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Star Kingdoms RAW novel - Chapter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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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편지[書]
숙소의 아이들은 점심을 먹고 모두 일터로 나갔다. 이마진과 무명도 일전과 같이 호미를 쥐고 일터로 나갔다.
평소에 둘이 글공부하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본래 이마진은 처음 온 아이의 적응을 위해 곁에 가장 많이 붙어있기에 무명과 함께 다니는 걸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이 호미를 쥐고 땅을 갈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본래 호미로 땅을 갈아엎으며 매일같이 단어와 글쓰기를 배우던 이마진이었으나 오늘은 무명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이마진은 남에게 자신의 과거사를 세세히 밝힌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빨리 말해주세요.”
무명이 먼저 쪼그려 앉으면서 말을 꺼내자 이마진은 결국 결심하고 무명 곁에 앉아 입을 열었다.
“알았어, 해줄게. 보채지 좀 말아.”
이마진이 결심하고 이야기해 주겠다고 하자 무명은 얼굴 한가득 미소 지으며 이마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여기에 와서 벚꽃이 네 번이나 피고 졌으니 이제 4년째가 되었지. 4년 전 나와 공진희는 조국(趙國)의 남쪽 변방 마을에 살고 있었어. 마을 이름은 곡천(谷泉)이었는데 지방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아.”
이마진의 말에 무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은 이마진이 하는 말에 집중하고 있다는 행동이었다.
“공진희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야. 나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종이를 만들어 팔았어. 대대로 아버지 집안이 종이를 만들어 왔거든. 하지만 종이를 만드는 작업만으로는 집안이 풍족하기 어려웠지. 아버지는 공진희 아버지에게 땅을 빌려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어. 땅에서 나는 수확물의 3할 정도를 공진희 아버지에게 땅을 빌린 삯으로 드려야 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어렸을 때 굶주린 기억은 없었어.”
이마진은 가족을 추억하며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슬퍼 보이면서도 어딘가 따스함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공진희 집안은 고조할아버지가 조국에서 벼슬을 했기 때문에 그때 모은 재력으로 마을 내에서 상당히 권력 있는 집안이었어. 비록 현재는 벼슬하는 사람이 없어 그 위세가 줄었지만, 조그마한 촌락 주변에는 그만한 가계가 없었고 주변 땅은 대부분 공진희 아버지 소유였어. 마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려워지면 공진희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거나, 땅 한두 마지기를 빌려다 개간해 농작물을 길렀지.”
이마진은 계속 호미를 놀리면서 이야기했는데, 공진희의 아버지를 언급하는 순간만큼은 손을 쉬고 그를 기렸다.
공진희의 아버지가 이마진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란 것을 무명은 그의 행동에서 알 수 있었다.
“어쨌든 그분이 아버지에게 땅을 빌려 주었기에 나는 그 계기로 어렸을 때부터 공진희를 알게 되었어. 공진희는 위로 누나가 둘 있었는데, 큰누나는 이미 결혼해 분가한 상태였고 둘째 누나와 같이 살고 있었지. 아버지와 함께 추수한 농작물을 공진희 아버지께 드리러 갈 때마다 나는 그녀의 누나와 그녀를 볼 수 있었어. 나와 그녀의 누나는 나이 대가 맞질 않아 잘 어울리지 못했지만, 공진희는 나와 잘 어울려 놀고 말 상대가 되어주었지.”
이마진은 두 눈을 감고 꿈을 꾸듯 말을 이었다. 과거를 기억하면 할수록 그 순간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듯했다.
“그렇게 평화로운 나날이 흐르던 때였어. 내가 열한 살이 되었을 때 딱 무명, 네 나이 또래였을 거야. 그때 마을 전체에 역병이 돌았고, 그 역병으로 나는 부모님을 잃고 천애 고아가 되었어. 그때 내 심정은 이 세상이 전부 무너지는 듯했지. 정말 한순간에 모든 것이 폭삭 무너졌어. 슬픔과 우울함이 내 마음에 가득 차있었지. 병든 사람들이 쓰던 모든 것을 불태웠어.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 나의 물품, 나의 삶까지 모두 불타올랐어. 그때 나를 구원해 준 게 바로 공진희야.”
이마진은 당시 암울하고 비참했던 모습이 기억나는지 양미간을 잔뜩 구부리며 말했다.
“그때 공진희가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었어. 그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몰라. 그전까지는 그녀를 단지 친구로 생각했지만, 그 후로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어. 그리고 그녀는 나를 자신의 아버지에게 부탁해 그녀의 집에 거둬주게 했지. 나는 그녀에게 그 어떠한 것보다 고마움을 빚졌어. 그 당시 그녀가 없었으면 나는 죽고 말았을 거야.”
이마진이 조금 침울해져 감상에 젖자, 무명이 그를 위로하듯 손을 들어 어깨를 쓰다듬으며 나직이 말했다.
“공진희 누나가 힘이 되어 주셨군요.”
“응, 그래.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나에게 의지가 되어주었지. 그녀는 나를 구원해 준 빛과 같아.”
이마진은 공진희의 모습을 떠올리자 두 볼이 붉게 상기되었다. 언제 어디서라도 그녀를 생각하면 이마진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했다.
무명은 그런 모습에서 이마진이 진심으로 공진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녁 일과가 끝나고 아이들은 모두 숙소에 돌아가 하루를 마감했다.
이마진은 공진희의 답장에 두근거리며 잠 못 이룰 걸 알면서도 자리를 펴고 누웠고, 무명은 그의 옆에 누워 잠을 청했다.
내일부터는 무명도 수에르에게 피리를 배운다는 새로운 기대가 있었기에 오랜 시간 잠을 이루지 못하다 간신히 잠에 들었다.
“편지 왔다!”
이소호칸과의 공부가 끝나고 장원을 나서는 무명에게 배웅하러 온 수에르가 품에서 편지를 꺼내 주었다. 그는 장원 안쪽에서 공진희에게 편지를 일찌감치 받아 온 모양새였다.
수에르의 얼굴은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올라있었다. 그는 편지 내용 듣는 것을 하나의 낙으로 생각할 정도로 그 시간을 즐겼다.
“오! 답장이 빨리 왔네요, 수에르 형.”
편지가 수에르의 손에서 무명의 손으로 옮겨가면서 무명은 슬며시 포개진 편지를 폈다.
본래 이마진에게 가는 편지이기에 이마진이 먼저 읽어 봐야겠지만, 수에르가 편지를 전해주는 조건으로 바로 편지 내용을 보고 싶다고 하자 처음에는 난처해하다 근래에 수락한 상태였다.
이제 이마진은 무명에게 허물없이 터놓고 지내는 상태가 되어 무명도 부담 없이 편지를 열어 수에르에게 범어로 읽어주었다.
“수에르 형! 처음으로 공진희 누나가 이마진 형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썼어요!”
“그래?! 어디, 어디?”
수에르는 자신이 읽지 못하는 인간의 언어였지만 관심을 가지고 편지 내용을 살폈다. 무명이 손가락으로 짚은 곳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문자 나열이 가득했지만 그는 호기심을 잃지 않았다.
“이게 사랑한다는 글자야?”
“네. 지금까지는 ‘좋아한다, 기쁘다, 보고 싶다’라는 글귀만 써놓았는데 이건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명실상부하게 서로를 깊이 사모하고 있다는 거죠. 그리고 이마진 형보다 공진희 누나가 이마진 형을 먼저 사모했다고 하네요!”
“뭐? 진짜야?”
무명과 수에르는 편지에 대해 두런두런 서로의 소견을 이야기했다. 편지라는 공통의 주제가 있기에 둘의 대화는 끊어지지 않고 길게 이어질 수 있었다.
이마진은 지난번 편지에서 자신이 어렸을 적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공진희를 좋아하게 되었던 계기를 설명하며 사랑의 고백과도 같은 글귀를 적어두었다. 그리고 이번 답장은 그 고백을 받아들이는 공진희의 쑥스러운 사랑의 마음이 담긴 전언이었다.
그녀는 이제야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고, 무명과 수에르에게 감사해했다.
“이번 편지에는 형 이야기도 있는데요?”
무명이 싱글벙글하며 편지의 다음 내용을 수에르 앞에 내밀자 수에르의 눈이 동그래지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수에르 형이 공진희 누나에게 편지를 가져다주고 먹과 붓, 종이를 줘서 너무나도 고맙대요. 그리고 형의 웃는 모습이 좋다네요. 범족은 모두 무뚝뚝한 줄 알았는데 형을 보고 그런 선입견이 사라진 것 같아요.”
“오, 그래? 내 웃는 모습이 좋다고? 앞으로도 많이 웃어야겠네, 흐흐. 대부분의 범족이 무뚝뚝한 건 사실이지. 범족은 잘 웃지 않는다구. 표정의 변화가 없어. 좋든지 싫든지 간에 그게 표정으로 잘 안 드러난다니까. 나도 유기이에게 고백했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유기이요? 그분이 누구신데요?”
무명은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이름이 나오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아, 말 안 해줬었나? 내 아내야. 범족은 성인이 되면 결혼할 권리가 생기거든. 첫 번째는 아버지가 정해준 정인, 두 번째는 서로가 좋아하는 정인, 세 번째는 결투로 정한 정인과 결혼하게 되는데, 나는 아버지가 정인을 정해주지 않아 서로가 좋아하는 정인이나 결투로 정인을 얻어 결혼했어야 했어.”
수에르가 자신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무명에게 알리자, 무명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수에르는 그런 무명을 보며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 이었다.
“유기이는 소꿉친구였는데, 나는 그녀와 어린 시절을 매일 같이 지냈기 때문에 그녀를 좋아했거든. 그런데 그녀는 별로 그런 내색을 안 했어. 다른 범족들과 다름없이 무표정 일색이었거든. 내가 그녀에게 고백하는 순간까지 그녀의 표정은 바뀌질 않았고 대답도 안 해줬었지. 그래서 나는 그녀가 나 말고 다른 이를 좋아하고 있는 줄 알았지 뭐야. 다른 이들과 결투해서 연인을 얻으려 준비하려던 찰나에 그녀가 나를 찾아와 결투를 왜 준비하냐고 묻더라고. 그제야 나는 그녀가 내 고백을 받아들인 걸 알았지. 아니, 고백을 받아들였으면 기쁜 내색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수에르가 다시 생각하니 약간 분통이 터진 듯 말을 내뱉었다.
무명은 수에르의 말이 끝나자, 바로 되물었다.
“아내가 있었어요? 총각 아니었나요?”
“이 녀석이 누굴 갑자기 총각으로 만들어. 너, 그러고 보니 요즘 말이 참 능숙해졌다? 일상 회화가 상당히 매끄러운데? 이 상황에서 총각이라는 단어도 쓰고 말이야.”
“지금 말하는 주제가 그게 아니잖아요. 수에르 형, 정말 아내가 있어요?”
“그렇대두. 결혼한 지도 꽤 되었어. 다들 두 번째 아내를 얻으라고 성화인데 뭘 놀래.”
“두 번째 아내라뇨?”
무명은 밝혀지는 수에르에 대한 새로운 사실에 놀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
“유기이와 나 사이에 아직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거든. 범족 남자는 많은 아내를 가질 수 있어. 특히나 아내에게 자식이 없다면 다른 두 번째, 세 번째 아내를 가질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기도 하지.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신의 강함을 평생이 가도록 수련하기 때문에 집안 살림을 잘 안 챙겨. 생활은 거의 아내에게 맡기고 육아도 아내에게 맡기는데, 아내가 많으면 많을수록 편하기 때문에 자기 능력만 되면 수십 명의 아내도 거느릴 수 있지. 뭐, 나는 대족장님처럼 한 사람만 바라보는 주의라 아이를 못 가진다 해도 유기이 하나면 만족해. 대족장님도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하셨지. 아이가 생기지 않아 많은 자들이 계속해서 여러 여자들과 결혼을 요구했지만 그 뜻을 꺾지 않으셨어. 결국 뭐, 말년에 멋진 아들을 얻어 그런 이야기가 쏙 들어가 버렸지만 말이야. 나도 언젠가 득남할 수 있겠지.”
수에르의 말에 무명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가 벌써 결혼한 것도 충격이지만, 그들이 많은 여자 호인과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문화였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권위 있는 귀족이나 왕들만이 후손을 많이 남기기 위해 결혼을 여러 번 한다고 들었지만 범족은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듯했다.
“뭐,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개시켜 줄게. 그래도 나와 결혼한 다음 감정 표현을 많이 하게 되었다구. 우리에게는 연애라는 기간이 없어서 이마진과 공진희의 이런 서신이 풋풋하게 나를 자극시킨단 말이지. 편지 내용을 아내에게도 말해주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사랑이라는 감정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달까?”
수에르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피리를 꺼내 들었다. 그가 애용하는 대나무 피리였다.
“자, 편지를 다 읽었다면 피리를 배워봅시다.”
무명은 피리를 빼 든 수에르를 보며 편지를 접어 품에 넣고 그 속에 있던 자신의 피리를 꺼냈다. 수에르가 만들어준 조그만 피리였다.
붉은색 광택이 은은하게 났는데, 수에르가 평소 피리를 깎기 위해 대나무를 모으는 곳에서 가장 색이 좋은 대나무를 골라 만들었다고 한다.
수에르의 말에 무명은 숙소로 걸어가며 피리 잡는 법을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피리를 손에 쥐었다.
전날에는 수에르가 무명을 어깨에 태워 이 길을 이동했지만, 수에르가 무명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그는 이 길 걷는 시간을 강의 시간으로 정했다.
수에르와 무명은 두런두런 이야기하면서 피리를 불고 가르치며 숙소로 향했다.
이 시간은 금세 무명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수에르는 이소호칸처럼 분위기가 무겁지도 않았고, 자신도 즐기면서 무명을 가르쳤기에 배우는 입장의 무명은 배움의 압박감을 받지 않고 시간을 즐겼다.
또한 음악 자체가 가지고 있는 편안한 성질 때문에 무명은 수에르와의 시간을 거의 놀이로 생각했다.
그렇게 봄날의 따사로운 아침 일과가 지나갔다.
============================ 작품 후기 ============================
2014-07-31 출판 본으로 본문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