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277
277화
* * *
서쪽 지역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동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반데스 영지로 날아가는 시점. 큰 산을 지나던 나는 이상한 감각을 캐치했다.
승천자의 기감이 아주 무시무시한 것이 북쪽에서 다가온다고 경고를 날린다.
동서로 길게, 스마일 형태로 지어진 울창한 대수림. 상대는 간 크게도 그 대수림을 수직으로 통과하고 있던 것이다.
‘아무리 폐허를 통해 온다지만, 조금만 실수해도 몬스터가 우글우글 끌려올 텐데. 제정신인가.’
큰 산의 화산 분화 이후, 막대한 양의 화산재가 남풍을 타고 북쪽을 향해 흘렀다. 그 탓에 중금속과 유해 입자가 포함된 먼지가 큰 산에서부터 대수림을 넘어 중앙 대륙까지 유입되었다.
2년 쯤 지나면 풍부한 양분을 빨아먹고 더 큰 수림으로 복원되겠지만, 지금은 겨울과 화산재라는 이중고 탓에 큰 산을 시작으로 하는 북쪽 루트는 화산재에 황폐해진 땅이 되었다.
그곳은 몬스터도 먹을 게 없어서 서식하지 않는다. 그 길을 통해 누군가가 은밀히 하늘을 날아 게리소님 왕국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누구지?”
이거 신비한 일이군. 나 말고 다른 자가 하늘을 날아온다니. 인원은… 하나? 아니, 둘 이상, 오십 이하. 상대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정확한 분석이 힘들다.
오싹하군. 소드 마스터의 마나도 분석할 수 있는 내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힘들다’고 판단한 상대라니. 그것도 마법사. 내가 본 가장 뛰어난 마법사가 누가 있지?
내가 본 가장 뛰어난 마법사는 이종족 연합지역의 이디티 에이. 쉘리 반데스는 규격 외라서 포함하지 않는다.
이디티 에이 다음이 이스마일 반데스, 그 다음이 살저 하라한, 마냐툴. 이 순서다. 헌데 상대는 이디티 에이보다 훨씬 뛰어난 수준으로 마나를 다뤘다. 그렇지 않는 이상 내 분석이 통하지 않을 리가 없거든.
‘이건 거의 쉘리 반데스급…….’
일이 많다고 징징댈 때가 아니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은신을 썼다. 왜냐하면, 내가 상대를 감지한 것과 거의 동시에 상대 또한 나를 감지하여 내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착! 근처의 작은 야산에 내려서 돌덩어리 속으로 파고든다. 생명력, 마력, 기력 등… 력(力)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나라는 인간의 개성을 극한 그 이하까지 줄인다.
하지만 완전히 없애지 않는다. 공백 지대는 오히려 더 큰 위화감을 낳는다. 벌레, 물, 동물, 산천초목이 부조화스럽게 어울리는 조화에 나라는 조형물을 하나 더한다.
이것은 발견 당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은신술이 아니다. 나를 발견하는 것은 벌레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나무를 기어가는 개미, 나뭇잎에 고인 물방울, 나무뿌리에 자라난 버섯을 감지한 것처럼 사소한 것으로 나를 인식하고 넘기는 방식의 은신술이다.
6년 전, 뮤온 보트라에게 은신이 완벽히 통하지 않았을 때부터 고심을 거듭하여 창안한 새로운 은신술. 과연 이 은신술은 하늘을 날아 온 의문의 상대도 나를 특정하지 못하는지 허공의 한 지점에 떠서 곤란한 듯 가만히 서 있다.
소름 끼치게도, 허공에 뜬 지점은 정확히 내가 착지한 땅 위였다. 그곳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자기들끼리 무어라 대화하고 손짓 발짓한다.
눈과 귀조차 닫았기에 무슨 대화를 하는지도 모르겠고, 인원 파악도 하지 못한다. 상대방 정도의 실력자라면 시선도 감지할 수 있기에 장애인 수준으로 내 감각을 닫아야 해서 생긴 문제였다.
우웅~! 아 마법을 썼다. 탐지 계열의 마법이다. 이건 그 실력자의 것이 아니다. 실력자가 데리고 온 다른 마법사가 탐지 마법을 써서 인근 수백 미터 내의 생명체를 탐지한 것이다. 경지는 이제 막 5결에 들어선 수준.
‘마법사부터 죽여야 하나? 적이 아닐 수도 있는데 다짜고짜 적의를 내비치며 암습하는 게 과연 현명한 결정인가?’
머릿속이 복잡하다. 하지만 저 정도의 실력자가 인원 다수를 데리고 오는 것부터가 의심되지 않나. 저자가 뮤온 보트라처럼 빛의 수호자의 마스터급 마법사라면?
마스터급 마법사가 중요 도시에 테러를 저지를 목적으로 저만한 인원을 데리고 온 것이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수십만이 죽겠지.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그걸 방지…….
“쟈기인가!”
내가 각오를 다질 때, 초고수 마법사의 동행인이 그리 외쳤다. 쟈기? 나를 아는 건가? 아니면 빛의 수호자일 수도 있다. 그자들이 나를 위험인물로 지정해서 이런 은신을 보일 수도 있는 게 나라고…….
“쟈기라면 당장 나오너라! 숨지 않아도 된다! 쟈기가 아니면 포기하고 몸을 드러내라!”
“이놈아. 네 검술 스승의 목소리도 까먹은 것이냐.”
동시에, 낄낄대며 말하는 초고수 마법사의 웃음. 나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몸에서 힘을 쭉 뺐다.
아, 뭐야. 나는 허탈함에 몸을 스륵-! 일으켰다.
“허억?!”
“저, 정말 있었군!”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수십 명의 사람이 기겁하며 내게서 한 발짝 멀어지거나, 무기를 꺼내 경계했다. 놀라지 않은 이는 단둘. 내가 극도로 경계한 초고수 마법사와 쟈기라면 나오라고 외친 동행인뿐이었다.
아이 씨. 사람 민망하게.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초고수 마법사에게 걸어갔다.
“아, 뭡니까. 진짜. 사람 식겁했잖아요.”
“뭐가 식겁했다고 그러냐.”
“아니, 아니아니. 나도 모르는 엄청난 실력자가 갑자기 하늘을 날아 남쪽 대륙으로 오니껭. 저 오늘 죽을 각오까지 했잖습니까. 제발 사람 좀 놀라게 하지 마세요. 쉘리 반데스 부왕(父王).”
쉘리 반데스 부왕. 그렇다. 내가 극도로 경계한 초고수는 쉘리 반데스였다.
내가 참 멍청하기도 했고, 르암인을 너무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나도 마나를 분석할 수 없는 쉘리 반데스급 마법사. 그런 자가 당연히 쉘리 반데스 말고 또 다른 이가 있을 리가 없지.
“어허? 이놈 보소? 뮤온 들었나? 저 말투에서 자기가 죽을 각오로 덤비면 나를 곤란하게 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의도가 드러나지 않나? 이 나를?”
“쟈기, 오랜만이다. 본의 아니게 네게 오해를 산 것 같아 미안하군.”
나를 쟈기라고 외친 동행인, 뮤온. 뮤온 반데스. 그가 거의 7년 전에 헤어졌을 때와 비교해서 전혀 달라지지 않은 그 모습 그대로 내게 인사했다.
나도 뮤온 보트라에게 꾸벅 인사했다.
“아닙니다. 오랜만입니다. 뮤온 보트라. 그때 알려주신 검술은 잘 배우고 있습니다.”
어떠냐. 나도 도움을 준 이에겐 예의를 차릴 줄 아는 훌륭한 사회인이라고.
그런 나의 인사를 보고 사회인답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한 세기 반 넘게 산 그랜드 그랜드 할아버지, 쉘리 반데스였다.
“나한테도 뮤온에게 보이는 존경심의 반이라도 보여주면 안 되겠느냐?”
“예? 누구시죠? 당신?”
“모르는 척까지 해??”
“아뇨. 진심으로. 남쪽 대륙 최고 고수이신 주제에 화산 분화로 인류가 절멸한 위기에 놓였는데도 혼자서 있는 대로 폼은 다 잡더니만 훌쩍 사라져서 4개월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분은 저는 모릅니다만.”
“어… 나도 나름대로 바빴단 말이다! 금방 끝내고 오려고 했는데…….”
“했는데?”
“잠깐 지각했어.”
장난하나. 4개월 지각이라니. 유급이잖아 그건.
도짓코 캐릭터라도 용서할 수 없는 짓거리를 한 세기 반이 넘게 산 할아버지가 한다고?
내 짜게 식은 시선을 받자 쉘리 반데스가 찔끔했다. 그가 똑같은 센츄리 올드 맨, 뮤온 보트라에게 동의를 구했다.
“진짜네. 자넨 아직 어려서 모르는데, 나 정도 나이 먹은 사람은 시간 감각이 빨라. 잠깐 딴짓하면 계절이 휙휙 바뀐다고! 뮤, 뮤온. 자네도 그렇지 않나?”
“아니, 나는 당신과 같은 예외가 아닌 이상 분 단위로 일정이 잡혀 있다.”
뮤온 보트라도 정상은 아니다. 나이 먹은 사람들은 전부 다 저런가?
“지, 진짜. 진짜로. 나도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줄은 몰랐는데…….”
쉘리 반데스가 드물게 허둥지둥하며 변명했다. 대수림을 돌아다니며 이스마일이 탐지하지 못한 화산 분화 계획을 저지르는 연구원을 처치하고, 뮤온 보트라를 데리러 중앙 대륙으로 떠났다.
그랬는데 중앙 대륙에 난리가 나서 엇나간 과거의 친구들과 사랑과 우정, 눈물이 가득한 스토리를 써가며 싸우는 사이 시간이…….
아니, 잠깐! 그런 대박 이벤트를 나를 빼고 즐겼다고? 내가 3개월 동안 코털 나고, 가슴털 나고, 다리털 난 아저씨들의 손가락을 뽑는 동안 자기들끼리만?
“이 얘기는 듣기만 해도 화가 나니 그쯤 하죠.”
나는 이 대화에 끼지 못하는 다른 동행인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그보다 먼저 소개할 분들이 있는 것 같은데요?”
쉘리 반데스가 데리고 온 이들은 50명이 넘는다. 그는 이스마일이 초안을 잡고, 나와 시즈믹스가 개량한 초장거리 비행마법과 다른 방식의 비행마법을 창안하여 50명이 넘는 사람들을 데리고 대수림을 종단하는 기함할 짓거리를 저질렀다.
면면을 보니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실력자들이 득시글하다. 익스퍼트만도 일곱에, 5결 수준의 고위 마법사는 셋. 중~하위 마법사도 스물이 넘는다. 나머지는 스칼러 상급 이상의 기사급 실력자.
“그리고…….”
나는 익스퍼트 일곱 중 가장 찬란한 기세를 발하는 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푸른 머리칼을 자랑하는 남성과 장신의 미인 여성.
나는 저 둘을 안다. 그들은 나의 전생. 웨일의 소울 브라더. 뼈의 트록바의 의해 탄생한 인간. 실험체였다.
부드러운 인상의 남성은 에레스발다로 편입한 험클리.
그리고 또 한 명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미인.
바로 르데앙이었다.
“성자 두 분. 그것도 성검사(聖劍士) 르데앙 님이 함께하신다니. 보통 일이 아닌가보군요. 이곳이 아닌 좀 더… 중요한 자리를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 * *
초장거리 비행마법을 알려준 지 10분도 되지 않아서 쉘리 반데스는 능숙하게 마법을 사용했다. 그는 나를 포함한 50명이 넘는 짐덩이를 달고, 대류권 궤도에서 고아음속으로 나는 실력을 선보이며 반데스 영지로 향했다.
“이 마법은 정식 명칭이 뭔가?”
“초장거리 비행마법입니다.”
“허어. 초장거리라. 말 그대로군. 누가 창안했지?”
“이스마일이 초안을 잡았고, 저와 시즈믹스 노친네가 완성했죠.”
대화에 뮤온 보트라가 끼어들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네가? 이스마일 전하의 마법을 개량했다고?”
“예. 저보고 이 사람들 학파 마법 배우라고 추천하신 분이 뭘 그리 놀라신 겁니까?”
“아, 아니… 하지만 그때로부터 6년… 길게 잡아도 7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그 정도나 실력을 쌓았나?”
“이론만입니다. 이론만.”
“이론은 무슨.”
헹! 하고 쉘리 반데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가 내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머릿속에 비은다각형의 흔적이 느껴지는구나. 이론만 아는 놈이 그 흔적을 남길 리가 있나.”
그걸 또 어떻게 읽은 거야. 저 괴물은 진짜…….
“비은다각형은 또 뭐지?” 뮤온 보트라가 물었다.
나는 쉘리 반데스를 바라보았다. 네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 이걸 설명해도 될지 결정하라는 뜻이다. 쉘리 반데스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엄지를 척! 들었다. 나는 그의 바디 렝귀지를 정확하게 해석했다.
“마법 회로와 이론까지 다 알려줘도 된다고요? 역시 천국의 계단 대장로. 통이 크시군요.”
“아, 아니! 이놈아! 그냥 대략적인 설명만 하라고! 설명만!”
“…….”
뒤에서 얌전히 얹혀가던 마법사들이 은근히 실망한 눈치를 보인다. 나는 그 기색을 모르는 척하며 뒤를 가리켰다.
“뮤온 보트라 그… 설명에 앞서 이분들은…….”
“천국의 계단은 이자들도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천국의 계단 마법서는 수십 년 전부터 너희에게 주었지만, 사본은 재능이 있지만, 기회를 보지 못한 이들에게 조금씩 뿌렸지.”
수십 년이 아니라 6~7년 전인데? 시간 차이가 나는 건 알아서 입을 맞추라고 눈치를 준 건가? 또한, 천국의 계단만 입에 담았다는 것은 렉시놈은 모른다는 뜻이다.
뭐, 르데앙은 알겠지. 어쨌든, 나는 천국의 계단과 관련해서 비은다각형을 간략히 설명했다. 물론 아주 작은 힌트조차 주지 않기 위해 프랙탈 구조와 심상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에. 그래서. 신생 천국의 계단. 게리소님 왕국 마법 학파는 비은다각형과 같이 과거 천국의 계단이 완성하지 못한 초고위 마법을 정리하여 천국의 계단 5대 마법이라 칭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방금 설명한 비은다각형이라는 마법입니다.”
“…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소리를 하는군.”
뮤온 보트라가 또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가 이마에 손을 올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걸… 쟈기, 네가 익혔다고?”
“예. 그렇습니다만?”
“5대 마법 중 익힌 것은 그거 하나뿐인가?”
“아뇨. 오온의 눈하고 개변상수치환도 익혔습니다.”
“하… 7년 만에 천국의 계단 5대 마법 세 개를 익혔다니. 대체 너라는 놈은…….”
쉘리 반데스가 물었다.
“그냥 비은다각형이 아닌데? 원본보다 훨씬 흐름이 유순하다. 뭔 짓거리를 한 것이냐?”
은근히, 평온한 목소리로 묻지만 입에서 지독한 탐욕의 향기가 흘러나온다. 안 알려준다고 장난이라도 하면 내 목을 뽑아버릴 것 같은, 마법에 대한 광기가 철철 흘러넘치는 발언이었다.
나와 뮤온 보트라, 르데앙의 기색이 달라졌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기운을 흘리며 말했다.
“세 마법 다 너무 무거워서 말이죠. 경량화를 조금 했습니다. 안전장치도 마련했고요. 아, 개변상수치환은 아직 도면만 그렸습니다. 이번 일 끝나고 시간 나면 차분하게 알아볼 생각입니다.”
뮤온 보트라가 양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젠 그 5대 마법을 혼자 힘으로……?”
“…뭐 때문에 그러십니까?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알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의 폭풍에 휩쓸린 뮤온 보트라.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쉘리 반데스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군. 우리는 쟈기하고 오래 있어서 이놈이 뭘 하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데, 역시 원래 이런 반응이 정상이었지.”
“그렇습니까? 저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서 ‘이런’ 게 정상입니다만.”
뮤온이 단언했다.
“확실히 말하는데, 너는 비정상이다.”
“슬픈 소리를 하시는군요.”
“슬픈 소리라니. 네 검술 성취를 보면 내가 더 슬퍼지는군. 영역을 보아하니 이전보다 발전한 것 같은데… 예전이 익스퍼트 중급이었지. 설마?”
“예. 상급에 들어섰습니다.”
션도, 웨일도 어느 한 학파의 정식 마법을 기초부터 고급 이론까지 단계적으로 밟은 적이 없다. 해서, 계단을 밟아 올라가며 하나하나 정복해나가는 성취감이 의외로 쏠쏠해서 정신없이 마법을 탐구하느라 검술에 소홀히 한 지난 5년이었다.
때문에 검술 성취는 웨일보다 한참이나 늦었다. 나, 이제 스물넷인데 겨우 익스퍼트 상급이라니. 부끄러운 성취다.
“…그걸 부끄러워해? 돌아버리겠군.”
뮤온 보트라가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20대에 익스퍼트 상급. 내가 아는 사람과 똑같군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르데앙이었다. 나는 그녀를 보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겨우 참으며 존댓말을 했다.
“말을……… 놓으셔도 괜찬흐… 습니다. 성검사에게 존댓말을 들으니 제에가…… 다 부담스럽군요.”
“아뇨. 같은 검사로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분에게 예의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부디 저를 무인의 존경심도 모르는 못된 것으로 만들지 말아 주시길.”
그러며 싱긋 웃는 르데앙. 참 어른스러운 태도다.
현명한 가이노스에 이어 어른스러운 르데앙이라니.
우와. 소름 돋아.
남들의 눈엔 어떻게 비칠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웨일이 아는 르데앙은 전형적인 다혈질 미치광이 반골 내향형 인간이었다.
연구소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탈출 계획을 돕지 않겠다고 수신호를 보내자마자 악력으로 내 손가락을 꺾어버리지 않았나.
항구 도시 슈타펜드에 있을 땐 더했다.
아비간 펄니아의 마을과 다르게 찬란히 발달한 도시인 슈타펜드는 한평생을 연구소에만 갇혀 살았던 실험체의 눈에는 새로운 것이 넘쳐나는 놀이동산이었다.
르데앙과 나의 가출 사건에 내가 감옥에 갇혀 있던 초반 며칠 동안, 그녀는 항구 도시 관광을 마음껏 즐기며 매일같이 내게 방문해서 조잘조잘 잘도 떠들어댔다.
(고기 위에 빵을 얻는다니! 이건 혁명이야!)
빵 사이에 고기를 넣는 거다. 이 멍청아.
(고기하고 빵 말고도 그 사이에 소스라는 걸쭉하고 단 액체가 추가됐어! 말도 안 돼! 이건 혁명이라고 웨일!)
넌 참 혁명이란 단어를 좋아하는구나.
(고기에 빵, 소스 말고도 야채까지 들어갔어! 빵하고 야채를 같이 먹는다니! 웃기는 소린데 고기하고 소스가 더해지니 이렇게 맛있을 수가!)
먹는 것 말고 다른 이야기 하면 안 될까?
지루한 나는 ‘응, 그래. 그렇네’의 세 단어만 활용해서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세 활용 어구의 대답의 총합이 28번을 넘었을 무렵, 르데앙이 나한테 화를 내더니 감옥을 떠났다.
그날 밤. 나는 베노드란도의 방문을 받았고 기껏 회복된 팔뼈가 다시 부러졌다. 다음날 나는 성의를 보였다. 절대로 베노드란도가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여하튼, 르데앙이 ~했어. 이러면 ‘했어요?’ 라고 답하고, ~봤어. 이러면 ‘봤어요? 라고 답했지.
열 번쯤 반복했을까. 르데앙은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부르르 떨다가 빽 소리를 지르곤 감옥을 떠났다. 나는 그날 밤 베노브란도와 추가로 길의 방문도 받았고, 이번엔 다리뼈가 부러졌다.
다 르데앙 때문이다. 그런 미친년이 이제 와서 나이 좀 먹었다고 어른스러운 척하다니. 토가 다 쏠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