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Star Kingdoms RAW novel - Chapter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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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반환[返還]
무명이 사뿐히 내려앉은 그 자리 뒤로 세계가 정지한 것처럼 정적이 흘렀다.
핏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그 뒤로 커다란 물체가 떨어져 굴렀다.
그것은 팔이었다, 이소호칸의 오른팔. 강철 같은 뼈 위에 철사 같은 근육이 빽빽이 들어차 그 어떠한 것도 부수어내고 전장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던 그의 기다란 팔이었다.
가슴 한쪽과 함께 깨끗하게 베인 자리에 피가 솟아 눈 사이로 길을 만들며 허연 김을 뿜어내었다. 그런 큰 상처를 입었는데에도 불구하고 흰색의 거체는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너는, 누구냐?”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강력한 살기가 담겨있었다. 흔들림 없는 평온. 분수처럼 오른팔에서 피가 솟구치는데도 그의 위압감은 전혀 줄지 않았다.
“나는 무명. 네가 지어준 이름이지 않느냐.”
무명의 목소리에서 더 이상의 공손함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무명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낯선 것이었다. 이질적인 웃음. 왼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 상대를 비꼬는 표정은 무명이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것이었다.
“그렇군. 요물(妖物)이었군. 그 검에서 예기가 진득하게 흘러나온다 했더니, 무명을 홀리고 있었군.”
이소호칸은 왼팔을 내리며 손톱을 길게 뽑아내었다. 강렬한 적의를 내비쳤다. 옥빛 눈은 서슬 퍼렇게 빛나며 다리 근육을 팽창시키고 폭발하듯 무명에게 도약했다.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무명은 미소를 지은 상태 그대로 이소호칸의 전진을 지켜보았다.
“죽어라.”
단 한마디의 말이 조그마한 입술에서 튀어나왔다.
이소호칸의 속도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것이었지만 이어지는 무명의 움직임은 눈으로 좇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눈꺼풀을 한 번 감았다 뜰 정도의 짧은 시간에 무명은 이소호칸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달려들었다.
빙그르르 팽이처럼 두 바퀴를 공중에서 돌며 무명은 쇄도해 오는 이소호칸을 부드럽게 지나쳤다. 마치 거세게 흐르는 격류에 몸을 맡긴 채로 자연스럽게 곁을 지나치는 듯했다.
무명은 땅 위로 깃털처럼 가볍게 착지했다.
사륵.
눈 위에 살포시 착지한 무명의 몸은 이소호칸을 지나쳤다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실 한 오라기 흐트러진 점이 없었다. 오히려 지나쳐온 이소호칸이 휘청거렸다.
이소호칸은 눈을 부릅뜨고 이 믿기지 않은 사태에 해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처 생각을 이어가기도 전에 그는 상체가 기울어진 무게에 따라 땅에 고꾸라졌다.
기습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 한 팔을 잃었지만 충분히 상대의 강함에 긴장을 하고 들어간 공격이었다.
눈발이 거체의 고꾸라짐에 흩날렸다. 이소호칸이 무너지고 나서야 그의 옷이 갈라지고 왼쪽 목 언저리부터 가슴을 대각선으로 가르는 자상이 길쭉하게 벌어졌다.
상처에서는 이내 붉은 피가 꾸역꾸역 나와 흰색 옷을 붉게 물들였다.
단 일격에 절명(絶命). 그 강대한 이소호칸이 한 합에 무너졌다. 경악의 표정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풀리지 않고 추위에 얼어붙은 듯 경직된 상태로 허공을 주시했다.
“훗.”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명은 이소호칸의 시체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입술 가득 비열한 웃음을 지은 무명은 바로 검신에 묻은 몇 방울의 피를 대지에 털어내고선 검을 둘러메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고기에 정신이 팔려있는 초병들을 지나 무명은 안전하게 시내로 도착했다.
이소호칸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베었으나 무명의 몸에는 피 한 방울도 묻어있지 않았다. 온몸에 죽은 사슴을 잔뜩 문지르고 비벼댄 까닭에 무명의 몸에서는 오직 사슴의 누린내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아무런 의심 없이 정문을 빠져나온 무명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을 혼돈으로 만들어주리라. 혼란 속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억누르고 있던 고통과 슬픔을 느껴보거라.
어둑한 새벽의 시가지를 걸으면서 무명은 정문에서 불을 옮겨온 기다란 나뭇가지를 높이 들며 나무로 된 기둥에 불을 가져갔다.
노란 불꽃이 둥그런 나무 기둥에 옮겨붙으며 위로, 위로 뱀처럼 올라갔다.
석제가 아닌 목제로 이루어진 집이 대부분이었기에 뻘건 불길은 순식간에 옆으로, 옆으로 옮겨붙었다.
본래 온전한 무명의 정신 상태였으면 결코 이러한 만행은 저지르지 않을 터였다. 이 집들을 지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자신이었다. 물론 좀 오래된 건물들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었지만 대부분이 인간의 손을 탄 건물들이었다.
그것들을 태운다는 것은 곧 인간이 이곳에서 해온 노력들을 송두리째 지워 버리겠다는 것과 같았다.
불은 삽시간에 한 구역에 옮겨붙었고 그제야 집 안에 있던 자들이 불이 난 것을 눈치채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이미 번진 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무명은 일부러 거리를 지나칠 때마다 불이 번지기 쉬운 목재, 건초더미, 창고마다 불을 질렀기 때문에 불이 더 거세게 번졌다.
모든 동쪽의 백모 지파 범인들이 새벽에 일어나 이 참상에 대해 갖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불들은 성난 자신들의 모습보다 더 이를 드러내고 거주지를 불태웠다.
배를 주린 맹수처럼 불길이 지나가 곳은 불에 그을어 새카맣게 타버린 시체들과 뼈대가 황량하게 서있는 집터만이 남아있었다.
불은 측정할 수 없는 피해를 안기고 열여덟 시간 만에 꺼졌다.
그들은 화재가 일어난 것보다 더 놀라고 황당한 일을 마주해야 했다. 그 일은 화재가 일어난 후 보고를 위해 대족장인 이소호칸을 찾아갔을 때 일어났다.
오른팔이 떨어져나가 목에서부터 허리까지 긴 자상을 입어 생명을 다한 대족장의 시체를 찾아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고사가 아니었다. 어떻게 보아도 날이 있는 병기에 베여 죽임을 당한 모습이었다.
백모 지파는 경악하는 한편 그 경악을 넘어 분노하고 또 분노했다.
누가 감히 백모 지파의 지도자를 벨 수 있는 것인가. 그것도 백모의 안마당에서 말이다.
그들은 이소호칸의 사체를 두고도 시해한 자를 곧바로 찾기 어려웠다. 두 눈에서 피가 흘러나올 정도로 분이 역류한 마진츠조차도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보다 눈앞에 벌어진 화재가 너무나도 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백모의 범족들과 노역하던 인간들까지 불길을 진압했지만 시가지 절반 이상을 태우고 나서야 간신히 불길을 잡아낼 수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일어난 불은 수도 없는 생명을 앗아감은 물론 천문학적인 재산의 피해를 가져왔다. 하지만 그들은 그대로 주저앉아 쉴 수 없었다.
이어, 이소호칸의 죽음이 그들의 눈앞에 고스란히 다가왔다.
열여덟 시간의 화재 진압 동안 이소호칸은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한 채로 차가운 땅바닥 위에 흰 모포로 덮여있었다.
마진츠는 화재 속에서 어떻게든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일선에서 지휘를 하며 불길을 잡아내었다. 온몸이 숯 검댕이 범벅이었으며 자랑하던 흰 털은 불길에 그을려 짧아지고 그 끝이 검게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피곤함이 극도로 골수까지 치달았지만 마진츠는 결코 쉴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생각만 해도 눈이 충혈되고 몸이 달아올랐다.
화재의 수습을 고스보치에게 맡기고 그는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며 이 기괴한 일의 진상을 추리하기 시작했다.
누가, 언제, 어떻게 아버지를 시해(弑害)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기는 백모의 한복판, 그것도 대족장이 거주하고 있는 장원이었다.
아니 다른 이유보다 아버지를 시해할 만한 적수가 있을 리도 만무했다. 아무리 전날 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셨다고 해도 이렇게 제압될 분이 아니었다.
정황을 종합하여 보면 아버지의 잘려진 오른 손톱은 돌출되어 있지 않았지만 왼손은 발톱과 함께 돌출되어 있었다.
오른팔이 잘려 나간 것까지는 기습일 수 있었으나 그 이후의 공격은 결코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손톱과 발톱을 꺼내었으면 아무리 한 손만 남은 상태라도 결코 이렇게 단칼에 당할 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실력은 족장 급은 무리고 각 지파의 대족장 급도 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신기였다.
‘신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진츠는 다른 추리는 생략하고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주변을 뒤지며 하나의 물건을 찾았다.
하지만 마진츠는 결국 자신이 찾는 것을 찾지 못했다.
그는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무명은 아직 못 찾았는가?”
화재가 난 이후로 혼란 속에서도 인간들을 조율하기 위해 마진츠와 다른 범인들은 무명을 계속해서 찾았다.
하지만 아무도 무명을 본 이가 없었다. 무명은 이소호칸을 배알하러 온 이후로 계속 행방불명 상태였다.
“네. 아직 화재 진압 수습 작업이 마무리가 되질 않아서 백모 지파 내가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명은 화재로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를 모시던 여 범인 시종이 말하는 것을 듣고 마진츠는 눈을 떨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무명이 불에 타 죽었을 리는 없지.”
눈 위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발자국. 설마하며 믿지 않았으나 처음 그가 별채에 도착하여 아버지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에 주변에는 작은 인간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그전에 찍힌 것은 자신이 돌아가는 발자국뿐이었다. 그 발자국은 필히 무명의 것이 분명했다.
“수에르를 불러라.”
마진츠는 믿기지 않은 일에 헛웃음이 절로 나올 뿐이었지만 그래도 냉철하게 판단하여 말했다.
적국의 신물 신검이 사라져 있었다. 이소호칸의 사체 주변에 찍힌 눈의 발자국은 무명의 것뿐이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범인은, 무명임이 분명했다.
무슨 수를 사용하였는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명은 이 별채에서 신검을 훔쳤고 아버지를 베었다. 그리고 도망을 위하여 백모의 시가지를 불태운 것이다.
마진츠의 눈에 보이는 정황상 증거로 명확하게 들어맞았다. 그것 말고는 떠오르는 가능한 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검이 없어진 것을 보아 마진츠는 검의 힘이 무명에게 깃든 것이라고 예측했다.
“검을 가져오는 것이 내 실수였던 것이었나.”
묘한 분위기를 가진 검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자신을 상대함에 부족함이 없는 위력을 보여주었기에 신기한 마음에 취한 검이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올 줄은 추호도 상상하지 못했던 마진츠였다.
“어찌 되었든 아버지의 복수는 내 손으로 하겠다.”
마진츠는 화재에 누더기처럼 변한 흰 소복을 벗어던지고 검은색 소복을 입었다. 그의 두 눈에는 시퍼런 안광이 칼날처럼 빛났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전까지 이 상복을 벗지 않으리라.”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마진츠는 복수를 다짐했다. 아비를 잃었다는 상실감보다 아버지가 무명에게 죽었다는 사실. 그것에 대한 복수심이 더 온몸에서 끓어올랐다.
마진츠는 서둘러 무명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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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출판 본으로 본문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