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235
235화
한 달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쟈기였고, 도자기 장인이었다.
다행이다 싶은 게 교류회는 납치 사건 때문에 원래보다 훨씬 일찍 끝났다. 밑에서 기회를 노리던 승냥이들에겐 슬픈 소식이었다.
내가 없는 사이 스킬을 익혀 차기 장인 직을 노리려고 했건만, 예정된 시간보다 두 배나 빠르게 도착한 내게 다시 자리를 내 줄 수밖에 없었다.
‘헹. 누가 이 꿀 보직을 넘길 줄 알고?’
나는 진심으로 도자기 장인 직을 유지한 걸 기뻐했다. 내가 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검술이나 마법과 다른, 순수하게 내가 일궈낸 성과라서 더 아끼는 건가? 어쨌든 심심풀이 정도는 되니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도자기 장인 직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도자기 장인 일을 하는 동안, 가이노스와 뮤온 보트라도 바쁘게 움직였다.
가이노스는 소니아와 이러저러한 비밀 대화를 한 뒤,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떠났다. 떠나기 전에 내게 보여준 음흉한 미소가 마음에 걸렸다.
뮤온 보트라에게 물어보니,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비밀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게 있다고 한다. 참 비밀 좋아하는 인간이다.
뮤온 보트라는 게리소님에 남았다. 그는 렉시놈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쉘리는 본인이 공언한 대로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대령했다.
‘하지만 뮤온 보트라의 진정한 믿음을 얻기 위해선 반드시 보여줘야 할 게 있지.’
흑마력을 포기, 흑마법은 바꾸는 중이다. 인체실험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렉시놈은 대륙의 폭탄이다.
다름 아닌 악신의 살 때문이다. 뮤온 보트라는 편집증일 정도로 악신의 살이 어디에 쓰였고, 얼마나 남아있는지를 조사했다.
백색의 마냐툴은 그에게 지난 수십 년간의 실험 일지, 피험자들의 주장, 노트에 휘갈겨 쓴 사견, 심지어는 영상 기록마저 보여주며 악신의 살을 단 한 조각도 남김없이 소모했음을 증명했다.
“아니. 내 계산과 다르다. 악신의 살 강화자는 적어도 이보다 열 배는 더 많아야 해.”
실험일지를 본 뮤온 보트라가 단언하며 한 말이다. 그가 단언하는 이유는 이종족 연합지역의 증언을 토대로 악신의 신장과 뼈의 부피를 계산해서 살의 무게를 도출해냈기 때문이다.
다소의 오차는 있겠지만, 그가 계산한 살의 무게와 피험자에게 들어간 살 무게의 총량이 심하게 다르자 험악한 분위기마저 띄우며 마냐툴을 압박했다.
마냐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덤덤하게 말했다.
“설마 살점을 그대로 투입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요? 생명과 변화의 정수만 빼내면 부피는 수십 분의 일로 줄어듭니다.”
으지직!
그는 경악스럽게도 자신의 어깨살을 한 움큼 떼어내어 그 ‘줄어듦’을 실제로 증명했다. 아직 가이노스가 떠나지 않았던 시기에 일어난 일이라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만이 아니라 쉘리에게 연락하여 기타 악신의 살 강화자의 피마저 한 바가지씩 뽑아서 실험에 나온 기록과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며 악신의 살을 전부 소비했다는 걸 증명했다.
그렇게 뮤온 보트라가 눈을 벌겋게 뜨고 게리소님과 위성 도시를 돌아다닌 지 근 한 달.
그는 그동안 ‘악신의 살 개조 시술’을 받은 1천여 명의 피험자를 모두 만났고, (반데스 가문을 포함해서) 그들의 육체에 더는 어떠한 사악한 흔적도 남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사실, 겨우 한 달은 반세기 넘게 성공적으로 숨은 비밀조직을 완전히 파헤치기에 부족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뮤온 보트라는 해냈다.
그는 수백 년의 인생경험을 바탕으로 핵심을 속속들이 파고들어, 믿을 수 없을 만큼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렉시놈의 비밀을 캤다.
“후우……!”
물론 능력은 능력이고,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지. 1차 조사가 끝났을 땐, 철인인 소드 마스터조차 진이 빠져서 축 늘어지는 진귀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받아라.”
한밤중.
쟈기의 대외적인 일, 도자기 제작일이 끝나고 수련을 하던 나를 뮤온 보트라가 대수림 안쪽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지친 얼굴의 뮤온 보트라가 내게 두꺼운 종이 무더기를 건넸다.
바스락.
종이 무더기. 총 142장의 종이는 장마다 여덟 명씩, 렉시놈 조직원의 그림과 나이, 성별, 이름, 대외적인 지위, 현 거주지, 특징, 등등이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내가 조사한 악신의 살 강화자들이다.”
“그리고 렉시놈 조직원이죠.”
“그렇지.”
렉시놈 조직원, 현재는 악신의 살로 강화된 이들은 빠짐없이 신생 렉시놈에 소속되어있다.
그들은 모두 이중신분을 가진다.
예를 들면, 시즈믹스는 치료사. 할리는 영지 마법사. 소니아는 차기 영주.
하지만 실제로는 신생 렉시놈에 소속된 비밀조직원.
나도 똑같다. 아니, 나는 삼중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도자기 장인 쟈기 또는 신생 렉시놈 조직원 마지막으로 뮤온 보트라의 끈.
뮤온 보트라는 나와 같은, 빛의 수호자에 소속되지 않은 그만의 끈을 대륙 각지에 만들어두었다. 누군가는 그에게 은혜를 입고, 누군가는 검술을 한 가닥 배우고… 그렇게 만들어놓은 끈이 그에게 다양한 이득을 주었다.
나는 뮤온 보트라가 떠난 이후 렉시놈과 그와의 연결고리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비밀로 했지만, 만약 렉시놈이 그가 발견하지 못한 인륜을 저버리는 짓을 했다면 이르는 역할도 맡았다.
렉시놈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알면서 나를 용인하는 거다. 나를 내버려 둠으로써 뮤온 보트라와 이후로도 신뢰관계를 구축하고 싶다는 거겠지.
“이것도 받아라. 특정 패턴의 마나를 주입하면 신호를 보내주는 물건이다.”
작은 단추… 같은 걸 건네준다. 뮤온 보트라는 내게 마나를 주입하는 요령과 사용할 시기를 알려주었다.
“하나, 이곳에 적혀있지 않은 악신의 살 강화자를 만났을 때. 둘, 인륜을 버리는 행위를 했을 때. 셋, 네 목숨이 위험하고. 넷, 네가 게리소님을 벗어난다면. 이 조건을 하나라도 충족하면 바로 신호를 보내라.”
조건마다 신호를 보내는 패턴을 알려준다. 외울 것도 많다. 이후로도 알려줄 건 다 알려준 그가 종이 무더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 외우면 태워라. 다른 이들이 본다면 괜한 의심을 살 수 있으니까.”
“예. 다 외웠습니다. 태워도 되죠?”
“…농담하나?”
“진짠데요.”
팍! 뮤온 보트라가 짜증을 내며 종이를 빼앗듯이 가져갔다. 몇 개의 질문으로 나를 시험했지만, 단어 하나도 틀리지 않고, 심지어는 페이지와 구겨진 흔적까지 말하자 입을 살며시 벌렸다.
내 특기가 남의 기술 훔치는 것과 단순암기다. 삼사드로 살 땐, 홉스가 반나절 동안 주절거린 이론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어야 했는데 이 정도는 쉽지.
“…크흠!”
뮤온 보트라가 약간의 미안함이 담긴 헛기침과 함께 얌전히 종이 무더기를 건네주었다. 그가 어둠 속에서도 훤히 보일 정도로 얼굴을 붉히며 말을 돌렸다.
“렉시놈은 지난 한 달간 성실하게 조사에 협력했다. 그러니 네 부탁대로 나 또한 그들을 도와줘야겠지.”
이걸 빌미로 놀릴 수 있지만, 나는 얌전히 장단을 맞춰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렉시놈의 새로운 신분을 말하는 거다. 게리소님이 어떻게 다수의 고위 마법사를 확보했는지를 해결해야 양지로 나올 수 있으니까.”
“아아, 데일리케하고 연관 지어서 말입니까?”
“아니다. 데일리케는 내 개인적인 인연으로 어쩔 수 없이 적을 두게 된 것이다. 그것 말고도 나만이 아는 여러 조직이 있다.”
“아하. 그 조직 중 하나의 탈을 렉시놈에게 씌워준다… 이거겠지요?”
“정확하다. 약 150여 년 전에 멸망한 마탑이 있지. 렉시놈의 새 신분으로는 적당할 것이다.”
고고하지만 머리에 나사가 하나 빠진 천재들이 만든, 그 이름도 찬란한 ‘천국의 계단.’
하지만 천국의 계단의 역사는 5년도 되지 않는다. 주춧돌 하나도 남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당시 기준으로 신흥 세력이었지만, 소속된 마법사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고 잠재력 또한 엄청났지.”
“그런 대단한 조직이 어째서 5년 만에 멸망한 겁니까? 경쟁상대를 배제하기 위한 기존 집단의 견제 때문에?”
“음…….”
뮤온 보트라가 잠시 망설였다.
나는 빛의 수호자니 뭐니 하는 비밀조직의 음험하고도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예상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속사정은 전혀 달랐다.
“아니다. 그들은… 간략히 말하면 자멸(自滅)했다.”
“어… 예?”
내 인상이 구겨지자 뮤온 보트라가 헛웃음을 지으며 천국의 계단이 멸망한 원인을 알려주었다.
“그들은 인적이 드문, 달리 말하면 사방이 몬스터에 둘러싸인 곳에 마탑을 세워서… 휴우! 뭘 어찌해보지도 못하고 멸망했다.”
“아니, 천재라면서요? 천국의 마법사의 계단의 마법사님들이 왜 그딴 짓을 한 겁니까?”
“글쎄다. 천재라는 존재가 꼭 인간적으로 성숙한 이들이 아니라는 증거… 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사회성이 심히 부족한 천재들의 집단, 천국의 계단은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회성 부족한 부적응자가 으레 그러하듯이 시작부터 막장으로 향하는 엑셀을 마구잡이로 밟았고… 장렬하게 산화했다.
이름 그대로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은 것이다.
“대체 어디에 조직을 세웠기에?”
“대수림 안쪽이다.”
“미쳤군요.”
“…그렇지. 아주 뛰어난 천재들이었고, 참신하게 미친 이들이었지.”
성곽시대-투쟁의 시대 2연타를 맞은 남쪽 대륙이 그 어디보다 혹독하게 무너진 것에는 대수림에 우글대는 몬스터 탓이 크다.
(실은 렉시놈을 탐색하기 위해서였지만) 도움을 주러 온 중앙 대륙과 이종족 연합지역의 맹자들도 대수림 안쪽은 감히 손도 못 댔다.
그저 환경오염과 대규모 서식지 파괴를 감수하고 톤 단위로 제작한 독을 뿌리는 걸로만 만족하고 물러날 뿐이었다.
중앙 대륙과 이종족 연합지역의 고수 연합. 3시대를 통틀어서 최고의 무력집단이라고 자부할 이들조차 정복하지 못한 땅을 150년 전의 소규모 마법 집단이 버틸 리가 없다. 망하는 게 당연했다.
나는 단언했다.
“5년을 버틴 것도 기적입니다.”
“사실 5년도 확실치 않다. 첫 출범식 때만 참석했고, 이후로 아무런 연락이 없었지. 결국, 5년째 되는 해에 위험을 무릅쓰고 대수림 안으로 들어가 천국의 계단이 멸망한 걸 확인했다.”
“어이고…….”
“돌이 풍화된 흔적이나 수풀이 자란 높이를 보면 1년은 버텼을지도 의문이 들더군.”
나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괜히 그런 집단의 후계자라고 떠들고 다니다가 비웃음거리만 되는 거 아닙니까?”
“끝은 좀 그래도 실력은 진짜였다. 그들은 천국의 계단 이전부터 소규모 조직을 이뤄 독자적인 학파의 기틀을 잡았어. 현대 마법체계에도 그 흔적이 일부 남아있을 정도이니 실력은… 실력 하나만큼은 진짜였지.”
뮤온 보트라도 눈을 가늘게 뜨며 과거의 한심한 천재를 회상했다. 말을 끝낸 그가 고개를 저으며 내게 두꺼운 보따리를 건넸다.
“제대로 가면을 쓰려면 이론이 뒷받침되어야지. 이걸 쉘리나 이스마일 반데스 경에게 전해주도록.”
보따리 안에는 17권의 빛바랜 책이 담겨있었다. 보존 상태는 썩 훌륭하지 못하지만, 조심해서 펼치면 글씨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폐허에서 찾아낸 마법서다. 대부분의 마법서는 물에 젖어 흔적도 남기지 못하거나 썩어가고 있었지만, 보존마법이 걸린 17권의 책을 발굴하는 데 성공했지.”
“과연.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었군요.”
“천국의 계단 특유의 기초부터 상급까지의 일반 마법서이다. 이것만 잘 더하면 천국의 계단 후계자 노릇을 하기는 어렵지 않을 거다.”
“어디 한 번 봅시다.”
혹시나 삭은 종이가 찢어질라, 조심해서 종이를 넘긴다. 뮤온 보트라가 그런 나를 보며 입을 살며시 오물거렸다.
“…네가 마법을 아나?”
당신보단 많이 알 거다. 나는 답하지 않고 삭은 마법서를 신중하게 넘기며 천국의 계단이 이룩한 성과를 파악했다.
‘좀 하는데?’
과연 천재라고 자부할 만하다. 동시에 5년도 버티지 못하고 멸망한 등신들 특유의 불완전함이 묻어나왔다.
어느 것 하나 완전한 게 없는 마법서. 그것이 나의 평가였다. 천재 특유의 번뜩이는 발상으로 핵심 코드를 적는 건 성공했지만, 그 이상 논의를 발전하지 못했다.
한 명의 천재가 혁신적인 이론을 제시하면, 백 명의 수제가 이론을 뒷받침해줘서 살을 붙여야 한다. 하지만 오만한 천재만 있으니 혁신만 있고, 개혁은 없다.
이론적으로는 되는데 현실에서 실행하기 위한 수많은 공학적, 생체학적 기반지식이 부족한 것이다.
‘말만 기초부터 상급 마법이군.’
실제로는 기초 단계의 마법만 시전 가능한 수준? 중급 이상은 콘티나 다름없을 정도로 뼈대만 앙상한, 핵심 회로와 코드만 겨우 채워진 마법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앙상한 게 득이 되겠군요. 렉시놈의 이론은 탄탄하니 이들의 마법에 불완전한 부분을 금방 채워줄 겁니다.”
“…정말로 마법도 배웠나?”
아, 이런. 너무 드러냈군. 뭐라고 변명하지?
이럴 때를 위해서 천재라는 좋은 변명거리가 있었다.
“엄… 사실. 스승님이 언제나 ‘넌 천재다. 천골이다. 천하의 천재골이다’고 외치신 덕에 이런저런 헛바람이 많이 들었을 때가 있습니다.”
“흐음… 그래서?”
“그래서 뭐… 스승님이 돌아가시고 저 혼자 자유롭게 수련을 할 시기가 와서 말이죠. 그 헛바람 때문에 마법에도 손을 댔었습니다. 용병들이 익히는 공용 마법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독학으로 마법을 배우다니…….”
뮤온 보트라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과 함께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내 그가 굳게 결심한 듯이 나를 마주 보며 내 양어깨를 꽉 짚었다.
“쟈기, 잘 들어라. 천재와 미치광이는 종이 한 장 차이다. 네가 한 짓은 이 천국의 등신들과 다를 바 없는 위험천만한 행위다.”
“…천국의 계단 아닙니까?”
“등신이다. 이놈들도, 그리고 너도. 네가 겨우 용병 업계를 떠도는 마법을 익혀서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만, 당장 때려치우든지 아니면 차라리 렉시놈의 것을 익혀라.”
“아, 예. 알겠습니다.”
너무 진지하게 충고를 해서 거짓말을 한 내가 다 미안해질 지경이다. 내가 얼떨떨해하자 뮤온 보트라가 무안한 듯이 말했다.
“원래는 이런 충고 따위가 아니라 네 검술을 직접 봐줘야 함이 옮지만… 렉시놈이라는 무게감 때문에 쉴 틈 없이 움직여서 그럴 시간도 나지 않는구나. 미안하다.”
“예? 아뇨. 미안하다뇨.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마법서를 가져다주며 사정을 설명하면 렉시놈 내에서 네 위상도 조금은 올라갈 거다. 그런 위상이나마 있으면 이전보다는 편하게 수련에 집중할 수 있겠지.”
“…그래서 저보고 전달하라 그러신 거였군요.”
뮤온 보트라가 이렇게 세심한 성격이었나? 사람이 갑자기 착해지면 죽을 때가 온 거라던데. 불안해 죽겠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 모닥불을 피웠다.
타닥! 타닥!
인적 없는 대수림 안쪽. 모닥불을 피우고 인적사항이 적힌 종이 무더기를 한 장 한 장 꼼꼼히 태운다. 나는 타들어 가는 종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말씀하시는 걸 보아하니… 이제 떠나실 겁니까?”
“그래. 솔직히 일 년 정도 더 있고 싶다만, 그랬다간 게리소님이 곤란해질 테니까.”
“아아. 그날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죠.”
뮤온 보트라와 가이노스는 대놓고 배에 타서 우리를 따라오다가 마탄 항구에서 종적을 감췄다. 실제로는 렉시놈을 조사했지만, 대외적으로는 행방불명.
데일리케 왕국의 신화검과 성자 가이노스가 게리소님에서 행방불명되었다. 불온한 가십거리가 나오기 딱 좋은 소식이다.
“이 이상 시간을 끌면 외부세력이 이를 빌미로 게리소님을 자극할 수 있다. 나 나름대로 할 일도 쌓여있고 말이지. 아쉽지만 이번은 이 정도로 만족하고 다음을 기약해야겠어.”
“한 달간의 실종은 어떻게 변명할 생각입니까?”
“대수림 안으로 제자와 수련여행을 떠났다고 하면 된다. 천국의 계단을 이은 새로운 후임도 자연스럽게 소개할 수 있겠지.”
“새로운 후임이라…….”
대강 스토리가 그려진다.
할리의 마법에서 인연의 향기를 맡은 뮤온 보트라는 흥미를 느끼고 게리소님을 방문해서 쉘리 반데스에게 사정을 들었다.
쉘리 반데스는 젊은 시절, 대수림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기연을 만났는데, 어머나 세상에, 그게 바로 150년 전에 멸망한 천국의 계단의 마법서였던 것이다.
쉘리 반데스는 은밀히 마법사 세력을 키우며 그 힘을 바탕으로 게리소님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어느 유명한 마탑의 비전 마법일까 두려워서 외부 활동은 극도로 자제했다.
뮤온 보트라를 만나 천국의 계단과 관련된 진실을 들은 그는 안심하고 숨겨왔던 야망을 펼치기로 한다.
“…이렇게 가면 되겠네요.”
“살을 붙이는 건 너희끼리 알아서 하도록. 나는 후임을 만났다는 것 이외에는 말을 아끼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