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Star Kingdoms RAW novel - Chapter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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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배움[學]
집안 한구석에서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수에르보다 작고 얄팍한 인영이 튀어나오면서 으르렁댔다.
하지만 수에르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어디긴 어디오, 할멈 집이지. 자, 그러지 말고 이야기 좀 들어보시오.”
그 그림자는 작은 호인의 그림자였다.
본래 동쪽 지파는 흰색 갈기에 검정 무늬가 대표적이었지만 이 호인은 몸 전체가 하얀 털로 덮여있었다.
얼굴의 주름과 긴 눈썹의 털을 보아하니 상당히 나이가 든 모양새였다. 또한 허리가 굽어있어 상대적으로 다른 호인에 비해 작아 보였다.
“요 몇 년간 코빼기도 안 보인 녀석이! 내게 뭔 말을 하려고…….”
그녀는 모습을 다 드러내고 호통을 치려다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수에르의 뒤에 있는 인간 아이가 보였기 때문이다.
“수에르, 뭐냐? 저 아이는? 네가 꼼쳐 두었거나 그런 건 아니지?”
“할망구,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오. 내가 그런 간 큰 녀석으로 보이오? 당장에 목 달아나갈 소리는 하들들 마시오. 이 아이는 말이오, 대족장 어르신이 가르칠 아이요.”
“그게 무슨 콩 까먹는 소리여?”
수에르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긁적였다. 할멈에게 어찌 설명해야 좋을지 마땅한 문장이 생각나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이내 결정을 내린 듯 수에르는 피리를 허리춤에 집어넣고 입을 열었다.
“내가 더 말해줄 게 없소이다. 할멈, 난 이 애를 여기까지 데려다 주라는 대족장님의 명령을 받았을 뿐이오. 그러니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끝난 거요. 난 가보겠소. 나머지는 이 아이와 대화해 보시오.”
수에르는 말을 마치고 나서 무명의 머리를 손으로 한 번 헝클더니 이내 빠르게 밖으로 달려 나갔다.
무명은 노인이 수에르를 향해 손을 뻗으며 뭐라 외치는 것을 들었으나 수에르는 이미 멀찍이 가버린 후였다.
“후우…….”
무명과 노인만이 남겨진 현관에 고요함이 감돌다, 노인의 긴 한숨 소리에 정적은 깨어졌다.
“내 이름은 아니안이라 한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니?”
중후하지만 부드러운 소리가 무명의 귀에 와 닿았다. 다행히도 그것은 무명이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였다.
“안녕하십니까, 제 이름은 무명이라 합니다. 인간에게 이름은 주어지지 못하는 것이니 ‘이름이 없다’라는 뜻을 이소호칸 어르신께서 지어 주셨습니다.”
“아니, 아니. 내가 물어본 건 인간 이름이란다. 다른 호인들은 인간의 옷에 쓰여있는 숫자로 인간을 부를지 모르지만 난 이름을 불러주거든.”
무명은 살짝 침묵했다. 자신의 본래 이름을 밝혀도 좋을지 고민이 됐던 것이다. 하지만 곧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무명입니다. 그리 불러주시면 됩니다.”
“뭐,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리 불러주도록 하마. 그런데 도대체 무슨 연유인지 설명해줄 수 있겠니? 수에르 저 녀석은 옛날부터 이리 들치고 저리 들치면서 마구잡이식으로 쑤시고 다녀 신뢰가 안 갈뿐더러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네가 이소호칸 어르신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어떤 이야기인지 차분히 들려줄 수 있니?”
무명은 고개를 끄떡이고선 입을 열어 지금까지의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말했다. 최대한 상세하게 말해야 될 것 같아 자신이 잡혀왔을 때부터 시간 순으로 설명했다. 수레 위에서 범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부터, 잡혀와서 노비츠에게 소리치고, 이소호칸과 대화를 나눈 것까지.
시간 순으로 이야기하고, 그것이 끝났을 때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굉장한 일이로구나. 난 이곳에 온 인간 아이들의 이야기를 간간이 듣곤 하는데 너는 내가 본 인간 아이들 중에 가장 진귀한 체험을 한 녀석이구나.”
그녀는 긴 시간 동안 고개를 끄떡이며 무명의 이야기를 경청하다, 이야기가 끝나자 입을 열었다. 그녀가 듣기에도 무명은 다른 아이들과 확연히 차이점이 있는 아이였고, 그렇기에 이소호칸 어른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일단 네 나이가 몇이냐? 이곳에서 지내려면 숙소가 필요한데 나는 그것을 나이순으로 배분한단다. 내일 어르신과 일정을 맞추기 전에 네 숙소를 정해야겠다.”
“아홉입니다.”
무명의 이야기를 듣고 아니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탁자로 걸어가 서랍을 열고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책에는 무명이 이해하지 못하는 지렁이 같은 글씨들이 잔뜩 쓰여있었다. 인간이 쓰는 언어는 아닌 듯했고 범어인 듯했다.
“사흘 전에 아이들 수백이 들어와서 남아있는 숙소가 없구나. 어쩔 수 없지, 그나마 큰 방에 배정해 주겠다. 아마 여름이 가기 전에 집 몇 채를 더 지어야 할 것 같구나.”
그녀는 책을 탁 덮으며 말했다. 책은 덮이면서 희뿌연 먼지를 뿌렸다. 햇살에 먼지 입자가 두둥실 떠돌았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여기서 남자 인간을 관리하고 있다. 나이가 먹을 만큼 먹었기에 먹고살려면 이런 일이라도 해야 하지. 아이들은 너도 알고 있다시피 여기서 농작물을 경작하거나 대장간에서 도구를 만들고 있지. 웬만한 일에는 거의 차출돼 일꾼으로 쓰이고 있단다. 우리 범족보다는 일을 잘하고 솜씨 있게 해내니까.”
“그렇습니까?”
“범족이 인간을 노예로 쓴 것이 10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라 다들 나이가 어리단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20대 중반이지. 네가 여기서 잘 적응했으면 좋겠구나. 보통의 호인들과 달리 나는 너희 인간들이 있어 우리가 굶주리지 않고 잘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아니안이 일어나서 무명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지만 푸근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무명은 지금까지 지켜봤던 호인들 중에서 백모 지파가 가장 인간에게 호의적인 지파라 생각했다.
“어쨌든 네가 어떻게 이소호칸 어르신께 가르침을 받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너의 잠자리를 제공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네가 여기에 온 이유도 바로 그것일 테고 말이지.”
그녀는 무명을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
무명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부터 진짜 이곳에서의 삶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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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31 출판 본으로 본문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