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226
226화
* * *
“가이노스를 아나?”
“그거야… 유명하니까요. 외모도 다르게 묘사되는 누구랑 다르게.”
뮤온 보트라의 얼굴이 붉어지는 수준을 넘어서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하지만 그의 복잡한 감정과 상관없이 나의 발언은 진실 그 자체였다.
가이노스, 르데앙 그리고 몇 명의 실험체들. 웨일이 죽은 이후, 실험체로서의 저주스러운 주박을 풀어내고 피에 깃든 성력을 각성한 신세대의 성자.
신왕 알테어와 중앙 대륙의 강자들이 사악룡을 물리 찌른 평화의 주역이라면, 신세대 성자들은 ‘대륙 간 협력’이 별 탈 없이 이루어지게 기름칠을 해준 화합의 주역이었다.
그들을 호위해줄 기사단도 있었다.
익스퍼트 상급의 강자와 르암인보다 몇 배나 강력한 신체능력을 자랑하는 이종족 기사들, 정령사와 마법사를 거느린 기사단의 호위를 받는 성자가 대륙 각지로 뿌려졌으니, 협업도 순탄하게 이어졌다.
‘신성 기사단이었나? 성자 기사단이었나. 대충 그런 이름으로 기억하는데.’
이름이야 어쨌든 간에. 르데앙, 가이노스, 험클리, 로슈 등… 정보를 얼마 얻을 수 없는 시골 촌구석인 남쪽 대륙에서조차 열 명 가까운 신세대 성자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남쪽 대륙의 탈환에도 성자가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루’라는 이름의 성자였는데, 묘사된 외모를 보면 루루루루루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내가 가이노스를 알아도 전혀 이상할 건 아니다. 내가 남쪽 대륙에서 알음알음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하자 뮤온 보트라가 볼을 긁었다.
“흐… 내 제자의 유명세가 이렇게나 클 줄이야. 이거 심경이 복잡하군.”
“제자라고요?!”
아니, 대체 뭔 일이 있었기에 저 찐따년이 뮤온 보트라의 제자가 된 거야? 나는 인연의 오묘함에 잠시 넋이 나갔다.
‘뭐, 뒷배가 소드 마스터면 알아서 잘 살겠지.’
제자건 뭐건 옛날 인연이니 상관없다. 알아서 자기 살 자리 찾아 잘살고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중요한 건 ‘성자’ 가이노스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겠지.
나는 가이노스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자마자 어째서 뮤온 보트라가 납치된 이들을 극적인 용도로 쓰려 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짠하고 정체를 밝히는 역할’은 장인 따위보다 성자가 적임이었다. 그야 당연하잖아? ‘암행어사 출두요!’하고 ‘도자기 장인 출두요!’중 어느 쪽이 더 임팩트 있는지 따질 필요가 있나?
극적인 장면에 무력, 권력까지. 이제 대강 필요한 건 맞춰졌다. 나머지는 가이노스가 등장할 타이밍을 조절하기만 하면 된다.
“뮤온 보트라 님. 이렇게 된 거 약을 좀 치죠.”
“약?”
“예. 가이노스………………님의 등장은 좀 더 뒤로 미루는 겁니다. 저는 그 사이에 게리소님 측 인물들과 대화를 해보겠습니다.”
“게리소님을 어떻게 설득하려고?”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되는대로 지껄여 보려고요.”
“허? …계속 해봐라.”
“워낙 많은 정보가 돌아다녀서 잊으실까 봐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만, 납치가 시작된 순간부터 도자기 장인 쟈기의 삶은 반쯤 끝났습니다. 뮤온 보트라님이 제 거짓말에 힘을 실어주셔야 사후 뒤처리가 수월해집니다.”
사실 반이 아니라 완전히 끝나지 않았냐는 불안감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쟈기의 표면적인 지위를 놓칠 순 없다. 나의 평온이 첫째 이유고, 게리소님의 탈을 쓴 렉시놈과의 연결고리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게 둘째 이유였다.
“…그런 뜻이군. 알겠다. 게리소님은 네게 맞기지.”
아리송한 발언을 했는데 찰떡같이 알아듣는 뮤온 보트라. 세월이 헛되지 않은 건지 엉뚱하게 오해하는 건지 모르겠다만, 책임져준다고 하니 나로선 고마운 일이다.
나는 안심하고 일어서서 올백으로 넘긴 머리를 원상복구 했다. 신체를 돌아다니는 초능력을 거둬들여 변장을 푼다.
우두둑!
뼈가 맞물리며 키가 줄어들고 쟈기의 인상도 변한다. 깔끔한 검은색 머리카락도 수더분한 회색으로 변하고, 날카로운 인상 역시 멍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멍청하고, 거지 같은 쟈기의 원래 외모를 회복한 나. 뮤온 보트라가 쟈기의 변형 과정을 지켜보더니 기함했다.
“쟈기? 그건 대체 뭐지?”
“어… 저도 모릅니다.”
몰라. 시벌. 당신을 만날 거라고는 아예 생각도 안 해서 변명도 준비 안 했다.
그렇다고 그에게 숨기고 변신을 푼 채로 게리소님을 설득한 뒤, 다시 둘 다 보는 앞에서 변신하고 어쩌고… 하는 과정을 거치느니 어수선한 지금을 노려서 한 번에 끝내는 게 쉬울 거란 생각에 대놓고 보여줬다.
설득은 어떻게 할 건가. 판타지 아니야. 대충 판타지라고 하고 넘겨.
“익스퍼트가 되고 갑자기 이런 능력을 얻어서 당황했죠. 그래도 정체를 숨길 때 참 편해서 은근히 애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에서 인간에로의 변신이라… 수인족의 그것과도 차원을 달리해. 쟈기, 아무래도 너는 나와 같은 정령족의 피를 이어받았나 보구나.”
“저처럼 변신을 하는 정령족도 있었습니까?”
“문헌에 불과하고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다만, 눈앞에 있으니 실존을 의심하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겠지. 아무래도 익스퍼트가 되어 잠재력이 개화하면서 정령족의 피가 발현된 게 아닌가 싶다. 네 사부는 정말 천골을 만났군.”
정말 있긴 있구나. 역시 괜히 내가 이리저리 변명하는 것보다 이게 더 낫다. 어중간하게 알면 자기 멋대로 납득하고 넘어가는 케이스가 자주 있다니까.
특히나 전설과 밀접한 이종족은 그런 경향이 심하다. 웨일도 그 덕을 톡톡히 봤지. 플라잉 휴먼도 모르겠다고 하면 그냥 넘어갔는데 변신 정도야 훨씬 난이도가 낮지.
“그럼 가보죠.”
“잠깐. 신호는 어떻게 할 건가. 네가 성공했다는 건 어떻게 알아내면 되지?”
“그걸 알면 제가 신이지 인간이겠습니까? 적당히 눈치껏 하십시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고, 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일단 해본 다라. 인생 오래 살았다고 자부하는데 이렇게 엉망인 작전은 참 오랜만이군.”
이 인간 말하는 본새 좀 보소? 너 지금 나 혼내는 거야? 남들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다 보니 뭔가 착각하는 듯한데, 네가 속한 뭔 놈의 수호자인지 하는 놈들이 아니었으면 이런 일 자체가 일어나지도 않았다.
나는 그 점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렇죠. 빛의 수호자의 작전 수행능력이 신속하고 빈틈이 없어서 방어자 입장으로선 이렇게나 엉망진창인 계책을 수행해야 한다는 게 참으로 비통한 일입니다.”
“…무운을 비네. 나는 라그랑쥬 쪽에 가 있지.”
뮤온 보트라가 헛기침을 하며 나를 배웅했다. 언덕을 몰래 내려가는 내 감각에 그가 민망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는 게 느껴졌다.
소드 마스터라고 해서 좋게 봤는데, 자기 분야를 빼면 영 맹탕인 인간이다.
차작!
원주인은 도망쳤는지 텅 빈 2층 건물 창가에 착지한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단 한 사람의 귓가에만 들리게 음파를 조절한 뒤 그를 부른다.
“피르모딘! 피르모딘 님!”
마탄 영주의 둘째 아들, 피르모딘. 그가 병사들과 함께 도시 구석진 곳을 점한 채로 잔뜩 긴장해 있다가 귀를 후비적거렸다.
나는 피르모딘을 부르면서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이거 어떡하지? 피르모딘을 불러도 되나?’
이래도 되나? 뭔가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내가 과연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나는 늘 남들 약점을 쥐고 흔드는 일만 했지, 평화로운 설득은 쥐약이라고.
해피하고 피오드가 그립다. 해피의 외모와 피오드의 말발이면 웬만한 사람들은 다 넘어왔는데. 웨일도 중요한 건 아본이나 주름살 티핑, 살저 하라한이 다 해줬지.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어 봤자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할 게 분명하다. 뮤온 보트라는 내게 협력하면서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 척하지만 그건 수백 년 전의 죽은 정보에 불과하다고.
일례로 이곳에 있는 빛의 수호자 측 간자를 단 한 명도 알려주지 않았잖아. 화려하지만 실속 없는, 죽은 정보로 내 눈을 가린 거다. 통할 거로 생각했지만, 내게 통할 리가 있나. 소드 마스터라서 지적하지 않은 것뿐이다.
“야! 피르모딘!”
“누가 내… 어헉?!”
내 속마음이 타들어 가는 것과는 별개로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 드디어 닥쳐왔다. 피르모딘이 나를 확인하자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놀랐다.
“고, 공자님? 무슨…….”
“아, 아니다. 잠시 준비할 일이 있으니 빠지겠다. 너희는 경계를 철저… 아니, 일단 다들 가만히 있어.”
어찌나 놀랐는지 부하들에게 제대로 된 변명도 하지 않고 황급히 골목길로 달려온다. 그가 한달음에 2층 집을 올라와 내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쟈, 쟈기…? 너, 넌 분명 그 흉악한 놈들에게…….”
“예.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라…….”
피르모딘이 내 말을 끊고 나를 끌어안았다.
“천족이여! 맙소사! 멀쩡해서 다행이다! 쟈기!”
“아, 아뇨. 그게…….”
“네가 무사하단 소식이 퍼지면 당장 이 전운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야! 다른 이들도 무사한 거겠지?”
“피르모딘 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
“아니다. 쟈기, 너희가 납치되어있는 동안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다. 지금 너의 존재는 그 무엇보다 중요해. 어서 따라와라.”
“아 씨! 말 좀 들으라고!”
나는 피르모딘을 밀쳤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나는 적당한 거리가 벌어지자 롱소드를 꺼냈다.
기습? 배신? 피르모딘의 낭패한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마주 검을 꺼내 들어 나를 공격하기 직전에 마나를 일으켰다.
우웅!
롱소드에 서린 백색 검광. 영역도 은밀하게 조절해서 기파가 외부로 퍼져 나가지 않게 제한했다. 하지만 코앞에서 오러를 마주 본 피르모딘은 그 힘을 똑똑히 느꼈다.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오, 오러…….”
“예. 맞습니다. 피르모딘. 저 익스퍼트입니다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쟈, 쟈… 너. 누구냐. 쟈기는 어디 있지?”
“저 쟈기 맞습니다. 중앙 대륙하고 거래할 때, 그 지역 술집에 외상을 너무 달아나서 제게 마나석 충전기 하나만 몰래 만들어줄 수 없냐고 물으신 것까지 털어놔야 믿을 겁니까?”
“어…….”
“진심으로, 그런 짓 하면 저도 당신도 목이 잘릴 게 분명해서 대신 제 돈을 빌려줬죠. 2년 전에 빌린 98골드. 아직 한 푼도 안 갚으신 거 다 기억합니다.”
“…맙소사. 진짜잖아. 진짜 쟈기였어. 쟈, 쟈기가… 쟈기가 익스퍼트였다니.”
“예. 피르모딘. 그리고 제가 익스퍼트인 것보다도, 지금 상황이 최악으로 달리고 있는 것보다도 중요한 게 세 개나 있습니다.”
“믿기지 않는 군. 도자기 장인인 쟈기가 익스퍼트라는 것보다 중요한 게 세 개나 있다고?”
“성자와 소드 마스터. 그 두 개라면 믿으시겠습니까?”
사람이 너무 놀라면 오히려 냉정해진다는 말이 있다. 피르모딘이 그러했다.
그가 숨을 흡! 들이쉬더니 몇 초 지나지 않아 긴 한숨과 함께 상황판단을 끝마쳤다.
“쟈기… 너는 내가 아니라 나를 통해 소니아 공녀님을 부르려는 속셈이로군.”
“그렇습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할리 마법사님도 불러주랴?”
“가능하시다면 얼마든지.”
“정말… 나중에 꼭 설명해야 할 것이다.”
“일이 잘 풀리기만 한다면 그 소드 마스터라는 분이 알아서 다 해줄 것입니다.”
“하! 얼마나 대단하신 분이기에 그런 소리를 하는지 나도 꼭 봐야겠군.”
피르모딘이 가슴을 탕탕! 두들긴 후, 방을 나섰다. 그래. 보고서 까무러치지나 마라.
탕탕탕탕!
피르모딘이 계단을 밟는 소리를 들으며 소니아와 할리 마법사를 기다린다.
과연 그들이 올까? 너무 다급하게 몰아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아침 해가 뜨면 전투가 벌어질 것을 알기에 우격다짐으로 부를 수밖에 없다. 시간이 부족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한 시간만 더 있었어도 깔끔한 해결책이 있었을 텐데…….’
나는 소니아와 할리를 기다리며 지구를 떠올렸다.
지구에는 인재(人災)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말이 하나 있는데, 사고의 총량은 비슷하다는 관점에서 출발한 이론이다.
인간이 일하는 이상 실수는 없을 수 없다. 거기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고의 총량을 100이라 가정하면. 10의 작은 사고를 여러 번 일으키는 게 나중에 한번에 100의 큰 사고를 일으키는 것을 예방한다는 이론이다.
이게 맞나? 쉰둘이 드라마 볼 때 잠깐 나왔던 이야기라서 정확한지 모르겠다. 여하튼, 이 이론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남쪽 대륙에 쌓인 감정의 골은 한 번쯤 피를 보지 않은 이상 해결하기 힘든 시점까지 왔다. 지금 10의 피를 흘려야 나중에 흐를 100의 피를 막는다.
한 삼백 명쯤 죽고 힘과 감정을 속 시원히 풀어내면 대화할 여유가 생기겠지. 빛의 수호자 측 간자는 뮤온 보트라가 막아줄 테니 협상도 부드럽게 흘러갈 거다.
‘그렇다고 진짜로 피를 볼 수는 없는 법이야…….’
하지만 세상에는 늘 예기치 못한 일이 넘쳐나는 법. 그것이 바로 남쪽 대륙의 화약고, 숨겨진 잠룡. 흑마법사의 세 지파 중 하나인 살의 렉시놈이 게리소님의 진정한 정체라는 것이다.
그들이 한 번 피를 보기 시작하면 어느 시점에서, 얼마나 많은 죽음을 쌓아야 만족할지 그 누구도 모른다. 심지어 쟈기도 예측할 수 없다.
‘뮤온 보트라에게 협력하는 척하면서 평화니 이상적인 결말이니 뭐니 지껄였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그건 물 건너갔다. 그러니 사건 해결에 앞서서 렉시놈에게 목줄을 채우는 것부터 해야 해. 그게 가장 중요하다.’
저벅. 저벅.
내가 깊은 고민에 빠져있을 때, 세 개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을 때, 나는 문 뒤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끼익! 문이 열리고 세 쌍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다. 개중 한 명이 내 앞에 대검을 박았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러… 오러를 보여봐라.”
12년 전, 우리를 구해준 한보 기사였다. 나는 그의 검을 공손히 잡고 마나를 일으켰다. 백색 오러를 보자 다른 두 명, 할리 마법사와 소니아 공녀가 이채를 표했다.
할리 마법사가 그립다는 듯이 턱을 쓰다듬었다.
“백색이라… 그분이 생각나는 듯한 찬란한 오러구나. 그렇지 않습니까? 소니아 공녀님?”
“흥! 그런 새끼가 뭐가 그립다고 오러 색만 보고 옛날을 추억해? 당신도 늙으니 괜한 감상이나 늘어났군.”
“허허! 저도 증손자를 볼 나이입니다. 감상에 젖는 건 당연한 일이죠.”
“…….”
“알겠습니다. 그만하죠. 쟈기. 고개를 들어라.”
“예.”
양손의 손톱이 없는 무조(無爪)의 할리. 예전과는 다른 싸늘한 얼굴을 한 솔, 소니아가 내 시선에 들어온다.
할리가 표정을 읽기 힘든 얼굴을 한 채, 나를 빤히 내려다본다. 나는 이런 때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그가 놀라웠다. 내 표정을 읽었을까? 할리 마법사가 놀리듯이 말을 걸었다.
“쟈기.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늘 네가 의심스러웠거든.”
“언제부터였습니까.”
“12년 전.”
“…예?”
나는 예상외의 대답이 나오자 놀랐다. 12년 전이면 똥 시절부터 아닌가. 그때 내가 뭐가 의심스러운 건덕지가 있다고?
한보 기사가 배신감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검술을 배웠음에도 도자기 장인에 만족한 게 이상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더냐? 보로가 네게 은연중에 검술을 배우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을 줄 알았느냐?”
할리 마법사가 이어 말했다.
“또한 네가 목검과 진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남는 시간에 검술 수련을 하고, 차기 장인이 되자마자 성인 남성 십수 명을 맨손으로 두들겨 팬 무력은 또 어떻고? 쟈기, 네가 이러고도 들통 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면 참 실망이 크다.”
아, 그러시군요. 나도 참 실수투성이 라니까.
“원래는 피르모딘의 말을 듣자마자 너를 처치하려 했다만, 오러의 색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 공을 사서 대화를 할 테니 신중하게 말을 골라라.”
“변명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다. 잘 대답해야 할 것이다. 먼저, 그 무력은 어떻게 된 것이냐.”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신 분이 있습니다.”
“그자는 대체 누구이더냐. 우리의 조사능력으로도 네게 접근한 용병, 기사는 단 한 명도 없었는데.”
아하, 도자기 장인들의 감시가 심하다 생각했는데, 기술 유출이 아니라 나를 조사하려고 그랬던 거구나.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하다. 나는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말했다.
“그럴만할 것입니다. 그분은… 뮤온 보트라 공과 연이 닿아있으니까요.”
포커페이스!!!
초능력까지 이용해서 안면 근육과 모든 생리적인 반응을 다스린다. 내가 나타내는 감정은 긴장뿐이었다.
거짓말에 거짓말에 거짓말. 사부를 언제 만났고, 어떤 인연을 쌓았는지도 준비를 끝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나의 거짓말은 ‘심증은 차고 넘치지만, 물증은 하나도 없는’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진실을 쥐고 있는 이는 이미 죽고 없는 나의 사부였으니, 그 이상 가지는 못하겠지. 또 다른 진실의 열쇠는 뮤온 보트라인데, 간이 붓지 않은 이상 소드 마스터를 협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할리 마법사도 그 이름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뮤, 뮤온 보트라? 그 신화검(神話劍) 뮤온 보트라?!”
“그렇습니다. 피르모딘에게 언급했던 소드 마스터가 바로 그분입니다. 그분께서 남쪽 대륙에 이는 풍운을 정리하기 위해 직접 오셨습니다.”
“그분이 어째서…? 아니, 그렇다면 한 명의 성자는?”
“그분은…….”
나는 소니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웨일을 처음 만났을 때와도 같이, 경계심이 잔뜩 묻어나오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이 떡밥이면 너도 가만히 있지 못하겠지.
“이름은 듣지 못했지만… 이종족 연합지역의 성자라고 들었습니다. 익스퍼트 수준까지 검술을 익힌, 아름다운 미녀라고 합니다.”
“!!”
과연 소니아가 반응했다. 그녀가 자그마하게 말했다.
“르데앙?”
아니거든. 하지만 소니아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나는 은밀하게 미소 지었다.
잡았다. 약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