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281
281화
* * *
일주일 후. 마탄항구에 에레스발다 선박이 도착했다. 쌍두선. 에레스발다가 제공해준 선박의 이름이다.
쌍두선은 전형적인 화물선(貨物船)과 비슷했다. 아니, 그냥 화물선 그 자체였다. 당장 배에 실린 짐만 해도 숙련된 짐꾼 수십 명이 온종일 날랐는데도 다 빼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화물?? 이거 비밀 맞습니까?”
내 질문에 험클리가 민망하다는 듯이 코를 긁적였다.
“루루가 부탁하는 바람에 말이죠…….”
“루루?”
“아, 루루루루루. 그러니까, 음… 남쪽 대륙에서는 ‘성자 루’가 더 유명하겠군요.”
“아하. 성자 루 님!”
그 시건방지고 못된 꼬맹이. 어른인 척하지만, 조금만 도발하면 화가 폭발해서 덤비는 애새끼. 그리고 웨일의 형제인 실험체, 루루루루루.
그녀의 행적이 험클리의 입에서 나왔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루루는 현재 상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상인이요? 성자님이?”
“예.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의 경제를 지배한다나 뭐라나요? 저는 경제 같은 복잡한 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녀의 지원 덕분에 최신 선박을 빌릴 수 있었죠. 물론 공짜는 아니고, 지금 이렇게…….”
험클리가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짐을 나르는 일꾼과 하역 목록을 검사하는 사무원을 가리켰다.
“아아… 루 성자님은 이번 일을 토대로 게리소님, 알테어와 상로를 열려는 목적이시군요.”
“바로 보셨습니다.”
짐의 절반이 빠지자 마탄 다웨이디안 백작이 뒤를 보며 크게 손짓했다. 그러자 저 멀리 창고에 준비돼있던 수많은 짐이 짐승과 일꾼들에 의해 쌍두선에 실렸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질린 듯이 말했다.
“게리소님도 알테어와의 무역에 한 다리 끼려고 하고 있네요.”
누구는 중앙 대륙을 넘어 남쪽 대륙까지 전화의 불길이 미치는 것을 염려해 알테어와 협상을 하러 떠나는데, 누구는 그 틈을 타서 돈이나 만지려고 하고 있다니.
기가 찰 따름이다. 하지만 화를 내기도 뭐한 게 다웨이디안 백작이 선장에게 건네는 편지봉투에 이스마일의 직인(職印)이 찍혀있다. 이스마일도 꼽사리 꼈다 이거지.
꾸벅. 하고, 선장이 무릎을 꿇곤 편지봉투를 받는다. 일어선 선장이 보석함에서 푸른 봉인이 찍힌 편지봉투를 꺼냈다. 이번엔 다웨이디안 백작이 무릎을 꿇고 그것을 받을 차례였다.
하는 꼬라지를 보니 이스마일하고 에레스발다의 왕끼리 친서도 교환하나 보군. 시간을 따져 보면 그럴 여유가 없을 텐데, 대체 언제 저런 걸 다 준비했나 의문이 든다.
치를 떨 정도로 일거다득을 노리는 노괴물들이었다. 내가 몸을 부르르 떨자 험클리도 마주 몸을 떨었다. 우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쌍두사로 걸음을 옮겼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다웨이디안의 걱정 어린 충고와 함께 사람들이 탑승하기 시작한다. 이번에 알테어로 떠나는 인원은 약 열 명 남짓. 나, 르데앙, 험클리, 뮤온 보트라. 그리고 뮤온 보트라가 데리고 온 다섯 명의 익스퍼트와 5결 수준의 고위 마법사 셋.
마지막으로 총관(總管)이라는 직책을 받은 게리소님의 늙은 행정원 한 명이었다. 이름은 ‘무’라는 인물이었는데, 그 또한 렉시놈 소속의 신체개조자였다.
때문에 무는 족히 60은 넘어 보이는 외견과 다르게 웬만한 성인 남성도 한손으로 때려눕힐 수 있는 정정한 신체능력을 자랑했다. 무는 내가 모르는 국가 간의 복잡한 이야기를 대신해줄 것이다.
반데스 가문은 한 명도 참가하지 않았다. 나는 이게 심히 섭섭했는데, 하나하나 이유를 따지고 보니 말이 되었다.
우선, 쉘리 반데스는 뮤온 보트라처럼 그를 알아볼 사람이 있을 수 있어서 취소. 이스마일 반데스는 현왕이 왕국 수립 1년도 지나지 않아 먼 길을 떠나는 게 말이 안 돼서 취소.
그리고 소니아 반데스는 이스마일과 동일한 이유 때문에 안 된다. 특히 그녀는 지난 2주간 르데앙을 졸졸 따라다닌 탓에 업무에 구멍이 많이 뚫려서, 몇 개월이 걸릴지 모르는 알테어로 함부로 떠날 수가 없었다.
그 외 다른 천국의 계단 소속 마법사는 괜히 알테어에 얼쩡거렸다가 흑마법사와의 연결고리가 코털만큼이라도 발견되면 큰일이 나니 전부 취소.
즉, 게리소님의 고위 공직자는 필연적으로 렉시놈 소속이다 보니 전혀 관련이 없는 나와, 마법은 조금도 배우지 않은 무 총관 말고는 적임자가 없었다.
‘괜히 애먼 나만 고생하지.’
나는 투덜거리며 쌍두선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탕탕! 하고 철을 밟는 소리와 함께 쌍두선에 오른다. 승천자의 감각을 높이 세우지 않았는데도, 쌍두선을 이루는 마법 회로가 낱낱이 내 감각에 잡혔다. 나는 마법 회로를 느끼자마자 그 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와우.’
게리소님에게 섭섭한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쌍두선에 대한 감탄이 내 가슴을 채웠다.
쌍두선은 배의 형상을 한 예술작품이었다. 수만이 넘는 마법 회로가 선두에서 선미까지. 배 밑바닥에서 함교까지 빽빽하게 그려져 있었다.
엄청나군. 단지 쌍두사의 마법 회로를 살피기만 하는데도 마법에 대한 인식이 넓어지는 기분이었다.
왜 에레스발다가 뮤온 보트라에게 선박을 빌려주지 않으려 했는지 이유를 알겠다. 이만한 최신 기술이 집약되어있는 물건이라면 험클리가 연대보증인이 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뭐야 이건? 마찰력 감소?’
물이라는 유체(流體)를 뚫고 나아가는 것이 배. 접촉면 사이에 발생하는 마찰력이 연료 소모의 주된 원인이다. 과거 지구에선 연료 소비의 효율을 단 1%라도 상승시키기 위해 수천 억을 우습게 썼지.
하지만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기초적인 마찰력 감소 마법으로 지구의 학자를 엿 먹일 수 있다. 선체에 마찰력 감소 마법을 걸어서 이동 속도 증가는 물론이고 연비 상승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이 쌍두선이었다.
‘푸셔도 과거 웨일이 봤을 때보다 한 단계 발전했군.’
프로펠라와 엔진을 대신하는 동력기관 푸셔. 에레스발다의 특산품이라면 특산품이라고 할 수 있는 초고급 마법 도구. 안 그래도 소리가 적은 게 푸셔의 장점이었는데 그 적은 소리가 더더욱 줄어들었다.
해양 몬스터에게 들킬 일말의 가능성조차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제작품이었다.
마법은 마찰력과 엔진 효율만 해결해주지 않는다.
바닷물을 담는 평형수를 위한 공간도 매우 좁다. 굳이 바닷물을 담고, 버리는 과정으로 부력을 유지하지 않아도 마법으로 배를 안정적으로 잠기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또 연료 절약이 이루어진다.
“까끌까끌한데.”
나는 배를 구경하다가 현측(舷側)면을 보곤 그런 감상을 내뱉었다. 배의 표면은 반질반질하지 않고, 우둘투둘한 요철이 곳곳에 붙어있다.
저러면 저항이 늘어나지 않나? 궁금한 건 못 참지. 당장 승천자의 감각을 뻗어 요철과 관련된 마법 회로를 분석한다.
요철은 측면으로 파도가 칠 때, 파장을 흡수해서 반대쪽 면으로 흘리게 해주는 기능을 해준다. 이럴 경우 롤링이 극단적으로 줄어들고, 배의 안정성과 균형에도 도움을 준다.
하나같이 외부로 유출되면 죽여서라도 입을 막아야 하는 초고급 기밀. 에레스발다가 언제 이렇게까지 기술을 발전시켰지? 외판을 보니 산화도 방지해서 언제 진수되었는지 알기 힘들군.
지익-! 배에 올라 일부러 발을 질질 끈다. 은근히 초능력 파동을 보내 갑판의 구조를 분석한다.
‘나뭇결이 상한 걸로 보아서 진수된 지 1년을 겨우 넘었어.’
1년이면 최신 기술이 집약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자인 험클리가 연대보증인이라고 자학 개그를 할 만했다. 확실히 이만한 배는 험클리 정도의 인물이 아닌 이상 함부로 빌려줄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달리 말하면 이만한 물건을 빌려주었다는 것부터가 에레스발다가, 이종족 연합지역이 알테어와의 협상을 중요시한다는 증거겠지.
‘덕분에 나만 계 탔군.’
항해 동안 할 일도 없는데 쌍두선의 구조나 살펴야지.
* * *
쌍두선(雙頭船). 두 개의 머리를 지닌 선박. 이름처럼 선미가 갈라져 있는 게 아니라 밤낮에 따라 배 밑의 색이 바뀌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해가 뜨는 한낮에는 배 밑이 밝은색을 띤다. 반면에 해가 가려지거나, 한밤중에 되면 배 밑도 시커멓게 물든다.
일반적으로 물고기의 배가 밝고, 등이 어두운 것처럼. 해양 포식자의 눈을 피하고자 은신 마법진 말고도 빛을 이용하는 수를 쓴 것이다.
말로는 효과가 있다는데 나 같은 비전문가가 뭘 아나.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게 마음에 편하지. 어쨌든 사소한 것까지 꼼꼼히 신경을 쓴 에레스발다 최신 선박답게 쌍두선의 항해는 매우 순조로웠다.
남쪽 대륙. 적도 밑, 남반구 중위도에서부터 북반구 고위도 턱 끝까지 가는 긴 해로(海路). 지구보다 큰 행성이니만큼 가야 할 길도 1만 킬로미터를 훌쩍 넘는다.
쌍두선이 아니었으면 몇 개월이 걸렸을지도 모르지. 이 기막힌 녀석은 15일 안에 1만 킬로미터가 넘는 해로를 주파하는 기염을 선보였다.
풍향이나 해류와 상관없이 안정적으로 20노트 이상의 속력을 낼 수 있는 것이 쌍두선이다. 사실 그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지만, 이만한 화물선이 그 이상 속력을 내면 안정성에 여러 문제가 생긴다기에 얌전히 있었다.
시속 20노트. 그 속도로 달렸는데도 15일이나 걸린 항해.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은 딱히 특기할 만한 게 없다.
여기는 지구가 아니거든. 괜히 관광한다고 갑판에서 알짱거리다가 해양 몬스터에게 걸리면 찍 소리도 못 내고 죽는다. 오래 살려면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항해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현명했다.
특히나 중앙 대륙의 배에 걸리지 않기 위해 멀리 돌아가는 쌍두선은 더하지. 다들 신경이 날카롭게 섰고, 선원들은 조금만 실수하면 날 선 욕설을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르데앙이나 험클리와 같은 성자가 없었더라면 구타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항해한 지 15일째 되는 날 정오. 선장실에서 오매불망 수정구를 만지작거리던 마법사가 얼굴을 활짝 폈다.
“왔습니다!”
알테어와 통신이 닿았다는 뜻이다. 이제 몇 시간만 더 항해하면 알테어에 도착한다. 다들 15일 동안 머무른 방을 정리하고, 하나둘 짐을 챙겨서 하선을 준비했다.
‘심심해 죽는 줄 알았네.’
뮤온 보트라는 원체 말이 없고, 그가 데려온 다섯 명의 익스퍼트도 딱히 친해질 만한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검사라면 대련이라도 하면서 친해질 수 있지만, 해양 몬스터의 주의를 끌 수 있으니 그마저도 불가.
르데앙도 식사나 선원들에게 성력을 전해줄 때 말고는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승천자의 감각으로 살펴보니 검술이나 마나 운용술을 수련하고,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었다.
‘뱃멀미로 죽어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괜찮은가 보네.’
르데앙의 변모에 왠지 모를 감정을 느끼는 내게, 험클리가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말을 걸었다.
“드디어 끝이 왔군요.”
“아뇨. 이제 시작이죠.”
“하하! 그 말이 맞네요.”
험클리하고 친해진 것 말고는 아무런 성과도 없는, 심심 그 자체였던 항해다. 험클리와 잡담을 떨며 갑판에 오와 열을 맞춰 선다.
뮤온 보트라가 앞으로 나오더니 우리에게 간략하게 브리핑을 했다.
“다들 나눠준 책자는 읽어봤겠지? 항구 도시 이오브린이 이번에 도착할 영지다.”
나는 뮤온 보트라가 전해준 책자를 뒤적거리며 물었다.
“정보가 너무 옛날 것인데요?”
뮤온 보트라가 전해준 정보는 수십 년도 더 지난 과거의 것이었다. 그 사이에 이오브린이 얼마나 바뀌었고, 영주가 누가 되었는지는 오리무중이었다.
“이것도 겨우겨우 얻은 정보다. 알테어는 과거와는 너무나도 많이 달라졌다. 예를 들면…….”
곤란한 얼굴로 현 알테어의 대외정책을 설명하는 뮤온 보트라의 말을 요약해보면.
알테어는 수십 년 전부터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국경은 단단히 닫혔고, 국가를 왕래하는 상인이나 타국의 귀족도 국경 인근의 영지만 밟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오브린은 알테어 왕국의 안쪽 깊숙이 있는 영지. 거기까지 들어온 이들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렇게 타국을 경계하니 새로운 정보를 모으기도 쉽지 않아서 과거의 정보를 토대로 얼마나 변했는지 예측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험클리가 손을 들어 물었다.
“그렇다면 저희가 왔다는 사실도…….”
“쉘리 반데스를 통해 몇 개월 전에 나, 게리소님, 에레스발다. 이 세 가지 키워드만 겨우 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까운 시일 내에 배를 통해 알테어로 오겠다는 정보를 보내는 걸로 통신을 마무리했다. 알테어의 반응은 없었다고 한다. 뮤온 보트라는 최소한 반대의 통신이 오지 않은 걸 위안 삼아 사람들을 꾸렸다고.
“아아…….”
그의 말을 듣자 여기저기서 탄식의 말이 흘러나왔다. 알테어와의 협상이 쉽게 진행되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지만, 시작부터 꽉 막혀있을 줄은 몰랐다는 태도다.
영리한 사람이다. 뮤온 보트라는 이 정보를 드러내면 협상이 시작하기도 전에 좌초될 것을 알았기에 지금까지 비밀로 했다. 표정도 일말의 미동이 없는 게, 저 얼굴을 보면 항의하는 내가 바보가 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르데앙이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고정하며, 서서히 수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이오브린을 응시했다.
“적대시하는 반응은 없군요. 최소한 문전박대를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성자 둘에, 특히나 과거에 도움을 주었던 뮤온 보트라가 대화라도 해보자고 왔는데 그걸 문앞에서 내쫒으면 사람 새끼가 아니다.
르데앙의 말에 사람들이 일말의 희망을 얻었다. 그들이 뮤온 보트라가, 정확히는 빛의 수호자가 조사한 과거의 정보를 읽으며 이오브린의 정보를 머릿속에 새겼다.
나는 이까짓 것 필요 없었다. 내게는 빛의 수호자도 미처 알지 못한, 이오브린의 비밀 정보가 들어있었다.
‘이오브린. 이오브린이 복수회의 양의 힘이었지.’
70년도 더 전. 알테어가 와르르 무너졌을 때. 알테어의 실력자는 복수회라는 조직을 설립했다. 복수회는 ‘복수’라는 명칭에 걸맞게 알테어를 지옥으로 만든 흑마법사를 처단하기 위해 일어선 조직이었다.
그러한 복수회에는 두 가지 힘이 존재한다.
하나는, 왕실에 충성하는 특수기사단 등이 주축을 이루는 음의 힘. 그들은 흑마법사의 조사와 처치, 혹시 모를 타국 세력의 간섭을 막는 역할을 한다.
또 하나는, 초창기 몬스터 대란에서 살아남은 알테어의 구 귀족들. 구 귀족들은 흑마법사 처치 지원, 정보 수집 등을 도와주는, 복수회의 양의 힘을 상징했다.
또한 구 귀족들은 생존자를 모아 안전지대를 설립했다. 안전지대에서 도망친 시민을 보호하고, 몬스터의 남침을 막았으며, 안전지대 확장을 도모했다.
이번에 도착한 이오브린은 안전지대의 동쪽 끝에 위치한 곳이자 복수회와 깊은 연관이 있는 영지다.
이오브린의 성주는 전 특수기사단이었던 지오만 발탄이라는 자.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의 손자나 증손자가 이오브린을 이어받았겠지.
‘그랬겠지.’
나름 발달했지만, 슈타펜드와 비교하면 한적하다고 할 수 있는 항구도시. 정이 넘치는 시민들과 생존을 장담하지 못하는 시절에도 인류애를 잊지 않던 귀족들.
연해에 가까워질수록 배가 눈에 띈다. 나는 그 배를 바라보며 이오브린이 이 먼바다까지 배를 띄울 수 있을 정도로 발달했구나… 하고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 자, 잠깐.”
하지만 그런 감상은 내게만 있던 건지, 특사로 따라온 고위 마법사가 당황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사방을 둘러본다. 고위 마법사만이 아니다.
이번에 함께한 익스퍼트와 선원, 심지어는 험클리와 르데앙마저 얼굴에 미미한 파문을 드러냈다.
왜냐하면… 보이는 배가 한두 척이 아니다. 수십 척이 넘는 배가 이오브린을 넘어, 연해에 수도없이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배는 대부분 화물선. 어선도 드문드문 포함되어 있다. 그들이 접근하는 쌍두선을 보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반짝!
저 멀리, 등대에서 빛으로 신호를 주자 광신호를 읽은 배들이 썰물처럼 우수수! 빠져나갔다. 항구로 복귀하는 수십 척의 배. 그 배들 사이로, 몇 척의 군함(軍艦)이 삐져나와 우리에게 접근했다.
군함에 달린 마포는 우리를 조준하지 않았지만, 저만한 숫자의 군함이 대열을 이루고 접근하는 것 자체가 일행에게 부담으로 다가왔는지 일부가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뿌우우-!
하지만 다행히 군함은 쌍두선를 지나쳐서, 저 뒤까지 간 후에 유턴하여 우리 뒤를 따라왔다. 한 척의 군함은 쌍두선을 앞서나가며 이쪽으로 따라오라는 듯이 길을 이끈다.
앞에는 수십 척의 선박. 뒤에는 몇 척의 군함. 이건 꼭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듯이 우리를 포위한 것만 같았다.
그렇게 군함의 인도 아닌 인도를 따라 이오브린으로 접근하기를 몇 분.
쏴아악! 수십 척의 배가 물러나고 항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감회 깊은 얼굴로 이오브린의 항구를 내려다보다가…… 응?
“뭐지?”
뭔가 이상한데. 이게 이오브린이라고?
내가 아는 이오브린은 이렇지 않았다.
먼저 해변. 작살이나 그물, 쪼개지고 삭은 나뭇조각 따위가 굴러다니던 해변은 인위적인 구조물로 빽빽하게 덮여서, 모래 한 톨도 구경할 수 없게 변했다.
해변도 저렇게 길지 않았다. 몇 개의 곶을 부수고, 해변을 매립, 통합하여 깔끔한 일자형 해안선을 만들었나 보군. 시간 간격이 70년이나 되니 그럴 수가 있다.
더욱 놀란 건 부두다. 부두가 그 길다란 해변을 가득 채웠다. 부두에는 가지각색의 배가 정박되어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모르는 순서에 따라 십여 척이 넘는 출입하고 있었다.
“와아!”
“이게… 이오브린!”
과거에는 하나의 해변도 채우지 못했던 이오브린이 이만큼이나 커지다니. 이게 말이 되나? 나는 탄성을 내지르는 사람들을 밀치고 선장실로 향했다.
선장실, 함교 꼭대기로 올라가서 이오브린을 넓게 내려다본다.
아이고. 이오브린을 넓게 본 나는 기함을 내질렀다.
항구만 넓어진 게 아니다. 사람. 콩나물시루 같은 인파의 해일이 이오브린을 가득 채웠다. 마치 현대의 아파트처럼 최소 3층 이상의 건물이 이오브린을 덮었고,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항구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니까. 과거의 모습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이오브린은 이런 곳이 아니었다. 보면 번영하고 있는 개발도상국의 항구마을이라고 착각할 만한 이곳은 이오브린이 아니었다.
“진짜로 이오브린에 온 것 맞습니까?”
또 어디 이상한 데로 잘 못 온 거 아니야? 나는 이 현실을 밑을 수가 없어서 뮤온 보트라에게 뾰족한 어투로 물었다.
“어, 여… 어……. 여, 여기가…….”
뮤온 보트라에게도 이오브린의 진화(進化)는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는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에게 묻는 것은 포기하자. 나는 시선을 멀리 돌려, 이오브린의 영주성을 확인했다.
이오브린의 영주성은 해발 수백 미터 쯤 되는 뾰족한 산을 빙 둘러서 지어졌다. 그곳에서 한쪽으로는 바다를, 한쪽으로는 땅을 감시했지. 그 성을 확인하면 여기가 이오브린이란 걸…….
“서, 성?”
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과거 영주성‘이었던’ 뾰족한 산을 째려보았다. 불가사의한 구조물이 산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지름 수백 미터, 높이 백 미터가 넘는 백색의 원통형 구조물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이오브린은 사라졌고, 내가 추억하는 영주성은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선 건, 수많은 사람들과 건물.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원통형 백색 구조물이었다.
나는 허탈한 숨을 내쉬며 욕설을 내뱉었다.
“뭐야?! 시발 저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