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382
382화
【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
전쟁은… 솔직히 말하면 처참하다기보다는 지루하다.
절차를 밟는 게 참을 수 없이 지루하다.
전쟁은 개인 간의 결투가 아니다. 개인 대 개인끼리 분쟁이 일어나면 귀찮게 말로 주절거릴 필요 없이 칼 꺼내서 모가지를 베어도 문제가 없다. 좋은 칼 놔두고 멍청하게 대화 따위나 하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나?
하지만 이세계의 전쟁은, 국제 관계는 그래선 안 된다. 과거 게리소님 영지가 남쪽 대륙을 통일할 때에도 그러지 않았나. 귀찮고, 지루한 사전 단계를 하나하나 다 밟아야 했지.
그렇듯이, ‘나 간다? 당신들 설득 안 듣고 침략하고, 왕은 전부 죽이고 예쁜 귀족 자제는 노예로 삼을 거야.’ 라는 의도로 쳐들어왔어도 최소한 면전에 침략한다는 말은 해야 한다. 그것이 몬스터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인간이 지켜야 하는 기본 예의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면…….
나는 옥산틸국의 버마 후작이오. 정명한 빛의 이름으로 르암인을 한데 집결시키는 명예로운 임무를 받아, 남쪽 대륙 통일왕국 게리소님까지 오게 되었소. 블라블라블라… 주저리주저리 지껄이는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단순히 명분 쌓기를 위해서 길게 주둥아리를 놀리는 것만은 아니다. 승천자의 감각으로 살펴보면 적측 병력에서 몰래 하고 있는 짓거리가 낱낱이 밝혀진다.
인파에 가려진 병력 어느 곳에서 5결 수준의 마법사 한 명, 4결 마법사 둘, 3결 마법사 넷이 육각형을 그린 채로 집단 마법 회로를 구성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황금 야수단인지 똥색 짐승새끼인지 뭔지 하는 짐승 무리 뒤에선 몰래 마포에 마나를 불어넣고 있다.
‘마포를 쏴서 성벽의 방어 마법을 깎고, 광범위 공격 마법을 쏟아 부어 성벽하고 뒤의 집들까지 한 번에 쓸어버리겠지. 다음으로 야수단인가 하는 놈들이 돌격해서 일거에 영주성까지 관통.’
대강 이런 계획일 터다. 때문에 단순히 예의를 떠나, 마법 준비가 끝날 때까지 길게 말을 할 수밖에 없는 버마 후작이었다.
우리도 그에 준하는 준비를 하고 있으니 상대가 치사하다고 욕할 순 없지만… 그래도 지루한 건 지루한 거다.
“만약! 만약, 귀국이 본…….”
“으, 씨발. 지루해.”
버마 후작의 따분한 말을 참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입으로 튀어나왔다. 혼잣말이기에 별문제는 없었지만, TPO가 좋지 않았다.
버마는 음성 증폭 마법으로 먼 거리에서 말을 하고 있었고, 우리도, 정확히는 공주님인 소니아 반데스 또한 그의 말에 응답하기 위해 미리 음성 증폭 마법을 걸어둔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소니아 반데스 옆에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음성 증폭 마법을 거는 마법사 역할을 맡았거든. 그러니까, 내가 한 욕설과 지루하다는 말이 상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
버마 후작, 소니아 반데스, 옆에서 전투 지휘 준비를 하던 펜 슈라드 백작은 물론이고 성벽에서 활을 꼭 붙잡은 병사들까지 한마음 한뜻이 되어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그래. 이건 내가 잘못했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미안하다는 제스쳐를 내비쳤다.
“죄송. 계속 말하시죠.”
버마의 얼굴이 시뻘게진다. 그가 콧김을 씩씩 불며, 부들거리는 팔로 은박된 양피지를 길게 펼쳐서 이어 말했다.
“…으득! 닥쳐라! 최후통첩이다!”
버마 후작이 길길이 날뛴다. 이거 진짜 미안해 죽겠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그런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소니아가 음성 확장 마법으로 버마 후작에게 무어라 외친다.
잠시, 둘 사이에서 짧은 말싸움이 오간다. 말은 그럴듯하고, 사용하는 단어는 귀족들 특유의 멋스러운 맛이 있지만, 결과는 다를 거 없다.
[거절!] 이게 우리의 의사. 의사를 확인한 버마 후작이 잘되었다는 듯이 말도 없이 손을 위로 들었다. 협상이, 또는 협상의 탈을 쓴 협박이 결렬되고,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방패와 무기를 들고 진군할 준비를 하는 어마어마한 병력. 나는 휘파람을 불며 펜 슈라드에게 물었다.
“얼마나 됩니까?”
“추정 25만입니다.”
25만. 참 드글드글하다. 추정치 1천 명이 한 개 연대를 구성해 밀집 대형으로 스무 무리. 뒷열에선 인력 5만여 명. 식량이나 짐 등을 실은 마차까지 포함하면 그야말로 눈앞이 인간으로 가득 찼다.
이렇게 많은 인간을 보는 건 처음이다. 아니, 처음은 아니지. 북방의 악마 때 몇 번 본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 모두가 내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창칼로 무장하고 있진 않았으니까. 결국, 처음 보는 거다. 나는 병력의 구성을 살피며 물었다.
“좌우측 침투로 정찰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적들이 게리소님으로 들어오기 위해선 반드시 슈라드 성을 지나쳐야 했다. 슈라드 성의 좌측은 대수림. 우측은 절벽이었다. 절벽 너머엔 바다가 나오니 샛길의 존재는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대수림으로 침투 부대가 올 수 있지만, 그걸 대비해서 미리 레인저 부대를 운용하고 있지.
“대수림 정찰 부대 보고는 이상 없습니다. 바다 너머로도 접근하는 함선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2년 전에 대형 함선이 죄다 침몰한 걸 아직도 회복하지 못했군. 그렇다면 전면의 적이 다다. 대수림 쪽을 지속해서 경계하라 말한 후, 우리는 적들의 진군을 지켜보았다.
가장 먼저 마나 유저 하급 수준에 들어선 방패병 무리가 전면을 막은 채 접근한다. 일천여 개에 달하는 대형 방패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위로 들렸다가 땅을 찍는다.
쿵! 하고 땅을 찍으면 크게 한 걸음.
또 쿵! 하고 땅을 찍으면 크게 한 걸음.
쿵쿵! 착착!
쿵쿵쿵! 착착착!
일천 개의 방패와 이십오만 명의 발걸음이 하나로 합쳐지니 그야말로 지진이라도 일어나는 것 같은 진동이 성벽까지 전해져왔다. 전통적이지만, 효과가 확실한 압박 수단이다.
나는 적의 진군에 아군 병사들의 기세가 꺾이기 전에 비은다각형을 발동했다. 사용하는 마법은 돌풍의 중첩. 범위는 최대한 넓게.
휘잉-!
곧이어 적측을 향해, 순풍으로 바람이 분다. 순풍을 확인한 펜 슈라드가 통신기에 대고 명령했다.
“궁병 부대. 발사.”
성벽 위로 깃발이 들리고, 신호를 해석한 선임병이 성벽 위를 뛰어다니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1열 일어섯! 나머지는 앉아 자세로 대기! 활 들고, 시위 당겨! 3! 2! 1! 발사!”
파바밧!
1열의 일천 명이 신속하게 활을 쏘고 자리에 앉는다. 3초도 지나지 않아 2열의 병사가 똑같은 과정으로 활을 쏜다.
1열, 2열, 3열… 5열까지. 한 열에 천 명씩. 총 5천 발의 화살이 하늘을 까맣게 칠한다.
활시위는 지금을 대비해 하나하나가 몬스터의 힘줄을 꼬아 만든 특상품. 수가 부족해서 국경 영지, 북동의 슈라드와 북서의 펜로스에만 지급한 특수 군수 물자다.
화살 또한 활대부터 활촉까지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게 없다. 활촉은 대형으로 제작해 무게를 두 배 이상 늘렸고, 그에 맞게 관통력도 급상승했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하강하는 오천여 개의 화살을 보자 적이 기민하게 대응했다.
“방진 대형!”
차자작!
방패병이 즉각 방패를 대각선으로 든다. 병사들은 창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원형 방패를 들어서 오밀조밀하게 위를 가렸다.
타다닥!
쏘아진 화살이 방패의 절벽을 타격했다. 10여 초간 계속된 화살의 소낙비가 그치고, 적군 병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방패를 어깨에 멘 뒤, 창을 고쳐잡았다.
총 5천 발의 화살 공격. 하지만 부상자는 100명 이하. 대부분이 방패를 꿰뚫은 화살촉에 의한 팔뚝 관통상. 사망자는 한 명도 없다.
무피해나 다름없게 화살 공격을 막자 버마 후작이 ‘겨우?’라는 듯이 입꼬리를 비비 꼬며 우리를 비웃는다. 무참한 성과였지만, 나도, 그 누구도 실망하지 않았다.
펜 슈라드는 버마의 도발에 응하지 않고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가 통신 마법으로 영주성에 자리잡은 시즈믹스에게 통신을 보내며 명령했다.
“계속 쏴. 이번에는 1열씩. 간격은 다섯 배로 늘린다. 시즈믹스 경은 마법을 준비해 주십시오.”
쿵! 척!
쿵쿵! 처적!
한 번 화살을 막아서 그럴까?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옥산틸국의 병력이 아까보다 빠른 페이스로 방패 진군을 시작했다.
우리는 그에 맞서, 무의미한 화살 공격을 이어갔다. 각 열의 시간 간격은, 펜 슈라드의 말처럼 다섯 배로 느리게 해서.
쏴아아!
화살을 계속해서 쏘지만,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일천 발의 화살 무리는 맥없이 튕겨 나갔다. 적들 밑에 부러진 활대와 우그러진 화살촉만 허무하게 쌓인다.
한 걸음이 열 걸음이 되고, 열 걸음이 백 걸음이 된다. 방패를 앞세운 25만 인파의 접근은 알고 있음에도 정석적인 방법으로 막기 힘들었다.
이제 슬슬 마포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온다. 몇 십 걸음만 더 접근하면 적들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마포를 쏴댈 것이고, 그것에 성벽의 방어 마법진이 힘을 소모하면 다음은 마법사들이 힘을 모은 합동 공격 마법으로 성벽을 무너뜨리겠지.
하지만 준비는 우리가 더 철저히 했다. 뭐든지 의외성이 중요하다. 적이 준비한 의외성은 상급 마나석을 이용하여 성벽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광범위 관통 공격 마법진이지만, 우리의 준비는 그것을 뛰어넘었다.
적들이 마포를 조작하기 전, 펜 슈라드가 통신 마법을 통해 시즈믹스에게 통신을 걸었다. 그가 침착한 눈빛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터트리십시오.”
우웅!
그 즉시 성벽을 보호하는 방어 마법진이 크게 떨리고. 외부로 붉은 파장을 발사했다. 적측 마법사는 파장을 방어했지만, 파장은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적군이 잠시 자리에서 멈춘다. 무언가 다른 수를 썼나 마법사가 바쁘게 탐지 마법을 걸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 알자 허세라고 생각했는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의 헛숨이 그가 살아생전 내쉰 마지막 숨이 되었다. 그의 발밑에 떨어진 화살촉, 그 화살촉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폭발이 마법사를 집어삼켰다.
꽈과광!
마법사의 죽음을 시작으로, 수만 발의 화살 중 2,000여 발이 적들의 발밑에서 터진다. 붉은 화염이 터지고, 갈기갈기 짓이겨진 살 조각과 시뻘건 핏덩이가 황량한 벌판을 새빨갛게 칠했다.
폭발에 휘말린 병사들이 목놓아 지르는 비명이 성벽까지 전달된다. 진군이 멈추고 대열이 흐트러진다. 마법사가 즉각 중요 인물을 보호하는 방어 마법을 걸었다.
“통했군.” 나는 남몰래 주먹을 움켜쥐었다.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걸리지 않았다.
화살을 통한 폭발 공격!
화살촉 한 개에 네 조각으로 자른 최하급 마나석 한 조각을 담는다. 마나석은 왕국 수립 이후 대대적으로 모집한 기초 마법사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린 하급 폭발 마법이 그려져 있다.
하급 폭발에 마법 회로를 그린 당사자도 기초 마법사. 그만큼 위력은 강하지 않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꼼수를 썼다. 최하급 마나석이다. 네 조각으로 갈랐지만, 마나석을 일회용으로 씀으로써 위력을 대폭 증강시킬 수 있었다.
이래서 화살촉을 억지로 두껍게 만든 거다. 안에 마나석을 숨기고, 외부로 흘려보내는 마나 파장을 숨겨야 하거든.
‘이거 한 방에 웬만한 영지 1년 치 예산을 썼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계략이었어.’
그만한 돈을 부어서 만든 폭발 화살. 살상 폭발 범위는 지름 1미터도 안 되고, 화살촉을 이루는 코딱지만 한 금속 파편으로 피부와 근육에 상처를 주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말했듯이, 무엇이든지 의외성이 중요하다. 돈을 얼마나 쓰든지 간에 한 번의 의외성으로 적을 흐트러뜨릴 수만 있으면, 그때는 우리의 턴이었다.
“지금이다! 다시 쏴라!”
폭발에 방패를 들 틈이 없이 혼란에 빠진 병사들. 슈라드 백작이 이 틈을 노리고 재차 명령했다.
“활! 활 들어! 시위 당겨 이 새끼야! 1열! 씨발 2열은 뒤로 빠지고! 1열 발사!”
마찬가지로 급작스러운 폭발에 얼떨떨해하던 우리 측 병사들이 선임병의 닦달에 화살을 쏘았다.
파바밧!
비밀 유지를 위해 병사들에게 알리지 않은 마법 물품 제작. 그 탓에 화살은 아까처럼 일사불란하지 않고 대열이 조금 흐트러졌다.
그래도 절반 이상은 똑바로 목표를 노린다. 솔개처럼 습격하는 수천 발의 화살이 대열이 흐트러진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관통했다.
퍽! 퍼벅!
“커흑!”
“쏴! 계속 쏴! 4열! 앉아! 5열! …다시 1열! 일어서! 화살 걸어! 시위 당겨!”
슈라드가 이때가 기회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여 명령을 내린다. 궁병이 골무가 찢어지고 손가락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화살을 쏘고, 또 쏘았다.
어차피 아까 일어난 폭발 범위는 그리 넓지 않다. 적들은 곧 혼란을 수습하고 방패를 위로 들어 화살을 막았지만, 아까처럼 탄탄한 대열을 만들지는 못했다.
아까의 폭발이 또 일어날까 봐 두려워서 대열이 흐트러지는 것이다. 하나둘 화살촉으로부터 거리를 벌리고, 방패에 꽂힌 화살을 제거하려고 방패를 비튼다.
그 틈을 노려 쇄도한 화살이 병사의 머리, 어깨 등을 관통했다. 자꾸 겁먹어서 피해가 누적되자 기사들이 돌아다니며 호통을 쳤다.
“겁먹지 마라! 이런 폭발을 계속 쓰진 못할 거다! 방패를 앞세워서 전진하면……!”
꽈앙!
아니거든. 수천 발 사이에 열댓 발씩 폭발 마법을 담은 화살촉을 심었다. 열댓 발 수준이면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폭발시킬 수 있다.
수천 발의 화살. 중간마다 일어나는 작은 폭발 열댓 번. 그러나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사방에서 작은 폭발이 일자 병사들이 방패를 들어올리지 못할 만큼 동요했다.
일부는 땅에 널린 화살촉에서 멀어지기 위해 대열에서 벗어나기까지 한다.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마라아아!!”
서걱! 기사 한 명이 도망치는 병사의 목을 잘랐다. 그가 피가 뚝뚝 흐르는 병사의 모가지를 들고는 벌게진 눈으로 지휘관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본 버마 후작과 지휘관이 침통한 얼굴로 새로운 신호를 보냈다.
뿌우우-! 뿌! 뿌!
적측 곳곳에서 뿔피리 소리가 높게 울렸다. 신호는 모르지만, 적들의 행동으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우와아아아!”
두두두두!
전열의 병력이 돌진을 개시했다. 3미터가 넘는 덩치를 자랑하는, 황금 야수단이라고 불리는 짐승에 탄 기사들을 필두로 수만 명이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달려온다.
황금 야수단 300여 명. 돌격병, 이종족 노예를 이용한 충차병, 접힌 봉처럼 길게 촤라락! 늘어나는 사다리를 들고 뛰어오는 마나 유저 상급의 정예병. 수많은 병사들 속에 복병이 숨어있다.
꽈앙! 파앙!
마포도 급하게 불을 뿜는다. 수백 킬로그램은 우습게 나가는 쇳덩이가 허공을 날다가 방어막에 가로막혀 힘을 잃고 떨어졌다.
방어막은 마포에 대비해서 유동체 성질을 부여했다. 힘 대 힘으로 막으면 금방 마나를 소모하니, 부드럽게 감싸서 밑으로 흘려보내는 식이다.
우직!
“끄헥?!”
밑으로 추락하는 포탄에 깔려 죽은 병사들이 발생했지만, 적들은 아군의 피해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해서 마포를 쏘았다. 먼저 방어막을 뚫어야 성벽을 뚫든 뭐든 한다.
잠시 후, 적군 마법사들이 방어막이 약해질 때를 기다리며 마나를 끌어 올리는 게 내 감각에 잡힌다.
“어딜.”
지금은 내가 나설 차례다. 나는 고이 보관한 성게의 마나석을 꺼냈다. 여섯 조각으로 갈랐음에도 수박만큼 커다란 그것.
마나석은 한 번 쓰면 최소 주 단위의 충전 시간이 필요하다. 성게의 마나석은 충전 시간이 얼마나 될지 감히 계산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것에서 함부로 마나를 뽑아내지 않는다.
내게 필요한 것은 압력. 성게 마나석이 품고 있는 무진장한 마나량이 제공하는 압력을 이용해 투사체의 발사 속도를 늘리는 용도로 쓰는 것이다. 마법의 구성은 온전히 내 힘으로만 한다.
이번에 쓸 마법은 이전에 빛의 수호자에게서 뺏은 유물, 멸망을 부르는 화살을 응용한 관통 계열의 마법. 거기에 며칠 전에 회수한 마법총의 마법 회로가 워낙 구성이 깔끔해서 그것도 일부 가져다 썼다.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은, 광속의 섬광탄. 승천자의 마법 지식, 유물에서 얻은 아이디어, 마법총의 깔끔한 마법 회로 구성마저 더한 최흉의 관통 마법이다.
어디 한 번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봐라. 나는 중열에 숨은 마법사를 향해 광속의 섬광탄을 발사했다.
투쾅!
성게 마나석에서 일어난 백색 폭발이 내 몸을 뒤로 밀친다.
상위 에너지인 마나를 통한 물리력의 발산은 운동 법칙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쟈기가, 괴괴괴괴 마나 운용술과 신체 강화 초능력으로 이종족 이상으로 육체를 단련한 쟈기의 몸이 뒤로 2미터나 죽-! 밀리는 엄청난 반발력.
지이익-!
성벽에서부터 적측 마법사가 있는 거리까지. 근 수백여 미터에 달하는 백색 실선이 그려진다. 음속의 세 배로 쏘아진 압축 섬광 마법이 두 겹의 방어막을 뚫고, 몰래 마법진을 발동시키려던 마법사의 가슴을 관통했다.
‘다시.’
성벽으로 다가가서, 목표물을 잡고… 광속의 섬광탄 발사!
음속의 세 배가 뭐가 잘났다고 광속이라는 거창한 명칭까지 붙이냐 싶지만, 이런 건 먼저 선점하는 놈이 우선이다. 내 마법은 누가 뭐라 해도 ‘마하 3’의 섬광탄이 아닌 광속의 섬광탄이다.
투쾅!
아까는 5결 마법사. 이번은 4결 마법사. 여섯 마법사 중, 마법진의 핵심축을 다루는 고위 마법사 둘이 죽자 마법진이 힘을 잃는다. 대열에서 혼란이 발생하고, 방어막이 두 배 이상 강화되었지만, 이미 늦었다.
마법사를 죽인 나는 목표를 다음 뒤졌다. 다음은 누구를 하지? 지휘관? 다른 마법사? 아니면 기사단장?
쉐엑!
고민하는 와중, 직선을 저 앞에서 빛의 덩어리가 쇄도했다. 밀집된 힘으로 유동체 성질을 지닌 성벽 방어 마법진마저 관통한 그것이 성벽에 선 나를 향해 날아왔다.
적측에 있는, 익스퍼트 상급의 무인이 오러를 담아 날린 투창 공격이다. 나는 신경도 쓰지 않고 목표물을 탐색했다.
“차합!”
내게 날아온 오러의 창은 내 옆에서 눈을 부라리는 소니아가 대신 처리해 주었다. 반월을 그리는 짙은 갈색의 오러가 오러 창과 충돌하여 허공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초록색과 갈색 빛이 폭죽처럼 눈앞을 가린다. 좋아, 익스퍼트는 포기하지. 이 거리면 광속의 섬광탄에 반응해서 막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황금 야수단 한 놈을 죽이는데 쓰기는 아깝고… 나는 생각 끝에 마포를 목표로 잡았다. 마포 한가운데, 일반적으로는 약실 부위로 지칭되는 그곳을 겨누곤 광속의 섬광탄 발사!
지익-!
한 발에 마포가 관통되고, 폭발 마법과 함께 발사될 준비를 하던 마포가 폭발을 일으켰다. 마포의 폭발에 마포를 조작하던 병사 십여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을 나뒹군다.
좋다. 나는 계속해서 마포를 노려 광속의 섬광탄을 쏘았다. 한 발에 마포가 터지고, 병사들이 허둥댄다. 또 한 발에 마포가 터지고 주요 인물을 보호하던 익스퍼트가 이를 악문다.
꽈앙! 또 한 발. 돌진 준비를 하던 기사가 우람한 금속 방패를 들곤 마포를 막을까 말까 고민하며 움찔댄다. 아서라. 이걸 막으려면 마포 외부에 미터 단위의 금속판을 둘러야 한다. 방패 따위는 있으나 없으나 그게 그거다.
그렇게 원거리 전을 벌이고 있을 때, 적군이 어느새 성벽까지 다가왔다. 말과 비슷한, 3미터가 넘는 괴수가 발톱을 휘둘러 성벽 밑 부분을 부수고, 관통 마법이 걸린 충차가 성문을 때린다.
드륵! 드르륵!
눈앞까지 다가온 대형 사다리차는 소니아를 비롯한 두 명의 익스퍼트가 오러탄을 쏘아 망가뜨렸지만, 그 넓은 성벽을 겨우 세 명이서 막기란 힘들었다.
턱! 어느새 내가 있는 곳까지 사다리가 놓였다. 펜 슈라드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검도 꺼내지 않고 무감각하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불벼락의 폭풍. 시행.”
불벼락의 폭풍. 게리소님의 중간에 위치한 큰 산. 일전, 화산 폭발을 일으킨 그곳. 과거, 나는 큰 산의 분화구를 들러 화염의 크리스털을 무더기로 챙겼다.
이걸 가만히 내버려 둔 줄 알았지? 천만에 말씀. 그럴 리가 있나. 게리소님은 영지마다 초장거리 비행 마법진을 설치하며 영지의 방어 마법진 설치를 함께했다.
이때 방어 마법진에 쓰인 핵심 물자가 화염의 크리스털이다. 화염의 크리스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걸 매개로 화염 마법을 쓰면 웬만한 고위 마법사 뺨칠 정도로 커다란 화염을 만들 수 있다.
더군다나 영지 전체를 감싸는 마법진의 보조마저 받기 때문에, 밀집도는 뒤로하더라도 범위 하나만큼은 고위 마법사도 따라 하기 힘든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했다.
그것이 바로 불벼락의 폭풍이다. 마법진으로 증폭된 불벼락의 폭풍이 전면 만수천 명, 수백 기의 짐승을 앞세우고 돌격하는 황금 야수단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