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Star Kingdoms RAW novel - Chapter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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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흰[白]
“여강 저하! 서둘러 이곳을 피하십시오. 저하께서는 기마대를 추스르셔서 적들을 막아주시기 바랍니다. 여기는 저희가 사력을 다해 저하께서 후진에 안전히 도달하실 수 있도록 시간을 벌겠습니다.”
모진오가 화살이 더는 없음을 눈치챈 주변의 부장들과 병사들이 죽음을 결심한 눈빛으로 모진오에게 말했다.
모진오는 피가 흐를 정도로 아랫입술을 깨물고 주위의 병사들을 쳐다보았다. 전율할 정도로 강력한 적을 앞에 두고도 그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모진오 자신 때문임을 스스로가 느끼고 있었다.
“저력을 다해 적을 저지하라! 내가 곧 다시 돌아오리라.”
“예! 저하. 사력을 다해 적을 저지하겠습니다. 서둘러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부하들이 대권하며 모진오에게 예를 갖추었다.
모진오는 그런 부하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바라보며 예를 받아들였다.
모진오는 이미 성벽이 적의 손에 넘어가 성 내부로 적이 침입해 들어오는 이상 더는 희망을 찾기 어려움을 직감했다.
그는 주변의 병사들에게 등을 돌려 성 내부로 달려갔다. 지휘관으로서 이곳에서 난전하여 싸우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일이었다.
깨문 아랫입술에서 핏물이 배어 나와 입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자신의 등 뒤의 병사들은 아마 단 일인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모진오는 그들의 희생을 뼈아프게 감내하며 기마대가 준비되고 있을 후진으로 빠르게 발을 놀렸다.
* * *
“대완!”
푸르렁거리며 자신을 맞이하러 온 대완을 보며 모진오는 기쁘게 웃었다.
대완의 허리춤에는 화살이 잔뜩 들어있는 화살통이 메어져 있었다. 모진오는 대완의 등에 바로 올라타 활을 꺼내 들었다.
만일 대완이 맞이하러 와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적에게 발목을 잡혀 포위되었을 것이었다.
적들의 상상을 넘어선 빠른 이동 속도는 도저히 인간의 다리로는 이겨낼 수가 없었다. 후진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적에게 포위되었다면 결코 쉽게 그 포위를 풀지 못할 터였다.
모진오는 대완을 자기에게 보낸 것이 장제임을 눈치챘다. 대완의 등에 장제의 나각이 함께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모진오는 바로 화살을 집어 들어 시위를 당겼다.
“이랴! 이랴!”
발로는 대완을 다독여 성 안쪽으로 가게 하면서 자신은 상체를 틀어 등 뒤를 겨누었다. 어둠 속이긴 하나 적들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잠시 눈을 감고 적의 기운을 추리던 모진오는 시위를 놓았다. 기적 같은 일이지만 그의 화살은 정확하게 어둠 속을 뚫고 적을 맞히었다.
“크엉!”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모진오는 적이 화살에 맞음을 확인하고 계속 화살을 재어 견제했다.
하지만 그다음부터 쏘아낸 화살에는 적이 쉽게 맞아주질 않았다. 어둠도 어둠이었지만 모진오의 화살 공격이 강력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적들이 몸을 은폐하며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적의 발을 늦추는 수확이었다. 모진오는 후방을 주시하며 입에 장제의 나각을 가져갔다.
자신이 건재함을, 후진에 가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적들의 집중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대완의 빠른 발과 자신의 활이 있다면 충분히 벗어날 수 있다 생각했다.
부우우우.
저음의 나각 소리가 깊게 울렸다. 후진에서 그것을 듣고 함성으로 답했다. 모진오는 그 함성을 따라 대완을 몰았다.
“저하!”
기마들이 성내 길가에 도열하여 횃불로 길을 밝히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장제가 모진오를 맞았다.
“장제! 대완을 보낸 것이 자네인가!”
모진오의 말에 장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모진오는 말의 머리를 선회하면서 장제에게 웃음을 지었다. 친우이자 뛰어난 지략가인 장제가 곁에 있어주기에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든든했다.
장제는 지난날 전투에서 구부러지고 깨어졌던 모진오의 애병인 구겸창을 온전한 모습으로 가지고 있었다. 수리가 온전히 끝난 모양새였다.
장제가 구겸창을 공손히 두 손으로 건넸다. 모진오는 비어있는 오른손으로는 창을 받고 왼손으로는 쥐고 있었던 나각을 장제에게 넘겨주었다.
아무렇지 않은 동작이었으나 그 행동은 둘이 서로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적들은 내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반 각도 안 돼서 여기에 도달할 것이다! 준비하라! 우리는 여기서 적을 대적하여 섬멸하리라!”
장제에게 창을 넘겨받은 모진오는 창을 쥐어 들고 하늘을 찌르며 말했다.
기마 위의 병사들이 모진오의 함성에 같이 목청을 높여 환호했다. 모진오의 존재는 병사들에게 그 어떠한 것보다 빛나는 것이었다.
모진오는 고삐를 잡아당겨 대완의 상체를 들게 했다. 대완이 뒷발로 버틴 채 앞발을 구르며 일어섰다.
적의 위세에 뒤지지 않겠다는 모진오의 행동을 시작으로 검단 성내의 기마들은 앞으로 달음질하기 시작했다.
“성벽까지 달리며 적을 몰아붙여라!”
모진오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병장기를 꼬아 쥐고 어둠 속의 적을 향해 달려나갔다.
* * *
“적의 혼란이 잠잠해졌습니다.”
마진츠가 고스보치에게 말했다. 고스보치는 잠잠히 주변을 지나가며 상황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진츠의 말대로 난잡하던 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적은 성벽 위에서 너무나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거의 한 명의 손실 없이 모든 병력이 성벽 위에 온건히 올라올 수 있었다. 눈을 이용한 위장이 적의 의표를 아주 정확하게 찌른 것이었다.
성벽 위에는 인간 병력이 거의 일만 명이나 있었으나 그들 모두 활 한 발 제대로 쏴보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실제로 성벽 위에서 마진츠와 병사들이 적군을 죽인 것보다는 통제가 되지 않아 서로 간에 물러나기 급급하다 성벽 아래로 떨어져 죽은 자가 더 많았다.
하지만 성벽 아래 활을 잘 쏘는 적의 장수가 등장한 이후로는 적의 기세가 갈무리되어 보다 본격적이고 체계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전의를 잃은 상대나 강한 투지를 가지고 덤벼드는 상대나 어차피 두 다리를 땅에 댄 범족의 적수는 아니었다.
단지 죽음을 각오하고 저지하는 적들에게 시간을 조금 더 뺏길 뿐이었다.
“이 전투 지휘관인 듯한 적의 장수를 해치워야 끝을 보겠군요. 인간들에게 그자는 추앙받을 정도로 강력한 신뢰를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그자가 항마레 님과 정루 님 그리고 우리들을 훌륭히 막아낸 자이겠지요.”
마진츠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한 범인이 달려와 부복하여 상황을 전했다.
“적의 기마 사천 기 가량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정면으로 붙어 난전을 유도할 것 같습니다. 기마의 덩치와 공간의 협소함을 이용해서 병력 수의 이점을 보려 하는 것 같습니다.”
“적의 선두는?”
“일전에 성벽에 모습을 보였던 무서운 활솜씨를 가진 붉은 갑옷의 지휘관입니다. 그의 화살에 벌써 열 이상이 당했습니다.”
“혼자서 전황을 격변할 정도로 바꾼다라……. 후훗, 적장은 자네의 아버지이신 이소호칸 대족장님을 떠오르는게 하는 군. 일전 가(駕)의 요괴들과 싸울 때 대족장님은 불리한 상황 속에서 아군의 기세를 전환할 정도로 무서운 신위를 보여주셨지. 그때의 대족장님은 정말 우리 군 전체와 비견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맹렬한 힘을 과시하셨어. 자네 말대로 저 장수를 쓰러트리지 않는 이상 적의 단결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보네. 내 인정하기는 싫지만 저자가 지금까지 보여준 것을 본다면 단신으로라도 우리 여럿을 능히 상대할 자야.”
고스보치가 옆에서 보고를 들은 후 말했다.
마진츠는 고스보치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다가 이내 결심한 듯 몸을 앞으로 움직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저자를 제가 베어야겠군요.”
마진츠의 옥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빨을 드러내며 적에 대한 적의를 불태웠다. 끓어오르는 투지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몸의 근육들이 달아올랐다. 자신의 힘을 보여줄 때가 온 것이었다.
* * *
모진오와 기마대는 달려들어 적을 상대했다. 말의 키를 합하면 호인보다 더 컸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는 위압감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특히 모진오는 다른 이보다 월등한 돌파력을 보이며 적들을 제압했다. 그는 활로 약화시킨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 화려한 창술로 호인들을 괴롭혔다.
호인 여럿이 그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역부족이었다.
모진오를 지켜보고 있는 병사들도 그의 창술 앞에 낙엽처럼 나가떨어지는 호인을 보고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마치 전쟁의 신이 모진오의 몸속에 강림한 듯했다.
“크아아압!”
지휘관의 엄청난 활약에 기마대는 더욱 힘을 얻어 적들에 대항했다. 상대적으로 성 내부의 전투는 건물들이 많아 자유자재의 이동이 불가했다. 이것은 인간의 기마대나 호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시가전은 인간에게 유리했다. 적은 숫자가 많지 않기에 협소한 곳에서 난전을 하게 된다면 병력이 많은 쪽이 공격할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이었다.
적의 강력한 일격에 쓰러지는 기마병들이 많았지만 그 사이로 다른 병사들이 도를 회수하지 못한 호인들을 일시에 공격해 물리쳤다.
모진오는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에서 힘이 넘쳐흘렀다. 창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힘이 가중되고 속도가 빨라지며 정교함이 배가되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이 상태라면 그 어떤 적이 와도 능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자신이 하나의 적이라도 더 벤다면 뒤의 기마대가 입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은 우후죽순처럼 튀어나왔다. 지붕을 타고 천장에서, 골목에서, 벽을 부수거나 시가지의 창문을 통해서 자신을 공격해 왔다.
모진오는 창의 길이와 구겸창의 구를 이용하여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고 심지어 적을 넘어뜨리기까지 했다.
스스로 의문점이 들 정도로 평소의 실력을 상회하여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모진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이 강해진다면 지금 이 순간 그것보다 더 기쁜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정신없이 창을 휘둘렀을까, 홀로 서른이 넘는 적을 베어 넘기고 보니 뒤에서 적을 상대하고 있는 아군과 너무 멀리 떨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모진오는 순간 정신을 차리고 적진에 깊숙이 들어온 자신을 살짝 책망하면서 대완의 기수를 돌렸다. 하지만 그때였다.
모진오의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의 강렬한 살기가 바로 옆에서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모진오는 이 공격을 말에 탄 상태로는 절대로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모진오는 더는 생각할 틈도 없이 대완의 안장에서 발을 떼고 창을 땅에 찍어 튕기듯 떨어져 굴렀다.
“하아압!”
순간 하얀 그림자가 달려와 시퍼렇게 빛나는 곡도를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휘둘렀다.
모진오의 애마 대완은 그 일격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앞다리 근육부터 안장까지 대각선으로 잘려 죽었다.
그 충격으로 안장에 매어져 있던 것들이 튕겨져 떨어졌다.
모진오는 창을 땅 위에 놓고 허리를 숙인 채로 대완이 죽는 모습을 그대로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일전에 붉은 털을 가진 자의 공격은 자신의 철창으로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적의 공격을 가늠하고 창의 내구력을 믿었다.
하지만 이번 공격은 막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창으로 막는다면 아무리 철로 된 창이라 할지라도 단숨에 베어버릴 일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애지중지한 말을 버리면서까지 피했던 것이었다.
“정말 좋은 반사 신경과 판단력이군. 실로 놀라워.”
하얀 털을 가진 거체가 대완의 시체를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에 모진오는 눈을 크게 치켜뜰 수밖에 없었다. 귀에 들려온 말이 울부짖음이 아닌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였기 때문이었다.
남부 지방의 어투와 그르렁거리는 낮은 울음이 섞여있었긴 했지만 확실히 인간의 언어였다.
모진오는 확실히 놀랐지만 대꾸를 하기 전에 적과의 거리를 충분히 벌려야 한다 생각했다.
지금 이 거리에서 방금과 같은 적의 공격을 받으면 단숨에 양단이 날 터였다.
모진오는 쥐고 있던 창을 내던졌다.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함이었다. 어차피 방금 대완의 등에서 튕겨 나오면서 창날이 부러져 나가 무기로는 더 이상 쓸 수 없는 듯했다.
미련 없이 창을 던져버린 모진오는 발치에 떨어져있는 무기를 집어 들고 땅을 박차 뒤로 도약했다.
그 무기는 조국의 신검 태령검이었다. 대완의 안장에 걸려있던 것이 튕겨져 자신의 발치에 떨어졌던 것이었다.
상대방은 창을 쳐내면서 틈을 보였기에 모진오는 상대와 약 3장(10m)가량 떨어질 수 있었다.
“너는 누구냐? 우리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호인이 있다니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다.”
거리가 떨어지자 침착함을 유지하며 모진오가 말했다. 모진오는 말을 하면서도 검집을 벗겨내며 곧바로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자랑스러운 염의 다섯 지파 중 백모의 지파, 이소호칸의 아들 마진츠라고 한다. 지금은 백모 지파의 오백 병력을 이끄는 중책을 지고 있지.”
마진츠는 도신을 세우며 자신을 밝혔다. 그러곤 이어 말했다.
“자네와도 같이 강한 자가 인간에게도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나의 혼신의 일격이 담긴 도격을 피하다니, 그대가 항마레 님과 정루 님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바이다. 나를 대적하기에 그대의 무용(武勇)이 충분하니 이리 말을 붙이는 것이다. 내게 그대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겠나?”
내색은 하고 있지 않았으나 마진츠는 내심 놀라며 적인 인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활만 잘 쏘는 궁의 명인이 아니었다. 순간적인 그의 몸놀림과 판단은 범족 가운데에서도 보기 드문 것이었다.
자신의 이 일격을 막으면 막았지 회피할 수 있는 자는 아마 범족 통틀어서 열도 채 되지 않을 터였다.
“나는 조국을 다스리는 왕이신 모태토의 아들, 여강 세자 모진오라 한다. 그대가 어떻게 우리말을 구사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많지만 그 의문을 풀기에는 전장의 시간은 매우 짧은 것이겠지. 그대가 적을 이끌고 있는 자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나와 대적해야 할 것이다.”
모진오는 눈을 매섭게 뜨며 마진츠와 마주쳤다. 자신보다 능히 2척(60cm)은 커 보였으나 전혀 기죽지 않은 채로 호기롭게 대했다.
마진츠는 그런 모진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대적할만한 가치가 있는 자였다.
“좋다. 전사(戰士)는 무(武)로써 자기 자신과 적을 가늠하는 법.”
마진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진오가 태령검을 길게 쥐고 달려들었다. 대완의 복수를 해야 함은 물론 적의 대장을 여기서 벤다면 전군의 사기가 오르고 적의 사기는 곤두박질할 것이 자명했다.
모진오의 달려듦에 마진츠 또한 도날을 아래로 눕히며 합을 나눌 준비를 하였다.
============================ 작품 후기 ============================
2014-08-09 출판 본으로 본문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