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246
246화
‘손가락 끝쪽 마디 하나 정도야. 그걸 고통이라 하면 안 되지.’
내 기준에선 칭찬이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펄쩍펄쩍 날뛰는 보스를 진정시켰다. 발을 차올려 그의 명치에 발끝을 박아 넣자 보스가 넙죽 엎드린다.
“콜록!” 머리를 박고, 고통스러운 기침을 토하는 그에게 물었다.
“내 부모는 죽었다고 했지.”
“…….” 보스의 기침이 멎었다.
“아, 괜찮아. 굳이 부모 죽은 거로 화내고 싶지 않아. 그렇잖아? 세상이 좀 험해야지.”
진짜다. 부모도 한두 번 죽어봤어야지. 나쯤 되는 부모 사망의 프로라면 이런 거에 일일이 슬퍼하지 않는다.
“그 보다. 예전에 나를 지르바에 인도한 그 녀석은? 아직 살아 있나?”
“그게 누, 누구…….”
이야. 진짜 서운하네. 그걸 기억을 못 해? 나는 보스의 손을 잡고 손등부터 팔까지 천천히 쓰다듬었다. 신체변화 초능력이 팔을 타고 흐르며, 그의 팔에 분포한 감각점에 이상 반응을 일으켰다.
통점, 압점, 온점, 냉점이 한계치 이상으로 고통 신호를 전달하고, 근육층에 내장된 감각 신경도 번개처럼 마구 타오른다.
현재 보스의 팔은 불타고, 찢기고, 칼에 베이는 등의, 신경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한계치까지 전달하게 되었다.
51번이 배운 중급 신경계 고문 중 하나다. 그가 치사량을 뛰어넘는 고통에 게거품을 물며 정신을 놓았다.
“그르륵-!”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몸을 발발 떤다. 눈이 뱅글뱅글 돌아가고, 입에서 나온 게거품이 턱을 지나 가슴팍까지 흐른다.
엄살 피우고 있네. 그거 잠깐하고 끝내서 지금은 고통도 안 느껴지잖아. 한 번 더 해줘야 정신을 차리려나? 나는 반대편 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캬아악!”
보스가 눈을 번쩍 떴다. 그가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는 길고양이처럼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내 손을 탁! 쳤다. 고통 속에서 주마등이라도 본 걸까. 보스가 눈을 또렷하게 뜨며 급히 말했다.
“기, 기억… 기억나! 너는 모르겠지만, 네가 앞섬에 똥을 싼 그놈을 말하는 거지! 가, 가오닐 말이야. 그 녀석은 죽었어!”
“언제? 어떻게?” 나도 기억하거든?
“몰라. 아, 아악-! 손대지 마! 말할 게! 전부 말할 테니까 손만 대지 마! 아아아아악!! 4, 4~5년 전에 골목길에 죽어 나자빠져 있었어! 복부에 칼이 꽂힌 채로! 소, 손놔! 이제 됐지! 범인은 우리도 몰라! 그러니까 손 놓으라고오오!!!”
손을 놓자마자 보스가 땅을 기어가서 한보의 발에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고등어 통구이를 쩝쩝 먹던 한보가 보스를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법사가 포크를 놓고 완드를 든다. 한보가 마법사를 말린다. 그가 질색하는 눈으로 나와 보스를 번갈아 보더니, ‘휴~!’하는 긴 한숨만 내쉬고는 고등어 통구이를 먹는 데 집중했다.
“허, 흐! 허어! 허허허! 허헉! 허흐헉!”
이 모든 무음성 코메디가 이어질 동안, 보스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신음소리 한 번 괴상하네. 누가 보면 너한테 애무한 줄 알겠다.
어쨌든 알 건 다 알았다. 부모도 죽고, 은인도 죽었으니 보스에겐 더 이상 볼일이 없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순 없는 법이지.
‘최소한의 복수는 해야겠지.’
그렇다고 웨일처럼 막 나가지는 말자. 솔직히 흑마법사와 비교하면 시골 영지에 암약하는 양아치는 격이 맞지 않는다. 적당한 수준에서 끝내야지.
“오, 오지 마! 다가오지 마! 내 몸에 손대지… 컥!”
나는 보스를 제압하고 척추를 살살 쓰다듬었다. 내가 전달해준 신체변화 초능력이 혈관을 타고 그의 몸 곳곳으로 흘러들었다.
지금 현재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하지만 내일쯤 그의 몸에 심각한 변화가 닥칠 것이다.
‘부작용에서 발견한 고문법이다. 이거라면 네게 적당한 벌이 될 거야.’
신체변화 초능력은 어중간하게 지식이 있는 인간이 사용하면 인체에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
인체는 조(兆) 단위의 톱니바퀴가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기계다. 어중간한 지식으로 신체를 변화시키면 도미노처럼 연쇄반응이 일어나 엉뚱한 곳에서 부작용이 일어난다.
때문에 ‘근육은 단백질이야’ 수준의 바보, 아니면 최소한 생물학 지식을 석사 이상 갖춘 이가 사용하는 게 좋다. 괜한 놈이 손대면 치명적인 부작용이 발생하지.
그 부작용 중 하나가 내가 보스에게 쓴 신경계 이상이었다. 감각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실패한 부산물.
말초신경, 주로 감각신경의 역치 값을 임의로 변경시켜서 가만히 있어도 몸이 쑤시고, 따끔거리고, 불타는 통증을 느끼다가 극에 이르면 발작까지 일어나는 고문법.
대충 콜린성 두드러기가 수십 배로 강화되어서, 피부를 넘어 감각을 느끼는 모든 부위로 퍼졌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하다. 나는 보스에게 그것을 전해주었다. 내일부터 그에게 ‘편안함’이라는 개념은 없을 것이다.
그에게 남은 ‘편안함’은 죽음뿐이라는 걸 깨달을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까. 일주일은 참아줬으면 좋겠다. 과거, 51번이 똑같은 고문을 훈련받았을 때, 일주일을 버티다가 피똥 싸고 포기했던 적이 있거든.
그렇게 척추만 쓰다듬고 자리를 벗어난다. 한보가 입에 묻은 기름기를 닦으며 물었다.
“끝인가?”
“예. 끝났습니다. 바로 죽이실 건가요?”
“아니. 이놈이 숨겨놨던 비자금을 찾아야 하네.”
“그럼 내일 오후 즈음에 물어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그때쯤이면 몸도 마음도 적당히 노곤해지겠지.
보스에 대한 것은 이쯤에서 끝내자. 나는 한보, 마법사와 인사를 나눈 뒤,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 내 뒤를 스톤과 보로가 따라왔다.
“이걸로 끝이야?”
보로가 밑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대체 사람을 뭐로 보는지 모르겠다. 내가 남들 다 보는 앞에서 고문이라도 해야 만족하냐? 너는?
“응.”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보스에 대한 미련도, 관심도, 어린 시절 똥이 두고 온 방페라의 추억도 깔끔하게 정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쉘리 반데스가 올 때까지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보스는 이틀을 더 버티다가 죽었다. 사인은 쇼크사였다. 보스의 죽음은 서서히 잊혀졌고, 방페라는 평화를 되찾았다.
일주일 후, 피랄 연합체에서 무력 함대를 보내 인근 해역에서 얼쩡거린 것 말고는 방페라는 여전히 평화로웠다.
그렇게 한 달이 더 지났고, 방페라 북서쪽 인근 영지, 파스마스에서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 * *
게리소님은 북동쪽 끝에 있다. 우리의 출정은 북동쪽, 즉 오른쪽 위에서 네 개의 출정부대가 나와, 인근 영지를 잡아먹으며 왼쪽 아래로 내려갔다.
나와 할리의 출정부대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방페라를. 위성도시의 중역이 주를 이루는 출정부대는 서쪽에 치우쳐진 남서쪽으로 향하며 위를 먹는다.
소니아 반데스의 출정부대는 두 부대의 중간을 맡고, 네 번째 출정부대인 이스마일은 보급, 지원, 점령지 안정화 등을 담당한다.
이번 회담이 이루어지는 파스마스는 소니아 측 출정부대의 최외곽 점령지에서 두 개 영지만큼 떨어진 곳이었다. 방페라를 비롯해서, 원정지의 1차 목표였던 영지다.
우리가 먹었던, 방페라 바로 위의 기도라 영지보다 배는 되는 곡창지대를 보유한 곳. 풍부한 지하수가 공급하는 무기 양분과 영양분 덕분에 흉년이 든 시기에도 평작은 되는 곡물 생산을 자랑한다.
그곳에. 이제는 추수가 끝나고 휴경지로 변한 긴 논밭 한가운데에, 지나치게 단출한 의자와 탁자가 놓였다. 저곳이 공식적으로 협상이 이루어지는 자리였다.
마법을 비롯한 기타 암습의 위험이 있기에 저렇게 막 나가는 배치를 할 수밖에 없다.
휘이잉!
싸늘한 바람이 협상석을 차갑게 식혔다. 찬바람이 위용을 떨치며 냉기를 사방으로 퍼트리고자 했지만, 협상석 주변에 자리 잡은 수만의 사람들에게 닿자 ‘어머나!’ 하며 조신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수만의 사람들.
협상석을 사이에 두고 파스마스 쪽에서는 피랄 연합체가 끌고 온 수만의 병력이, 그리고 반대편에선 게리소님과 위성도시의 지원마저 받아 1만 5천이 넘는 병력이 자리잡았다.
꼴만 보면 당장에라도 전쟁을 치룰 것 같지만, 일단은 협상을 위해 모인 자리다. 하지만 일이 틀어질 때를 대비해서 군용 물자를 바리바리 끌고 온 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저쪽도 마찬가지겠지.
나도 맞춰는 났지만, 한 번도 입지 않은 전신 갑옷을 장비했다. 보온, 증발, 방어, 경량화, 감각 강화 마법 등이 걸린, 한 벌에 수천 골드나 하는 고급 장비였다.
만약 협상이 나쁘게 흘러 전면전을 할 때가 오면, 나도 눈먼 화살에 당할 수 있기에 입은 것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모인 만 오천의 병사들 모두가 게리소님, 위성도시의 돈을 탈탈 털어서 최고급의 장비를 갖추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뚜벅뚜벅!
긴 침묵이 흐르는 대치 시간. 우리 측 인원이 먼저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황량한 논밭 한가운데 놓인 긴 탁자와 의자를 향해 맨몸으로 걸어간다.
그 모습을 보자 피랄 연합체 측에서 작은 소요가 일어났다. 잠시 후, 코로미트 왕을 포함한 십 수 명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곤, 질 수 없다는 듯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지나치게 단출한 탁자와 의자에 마주앉은 두 거대 집단의 우두머리.
우리 측에선 반데스 가문 3인, 천국의 계단 고위 마법사 2인과 서기 등의 기록원 몇 명. 호위역으로 익스퍼트 셋.
피랄 연합체 측은 코로미트를 포함한 공동 왕 다섯과 마법사 넷, 익스퍼트 넷. 그리고 동일하게 기록원 몇을 데리고 왔다.
스물을 넘는 대인원. 하지만 긴 탁자에는 반데스 가문 셋과 피랄 연합체의 공동 왕 다섯, 양측의 서기 둘만 앉고 나머지는 뒤에 우뚝 서서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채 상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잠시간의 눈싸움이 펼쳐지고, 공동 왕인 루아네가 신음하듯이 말했다.
내가 있는 거리에선 들릴 리가 없고, 마법사가 방음막까지 쳤다. 하지만 나는 독순술(讀脣術)과 목소리가 방음막에 도달하기 전, 대기가 흔들리는 파형(波形)을 읽고 그의 말을 해석했다.
(천국의 계단이라… 그런 비밀을 숨기고 있었구려.)
“뭐야? 뭐라고 하는 거야?”
“쉿!”
“끼익!”
스톤이 눈치 없이 물어서 초능력으로 식도를 묶었다.
이런 상황에선 말 한마디 잘못하면 전면전으로 번지기 마련. 너는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도와주는 거다.
또 다른 공동 왕, 브룩스라는 노년의 남성이 입을 열었다.
(8개월 전, 교류회가 끝나고 신화검 뮤온 보트라 경과 성자님이 바람처럼 사라지셨지. 그리고 며칠 후에 마탄에 성자님이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소. 그게……?)
쉘리 반데스가 말했다.
(그… 약…….)
쉘리 반데스 측은 나와 등을 지고 앉았기에 독순술로 입 모양을 읽을 수 없고, 겨우 몇 미터도 안 되는 파형만으로 단어의 뜻을 유추하기도 힘들다.
어쨌든 그가 한 긴 말에 피랄 연합체 측이 납득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어떨 때는 입을 꾹 다무는 걸 보니 협상은 잘 진행되어가는 듯했다.
코로미트 왕이 말했다.
(일부로 지금까지 숨긴 것이오?)
(때… 쩔 수…….)
(상황이 이렇지만 않으면 남쪽 대륙의 흥복(興復)을 진심으로 축하했을 것이오.)
(우리… 게 생각….)
우리 측 인사가 뭐라 말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어쨌든 시작은 나쁘지 않은 듯했다.
탁!
천국의 계단을 시작으로 한 긴 인사말이 끝나고, 공동 왕 중 하나인 제네어드라는 늙은 여성이 불편함을 표시하듯이 탁자를 슬쩍 내리쳤다.
(당신… 어째……!)
그녀의 얼굴은 이스마일에게 가려져서 입 모양을 읽을 수 없었는데, 다른 공동 왕의 눈치나 서기가 글을 쓰는 손 모양을 보아하니 왜 교류회가 끝난 지 1년도 되지 않아 이런 전쟁을 벌였는지 묻는 것 같았다.
(…는가!)
아, 그녀의 말이 끝나자, 협상석은 멀리서 보기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지금인가? 지금 터트리는 건가?’
나는 조심스럽게 좌우에 정렬한 렉시놈 고위 마법사의 눈치를 보았다.
이제 마법의 융단 폭격이 시작되는 건가? 같잖은 공동 왕은 모조리 태워 죽이고,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의 전열을 무너뜨려서 최소한의 피해로 전쟁을 끝내는 건가?
하지만 지금은 아닌 듯했다. 쉘리 반데스와 이스마일 반데스가 번갈아가며 무어라 말했다. 제네어드의 태도를 보면, 왜 전쟁을 벌였는지 그에 합당한 명분을 말하는 거겠지.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통보도 없이 이런 행위를 한 것은 전쟁이 아닌 침략행위나 다름없소!)
(특히 네뷸, 갈리도, 드라… 그… 어찌하여……!)
(가문을 통째로 멸하다니! 전례 없…….)
아이 씨. 한 명씩 말해라. 좀. 중구난방으로 이놈, 저놈 순서 없이 말하자 독순술로 읽는 게 힘들어지잖아. 화난다고 몸을 막 흔들어대니까 입이 가려지기도 하고.
여하튼, 내가 모르는 말다툼이 펼쳐진다. 나는 이런 자리에 참석해본 적이 처음이라서 잘 모르겠는데, 원래 협상이란 게 이렇게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나?
세상 참 별꼴이 다 있다. 말싸움이 격해질수록 양측의 긴장감이 더욱 커져만 간다. 공동 왕들은 우리는 신경도 안 쓰고 반데스 가문을 압박하는 데 온 정신을 쏟았다.
‘지금인가?’
지금이 기회다. 화내는데 정신이 쏠린 이들에게 공격 마법을 퍼부으면, 상대는 ‘앗!’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잿가루로 변할 것이다.
나는 마냐툴을 확인했다.
“홍홍홍……!”
마냐툴은 이번 원정을 계기로 자신의 이명이 백색의 마냐툴이 된 거에 만족하는지, 협상이고 뭐고 신경도 쓰지 않고 흐뭇한 얼굴로 백색의 망토만 쓰다듬는다. 염색약을 쓴 건지, 마법을 쓴 건지 백색 턱수염도 은빛에 가까운 광택을 내뿜는다.
잘하는 짓이다. 노인네가 나이 먹으면 남들 평판만 신경 쓴다는 말을 들어는 봤는데, 지금까지 이럴 줄이야. 나는 허탈함에 눈을 돌렸다. 아직은 아니었나 보다.
(…래서…을 기회 삼아…….)
이런. 마냐툴을 한심하다는 듯이 보느라 협상에 눈을 뗐잖아. 쉘리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와 이스마일 반데스, 소니아 반데스가 차례차례 말한다. 공동 왕들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말을 듣다가, 소니아가 입을 열자마자 불같이 화를 냈다.
꽝!
코로미트 왕이 흥분해서 외쳤다.
(방페라는 양보할 수 없소! 절대로!)
오오. 벌써 영토 협상에 들어간 거야? 내 생각과 다르게 기습이 아니라 전면전을 하는 건가? 협상 결렬, 이후에 있을 총력전으로 한 번에 집어삼키겠다는 뜻인가?
은근히 렉시놈 측을 확인하지만, 마나가 움직일 기색이 없다. 사실, 공격 마법은 준비되어 있었고, 상대측을 향해 겨눠졌지만, 그것이 발사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언제 시작하는 거지?
(…하오만?)
또 내가 시선을 놓친 사이에, 쉘리 반데스가 무어라 말했다. 그의 말이 들려오자 피랄 연합체 측 참가자가 일제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소니아!)
쉘리 반데스가 똑바로 말하자 소니아 반데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내가 회수한, 지오 등의 습격자들이 가진 마법 물품과 그들이 방페라와 한 거래 일지였다.
(!!) 피랄 연합체 측 인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스마일이 유들유들한 기색으로 손짓하며 그들에게 무어라 말했다. 흥분했던 코로미트 왕이 허둥지둥하며 그의 말을 부정한다.
그리고 다시 긴 협상.
반대하고, 모르쇠하고, 어떤 것은 인정하고, 또 어떤 것은 방페라의 독단적인 결정이라며 연관관계를 부정하고…….
우리 측은 상대를 압박하다가 적당한 수순에서 멈추고, 어떨 때는 일말의 양보도 없이 끝을 보자는 듯이 막 나가고. 적절한 지점에서 양보한다.
바스락.
그렇게, 수십 분에 이르는 말다툼과 양보 끝에 겨우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양측 서기가 금박 된 화려한 종이를 한 장씩 들고 와 탁자에 올려놓았다.
아마 저게 평화 협정서인지 뭔지 하는 거겠지. 양측 인사가 일어나서 협정서에 서명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그 순간!
‘지금이다! 이건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때가 왔다고 여겼다. 고개를 숙이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기회가 없다.
역시 렉시놈이야! 협정서에 서명하는 순간을 노려서 기습하다니! 나도 못 할 양아치 짓거리를 한다니까! 내가 못하는 걸 태연하게 해 버려! 그 점에 전율해! 동경하게 돼!
나는 양손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어?’
내 옆, 뒤에 쫙 깔린 렉시놈은 망부석처럼 가만히 있었다. 어떠한, 아무런, 일말의 움직임도 없었다.
“어어?!”
나는 당황해서 육성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뭐야? 기습 안 해? 나 혼자 쌩 쇼한 거야? 아니지? 죽일 거지? 그렇지?
당황하는 내 앞으로, 협상을 끝내고 평화 협정서를 한 장씩 든 쉘리 반데스가 협정석을 벗어나 우리 측 병력을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가 여전히, 인자하지만 피비린내 나는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나는 그의 몸에서 풍기는 피 냄새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평화 협정서의 항목 중 하나에는 침략행위를 멈춘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와아아아!”
모두가 안심하고, 환호성을 지르는 순간. 하지만 나만은 속이 복잡했다.
나는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며 쉘리 반데스를 노려보듯이 쳐다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잠시, 악동 같은 웃음을 지으며 내게 대놓고 평화 협정서를 흔들었다.
‘대체 뭐지?’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쉘리 반데스가 무엇을 노리는지 단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지금 알 수 있는 사실은 더 이상의 전쟁은 없다는 것 하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