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86
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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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썩!
잘난 척도 여기까지다.
나, 션은 히라자의 죽음을 확인하고 쓰러졌다. 눈을 감으면 영영 뜨지 못할 것 같은 피로감이 나를 덮쳤다.
“셔, 션님······.”
에일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내 등을 받쳐주었다. 그가 굵은 눈물을 흘리며 나를 질질 끌고 가서 가까이 있는 커다란 돌덩이에 등을 기대게 해주었다.
나는 에일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눕혔다. 강렬한 만족감이 가슴속을 깊게 관통했다. 나는 움켜쥐지 않는 근육을 움직여 주먹을 꾹 쥐었다.
‘드디어!’
드디어 삼사드의 경지를 뛰어넘었다!
삼사드는 출발선부터가 불공평했다. 긍정적인 게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로도 불공평했다.
그는 검술과 마법을 동시에 익히며 재능을 낭비했고, 무서운 외계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초능력도 봉인했다.
마나라는 개념은 새로웠고, 그것을 이용한 기술도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심지어 전생에서 익힌 기술은 오히려 승천자의 무술을 익히는데 장해물밖에 되지 않았다.
삼사드는 이러한 악조건이 널려있음에도 스무 살에 익스퍼트 상급에 올라섰다.
그에 비해 션은 어떤가?
그는 검술에만 집중했고, 승천자에게 들킬 염려도 없으니 마음껏 초능력을 써서 잠재력을 개발할 수 있었다.
마나에 대한 지식도 백과사전 수천 권이 넘게 알고, 기술 또한 너무 많아서 고민일 정도로 넘쳐났다.
하지만 역시나 승천자와 르암인의 재능이 문제다. 션은 죽음의 위험 속에서 기술을 갈고 닦았는데도 서른 살이 넘어서야 겨우 검술 하나만 삼사드를 뛰어넘는 데 성공했다.
션이 삼사드의 경지를 개척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내가 승천자가 아닌, 그리고 르암인이 아닌 다른 종족으로 태어나도 얼마든지 승천자의 기술을 빨아먹을 가능성을 개척했다는 뜻이었다.
이번 생은, 션의 분투는 여기까지다. 이제 마음 편히 먹고 제발 다음 생에도 르암인으로 태어나길 빌 수밖에.
만약 다음 생에도 르암인으로 태어난다면 마법도 익혀야지. 익히지만 않았을 뿐, 르암인의 마법 체계도 짬짬히 공부했다. 승천자의 마법은 불가능하지만, 르암인 식 마검사가 될 방법은 연구해두었다.
그러니 다음생 부터는······.
“션님··· 일어나세요. 제, 제발 일어나세요······. 흐흐흑!”
“······.”
에일이 내 가슴에 고개를 파묻고 질질 짠다.
얘가 기껏 만족감에 잠겨있는 걸 방해를 하네. 나는 다 끝났는데도 사람을 귀찮게 하는 에일이 못마땅해서 주먹을 들어 올렸다.
콩!
에일의 머리를 때렸다. 나름대로 전력으로 때린 건데 유치원생 주먹질보다도 약한 소리만이 들렸다.
‘이거 진짜 죽기 직전이군.’
한 5분 남았나? 심장이 으깨졌는데도 5분이라니. 새삼스럽게도 션의 육체개조가 만족스럽다. 하지만 에일은 내 주먹질이 허약한 게 서러운지 얼굴을 가슴에 비비며 엉엉 울어댔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히라자의 주먹질에 내 가슴은 완전히 으깨졌다. 그 상처에 얼굴을 대고 비비니 아파 죽겠다.
“에일, 떨어져. 아프다고. 나 가슴 빠개진 거 안 보여?”
“아······!”
에일이 황급히 얼굴을 들었다. 잠깐 동안 녀석의 얼굴이 내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에일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떨어져라. 할 말이 있다.”
“예······.”
“그 전에 우선······.”
나는 주변을 보았다. 세 소드 마스터와 해피, 오세아이노, 그리고 니웨. 다들 만신창이가 됐지만, 놀랍게도 죽지 않았다. 히라자가 손속에 사정을 둔 게 분명했다.
그는 어째서 저들을 죽이지 않은 걸까? 왜 미련하게도 에일을 인간으로 대해서 내게 승리를 내준 걸까?
궁금했지만, 깊게 관심 둘 일은 아니다. 히라자는 배신자였고, 내가 죽였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정리를 끝내고 말했다.
“거기, 정신 차린 거 다 아니까 눈치껏 일어나시죠.”
부스럭······.
내 말에 트라칸과 뮤온이 뻘쭘한 얼굴로 일어섰다. 내부에서 코딱지만큼 남아있는 마나가 흩어지는 걸로 봐서, 내가 패배하고 히라자가 빈틈을 드러낼 때를 기다려 최후의 특공을 준비하고 있던 것 같다.
냉정한 판단이다. 아주 마음에 든다. 나는 둘에게 부탁하여 나머지 네 명이 정신을 차리게 해달라고 했다. 그들이 정순한 마나를 넣어주자 해피 등도 눈을 떴다.
네 명이 일어나고, 다 죽어가는 나와 죽은 히라자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해피의 얼굴은 담담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나도 짐작하기 힘들었다.
나는 세 소드 마스터에게 말했다.
“세 분은 오늘 처음 봤으니 딱히 할 얘기가 없군요. 알아서 일들 보세요.”
“큼···!”
트라칸이 콧잔등을 긁으며 무안해했다. 베이누스 프솔리아네는 허탈한 얼굴로 히라자를 바라보았고, 뮤온 보트라는 여전히 속을 알기 힘든 표정을 짓고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먼저, 나는 니웨에게 말했다.
“니웨. 외팔 병신이 된 기분은 어떠냐.”
“양팔이 병신이 돼도 션 님을 죽게 해선 안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검사답게 쿨한 녀석이다. 나도 쿨하게 말했다.
“어, 그래도 안 돼. 네 수준이 부족해서 양팔 다 바쳐도 불가능했을 거야.”
“······.”
니웨가 얼굴을 참혹하게 일그러뜨렸다. 나는 오세아이노에게 눈짓해서 내게 다가오도록 부탁했다. 그녀가 눈물을 훔치며 오자, 뮤온에게 말을 걸었다.
“뮤온, 제 왼팔 좀 잘라 주시죠.”
“어째서인가.”
“어차피 죽을 몸인데, 저 병신 하나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
뮤온이 착잡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르렁! 하는 칼이 뽑히는 금속음이 들리고, 깔끔하게 내 외팔이 잘려나갔다.
피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떨어진 왼팔을 발로 밀어서 오세아이노에게 전해주었다. 그녀가 ‘이런 미친놈들?!’ 하는 얼굴로 나와 뮤온을 번갈아 보더니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니웨 공. 받으시죠.”
니웨는 거절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양보니 뭐니 하며 시간 끌다가 내가 죽으면 그것만큼 억울한 상황이 없다. 니웨가 포기하곤 어깨를 내밀었다.
오세아이노가 성력을 전해주어 어깨와 팔을 접합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줌 남은 초능력을 왼팔에 몰아넣고 육채개변을 일으켰다. 왼팔은 몇 개월에 걸쳐 니웨의 체형에 맞게 변해갈 것이고, 거부반응도 없을 것이다.
초능력과 성력의 상승효과가 이만큼 뛰어나다.
이제 담담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해피 차례였다. 나와 해피가 말없이 시선을 마주하자 다른 이들이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래 봤자 홀로 우뚝 선 작은 돌 산 위에서 갈 데도 없었지만, 여하튼 분위기가 중요하다.
해피와 나, 에일만 남은 자리. 내가 본론을 말했다.
“해피. 잘 들어라. 천재검은 말이다.”
해피가 침을 튀기며 울컥! 소리 질렀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검술 이야기입니까!!!”
그 외침에 어찌나 요란하고 복잡한 감정이 담겨있는지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까지 고개를 획 돌려 해피와 나를 구경했다.
분노, 자괴감, 섭섭함이 응축된 감정이 해피의 얼굴에 떠올랐다.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들어라. 내 마지막 가르침이다.”
“별거 아니면 제가 죽일 겁니다. 이 검술에 미친 개새끼야!”
당연히 별거 아닌 게 아니지. 무려 승천자와 알테어의 합작품이 너인데, 내가 허튼소리 할 것 같냐?
“내가, 내가 네게 알려준 천재검을 떠올려봐라.”
나는 해피에게 세 개의 천재검을 알려주었다.
1, 함정 천재검. 2, 드레이에게 받은 천재검도해서, 즉 가짜 천재검.
끝으로 3. 함정 천재검과 가짜 천재검을 바탕으로 내가 작성한 보완 천재검.
나는 해피에게 3번을 먼저 익히고 2번을 나중에, 1번은 참고용으로만 쓰라고 했었다. 하지만 삼사드의 경지를 복구하니 한 가지 가설이 떠올라서 해피에게 알려줄 게 있었다.
“하지만 내가 틀렸어. 천재검은 진짜다.”
바로 이거다. 어때? 놀랍지?
“···예?”
“엄밀히 말하자면 가짜 천재검은 알테어의 유산이 아니다. 하지만 그 또한 진짜 천재검 못지않은, 선구자의 지혜가 담겨있다.”
“······??”
해피는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음표를 잔뜩 띄웠다.
못난 놈. 원래 저놈 재능이라면 말하자마자 깨달았을 텐데, 내가 죽어간다는 하찮은 거에 정신이 쏠려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한 번만 더 그래 봐. 아주 침을 뱉어주마. 나는 우물거리며 침을 모았다. 그런 뒤, 해피에게 설명을 계속했다.
내가 어째서 천재검에 그토록 집착했는가!
검법이 중요한 게 아니다. 선구자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였다.
아무런 단서가 주어지지 않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홀로 익스퍼트와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개척한 천재의 심득을 엿보기 위해서다.
“생각해봐라. 천재검도해서, 가짜 천재검과 함정 천재검의 첫 페이지에는 동일하게 알테어의 심득이 적혀있어. 바로 서로 다른 검결(劍訣)을 하나로 합치는 합결(合訣)이다.”
“······.”
하지만 그 또한 함정 천재검의 함정!
가짜 천재검은 합결의 묘리가 담겨있지 않다. 때문에 가짜 천재검은 합결이 아닌 분결을 최종 목표로 잡았다.
여기서 가짜 천재검을 익힌 불우한 천재들의 앙큼한 속셈이 드러난다. 그들의 목표는 합결이 아닌 분결. 하지만 그렇다고 그 두 개가 따로 떨어져있는 개념일까?
“예?”
해피가 여전히 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멍청한 새끼가.
퉤! 나는 해피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한 번만 더 그따위 표정을 짓기만 해 봐라.
“정신 차리고 들어라.”
“···알겠습니다.”
합결이 하나라면 분결은 톱니바퀴다. 하지만 그 톱니의 수가 수백 수천을 넘는다면? 수천 개의 톱니바퀴가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서 하나의 기능을 수행한다면?
“아아!!”
내 설명에 해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도 깨닫는 바가 있는 것이다.
무한하게 확장된 분결, 그것은 또 다른 합결이라고 보아도 좋다. 그것이 가짜 천재검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였다. 즉, 가짜 천재검도 그들만의 합결을 개척했다.
천재를 거울삼아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또다른 천재들. 가짜 천재검은 내가 목표로 했던 것은 아니지만, 르암인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한 선지자의 지혜와 고뇌가 듬뿍 담겨있었다.
즉, 함정 천재검과 가짜 천재검 첫 페이지에 쓰인 알테어의 구결! 그것은 함정이 아닌 게 함정인 것이 사실은 함정이 아니었던 게 함정이었던 것이다!
참으로 복잡한 함정의 연속! 이러니 진실을 모르는 자가 함정 천재검을 익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
해피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왜? 다 말해줬는데 이쯤 오면 뭔가 크게 깨달은 얼굴을 해야 하지 않나?
내가 황당해서 해피를 빤히 바라보았다. 진짜로 팰까?
해피가 한참이나 고뇌하더니 내게 물었다.
“어째서 제게··· 이렇게까지 해준 겁니까.”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던 질문이 나를 덮쳤다. 해피가 넋두리하듯이 내게 이어 말했다.
“어째서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왜 목숨을 바쳐서까지 에일을 구하고, 저를 구하신 겁니까. 어찌하여 어린 시절의 저에게 값을 수 없는 은혜를 지워주신 겁니까.”
“······.”
해피가 눈동자를 새빨갛게 물들이며 나를 보았다.
아! 나는 해피를 보며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생각이 아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해피에게 전했다.
“나는 네게··· 어른의 의무를 알려주고 싶었다.”
해피의 정신교육은 내가 아닌 피오드를 통해 이루어졌다. 만약 피오드가 아니었으면, 나는 내 손으로 제자를 죽이는 천인공노할 짓을 벌였을 것이다.
내가 해피에게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피를 인간으로 만든 것은 피오드고, 그에게 인간성을 알려준 것은 융 기사였다.
기껏해야 이깟 쇳덩어리 휘두르는 법이 내가 알려준 것의 전부였다. 그러니, 나는 에일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그 모습을 해피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해피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그의 스승으로써 아이를 버려두고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어른이란 말이다. 애새끼가 주저앉아서 질질 짜면 군말 없이 도와주는 거야. 그게 어른의 의무다. 유일하면서도 반드시 해야 할. 나는 네 앞에서 어른이 해야 할 의무를 방기하고 싶지 않았어.”
그것이 어른이 할 일이다. 서쪽이 내게 그랬고, 초월자인 라온과 솔리아가 내게 그랬듯이.
해피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진 모르겠다. 원체 똘똘한 녀석이었으니 알아서 잘하겠지. 나는 에일에게 손을 뻗었다. 에일은 전신에서 새하얀 빛의 가루를 내뿜고 있었다.
“에일, 넌 죽을 거다.”
히라자의 계속된 공격으로 그는 이미 그릇이 깨졌다. 내가 걱정하는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와 같이 마나가 줄줄 흘러나오다가 구심점을 잃고 흩어질 것이다.
에일이 울먹이며 내게 애원했다.
“죽고··· 죽고 싶지 않아요.”
“안다. 혼자서는 두렵겠지. 그러니 내가 너와 같이 죽어주마. 내 손을 잡아라.”
에일이 훌쩍이며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그의 마나를 흡수함과 동시에 졸졸졸! 흘러나오는 내 생명력과 마지막 성력을 그에게 전해주었다.
나는 에일에게 말했다.
“너는 가능성이야. 흑마법사 새끼들도 감히 짐작하지 못한 가능성의 덩어리야. 영광의 고원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겠다만, 대지의 정과 신의 힘을 한데 모은 너라면, 아마도 이번 죽음이 너의 끝은 아닐 것이다.”
나는 에일에게 희망을 주었다. 에일은 승천자의 지식을 이어받은 나도 짐작할 수 없는 기적의 상징이기에, 아예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가능성이 높지만도 않았다. 무한한 원숭이가 무한한 시간 동안 무한한 타자기를 두드려서 셰익스피어의 원고를 만들 확률 정도?
거기에 내 생명력과 성력을 주어 그를 축복해서 확률을 눈곱만큼 높여주었다. 에일이 정신을 붙들고 있다면, 그의 마나와 영혼은 이 행성을 떠돌다가 정명한 과정을 거쳐서 진정한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다.
에일이 다급하게 물었다.
“정말인가요? 정말 제가 다시 살아날 수 있나요?”
“그래. 새끼야.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어, 어떻게?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죠?”
어, 이 질문은 나도 예상하지 못한 건데.
그냥 대충 희망을 주려고 지껄인 말인데 여기서 ‘미안, 나도 몰라. 헤헤!’ 하면 실망하겠지. 마나는 정신과 영혼에도 깊게 영향받으니 그가 실망하면 기껏 생긴 가능성도 완벽한 0이 되어버린다.
“······.”
해피도, 에일도, 그리고 어느새 내게 다가온 나머지 오인도 나를 빤히 바라보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어··· 용기?”
“용기?”
용기. 이거 좋다. 완전 만능이네. 나는 용기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그래 용기. 남자라면 용기가 있어야지. 나처럼 엉덩이에 칼을 박을 용기만 있으면 인생 대부분은 마음먹은 대로 되기 마련이야.”
“······.”
해피도, 심지어 허탈해하던 베이누스도 얼굴에 한심함을 내비쳤다. 하지만 일자무식인 에일은 내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그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기죠? 진짜로 용기만 있으면 되죠?”
“그래.” 아마도.
“믿어요. 진짜로 믿어요.”
“그래. 믿어라.” 잘 될 진 나도 모르겠지만.
에일은 내 말에 안심하고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우리 모두 착잡한 얼굴로 에일이었던 빛의 가루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 가루마저 잘게 나뉘어서 허공으로 흩어졌다.
“······.”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해가 완연히 떨어지고, 적색으로 물든 구름만이 우리를 비춰주었다. 나도 이제 갈 때가 왔다.
죽음을 기다리는 내게 뮤온이 물었다.
“성자 션, 빛의 수호자를 아는가.”
“모릅니다. 왜 하필 빛을 수호하는 거죠? 인간 좀 수호해주면 참 감사하겠군요.”
“열심히 하고 있다. 늦어서 미안하다.”
뮤온은 거기까지 말하곤 고개를 깊이 숙였다. 트라칸도, 베이누스 프솔리아네도 마찬가지로 내게 감사인사를 했다. 나는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하······. 이번에는 진짜 오래 사나 싶었는데······.”
나는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해피가 조심스럽게 나를 받쳐주었다. 나는 마지막 힘을 내서 해피에게 속삭였다.
“재미있었다. 다음에 또 놀자.”
그렇게 나는 죽었다.
*****
푸른 바다로 가득 찬 새하얀 공간. 나는 그 공간을 날아가고 있었다.
온통 새하얀 공간이다. 왜 새하얗나 머리를 굴렸는데, 알고 보니 새하얀 하늘이 새하얀 땅이었다.
지평선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게 펼쳐진 새하얀 땅. 내가 바다로 착각했던 곳은 하늘이었다. 시선을 넓게 펼치니······.
“엥?”
이게 무슨 반전의 반전이냐. 알고 보니 파란 바다는 파란 하늘이었고, 사실 그 하늘도 하늘이 아니라 새파란 인간이었다.
새파랗고, 너무나도 커다래서 하늘을 가릴 정도로 거대한 인간. 그 인간이 고개를 숙여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냐 저건. 마치 은하수를 보는 것 같은 어마무시한 원근감이었다. 상상을 초월한 거대한 푸른 인간. 나는 그를 멍청히 바라보며 새하얀 땅을 날아다녔다.
‘여기는 어디지?’
불쑥!
혼란에 빠진 내 앞으로 푸른색 무언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인간 상체만 한 크기의 푸른 구체. 벨런스 볼이나 탱탱볼같은 질감을 지닌 구체가 나를 따라다니며 시끄럽게 재잘거렸다.
“안녕!”
대답할까? 아니, 무시하자.
“안-녕! 안녕안녕 안-녕!!”
참 시끄러운 탱탱볼이다. 내가 반응하지 않자 탱탱볼이 팔··· 로 추정되는 푸른색 작대기 두 개를 만들었다. 탱탱볼이 열심히 손을 흔들며 내게 소리쳤다.
“아아아아아아안!! 녀어어어어어어엉!!!”
이렇게까지 환영인사를 하는데 무시하는 것도 좀 그런가? 나는 멍청하니 탱탱볼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 그래··· 안녕······.”
“하하하! 히히! 만났다! 드디어 나를 인식했어!!”
탱탱볼이 바닥을 퉁퉁 튕기며 기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가 새하얀 땅을 날아가는 속도가 몇 십 배는 빨라졌고, 탱탱볼도 나를 따라오지 못하고 저만치 멀어졌다.
탱탱볼이 멀어지는 내게 열렬히 손짓했다.
“안녕! 다음에 또 봐!”
나는 탱탱볼의 인사를 무시했다. 뭘 또 보냐. 이상한 세상이고 이상한 녀석이었다.
새파란 인간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기이한 시선을 받으며 이 새하얀 세상에서 퇴출되었다.
087. 인생, 용기보다 운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