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240
240화
* * *
게리소님은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다. 그 고립은 지리적인 면과 혈연적인 면 모두를 포함한다.
그것을 설명하기에 앞서, 남쪽 대륙과 중앙 대륙을 가르는 대수림으로 들어가 보자. 스마일 형태로 길게 이어진 대수림은, 내가 조사한 것만 해도 일본 대륙의 넓이를 세 배는 가볍게 뛰어넘는다.
남쪽 대륙에서 육로로 중앙 대륙으로 가고자 한다면 대수림 좌우 사이드, 끝 부분에 살짝 생긴 안전지대를 지나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게리소님은 그 중 우측 끝, 북동쪽 안전지대를 독점했다. 동쪽 끄트머리 해안가는 마탄 항구, 바로 옆의 대수림 인접구역은 게리소님이 자리 잡았다. 위아래로 그리고 대수림 안쪽을 서서히 개발해가며 위성도시를 늘리고 인간의 땅을 넓힌다.
쉘리 반데스에서 이스마일 반데스로 이어지는 카리스마의 계보. 주변 영지의 간섭과 도움 없이 온전히 그들만의 힘으로 게리소님을 발전시켰다.
사실 개척영주가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라 해도 이건 과하다. 원래는 시간이 지나면 독불장군을 고수하던 개척영주도 인근 영지에 고개를 숙이기 마련.
그러한 도움으로 인연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게리소님은 빚을 지지도 않고 은혜를 입히지도 않았다. 그들은 어떠한 영지와도 연합하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다.
그 독자적인 노선에는 거리도 포함되어 있다. 게리소님과 게리소님에 소속되지 않은 영지까지의 거리.
예를 들어 네뷸, 아이웨눈, 그다음으로 발루가 영지까지. 영지 간의 거리는 20킬로 전후, 길어도 40킬로를 넘지 않는다.
거리만 가까운가? 그럴 리가. 속된 말로 ‘급이 맞는 사람들끼리 사귄다.’고 고조할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까지 계보도를 올라가면 웬만한 귀족들은 피가 이어져 있다.
하지만 게리소님은 다르다.
게리소님과 가장 가까운 네뷸영지만 해도 육로로 사흘이나 걸린다. 뭐, 그건 우리의 이동이 들키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움직인 탓도 있지만, 어쨌든 그 어떤 영지보다 거리가 먼 것은 확실하다.
혈연관계 또한 그러했다. 냉정히 따지면 귀족이 된 지 겨우 3대째. 반데스 가문은 어떠한 귀족과도 피를 섞지 않았다.
말했듯이, 철저한 고립. 근데 그런 놈이 돈도 많고, 세력도 가장 강하다. 남쪽 대륙 귀족들이 보기에 게리소님은 화합을 깨트리는 탐욕스러운 돼지새끼였다.
이 정도면 모난 돌이 정 맞는 수준이 아니다. 대놓고 너희 싫다고 밀쳐내는데 누가 게리소님을 좋아하겠나.
피랄 연합체는 그런 게리소님을 두려워했고, 의심했다.
기존 귀족 가문의 생리(生理)를 뒤엎는 길을 걷는 독불장군. 그러는 주제에 굶어 죽기는커녕 한계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발전하는 불가해(不可解)의 괴물. 그것이 남쪽 대륙의 귀족들이 보는 게리소님이었다.
일전의 교류회 때, 빛의 수호자가 대놓고 납치 테러를 일으켜도 합심해서 범인을 찾기는커녕 새벽도 지나기 전에 전쟁 직전까지 상황이 몰렸었지.
피랄 연합체의 귀족들이 전부 바보여서 그런 게 아니다. 예전에 말했듯이, 이미 판이 그렇게 깔려 있던 것이다. 게리소님의 의도적인 고립이 자초한 불화였다.
이렇게 보면 게리소님이 정말 나쁜 개자식들처럼 보인다. 쟈기는 게리소님 소속이니 그들의 편을 들어줘야 균형이 맞겠지.
게리소님의 진정한 정체는 살의 렉시놈이니,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것 이외에는… 음……… 적절한 변명거리가 없네?
뭐 굳이 복지, 인권, 인류의 문명 발달 같은 대의를 변명 삼지 않아도 게리소님이 먹을 수 있는데 안 먹는 것도 이상하잖아? 여기가 지구도 아니고. 정복할 수 있으면 정복하는 거지.
또한 게리소님이 독불장군에서 벗어나 남쪽 대륙과 진정한 의미의 ‘화합’을 이루기 위해선 모순적으로 남쪽 대륙을 먹는 방법 말고는 없다.
다만 그 시기가 빛의 수호자 때문에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고, 격한 수단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정말로 그게 다였다.
‘이걸 다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위의 사정이 ‘막무가내로 정복을 해도 뒷일이 걱정되지 않는가.’ 라는 기돌 기사의 직설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괜찮다.’인 이유였다.
“알겠나? 기돌 기사?”
“…뭘 알겠냐고 말씀하시는 건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기돌 기사가 우울한 얼굴로 답했다.
“그리고 어떤 대답을 하든 기도라의 영주님은 만족하지 않으시겠죠.”
네뷸, 아이웨눈, 발루가. 그 이외에 몇 개의 영지를 거쳐서 도착한 기도라.
기도라는 여러모로 부유한 영지다. 위아래로 다른 영지에 둘러싸여 상대적으로 안전했고, 풍부한 수원지와 너른 평야마저 가졌기에 곡물 수급도 용이하다.
그만큼 인구수도 여태까지 만났던 그 어떤 영지보다 많았다.
잘 훈련된 강군은 500을 헤아렸고, 허름한 목창 끝에 화살촉만 달랑 단 민병대까지 박박 긁어모은 병력은 우리보다 족히 배는 많은 수를 자랑했다.
그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기반으로 기도라는 수성전을 치렀다. 평범하지만, 정석적인 전략이다.
하지만 우리 측에는 평범하지 않은 실력자가 우글거렸고, 수성전의 대가는 처참하게 부서진 성문과 할리 마법사의 다중 폭발에 무너진 성벽이었다.
성벽에서 쏘아지는 화살과 돌팔매질은 바람 마법에 허무하게 막혔고, 그마저도 나와 한보 기사가 성벽을 종횡무진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허무하게 끊겼다.
다음에 있을 것은, 악에 받친 병사들이 뚫린 성문과 성벽을 향해 돌진하는 것.
도심지를 배경으로 하는 난전이 벌어졌다. 그 혈투의 중심에는 피보라를 일으키는 내가 있었다.
마하결이나 억겁세는 쓰지 않는다. 광검결도 과하다. 본 실력을, 션과 웨일이 개량한 검법을 꺼내지 않아도 익스퍼트 중급은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재앙이다.
뮤온 보트라가 전해준 검술, 선과 흐름의 법과 남쪽 대륙에 퍼진 기본 검술만을 이용해 병사들을 상대했지만, 기도라는 그런 나조차 막지 못했다.
번쩍!
일 회의 발검에 영역이 고차원적인 변화를 일으키며 십 수 개가 넘는 오러의 선을 내쏜다. 오러는 갑옷, 방패, 강철검을 수수깡처럼 부러뜨리곤 연약한 인간의 살을 아작냈다.
“끄흐흐흐흑… 파, 팔이……!”
“살려…….”
팔, 다리, 복부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쓰러지는 기도라 측 병사들. 나는 그들 사이를 산책하듯이 경쾌하게 걸으며 기본 검술인 ‘돌진 팔방 휘두르기’를 선보였다.
5미터도 넘게 늘어난 오러가 대각선으로 확! 다시 전면으로 획! 한 번 백색 선이 전면을 휩쓸면 인간 서너 명의 육체가 세절기에 들어간 종이처럼 죽죽! 잘린다.
절단면으로 쏟아지는 피와 내장이 비현실적인 파괴의 향연에 현실미를 더해주었다.
그런 내 뒤를 스톤을 포함한, 이제는 3명밖에 남지 않은 기사들이 이를 악물고 따라다닌다. 나, 스톤, 3명의 기사가 쐐기가 되어 병력을 관통하면 병사들이 그 틈을 더욱 넓힌다.
한 번 넓히면 그다음은? 다시 뒤로 가야지.
앞으로 한 번, 방향을 틀어 뒤쪽 대각선으로 한 번. 두 번의 돌진 또는 돌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산보.
내가 지나간 곳은 비인간적인 죽음을 맞이한 시체만이 가득했고, 그 두 번의 돌진에 기도라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수성전을 한 지 한 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4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나온 끝에, 기도라의 안주인인 조웬 기도라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는 것으로 상처투성이 수성전이 막을 내렸다.
그 모든 과정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지켜본 기돌 기사였기에 내게 질문을 던지는 거겠지. 그가 재차 물었다.
“쟈기 경이시여. 이 수많은 피 값을 대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십니까.”
“아까 다 설명했지 않나.”
“아뇨. 전혀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떠나는 기도라 영주님을 아련하게 바라보기만 했죠. 한 십분 정도?”
“그러니까. 십 분 동안 할 말 다한 거네. 못 알아들었으면 그걸로 끝내.”
“…….”
기돌 기사의 슬픈 시선이 쫓겨나는 기도라의 영주 가문에게 향했다. 그가 거리 너머로 사라지는 기도라 영주를 하염없이 바라보더니 슬픈 기색으로 말했다.
“귀족 가문 아홉 개가 박살이 났습니다. 게리소님의 다른 출정 부대까지 합치면 총 스물세 개의 영지가 무너졌죠.”
23개. 우리 부대 것을 빼면 나머지 세 부대가 14개 영지를 점령했다. 한 부대당 5개도 못 채운 수였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두 개씩이나 부족하다.
“왜 이렇게 느리지?”
“느리다… 고요? 제정신이십니까?”
기돌 기사가 기가 찬 얼굴로 윽박지르듯이 물었다.
“겨우 3주도 되지 않아 스물세 개의 영지를 손아귀에 집어삼키셨습니다. 쟈기 경께서는 이것도 부족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물론이지.”
이 정도면 기존 게리소님의 땅을 더해도 대한민국의 절반을 겨우 넘길 수준이다. 앞으로 우리가 먹어야 할 땅은 이것의 스무 배를 훌쩍 넘는데, 벌써부터 지친다고 늘어지면 안 된다.
하지만 나도 실수한 게 있는데. 인간의 정신력을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점이었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할리 마법사와 한보 기사마저 질린 기색을 토했다.
싸움이 힘들어서 지친 게 아니다. 싸움 이후에 올, 수십을 넘는 피의 숙청이 그들을 괴롭혔다.
“우웨에에엑!”
“이건… 이건 아니야.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아.”
병사 중에는 토하는 이들까지 나왔다. 맨날 몬스터와 싸우다가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리얼한 현장을 맞이하니 감정이 못 버티는 것이다.
PTSD는 꼭 시간과 경험의 양에 비례해서 오지 않는다. 네뷸과 아이웨눈. 병사들은 겨우 두 번의 경험에 ‘학살’에 관해 PTSD가 왔다.
기사들도 내게 찾아와서 ‘이런 식’으로 점령을 하는 것은 따를 수 없다는 말까지 했다.
병사들 사이에서 회의론이 흘러나오고, 심지어 할리와 한보 기사마저 정복 계획을 다시 세우는 게 어떠냐는 말까지 나왔다.
그 때문에 다음 영지인 발루가부터는 노선을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영주를 포함한 기존의 권력자는 살려주고, 적당한 돈만 주고 내쫓기로.
지금 쫓겨나는 기도라 영주도 그 덕분에 죽지 않은 것이다. 본인은 이를 바득바득 갈겠지만, 이 마음 약한 르암인 덕분에 살아남은 걸 알기나 할까?
‘이런 식의 점령전은 치러본 적이 없어서 나도 실수를 했어.’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기존의 지배자를 전부 갈아치워야 해서 네뷸, 아이웨눈처럼 열 살도 안 된 꼬맹이부터 골목길에서 굶어 죽어가는 버림받은 사생아까지 전부. 영지를 구석구석 뒤져서 귀족의 피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유, 학살을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의 정신적 피로감 때문에 방법을 바꿨다.
첫 번째 삶, 지구에서 악바리처럼 10년을 생존한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사고방식이었다.
“끙…….”
멍청한 스톤도 안색이 안 좋다.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물으니 나오는 대답이 가관이다.
“모르겠어. 그냥… 다 사이좋게 지내면 안 될까?”
스톤이 멍청해서 저딴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저게 게리소님 병력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나는 그나마 친한 보로에게 답을 구했지만…….
“너는 괜찮겠지. 이 징그러운 괴물 새끼야.”
“괴물이라니. 진짜 상처받는 소리 하네.”
“웃기고 있네. 너는 옛날 해적… 흡!”
보로가 다급하게 입을 막았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해적들을 처치한 이가 나라는 것은 죽어서도 비밀이다. 그가 은근히 내 눈치를 보더니 가래침을 뱉었다.
“카악-! 퉷! 어휴! 시이펄! 이런 놈하고 친해져서 이게 웬 개고생이야.”
그렇게 우리는 전혀 다른 의미의 피로감을 끌어안고 기도라를 떠나 다음 영지로 향했다.
* * *
터벅. 터벅.
출정한 지 약 3주. 원대한 웅심(雄心)을 품은 초창기와는 다르게 죽상을 한 병사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내 입으로 굳게 약속하지만 않았으면 바닥에 드러누워 차라리 죽이라고 고집을 피웠을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정말 보로의 말대로 괴물이라서 억지로 이들을 이끄는 게 아니다. 이 정도까지 싫다는 표현을 대놓고 하면 나라도 정복을 그만둘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기도 힘든 게, 기도라 다음이 바로 방페라 영지다. 마탄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도시.
방페라를 먹어야 나중에 있을 피랄 연합체의 무력 투사를 막기가 쉬워진다. 그걸 알기에 할리와 한보, 오레이 등의 참모진도 지친 정신을 채찍질하며 마지막 싸움을 하러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쟈기, 쟈기 경…….”
할리 마법사가 은근히 나를 부른다. 마차에 탑승하자 빛을 내는 수정구를 내게 건넨다. 다른 부대에서 통신이 온 것이다.
“누구하고요?”
“소니아 공녀님일세.”
고개를 끄덕이고 수정구를 작동하자마자 소니아의 말이 들려왔다.
(쟈기. 다음 영지로 간다는 소식을 들었어. 아직도 계속할 생각이야?)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그쪽 사정도 저희와 비슷한 것 같군요.”
(그래. 병사는 물론이고 기사들도 아예 진격 자체를 거부하고 있어. 저번에는…….)
소니아가 길게 사정을 설명한다.
그나마 소니아 이하 3개 부대는 사정이 더 나았다. 그들은 처음의 ‘귀족 학살’이후 학을 떼곤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전투 시에 일어난 어쩔 수 없는 피를 제외하고는 철저하게 피를 덜 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더 이상의 전쟁을, 명령을 거부한다. 상관의 명에 불복종한 이들을 죽이면 남는 것은 한 줌밖에 없는 지휘관뿐이다.
그들은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소란을 이겨내지 못하고 진격을 멈췄다. 한참 동안 진격을 멈출 수밖에 없는 이유와 고충을 토로하던 소니아가 내게 고백했다.
(쟈기 나는… 음… 솔직히 나를 포함한 게리소님의 모두가 몰랐어. 전쟁이…… 전쟁이 이런 거라는 걸… 그냥… 하아……!)
목소리만 들리는데도 소니아가 어떤 꼴일지 훤히 예상이 간다. 봉두난발에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겠지.
(해서, 네게 통신하기 전에 아버님께 먼저 연락했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어떠냐고 말이야.)
“영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죠?”
(…아쉬워하긴 하는데 내심 동의하는 눈치더라. 그러니까 쟈기 너도…….)
“저도 멈추라는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방페라는 초창기에 정한 우선순위 1순위가 아닙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방페라를 내버려 두면 지금까지의 싸움은 의미가 없게 됩니다.”
방패라를 욕심내는 것은 나 개인의 고집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방페라는 먹어야 한다는 것이 출정 전부터 세워둔 계획이었다.
솔직히 나로서도 아쉽긴 하지만 그만두는 게 더 낫다. 하지만 모두가 결정한 내용을 나 혼자서 막무가내로 중지할 순 없다.
나는 재차 물었다.
“소니아. 소니아 반데스 공녀님. 명령하십시오. 저는 당신의 기사입니다. 방페라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
수정구가 침묵한다. 할리도 침침한 눈을 한 채 수정구에만 시선을 집중했다.
깜빡! 깜빡! 망가진 전등처럼 깜빡이기 시작하는 수정구. 나를 제외한, 다른 부대의 지휘관과 이스마일 반데스와 의견을 교환하는 거겠지.
깜빡거림이 끝나고, 수정구가 흐트러진 말을 내뱉었다.
(…부탁해.)
“예. 맡겨주십시오.”
(미안해 쟈기. 그리고… 고마워.)
반년 동안 함께 생활하니 고맙다는 말까지 듣네. 반년 전 쟈기의 대우와 비교하면 상전벽해나 다름없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삼키며 할리와 눈을 마주쳤다.
“갑시다. 할리 마법사님.”
“알겠네.”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할리를 내버려 두고 마차를 나온다. 저만치 뒤에서 여전히 우리를 따라오는 기돌 기사가 보인다.
저놈은 언제까지 졸졸 따라올 생각이지? 따라오지 말라고 다그친 적이 있지만, 꼴에 같은 기사라고 부하들이 그런 나를 말려서 그냥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기돌 기사. 언제까지 따라올 생각인가?”
“당신이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볼 생각입니다.”
네뷸과 아이웨눈의 기사. 동료와 충성의 대상이 하루아침에 학살당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에게 충성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유이한 기사들.
그들과 다르게 방페라 이후의 기사들은 꽤나 순조롭게 우리에게 합류했다. 네뷸과 아이웨눈의 기사들만이 눈물이 섞인 저열한 욕설을 퍼부으며 영지를 떠났고, 개중 유일하게 기돌 기사만 나를 따라왔다.
나는 의미를 읽기 힘든 눈빛을 내비치는 기돌 기사에게 말했다.
“잘 됐군. 이 계곡만 지나면 방페라 영지고 거기서 진격을 멈출 생각이니까.”
좌우로 넓게 펼쳐진 협곡을 지나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방페라 영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오늘 안에 방페라를 접수하면 기돌 기사의 소원도, 게리소님의 정복도 서서히…….
쿠르릉!
그 순간. 들려선 안 될 소리가 들렸다. 불길한 감각이 뇌리를 치달으며 오감이 확장된다. 최소한도로 줄인 초능력 파동이 넓게 펼쳐졌고… 나는 혀를 찼다.
“쯧!”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다.
다들 지치고 힘들다고 죽상을 하는데 어떻게 나라고 평상심을 유지할까. 그들을 다그치고 힘을 불어넣으며 그 동안 나도 모르게 정신력을 많이 소모했었다.
계속된 정정당당한 대결도 내 눈을 가렸다. 그 끝에, 마지막 순간에 해선 안 될 결정을 내렸다. 바로 이 협곡을 지나치기로 한 것이다.
좌우로 넓고 긴 협곡, 그 길을 지나가는 천수 백의 병력. 협곡 너머는 적진의 본거지. 적에게 주어진 3주가량의 시간.
마지막으로 흔들리는 절벽과 그 위에서 느껴지는 마법사의 기운. 단서를 조합하면 하나의 답이 나온다.
쿠과과광!
내가 답을 입으로 내뱉기도 전에 절벽이 무너졌다.
지면 파괴, 암석 폭발, 흔들리는 대지 등의 마법을 맞은 협곡이 무너지며 수십 톤이 넘는 돌덩이를 떨어뜨렸다.
거대한, 갈색 해일이 수십 미터 높이의 절벽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아, 씨발. 진흙탕 싸움.”
방페라 영지가 드디어 암묵적인 룰을 깨고 맞기 전에 우리를 치기로 했다. 본격적인 진흙탕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하필이면 이 마지막 순간에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