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364
364화
* * *
성 꼭대기에서 내려와, 연무장으로 천공기를 이끈다.
부우웅!
헬기, 비행기, 천공기. 이름이야 뭐든 간에. 이종족 연합지역이 자랑하는 최신형 비행기 다섯 대가 내 인도에 따라 왕성 연무장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겨우 다섯 대가 착륙하는데 왕성 연무장이 꽉 찼다. 천공기의 장축은 50미터를 훌쩍 넘었기에 연무장 벽을 무너뜨리고 땅을 정비해서 평평하게 다지기까지 한 끝에, 다섯 대의 천공기가 연무장에 착륙할 수 있었다.
쿠웅!
쇳덩이가 착지하는데 건물이 쓰러지는 굉음이 울린다. 천공기는 배가 지면과 단 1미터만 거리를 두었는데도, 웬만한 3층 건물보다 높이가 높았다. 저것의 총 부피를 고려하면 한 대에 수백, 일개 대대를 이동시킬 수 있으리라.
“어, 어으으…….”
그 우람한 위용에 빛의 수호자의 암살자로 수십 년을 산 펙조차 입을 더듬거리며 할 말을 잃었다.
독안(獨眼)의 펙. 구지(九指)는 아니다. 사실 독안도 아니었다.
내가 뽑은 왼눈은 구오를 점령한 빛의 수호자 하부 조직원의 눈알로 대체해줬지만, 시신경 연결까지 해주는 건 눈치가 보여서 모세혈관 연결만 해주고 끝을 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왼쪽 시야가 어둡다. 그런 의미에서 독안이다.
왼손 검지도 위와 똑같이 적당한 녀석의 것으로 갈아 끼워줬다. 이건 서비스로 신경 연결도 해줬다. 그 덕분에 검사로서의 생명이 끝장나지 않았다.
열 손가락을 되찾은 펙은 내가 7일 동안 조마조마하게 구오에서 시간을 보낸 것과 달리 인생 최초로 획득한 자유를 누렸다. 쉽게 말해서, 일은 하나도 안 하고 순 놀러만 다녔다.
그런 펙 옆에는 에이스헨의 검귀, 익스퍼트 상급의 여검사인 릴리가 있다. 서로 빛의 수호자에게 인생이 휘둘렸다는 공감대 때문인지 펙은 검귀들과 친하게 지내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건 그렇고 유일한 홍일점인 릴리하고 붙어 다닌다고? 저 개잡년 새끼들 설마 사귀는 건 아니지?
툭!
“정신 차려.”
나는 펙의 옆구리를 찔렀다. 사심을 담아, 조금 강하게.
“꺼윽?!”
펙이 옆구리를 붙잡으며 푹 쓰러진다. 착지하는 천공기에 쏠린 시선이 팔꿈치를 굽힌 나와 쓰러진 펙에게 향한다. 나는 민망해서 초능력으로 펙을 일으켜 세웠다.
내가 그렇게 세게 찌른 것도 아니잖아. 암살자란 놈이 엄살도 심하다. 그리고 사심을 약간 담았지만, 이놈이 나한테 한 대 맞을 정도로 얼을 탄 것도 사실이라고.
나는 일어선 펙에게 중얼거렸다.
“허리 펴고, 입 닫아. 멍청한 표정 짓지 마.”
“어… 무슨 말이오?”
“펙. 나중이야 어떻든, 현시점에서 구오의 대표는 너다. 대표면 대표답게 행동해. 놀라도 놀라지 말고, 화나도 화내지 마라. 얼굴에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지 마. 늘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대해.”
엄밀히 말하면 뮤온 보트라와 나는 외부인이다. 현재 구오의 왕… 까진 아니고 대장이라 부를 수 있는 이는 펙이었다.
구오의 얼굴인 그가 이종족 연합지역과의 첫 만남에서 천공기에 겁을 집어먹어 얼을 탄다? 차라리 이놈을 죽이고 담 큰놈을 새로 대장으로 임명하는 게 더 낫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 차리라고 옆구리를 찔러준 것이다. 과연 펙도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얼른 표정을 고쳤다.
슈욱-!
대화가 이루어지는 와중 천공기의 문이 열렸다. 뒷문이 위로 들리며 보관하던 수백 명의 사람들을 쏟아낸다.
천공기 한 대당 무장병력 300명 이상. 하나같이 스칼러 중급에 들어선 고수. 이종족이라는 피지컬 적 이점을 고려하면, 저들 한 명이 르암인 스칼러 상급 둘~셋의 전투력을 지녔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이들 1,500명이 밀림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여러 보조마법이 걸린 가죽 갑옷을 입은 채로 천공기에서 내려 연무장에 도열했다. 익스퍼트는 총 여섯 명이 있다.
마법사는 한 대당 다섯 명이 탔다. 운전석에서 내린 마법사들이 병력 사이로 들어간다.
마지막으로, 가장 뒤의 천공기에서 고리타분한 학사로 보이는 이들 스무 명 정도가 병력의 호위를 받으며 연무장으로 발을 내디뎠다. 학자들이 허리를 두들기며, 연무장을 종종 걸어서 병력 사이로 숨는다.
“쿨럭! 흠! 어후! 죽겠군!”
“아이고! 허리야!”
째릿~!
학자들의 우는 소리에 병력이 눈을 흘긴다. 초장에 기선제압하려고 했는데 저들의 발언에 김이 빠져버렸으니 눈 정도야 흘릴 수 있겠지.
하지만 이내 자세를 바로 한다. 중앙의 천공기에서 이들을 지휘하는 총 책임자가 내렸기 때문이다.
“어휴! 밀림이라 했더니, 아주 후덥지근하네!”
단출한 민소매와 반바지 차림. 금속과도 같은 은색 질감의 피부를 자랑하는 기골 장신의 사내. 천공기에서 나온 그가 연무장에 모인 나와 뮤온 보트라, 펙 등을 보며 씩 웃고는 거침없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쿵쿵쿵! 하고 우람하게 울리는 발소리. 누가 보면 인간이 아니라 코뿔소가 달려오는 것 같다.
성큼성큼 걸어온 사내가 내 앞에 바로 섰다. 르암인 평균 신장보다 손가락 하나만큼 커다란 나조차 그를 올려다봐야 한다. 그와 내가 서로를 마주보며 경지를 가늠했다.
비인간적인 근육량과 외부에 넘실거리는 영역을 보아하니 익스퍼트 중급. 무투술, 그것도 박투술 계열을 주로 쓰고 영역이 흔들리는 정도를 보아 중급에 들어선 지는 막 1~2년 사이.
상대의 경지를 정확하게 파악한 나와 달리, 은색 피부의 거인은 내 수준을 짐작하지 못하는 듯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당연하지. 널 가르친 게 누구인데 감히 내 경지를 엿보려고 해? 나는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옛날 인연을 만나 반갑기도 하고 상대의 행동이 가소롭고, 한편으로는 귀여워서 미소가 나왔다.
결국, 짧은 신경전은 나의 승리. 상대가 졌다는 듯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광석인(鑛石人) 포테리오. 포테리오 소장이라고 하오. 아, 소장은 르암인 식 군 체계로… 대충 천인장(千人將)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할 것이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악수를 청한다.
그래. 포테리오 이 새끼, 나한테 그렇게 처맞던 놈이 소장까지 갔어? 아주 출세했구나! 나도 마주 웃으며 그의 악수를 받아주었다.
“남쪽 대륙 통일왕국 게리소님의 쟈기 자작입니다.”
휙휙. 가볍게 흔들고.
스륵~.
마주 잡은 손을 풀고 악수 끝.
“음?”
나는 너무나도 허무하게 끝난 악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포테리오의 옛날 성격이나 광석인 특성상 이쯤에서 손아귀 힘 대결이 나와줘야 할 타이밍 아닌가?
어리둥절해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포테리오가 익살맞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종족 연합지역을 대표해서 왔는데 유치한 신경전이나 벌일 여유가 있겠소?”
포테리오 이 녀석! 어른이 됐구나!
하긴 웨일이 죽은 지 4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애처럼 시비 걸고 다니면 그놈이 등신이다. 나는 포테리오의 말을 듣고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보다 고수에게 덤볐다가 개쪽 당하고 싶지도 않고. 손만 잡아도 알겠군. 신성 쟈기. 과연, 말대로 명불허전이었소.”
“제 이명이 이종족 연합지역에까지 알려졌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 르데앙 성자님이 얘기해주셨소. 알테어에서 거하게 저질렀다면서?”
“음… 거하게의 사전적 의미에 ‘무인 간의 대련’도 포함되어 있으면 그 표현도 딱히 틀린 건 아닙니다.”
“하하하!”
포테리오가 목청껏 웃으며 나를 지나쳤다. 그가 내 옆의 뮤온 보트라에게 다가섰다.
뮤온 보트라의 앞에 선 포테리오가 극도의 존경의 뜻을 담아, 그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였다.
“광석인의 말석 포테리오가 천혜(天惠)의 장벽, 천장(天障) 뮤온 보트라 님을 뵙습니다.”
“…….”
“…….”
이런. 갑자기 무릎을 꿇는다고? 난데없는 포테리오의 돌발 행동에 연무장에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눈알만 굴려서 뮤온 보트라의 눈치를 살폈다.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면 뮤온 보트라가 툭! 말했다.
“포테리오 소장. 이종족 연합지역을 대표하여 온 이가 함부로 무릎을 꿇으면 아니 되오. 그것도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이종족 연합지역은 은혜도, 원한도 잊지 않습니다. 다시 소개드립니다. 본인은 300년 전, 공께서 구해주신 포르니아의 손자 포테리오라고 하옵니다. 그때의 은(恩)을 담아 이렇게 인사드립니다.”
“아! 포르니아. 기억나는 아이였지. 잘 지내고 있소?”
“20년 전 편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아아… 그렇군. 그녀도 그렇게 갔군.”
“예. 당신께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에게 입은 은혜를 입에 담으셨습니다. 암툴 산 광석인 부족을, 그분을 대표해 늦게나마 이렇게 감사인사를 드리는 거니 언짢아하지 말아 주시길.”
야, 나 대할 때하고 너무 다른 거 아니냐? 차별도 이런 차별이 따로 없다. 너 웨일한테 무술하고 마나 운용술을 배워놓고선 마지막까지 무릎은커녕 허리 숙여서 인사한 적도 없잖아.
맨날 나 없을 땐 미친 스승, 시발 스승이라고 욕하고 다닌 놈이 갑자기 이런 짓을 하니까 내가 다 화가 난다.
흥! 하고 내가 콧잔등을 찌푸러뜨리자 뮤온 보트라가 포테리오를 일으켜 세웠다.
“알겠으니 일어서시오. 아무리 은혜가 있다 해도 익스퍼트 중급의 달인이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소.”
“예.”
포테리오가 즉시 일어섰다. 그러고는 소개 인사를 하듯이 뒤에 도열한 병력들에게 손짓하며 허리를 슬쩍 수그렸다.
“소장 포테리오, 혼성 기습 대대 1,505명. 마법사 스물다섯. 학자 스물. 게리소님의 연락을 받고 구오의 지원을 위해 당도하였습니다.”
“마음이 든든하구려.”
“본인은 구오를 지원하러 온 일개 군인에 불과하니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음. 알겠다. 포테리오 소장.”
와, 말 편하게 하랬다고 냉큼 하대하는 것 봐.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속 및 독립 가능한 농업적 지식의 제공. 포테리오 소장은 밀림에 살았던 소규모 이종족 부족, 쟈기 자작이 전한 메시지가 진실인지 확인하는 거겠지?”
“일차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바로 일을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왔지만, 미리 자료를 정리해 두었고, 물적 증거도 확보했다. 그리고 혈연 문제는… 펙?”
퍽! 나는 펙의 등을 발로 찼다.
“여기 있습니다.”
표정관리를 하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펙이 ‘어어?’ 하고 균형을 잃고 한발 깽깽이를 하다가 포테리오의 앞에 쓰러졌다.
분명히 아까까지는 표정 관리하라고 했더니 이제는 등을 발로 차는 폭거에 어리둥절해하는 펙. 나는 심드렁하게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펙과 암살자들이 가장 혼혈의 특성이 짙게 나타나니 이들의 몸을 조사하면 알 겁니다.”
“어이! 이자들부터 조사해!”
포테리오가 목소리를 높이자 병력 사이에서 마법사 다섯 명이 빠져나왔다. 그들의 손에 의료 도구와 홈이 파인 금속 원판이 들려 있었다.
주사기로 펙과 암살자 몇 명의 피를 뽑고는, 준비된 원판에 조심스럽게 떨군다. 원판이 빙글빙글 돌며 피를 분리한다.
원판에 파인 홈으로 피가 들어가고, 홈마다 마나를 투입하는 등 복잡한 변화를 일으키며 이종족의 특성을 찾아내고 있었다.
포테리오가 물었다.
“어떤가?”
마법사가 원판을 조작하며 대답했다.
“좀 더 심층적인 조사가 필요하지만, 거짓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심층적?”
내가 말했다.
“표본이 더 필요하다는 거군요. 이게 있으면 더 쉽게 알아낼 수 있겠죠.”
그러며 내려오면서 자료실에서 챙긴 종이 무더기를 마법사들에게 건넨다. 밀림 이종족 부족의 역사, 혈통서 관리, 혼혈의 특징 등이 적힌 서류다.
“지하 실험실에 원 이종족의 혈액 샘플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안내해 드릴 테니 원한다면 얼마든지 살펴보시죠.”
짝짝!
구오 왕성 일을 하던 사용인을 부른다. 그들이 다가오자 마법사들이 내가 건넨 자료와 사용인의 얼굴을 보고 쑥덕대더니 주삿바늘을 들었다.
쭈욱-!
마법사들은 펙과 암살자로도 부족해서 사용인의 피까지 채취했다. 사용인들은 팔을 문지르며 소름 끼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꺼림칙한 얼굴로 마법사들을 지하로 안내했다.
나는 떠나가는 마법사들을 보며 말했다.
“이종족 잡종 개량이 사실인지 확인하려면 며칠은 걸릴 듯합니다. 그 사이에 저희가 부탁한 사안은 어떻게 되었는지 의논하고 싶군요.”
“물론 준비했소.”
다시 포테리오가 손짓하자 학자 스무 명. 마법사 다섯 명이 병력 사이에서 걸어 나온다. 포테리오는 그들을 가리키며 하나하나 소개했다.
뭐, 누가 지리학의 대가다, 누구는 이종족 연합지역을 돌아다니며 토질에 맞는 농법을 연구했다. 누구는 종자 개량 마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마법사다… 이런 식으로 학자, 마법사들의 이름과 전문분야만 소개한 짧은 인사말이 오갔다.
나는 그들에게도 내려오면서 미리 챙긴 다섯 권의 책과 서류 무더기를 건넸다.
책 다섯 권은 토질과 양분 조사, 농작물의 생리학적 특징, 농경지대 관리에 들어간 몇몇 마법과 해설서 등이었다. 서류에는 매년 기온과 강수량, 기른 작물과 그해 수확량에 대한 자료가 정리되어 있었다.
“더 자세한 자료를 원하시면 집무실과 첨탑 중간의 실험실의 자료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그것도 안내를 해드리죠.”
마침내 저들까지 안내가 끝나자 연무장에는 나와 뮤온 보트라, 펙 등의 암살자들과 에이스헨의 검귀(라 읽고 빡대가리라 부르는 머저리들), 마지막으로 뒤에 도열한 1,505명의 병력만이 남았다.
“…….”
“…….”
어색한 침묵 속.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서로의 얼굴만 바라본다. 나는 뮤온 보트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야지? 하지만 뮤온 보트라는 자신은 자격이 없다는 듯 다시 방관자로 넘어왔다.
그러면 누가 말을 꺼내야 하나? 펙은 칼질만 한 놈이어서 혓바닥이 안 굴러가고, 릴리는 등신에 나머지 검귀들은 병신이다.
그래. 귀찮은 건 다 내 담당이지. 나는 짜증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한평생 여기서 멀뚱히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겁니까? 천공기를 타고 오느라 지쳤을 텐데 혼성 기습 대대원들도 쉬어야지요.”
“아, 그렇지. 말없이 일천오백의 병력이 왔는데 그들이 묶을 숙소가 있소?”
“딱히 숙소를 잡을 필요 없이 왕성에서 묶으시면 됩니다. 기사고 뭐고 다 죽여서 빈방은 넘쳐납니다.”
“…….”
“지하 2층부터 지상 3층까지. 쓰지 않는 방이 100실도 넘습니다. 한 방에 열댓 분씩. 아무 데나 마음에 드는 방을 고르십시오.”
“아, 어, 음. 아, 알겠소.”
나는 고개를 돌려서 연무장 밖, 기둥 사이에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던 이들을 불렀다.
“야! 어, 너네 다 걸렸으니까 좋은 말 할 때 이리 와라. 10초 준다. 10… 9….”
구오를 다스리던 빛의 수호자 조직원을 모조리 죽인 탓에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어버린 암살자 수십 명. 그리고 그 밑에서 예비 암살자로 커가던 이들 백수십 명.
칼 쓰고, 사람 죽이는 것 말고는 아무 능력도 없어서 왕성에서 밥만 축내던 식충이들. 이들을 1,505명의 병력을 안내하는 역할로 쓴다.
그들이 내 명령을 받자 주춤주춤 병력에게 다가갔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는 분위기.
“어… 이쪽…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그래도 암살일 하면서 세상 경험 좀 했다고, 선배 암살자들이 먼저 나서서 병력에게 손짓한다. 오와 열을 맞춰 선 1,505명의 병력은 꼼짝도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선배 암살자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포테리오가 그 모습을 보곤 웃음을 터트리며 위로 손을 들었다. 몇 개의 수신호가 들리고, 병력이 열 무리로 쪼개져서 암살자의 뒤를 따랐다.
왕성 안으로 우르르! 들어가는 일천오백의 혼성 기습 대대원들. 열 명 남은 마법사들이 천공기에 마법적인 조치를 하고 이들을 뒤따라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연무장에는 우리만이 남았다.
“저희도 슬슬 가봅시다. 좀 더 진지한 대화를 할 장소가 있습니다.”
나는 포테리오와 펙 등을 이끌며 연무장을 벗어났다. 연무장을 넘어, 왕성 7층을 향해 걸어간다. 내 뒤를 따라 왕성 계단을 걷던 포테리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물었다.
“진지한 대화라니. 또 무슨 할 이야기가 있소?”
능구렁이 같은 새끼. 이상하게 나이 먹은 놈들은 다 이렇다니까? 나는 익히 예상했다는 듯이 막힘없이 말했다.
“글쎄요? 예를 들면… 지금 당장 신원이 확인된 빛의 수호자 하부 조직 습격 등이 있겠군요. 애초에 그러려고 데려오신 병력 아닙니까? 단순히 구오 방위 목적이 아니라요.”
“어, 험…….”
입을 꾹 다무는 포테리오.
“구오 탈환 일주일. 그 이전에 제가 한 국가 수도 습격부터 따지면 벌써 2주나 지났습니다. 빛의 수호자의 능력을 고려하면 하부 조직 방비를 탄탄히 했을 건 분명하고, 하루가 지날수록 적의 방어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할 겁니다.”
“으음.”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으니 어디로 갈지 빨리 정하고 가서 다 때려 부숩시다.”
내 말에 포테리오가 뮤온 보트라를 슬쩍 쳐다보았다. 뮤온 보트라는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몸짓에 포테리오도 자세를 바로하며 나를 뒤따라왔다.
‘역시…….’
나는 내 감지력에 걸린 혼성 기습 대대의 무장, 천공기에 보관된 마법 무구를 떠올리고는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무장 정도를 보아하니 이들은 단지 구오를 도와주기 위해서 온 게 아니다. 집단전, 단적으로 말하자면 전쟁을 상정하고 전략물자를 차출했다. 이제 그것들의 쓰임새를 토론해야 할 때다.
그러니까. 천공기가 다섯 대씩이나 온 건 꼭 나 때문이 아니다. 이종족 연합지역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이만한 대병력을 보내주었다.
‘통 크게도 지원해 주시는 군.’
이종족 연합지역이 지원해 준 천공기 다섯 대, 르암인보다 강건한 스칼러 중급의 이종족 1,500명. 익스퍼트 여섯. 이들을 데리고 중앙 대륙에 어떤 불을 지를지 생각만 해도 신이 났다.
‘잘 받았고, 아주 잘 써드릴게.’
나는 희희낙락해하며 계단을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