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186
186화
* * *
부부부부부!!
과열된 마나 회로를 미처 식힐 새도 없이 푸셔가 불을 뿜는다. 사령부에 있는 마법사 대부분이 달라붙어 비행선의 마나 회로를 안정화하고, 마력석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타닷! 타닷!
걷는다기보다는 거의 뛰듯이 비행장으로 걸음을 옮기는 일행. 회의에 참석했던, 익스퍼트 중급 이상의 고수와 피스트 마스터 카보머 등등은 이미 비행장에 도착해있었다.
나세르 2세가 웨일 일행과 함께 비행장에 오자마자 피스트 마스터 카보머에게 물었다.
“카보머. 상황이 어떻게 돼가고 있는 겁니까?”
“저도 모릅니다. 습격 소식을 듣자마자 승선 준비를 하러 달려왔습니다. 참모진이 정보를 정리해서 알려 줄… 아, 저기 오는군요.”
사령부 건물에서, 참모 제반스 페이만과 그 부하들이 지도와 종이 무더기를 들고 후다닥 달려온다.
마치 야전(野戰)의 지휘관처럼, 찬바람이 쌩쌩 부는 비행장에서 넓은 지도를 펼친다. 참모진이 비행선에 승선할 준비를 하는 고수에게 현 상황을 간략하게 알려주었다.
“몬스터의 침략은 여덟 군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지도에 A1~A8이라고 표시된 지점입니다.”
무리 하나당 수는 최소 3,000에서 최대 5,000으로 추정. 범위는 덴트로스 해안가와 가장 가까운, 서쪽 끄트머리부터 동쪽 끝까지. 약 백 수십 킬로미터에 걸쳐서!
“징글징글하군!”
뚝! 뚜둑! 손가락을 꺾으며 근육을 예열하던 트라칸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정찰병이 몬스터를 빨리 발견해서 습격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가장 빨리 도달하는 A3도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습니다.”
“비행선을 타고 도착하자마자 준비, 그리고 바로 전투에 돌입하면 되는 건가?”
“마스터 트라칸, 잠시. 그리고 제반스 참모에게 질문이 있소이다.”
연검술(軟劍術)과 암기(暗器)를 자랑으로 삼는 이형족(異形族)의 익스퍼트 상급 고수인 달 오가 트라칸을 말리고 질문을 던졌다.
“저희의 역할은 흑마법사가 몬스터 시체를 가지고 수작을 부리는 것을 막는 것인데… 이렇게 전면에 나서도 되는 겁니까?”
“정확합니다. 여러분의 역할은 정면에서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 지역에 연락을 올렸으니, 특수 기사단과 함께 격전지의 외각을 돌며 흑마법사의 출현을 경계해주셔야 합니다.”
아본이 물었다.
“몬스터 처치보다 흑마법사의 경계에 힘을 쓰라는 겁니까? 우리가 전면에 나서지 못한다면 피해가 엄청나게 늘어날 텐데.”
“하지만 흑마법사가 몬스터 시체로 조금만 장난을 치는 걸 허용하면 그것보다 열 배는 더 많은 피해가 발생할 겁니다.”
제반스 페이만의 말은 지당했다.
당장 성벽에 널린 몬스터 시체만 가지고도 칠 수 있는 장난이 두 손으로 세지도 못할 만큼 많다.
시독(屍毒) 생성, 언데드 일으키기, 한밤중에 원혼의 비명 내지르기, 전염병 군락, 흑마력 생산 등……. 심지어 시체 폭발 하나만 써도 성벽 따위는 금방 무너진다.
물론, 사령부도 그걸 알고 있으니 필사적으로 흑마법사의 접근을 막는 것이다.
마법 적용 가능 거리 안으로 흑마법사를 들이지 않기 위해, 익스퍼트 상급 이상의 초고수가 전장에 나가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흑마법사의 출현을 경계하고 있었다.
제반스 페이만이 말했다.
“다시 한 번 요약하겠습니다. 탑승 후, 각 지역으로 돌입. 지역을 방어하는 특수 기사단과 함께 격전지 외곽을 돌며 흑마법사를 경계. 발견하는 즉시 전투에 돌입하기보다는 신호탄을 써주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참모진이 박스에서 일곱 색의 신호탄을 꺼냈다. 색깔별로 조우, 전투 돌입, 두 무리 이상, 외곽 습격 등등의 의미를 담은 신호탄이었다.
참모진이 신호탄을 일행에게 건네주었다. 피스트 마스터 카보머, 나세르 2세, 트라칸, 웨일, 아본, 길, 이형족 달 오 그리고…….
티안이 미안해하며 고개를 내저어 신호탄을 거부했다.
“내상이 도진 게 아직 낫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가봤자 방해가 될 테니 회복하면서 덴트로스 해안가의 경계를 돕지.”
“아, 그러면…….”
제반스 페이만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갈 곳은 여덟 군데인데 사람 한 명이 빈다. 그때, 발라리안 티핑이 호루스 란의 등짝을 때렸다.
“호루스 란, 자네가 가게.”
“예?!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쇼. 저는 성자님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호루스 란이 기겁하며 양손을 휘저었다. 자기 허리춤에도 오지 않는 노인네에게 쩔쩔매는 모습이 퍽이나 우스웠다.
“또 그런 소리 하는 건가? 평생, 이 늙은이 수발만 들어주느라 명성을 날리지도 못했는데, 기회가 왔으면 잡아야지.”
“하, 하지만…….”
“뭘 그리 걱정하는 게야. 중앙의 정예가 덴트로스 해안가에 모여 있지 않나. 어떤가? 제반스 참모. 덴트로스 해안가는 안전하겠지?”
“안심하십시오.”
제반스 페이만이 임시 정박지를 가리켰다. 그곳에선 수십 척의 배에 담긴 엄청난 양의 물자가 끊임없이 하역되고 있었다.
마포와 발리스타, 폭발 마법이 새겨진 마력석, 심해 생명체에게서 채취한 극독이 묻어있는 초대형 투망까지. 배에서 내린 물자만 요긴하게 써도 덴트로스 해안가의 안전은 보장된다.
“지쳤다지만, 돌격대대도 큰 피해는 없습니다. 몬스터 없는 흑마법사 정도야 성자님의 도움을 받으면 금방 물리칠 수 있습니다.”
애초에 흑마법사만 아니면 트라칸, 카보머, 나세르 2세 등의 ‘높으신’ 분이 파견사원처럼 비행선을 타고 이리저리 쏘아다닐 필요도 없었다.
고수를 쪼개서 각 지역마다 보낸다는 제반스 페이만의 전술은 ‘A1~A8까지는 너희를 일검에 쳐 죽일 고수가 있다. 그렇다고 덴트로스 해안가에 오면 방어막이 되어줄 몬스터는 없고, 마포가 불을 뿜고, 성자가 너희를 반긴다. 어디로 올 건가?’라는 양자택일을 노린 것이다.
그러니 중앙의 입장에서도 발라리안 티핑은 덴트로스 해안가에, 호루스 란은 인력이 필요한 지역에 가는 제 맞았다.
“그렇다네! 자! 어서!”
발라리안 티핑이 참모진의 손에서 신호탄을 뺏듯이 가져온 뒤, 호루스 란에게 내밀었다. 호루스 란이 입술을 괴상하게 일그러뜨리며 망설였다.
“흠…….”
적절한 타이밍에, 제반스 페이만이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시간이 없다는 몸짓에 호루스 란이 한숨을 내쉬며 신호탄을 받았다.
* * *
“먼저 간다!”
덜커덩! 후웅!
A1에 도착하자마자 트라칸이 비상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그의 뒤를 열둘의 병력이 뒤따랐다.
한 조당 스칼라 상급 이상의 정기사 열, 마법사 둘이 붙었다. 뛰어내린 열둘의 병력이 마법사를 열두 시, 여섯 시 방향에 두고는 각각 손을 마주 잡았다. 잠시 후, 그들의 몸에 백색 빛이 어리곤 추락 속도가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
“제발 내가 있는 곳으로 와줬으면 좋겠군.”
A3을 맡은 카보머도 내려가고.
덜컹!
“인사 할 시간도 없이 이렇게 출발하네. 웨일! 나중에 다시 보지!”
A6에서 아본과 열둘의 병력도 비상문을 열고 당 지역을 항해 떨어져 내린다. 빠르게 하늘을 나는 비행선. 이제 이곳에는 웨일과 나세르 2세밖에 남지 않았다.
A1부터 A6까지 이동하며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A6 끝자락에서 수천의 몬스터가 달려오는 것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온다.
비행선에 탑승한 웨일은 날카로운 눈으로 전방을 샅샅이 감시하다가 운전을 도맡는 마법사에게 말했다.
“흑마법사는 보이지 않는다.”
“확인했습니다.”
마법사가 바로 간이 통신 마법을 사용해 A6번 사령부로 통신을 보내 흑마법사가 없다고 알린다.
“마음에 안 들어…….”
적막한 비행선 안, 웨일은 흑마법사가 지나치게 미온적인 공세를 퍼붓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지?”
A7에서 내리는 나세르 2세가 물었다. 웨일은 그녀와 잠시 눈을 마주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흑마법사가 너무 무식합니다.”
“무식하다?”
“예. 1년간 몬스터를 조종하며 이종족 연합지역과 싸운 놈들답지 않아요.”
마법사는 단순히 마법을 쓰는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온갖 학문에 통달하고 그 모든 것을 펄펄 끓는 용광로에 녹여 ‘마법’이라는 통합 학문에 융합하는 미치광이 천재들이 모인 집단이다.
그런 마법사가, 흑마법사가 국가라는 초거대 집단과 1년 동안 소모전을 벌이며 전쟁을 몸소 공부했다. 미끼용으로 얼마든지 쓰고 버릴 수 있는 소모성 자원도 차고 넘쳐난다.
1년간 몸으로 전쟁을 공부했는데도 복잡한 전술 없이, 그저 몬스터 무리를 몇 개로 나누어서 내보내기만 한다? 이건 말이 안 된다. 벼락치기로 병법서를 공부한 무지렁이도 이보다는 뛰어난 전략을 짤 수 있을 것이다.
“놈들이 굳이 이렇게 쉬운 싸움을 벌일 이유가…….”
“쉽다? 웨일, 2차 몬스터 전선은 매일 사망자가 발생하는 격전지다. 1년간 사상자 수만 해도 3,000을 헤아린다. 우린 결코 쉬운 싸움을 하고 있지 않아.”
나세르 2세의 기분이 상한 듯, 말투가 냉막해졌다. 기세마저 은은하게 일어나 웨일을 압박한다. 웨일은 그녀의 태도에 겁먹거나 미안해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그게 쉽다는 겁니다. 놈들이 미쳐서 제노이 때처럼 안쪽 땅을 마경으로 만든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1년이나 시간을 질질 끈다? 이미 설하의 땅은 흑마력의 법칙이 지배하는 땅으로 재편성됐을 겁니다. 당신들은 너무 물러요.”
“…….”
“아니, 그보다 더 악독한 마음을 먹었으면 북쪽으로 도망치는 와중에, 지점마다 소규모 흑마력 지대를 수십 개 만들었겠죠. 이종족 연합지역 곳곳에, 마치 원형탈모처럼 썩어가는 땅 수십 개가 생긴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끔찍하군.”
“아주 끔찍깜찍하죠. 이제 제가 말한 ‘쉽다’는게 이해가 가십니까?”
사실 웨일은 자신이 한 말이 필요 이상으로 과장됐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알테어의 흑마법사, 피의 울타르도 넘쳐나는 악신의 피를 보유했지만, 지옥문을 열기 힘들어서 악신의 묫자리로 이동했다. 제노이는 20년 넘게 흑마법사가 암약하며 기반을 다져놓았다.
악신의 묫자리도 없이, 아무런 기반도 없이 마경이나 지옥문을 열 능력은 트록바에겐 없었다. 웨일도 그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는 수만이 넘는 몬스터를 두 번이나, 타임로스 없이 보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만한 몬스터 생산, 조종 능력을 갖췄다는 것은 재물, 촉매제, 악신의 신체 부위, 흑마법. 이 네 요소 중 최소 두 개가 충족되었다는 뜻!
“그러니까… 분명히 뭔가 있습니다. 흑마법사가 몬스터 조종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 이유, 전력을 아끼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여러분이 1년 동안 2차 몬스터 전선을 유지한 건 대단한 일이지만, 앞으론 ‘그런’ 방식으로는 흑마법사에게 당하기만 할 뿐입니다.”
“…….”
“앞선 회의에서 제가 주장했던, 몬스터보다 흑마법사 처치. 흘려듣지 말아 주십시오.”
승부수를 띄웠다는 사령부의 추측이 맞는가, 아니면 얻을 거 다 얻고 크게 피날레를 장식하자는 웨일의 의견이 맞는가.
어느 쪽이 맞는지 입씨름 따위를 할 필요가 없었다. 중요한 건 흑마법사다. 몬스터 대군을 처치하고 또 처치해도 흑마법사가 남아있는 이상 같은 일이 반복되기 마련이다.
웨일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리 생각했다. 그것은 단순한 주장을 넘어서서, 그 누구보다 흑마법사와 많은 싸움을 거친 그이기에 나올 수 있는 확신이었다.
그의 확신에 나세르 2세조차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술.”
“…예?”
“난 너와 단둘이서 검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때문에 은밀하게 카보머를 설득해서 내가 A7로 가도록 했지.”
“원래 카보머 공… 님이 A7이었습니까?”
“편하게 카보머라고 불러라. 그는 쓸데없는 예의를 차리는 걸 싫어하는 편이니까. 여하튼, 맞다. 그도 네게 큰 관심이 있더군. 하지만 내게 양보했다.”
내게 양보했다는 표현이 지나칠 정도로 단출하다. 웨일은 그녀의 양보 발언을 지적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나세르 2세가 옷을 갈아입으며 뛰어내릴 준비를 끝마친 후, 웨일에게 재차 말했다.
“천재검. 천재검의 전승자. 엘프의 검술. 네 재능의 근원과 출신. 화젯거리는 산더미처럼 많다만, 우리의 상황과 위치가 마음 편히 대화하기 힘들게 만드는구나.”
“마음이 통하는군요. 저도 소드 마스터에게 배우고 싶은 게 많습니다.”
진심이었다. 웨일은 그녀에게 검술을 배워 ‘다음’으로 가는 길을 엿보고 싶었고, 또 옛날이야기도 듣고 싶은 것이 많았다.
웨일은 나세르 2세에게 1대 전승자나, 1대 전승자의 입에서 나온 알테어 황제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흐.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꼭 시간을 잡도록 하지.”
덜커덩! 비상문이 열리고 나세르 2세와 그녀를 보조하는 열 명의 기사, 두 명의 마법사가 뛰어내렸다.
웨일도 잠시 대기한 후, A8지역에 착지했다.
“기사? 이름이 뭐지?”
웨일은 함께 온 기사 중, 가장 무력이 뛰어난 이에게 물었다.
“프리스크리라고 합니다!”
“좋아. 프리스크리.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어제 막 도착해서 계급장이나 위임장이 없다. 그래서…….”
“알겠습니다!”
프리스크리는 웨일이 말하고자 하는 걸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A8을 방어하는 사령관에게 대신 가서 말을 전했다. 사령관은 웨일의 특이한 신분을 듣고서도 놀라워할 뿐, 의심하지 않고 그의 단독 작전권을 인정해주었다.
초인이 넘쳐나는 세상. 그중에서도 재야의 고수가 많은 이종족 연합지역이기에 보일 수 있는 유연성이었다. 단독 작전권을 획득한 웨일은 A8에 모인 돌격대대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돌격대대는 10대대까지 있다. 1~4대대는 해안가에, 5~10대대는 2차 몬스터 전선에 소대 단위로 흩어져서 골고루 퍼져있었다.
A8 좌우 부대에 퍼진 돌격대대까지 시간이 되는 대로 A8로 모인 끝에, 웨일에게 모인 돌격대대의 수는 30명을 헤아렸다. 그는 30명의 돌격대대 기사, 그에게 붙은 10명의 기사와 2명의 마법사와 함께 외곽지역에서 몬스터를 기다렸다.
몇십 분 후.
“크와앙!”
두! 두두! 두두두두!!
수천의 몬스터가 괴성을 내지르며 얼음 성벽을 향해 뛰어온다. 초대형 몬스터는 한 개체도 없고, 대형 몬스터도 극소수. 인간보다 큰 중소형 몬스터가 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3미터 이상의 중형급 개체도 간간이 눈에 띈다.
웨일은 눈 언덕에 숨어서 몬스터를 꼼꼼히 살폈다. 녀석들의 충혈된 동공과 피부에 번들번들하게 흐르는 땀을 포착한 그의 눈이 빛났다.
‘붉은 눈, 추위에 맨몸으로 뛰면서 동상에 걸린 녀석은 거의 없고, 땀마저 얼지 않고 있어.’
흑마법으로 잠력을 폭발시켰다는 증거! 수천이 넘는 병력을 일회용으로 쓰고 버리는 미친 짓거리를 저질렀다는 뜻!
일회용이라지만, 그 기세만큼은 대지를 크게 울린다. 눈을 까뒤집고 돌진하는 수천의 몬스터와 비교하면 얼음 성벽은 말기암 환자의 팔뚝처럼 가냘프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한 시간이 넘는 여유 시간, 바로 어제 수만이 넘는 몬스터가 쳐들어왔다는 위기감은 중앙이 아껴둔 비싼 자원을 꺼내게 하였다.
“마법 준비 끝!”
“흐흐흐! 쏘겠습니다!”
모두가 긴장하며 몬스터를 기다리는 시간. 유일하게 마법사들만이 안면에 미소를 띄었다. 긴급 상황임을 인정받아 어디서 함부로 쓰기 힘든 비싼 마법도구의 사용을 허락받았기 때문이다.
한 명의 5결 마법사와 네 명의 4결 마법사가 내부에 눈이 휘몰아치는 수정구를 붙잡고 주문을 외운다. 마나가 깃들며 수정구가 밝게 빛나는 순간, 마법사가 수정구에서 나온 빛의 방향을 몬스터에게 틀었다.
“사안(死安)의 안개!”
사르륵!
몬스터와 성벽 사이에 깨진 유릿가루처럼 반짝이는 안개가 꼈다. 몬스터가 꼬리에 불난 망아지처럼 달려오다가 안개에 들어오는 그 순간, 안개가 스펀지처럼 몬스터에게 빨려 들어갔다.
벅벅!
“끄르륵……!”
안개를 흡수한 몬스터가 전신에서 피를 내뿜으며 죽어갔다.
편안한 죽음이라는 마법명 치고는 극도로 고통스러운지 전신에서 피가 흐르고, 피부가 찢기는 것도 개의치 않고 온몸을 벅벅 긁는다.
손톱이 뜯어져도 피부를 긁다가 목, 팔뚝, 손목 근처의 혈관을 뜯어서 피가 분수처럼 치솟는다. 순식간에 전열의 몬스터 절반 가까이가 피를 쏟으며 죽어 나자빠졌다.
죽은 몬스터에 걸려서 돌격에 제동이 걸리자 다음 마법이 쏘아진다. 얼음 벌레가 만들어져 몬스터의 다리를 뜯어먹고, 배를 가득 채우자마자 펑펑! 터진다.
살점 깊숙한 곳에서 얼음이 터지자 순식간에 하체가 얼어붙고 그 자리에 쓰러진다. 일단 한 번 쓰러지면 끝이었다. 앞은 온갖 공격, 뒤는 성난 몬스터의 돌진이 녀석들을 기다렸다.
으직!
“케…!”
시체를 짓밟고 뛰어오는 몬스터 군단!
펑! 퍼엉!
마포가 불을 뿜으며 중형 몬스터를 견제하고, 투창과 화살이 앞에서 달려오는 중소형 몬스터의 발길을 막는다. 눈속에 몰래 심어진 얼음으로 이루어진 마름쇠가 투창과 화살마저 피한 몬스터의 발등을 꿰뚫었다.
마름쇠를 넘어와도 한겨울에도 얼지 않은, 찬물이 가득 찬 해자(垓字) 몬스터를 반긴다. 그 누가 수성은 세 배의 우위를 가진다고 했나. 마법과 마나의 힘이라면 열 배도 적도 능히 감당해낼 수 있는 것이 수성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안 요소가 남아있다. 스물을 넘는, 느릿느릿하게 돌진하는 대형 몬스터였다. 녀석들은 사안의 안개에 닿아도 피부에서 피만 조금 흘릴 뿐, 거뜬히 돌파했다. 마름모 함정도 단단한 피부를 뚫지 못하고 바스러뜨린다.
저 녀석들이 성벽에 닿는 그 순간부터 진정한 결전이 펼쳐진다. 웨일은 머팔로에서 높게 뛰어올라 주변을 감시한 후, 흑마법사의 기척과 흑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착지했다.
“창.”
돌격대대에게 손을 내민다. 돌격대대원 기사가 조심스럽게 창을 주자, 머팔로에서 내린 채 투창 자세를 잡았다.
초능력마저 투입한 창이 빛으로 이루어진 물체처럼 백색으로 환하게 빛이 난다. 그 빛 무리가 절정에 이르른 순간!
쉐엑! 콰앙!
화살보다 몇 배는 빠르게 날아간 창이 대형 몬스터의 왼쪽 무릎을 꿰뚫는다! 발이 터져나간 대형 몬스터가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런 대형 몬스터에게 바늘 고문을 하는 것처럼 투창 세례가 작렬! 창날의 끄트머리가 녹색, 보라색 등으로 물든 걸로 보아 독도 듬뿍 발려있다.
“계속 줘. 마법사는 주변 감시 잘하고.”
“예!”
“알겠습니다!”
“천천히 뒤편으로 이동한다. 돌격대대는 뒤에서 따라와.”
웨일은 천천히 전장의 외곽을 순환하며 흑마법사 감시와 대형 몬스터의 접근을 동시에 이뤘다. 그가 창을 내던지면 대형 몬스터는 어김없이 발, 척추, 골반 뼈가 부러져 바닥을 굴렀고, 마포와 투창이 날아들었다.
퍼엉!
대형 몬스터가 모두 침몰한 것을 확인한 웨일이 다시 하늘 높이 떠올랐다. 동행한 마법사의 보조도 받고, 초능력도 전력으로 일으켜서 근 100미터 가까이 뛰어올랐지만, 흑마법사의 ‘흑’도 보이지 않는다.
그가 신호탄을 꺼내 검은색 신호탄을 터뜨렸다. 흑마법사가 없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가 여분의 창을 들며 돌격대대에게 외쳤다.
“돌격대대! 전투 준비! 목표는 몬스터 무리! 대각선으로 끼어들다가 성벽까지 접근한다! 해자에 딱 달라붙어서 성벽을 오르는 놈들을 모조리 쳐 죽인다! 사령부에서 따라온 기사들과 마법사는 위치를 유지한다!”
“엇, 자, 잠시…….”
마법사가 그를 말리려고 했지만, 성난 30마리의 머팔로가 돌진하는 걸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웨일은 정면에서 돌격하며, 가장 가까이 있는 중현 몬스터의 시체로 손을 뻗었다.
중형 몬스터의 발을 붙잡고, 앞에서 얼쩡이는 녀석을 향해 확!
뻥! 뻐엉!
신장 3미터가 넘는 중형 몬스터가 그의 손에서 몽둥이처럼 휘둘러진다. 몬스터 몽둥이에 맞은 녀석들은 하늘을 훨훨 날다가 해자나 성벽 위, 맨땅에 착지하고는 잠깐의 꿈틀거림 후, 숨을 멎었다.
그런 웨일의 뒤를 돌격대대가 사기 충만해져서 따라간다. 웨일은 맨몸으로 돌격대대의 선두에서 돌진하는 위엄을 선보이며 화려한 데뷔전을 치렀다.
그날 그 어디에서도 흑마법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는 불안요소만 제외하면, A1~A8지역 모두 큰 손실 없이 몬스터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다.
* * *
일주일 후.
다른 전장에서 혈투를 벌이던 웨일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씹새끼들이… 우리한테 장난을 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