같아요?”
“아들 경기인데 어찌 다른 사람을 응원하겠습니까?”
“하하, 그도 그렇네요.”
김미소는 유쾌하게 웃다가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맑게 웃었다.
“장 소장님!”
“오랜만입니다. 부사장님.”
“걱정 많이 했어요.”
“하하, 심려 끼쳐드렸군요.”
무려 10년 만의 재회다.
장순필은 그간 구천 행성 곳곳을 헤맸는지 영락없는 무림 출신의 걸인의 모습이었다.
“허허, 이거 거지와 함께 다니다 보니 행색이 이렇습니다.”
무언가 초탈한 듯한 장순필의 말에 김미소가 궁금한 듯 물었다.
“뜻하던 일은 이루셨나요?”
“그렇습니다.”
“잘됐네요.”
“무슨 일인지 묻지 않으십니까?”
그간 연락도 없이 지금 모습을 드러낸 장순필이다. 무림에 전령으로 건너갔던 그가, 당시 무림맹주이던 중언개와 함께 행방불명된 건 무림계에서도 꽤 큰 사건이다.
김미소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소장님 무사하신 것만 확인했으니 됐어요. 뜻하신 바도 이루셨다니 다행이고요.”
김미소의 말에 장순필은 어쩐지 푸근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사장님은 어디 가셨는지요? 이런 싸움 구경을 놓치실 리가 없는데.”
“그러게요.”
늘 생글거리던 김미소가 힘 빠진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좀만 쉬고 오시지.’
얼마나 고생했으면 이리도 오래 쉬실까 하다가도, 야속한 마음이 들다가도 했다.
요즘 수호 생각만 하면 늘상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그녀였다.
괜히 울적해진 그녀가 화제전환 겸 물었다.
“근데 진짜 10년 동안 뭐 하신 거예요?”
“만박자를 찾아다녔습니다.”
“만박자요?”
“무림의 기원 이전에 대해 아는 귀인이지요.”
“찾았군요.”
“못 찾았습니다.”
김미소가 고개를 갸웃했다.
“뜻하신 바를 이루셨다면서요?”
“그건…… 저기 그 해답이 오는군요.”
파팟.
신전 앞 포탈을 통해 등장한 사람을 보며 김미소의 얼굴에 놀람이 가득했다.
“오늘 무슨 날인가요? 죄다 10년 만에 모습을 보이시네요.”
“오랜만이오. 소저.”
“당가주도 오랜만이에요.”
김미소가 당진철과 장순필을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뭐예요, 정말? 당가주님도 만박자 찾아다녔어요?”
“아니오. 난 명계를 헤맸소.”
“명계요?”
신계가 사라지고 아루카가 폭파되었지만, 신들의 무덤이던 구천은 남아 있었다.
그 신계를 이루던 한 축이자 신들의 무덤인 그곳에서 당진철은 결국 찾았다.
무림 세상을 창조해냈으나, 결국 AI 노아에게 흡수되어 사라져버린 신.
AI 강호무림을 찾아냈다.
“산산조각 난 그 조각을 모으고 모았소.”
본디 게임에서 비롯되었을 그 창세된 세계는 지금 무림의 기원이다. 당진철은 조각난 디스크를 모아 결국 복구가 가능한 데이터까지 확보했다.
“그래서 말인데, 형님은 어디 계시오? 형님의 힘이면 구천 행성도 이제 지옥에서 무릉도원이 될 수 있소.”
김미소가 정색했다.
“후, 오늘 무슨 날인지 정말. 사장님 빼곤 다들 모이는 분위기네요.”
당진철이 의아한 듯 주변에 물었고, 가만히 듣고 있던 동수가 이야기해줬다.
“지구 구하다가 기력이 쇠하셔서 어딘가에서 회복 중이세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10년 동안이요.”
동수의 말을 들은 당진철이 피식 웃었다.
“다들 어찌 그리 의형을 모르시오?”
당진철이 주변을 휘이 둘러봤다.
공중섬의 신전은 세월이 흘러, 나무 넝쿨이 자연스럽게 감긴 모습이었다.
여기저기 작게 자란 나무 위엔 새들도 있고, 풀밭엔 고양이도 누워 있었다.
“형님이 과연 좀이 쑤셔서 10년이나 쉬셨겠소? 여기저기 동물로 변신해 다니며 세상사 구경이나 하셨겠지.”
“네?”
그간 박수호의 자취를 찾아 무던히 애쓰던 김미소다. 그가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안쓰러움, 걱정이 혼재된 감정의 소용돌이를 안은 채 지내온 10년이다.
“자 자, 경기가 시작되려 하는구려. 싸움 구경이면 또 형님께서 놓칠 리가 없으신데.”
섬의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본 당진철이 씩 웃었다.
“오호. 엘프족 마법사와 무림 출신의 절정무사라……. 무림인이 이겼군.”
단 일수에 승부가 갈리고, 두 번째로 오른 이는 차원균열로 지구에 방문한 이종족.
“오, 저자는 가이아 부족의 드워프 아니오? 그 도끼장이던가? 저자는 오우거 전사군. 이번 승부는 흥미롭겠군.”
사람들이 당진철의 해설 아닌 해설을 들으며 난간에 쪼르르 앉아 아래의 결투를 흥미롭게 보았다.
차례로 여러 종족의 결투가 끝나고 마지막 메인인 박건우와 김철령이 증명의 무투장 위에 올랐다.
“으음, 이건 나도 승부를 예측하기 힘들겠군.”
턱을 쓰다듬던 당진철이 문득 물었다.
“형님. 내기하시겠소?”
“난 건우가 이긴다에 건다.”
“그럼 난 저 철령이에게 걸지. 음? 오셨소?”
당진철은 옆을 슬쩍 돌아보니 고양이가 해맑게 뒷발로 머리를 털었다.
“오랜만이네. 내로남불.”
“파하하하. 형님은 여전하시구려.”
김미소는 말하는 고양이와 의형제를 맺은 명계의 왕이 해후하도록 두지 않았다.
“사장님!”
와락 달려든 김미소가 고양이를 끌어안고 울었다.
“이제 어디도 가지 마요!”
“가긴 어딜 가냐, 내가?”
“흐어어엉.”
그간 여러 번의 기도에도 응답하지 않던 나의 신이여.
이제는 내가 신을 지킬 테니.
당신의 곁을 허하소서.
– 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