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Star Kingdoms RAW novel - Chapter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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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랑[愛]
편지는 수에르를 통해 공진희에게 전해졌지만 만나기로 한 당일이 돼서까지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이마진은 오늘이 오기까지 내심 크게 기대하고 있었지만 답장이 오지 않는 것에 노심초사했다.
이마진의 계속되는 심경의 변화를 눈치챈 무명은 답장이 오지 않았으면 다른 날로 미루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이마진은 일정을 미뤄서라도 그녀를 만나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마음을 다시 가다듬었다.
“약속 장소와 시간은 미리 다 편지에 언질해 두었고 그녀도 알고 있을 테니 약속 장소로 가보자. 수에르 님도 도와주시고 아내 분인 유기이 님도 오늘 저녁에 오시기로 했으니 나를 위해 수고하는 분들이 이리 많은데 내 심정이 흔들리면 안 되지.”
이마진은 긴장감으로 흔들리는 무릎을 꽉 잡아 쥐었다.
방 안의 아이들은 모두 흐트러진 이마진의 모습을 보고 상당히 침울해져 있었다. 그들은 이마진이 전날 공진희를 만나러 간다고 미리 언급했기에 그가 얼마나 큰 모험을 하려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무명은 그런 이마진의 모습을 보고 어깨를 한참이나 잡아주었다. 참으로 용기 있는 결단이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압박은 그것을 상회한 듯했다. 이곳을 벗어나 이동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행동이었다. 지난날 보았던 처참히 삶아져 먹혀버린 아이들처럼 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여러모로 이마진의 행동은 지금까지 자신이 고집해 온 규칙을 철저히 무너트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오직 공진희와의 만남을 위한 것이었다. 마음이 어지러운 이마진의 곁으로 무명이 지금까지 받은 편지를 쓱 밀었다. 이마진은 그 편지들을 다시 한 번 손에 쥐고 읽어 내리며 공진희를 기억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 그녀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다짐했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이마진은 편지를 읽고 위태위태한 자신의 모습을 강력하게 곧추세웠다.
그리고 무명을 바라보며 무언이지만 굳은 의지를 전달했다. 무명에게 참으로 감사했다. 자신이 어렵거나 힘들 때 그보다 믿음이 가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이곳에는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은 남이 기댈 만한 자리를 만들어주는 남자였지, 자신이 기댈 만한 자리를 찾진 못했었다. 하지만 나이도 열 살이나 가까이 차이 나는 무명에게 확실히 편안함과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수에르의 아내, 유기이와 만나기로 약조한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무명은 이동 준비를 시작했다. 혹시 몰라 이마진과 자신의 얼굴에 숯을 묻혔다. 유기이가 있긴 했지만 혹시나 발각될 위험이 있었기에 무명은 주의에 주의를 기울였다.
마침 달도 기울어져 있어 밤이 환하지 못한 데다 하늘엔 적당히 구름이 끼어있어 별빛이나 달빛이 땅 위에 쉽게 내리지 못했다. 저녁 밤을 이동하기엔 최적의 시기였다.
이마진과 무명이 문을 나서자 아이들이 모두 나와 둘을 배웅했다. 심술궂은 주타와 고누마저도 이마진의 성공을 기원하며 손을 흔들었다.
이마진의 행동은 아이들에게 하나의 희망과도 같았다. 자신들도 언젠간 여자아이들과 알콩달콩한 연애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러한 희망조차 없었던 삭막한 생활이 이어졌지만 이마진은 사랑이라는 진실한 행동을 통해 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있었다.
오야의 시각. 이마진은 아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무명과 함께 나왔다. 달빛과 별빛이 약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자신들이 들킬 확률도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이동하는 것도 하나의 고난이라면 고난이었다.
보이지 않는 길을 감각에 의지한 채로 이각 정도를 걸었다. 혼자였으면 걷다 수번은 넘어졌겠지만 이마진과 무명은 서로 팔짱을 낀 채 걸었으므로 한 사람이 균형을 잃거나 넘어질 거 같으면 서로를 굳게 지탱해 주었다.
조금 이르지만 쓰르라미 소리가 귀를 조용히 울렸다. 둘은 약속한 장소 즈음에 도착한 것 같자 기척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피, 피.’
작은 소리였지만 풀피리 소리가 들렸다. 쓰르라미의 소리에 섞여 희미했지만 이마진은 정확하게 소리를 잡을 수 있었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주변에 무성히 나있는 잡초 중 기다란 이파리를 가진 것을 손으로 잡아 뜯어 입으로 가져갔다.
‘피, 피이.’
이마진이 풀피리 소리에 풀피리로 화답하자 들리는 풀피리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무명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이마진 또한 걷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낮추며 무명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뭐야, 왜 멈추는 거야?”
이마진에게 보이지 않겠지만 무명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이미 앞에 와 계시네요.”
무명은 어떤 인기척 같은 것이 빠르게 자신들 앞에 다가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 기척과 존재감으로 알 수 있던 것이다.
그것은 수에르와 매우 비슷한 느낌이었다. 무명은 조심스럽게 범어로 말했다.
“유기이 형수님, 맞으신가요?”
“뭐야, 들킨 거야?”
어둠 속에서 새파란 두 눈이 갑자기 떠오르며 말했다. 그 목소리는 범어로 말하고 있었다.
무명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범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마진은 낮게 깔리는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듣고 식겁했는지 무명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두 눈동자는 더욱 가깝게 다가왔다. 이마진은 상대가 수에르의 아내인 유기이임을 넌지시 직감했지만, 어둠 속에 떠오른 푸른 호인의 눈은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야밤에 날카롭게 자신을 주시하며 으르렁거리고 있는 호인을 보고 기절하지 않은 것만 해도 참으로 다행이었다.
“안녕하세요, 무명이라 합니다.”
“안녕? 수에르의 아내, 유기이라고 해. 네가 무명이고, 그 옆쪽이 이마진? 맞니?”
그녀가 반갑게 말했다. 그제야 무명은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불안을 한결 덜 수 있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이 계획의 전부와 같았다. 이마진과 자신은 이제 그녀의 인도만 받으면 되었다.
“네, 이쪽은 이마진 형입니다.”
“오, 남편 이야기 속의 주인공을 실제로 만나보니 너무 반갑다. 인간치고는 늠름하게 생겼네. 그리고 너, 범어를 상당히 잘 말하는구나. 대족장님께서 가르칠 만한 이유가 있네. 그리고 내가 너희 앞에 먼저 와있다는 사실도 눈치채고 상당히 예리하구나.”
유기이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형수님에게 수에르 형의 느낌이 나서요. 너무나도 닮아 근처에만 오셔도 알 수 있었죠.”
이마진은 무명이 범어로 그녀와 대화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명은 범어를 능숙하게 말하며 호인과 능수능란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수에르와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랬지만 보면 볼수록 진귀한 능력이었다.
“이마진 형, 유기이 형수님이십니다. 이제 형수님과 같이 공진희 누나를 만나러 가면 돼요.”
무명은 이마진에게 유기이를 소개하며 말했다. 이마진은 고개를 끄덕거렸고 유기이는 이마진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 참으로 가상했기 때문이었다.
유기이는 무명에게 주의해야 할 사항을 몇 개 알려준 후 둘과 함께 장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둠에 눈이 적응된 듯 흐릿하지만 조금씩 주변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기이의 몸집은 상대적으로 수에르보다 작았다. 그녀는 어깨에 거대한 무언가를 메고 있었는데 잘은 보이지 않았다. 둘은 희미하게 보이는 유기이의 실루엣을 따라 그대로 걸었다.
유기이가 인도한 길은 일반적인 길이 아니라 갈대와 대나무가 무성한 숲이었다. 이 길을 이용한다면 상대적으로 들킬 위험이 적어 보였다.
유기이는 둘의 얼굴이 숯으로 가득 찬 것을 보고 한참이나 웃었다. 쓸모없는 짓이라 놀리기도 했다. 범족은 누구나 어둠 속에서도 대낮처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낮보다 밤에 더 먼 곳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밤에 범족의 눈을 피하기 위해 얼굴에 숯을 바르고 이동하는 것보다는 엄폐물이 많은 곳으로 이동하고, 흔적과 냄새를 지울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용케 모습을 감추었다고 해도 범인은 천성적으로 흔적과 냄새를 잘 추적하기 때문에 금세 찾을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면서 그녀가 건네준 것을 받았는데, 털로 된 신발과 누린내가 나는 가죽 한 장이었다. 유기이는 신발을 털 신발로 갈아 신고, 이동하는 내내 가죽으로 몸을 문지르라고 했다. 털 신발은 둘의 족적을 흐리게 해줄 테고 가죽은 냄새를 지우는 용도로 사용될 터였다.
무명은 유기이가 하는 말을 그대로 이마진에게 전해주며 유기이를 따랐다.
한참을 걸어가니 희미하게 불빛들이 보였다. 유기이는 불빛이 보이자 등에 둘러메고 있던 거대한 물체를 내려놓았다. 둘은 그것이 바구니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너무나도 거대한 크기 때문에 바구니보다는 조그마한 배같이 보였다.
“여기부터는 여기에 들어가있어. 내가 들어줄 테니까. 새벽이지만 시내로 너희 둘을 데리고 돌아다니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거든. 가죽은 온몸 구석구석에 비벼두었지? 내가 맡아도 인간 냄새는 거의 안 나니까 괜찮을 거야.”
둘이 머뭇거리며 바구니 안으로 들어가자 유기이는 바구니 위를 모포로 덮고 그것을 들었다.
“아, 안 무거우세요?”
무명은 모포를 살짝 들춰내고 유기이에게 말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구니를 들고 이동했다.
“걱정 마, 너희 둘을 드는 것은 하나도 무겁지 않으니까. 그나저나 앞으로는 숨을 죽이고, 말도 하지 말고 조용히 바구니 속에 있어. 내가 바구니를 땅에 놓고 세 번 바구니 통을 치면 그땐 나에게 말을 걸어도 된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계속 걸었다. 무명은 이마진에게 그녀의 말뜻을 전해주고 그 이후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숨을 죽였다.
유기이의 걸음은 이전보다 상당히 빨라져 있었다. 바구니 안은 유기이의 걸음마다 조금씩 흔들려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포 모직의 미세한 틈 사이로 빛이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호족이 시내에 간간히 세워놓은 화로 때문에 밖은 밤이지만 일정 거리마다 빛이 넘실거렸다.
둘은 꼼짝없이 바구니 안에서 쪼그려 앉은 채로 서로의 눈을 쳐다보면서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목이 심히 탈 만도 했다. 아무리 유기이가 도와주고 있다고 하지만 이 모포 한 장이 벗겨지면 자신들은 벌거숭이처럼 이 위험한 지역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었다.
유기이가 걷는 시간은 일각도 되지 않았지만 바구니 안의 둘에게는 한 시진이 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유기이가 걸음을 멈추는 데까지 체감상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어어, 마누라.”
수에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이마진과 무명은 장원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외각 초소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둘은 수에르의 목소리를 듣고 몸과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수에르, 근무는 잘 서고 있는 거야?”
스쳐 들어도 기분 좋은 말투가 유기이의 입에서 나왔다. 이마진이 듣기에는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할 터였지만, 무명은 수에르와 유기이가 상당히 친하고 격식 없이 편히 지내는 부부 사이라는 것을 첫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내가 부탁한 건 가져왔어?”
“음, 가져왔지. 같이 보초를 서기로 한 옴베는? 왜 너 혼자 보초를 서고 있는 거야?”
“옴베 녀석은 내가 확실히 처리한다고 했잖아. 숙소에서 자고 있어. 오전, 오후 통틀어 엄청 굴렸거든. 몸살이 날 정도로 말이지. 내가 녀석을 배려하는 척하고 혼자 보초 서겠다고 했거든. 뭐 솔직히 이 장원에 어떤 간 큰 녀석이 몰래 들어올 생각을 하겠어. 외각 보초는 혼자라도 충분하다고 고스보치 님이 생각하셔서 이렇게 안전하게 혼자 나와있지.”
수에르는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그는 바구니 앞으로 다가오더니 위에 덮인 모포를 슬쩍 들어 올렸다. 그 속에는 이마진과 무명이 흠칫한 표정으로 수에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에르는 둘을 보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여긴 아무도 없다고. 아니, 나와 유기이를 제외하면 말이지. 어쨌든 계획한 것보단 더 좋게 됐지 뭐야, 하하핫. 옴베 녀석이라고 이제 갓 들어온 신입이 있는데 훈련을 상당히 힘들게 시켰더니 완전 곯아떨어졌어. 덕분에 보초를 혼자 서고 있으니 너희 둘이 이 안으로 들어가는데 아무도 제재하는 사람이 없다 이거지.”
무명은 수에르가 말하는 것을 듣고 기뻐하며 이마진에게 그대로 전했다. 이마진은 수에르에게 고개를 거듭 숙이면서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자, 답장을 조금 늦게 받았지만 읽어봐.”
수에르가 품을 뒤적이며 서신 한 통을 꺼내 이마진에게 주었다. 이마진은 직감적으로 공진희가 쓴 편지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황급히 서신을 열어보았다. 무명 또한 그 서신을 같이 보았다.
외곽 초소 화로 빛에 의지하여 편지 속의 글은 춤추듯 일렁였다. 문구는 상당히 짧았지만 이마진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오르게 만들었다.
[가랑께, 기다리겠습니다. 부야가.]편지는 짤막했으나 그 내용이 긍정임을 확인하자 무명 또한 덩달아 기쁜 표정을 지었다. 수에르와 유기이는 그런 둘을 보고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자, 그럼 유기이와 함께 들어가서 만나도록 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만남이니 옷매무새도 신경 쓰고 말이야.”
수에르가 장원 안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유기이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바구니를 들어 올렸다. 수에르는 모포를 살짝 걷어내어 밖을 볼 수 있게 했다. 유기이가 괜찮을까, 라고 물었지만 수에르는 문제없다고 말했다.
유기이는 수에르와 문을 지나쳐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조금만 더 가면 숙소가 나온다구.”
유기이는 즐거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몇 분 지나지 않아 바구니가 내려졌다.
유기이는 모포를 더 걷곤 이마진의 등을 손으로 일으켜 세운 후에 밀었다. 무명은 이마진이 바구니 안에서 나와 숙소 앞에 서있는 인영을 향해 다가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너무나도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이마진? 가랑?”
인영에서 그토록 고대하면서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틀림없이 그것은 공진희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머뭇거리던 이마진의 걸음걸이가 단박에 바뀌어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기대에 가득 찼다.
“부야? 부야 맞지?”
이마진이 화색하며 그녀에게 닿기 위해 다가갔다. 그녀 또한 이마진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며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가운데 둘은 만나 깊은 포옹을 하였다.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하던 순간이었다.
“킁.”
바구니 위에서 유기이가 콧물을 훔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호랑이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나 눈에는 살짝 눈물이 고여있었다.
무명 또한 그녀와 같이 자신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여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포옹하는 장면이 이렇게나 감명 깊고 감동을 주는지 지금까지 몰랐다. 가슴 한편에 따스함이 복받쳐 온몸 구석구석을 데워주는 듯했다.
유기이 또한 그런 감정을 고스란히 공유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녀 또한 눈시울이 붉어져있는 듯했다. 종족에 상관없이 사랑의 감정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무명은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답죠.”
무명은 유기이에게 범어로 말했다. 유기이는 무명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안타깝지만 반 시진밖에 벌어줄 수 없단다. 이마진에게 가서 말해 줘. 반 시진 동안 이야기하고 여기로 다시 돌아오라고. 본래는 따라가서 반 시진이 되면 같이 나가는 게 좋겠지만 둘의 포옹을 보니 오붓한 시간을 우리 둘이서 망칠 수 없을 거 같네. 말 좀 전해주겠니? 하지만 꼭 반 시진 뒤에는 여기로 와야 한다고 전해줘.”
유기이는 무명에게 말했고 무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명은 바구니에서 나와 이마진과 공진희가 포옹하는 곳으로 쑥스럽게 다가갔다. 둘은 포옹하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눈을 뜨고 그곳을 바라보았다.
“무명이구나. 고맙다, 가랑을 만날 수 있게 해주어서.”
공진희가 먼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왔다. 얼마나 감정이 벅차올랐으면 기쁨의 눈물이 얼굴에 가득했다. 그것은 이마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무명. 너에게 너무나도 고맙다. 네가 없었다면 이렇게 부야를 만나보고 안을 수도 없었을 거야. 나는 살면서 이렇게 감동을 받은 적이 없단다. 이런 감동을 받을 수 있게 해준 너에게 감사한다.”
이마진은 눈물을 훔쳐내며 말했다. 무명은 그런 둘의 시선에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한 게 뭐 있나요. 이게 다 두 분이 서로를 만나겠다는 용기가 만들어낸 결실이죠. 이마진 형, 공진희 누나. 아쉽게도 반 시진밖에 두 분이 만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본래는 저기 뒤에 서있는 수에르 형의 아내이신 유기이 형수님이 반 시진 동안 두 분과 같이 있다 시간이 되면 이마진 형하고 이동하려 했는데, 두 분이서 오붓한 시간을 가지라고 곁에 있지는 않으시겠다고 하네요. 반 시진 동안 이야기를 나누시고 이곳으로 다시 오시면 됩니다. 일분일초라도 늦으시면 안 돼요.”
무명이 말하자 이마진과 공진희는 멀리 떨어져있는 유기이의 배려에 감사하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유기이는 그런 그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이따 반 시진 뒤에 뵈어요.”
무명이 뒤로 물러나며 말하자 이마진이 서둘러 말했다.
“수에르님과 유기이님에게도 어떻게 감사를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가 너무나도 감사해하고 있다고 꼭 전해주렴.”
“물론이죠. 뭐, 수에르 형이나 유기이 형수님에게는 두 분의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를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실 거예요. 부담 갖지 마시고 이야기 잘하고 오세요.”
무명은 기분 좋게 속삭였고 곧 둘에게서 멀어져 유기이의 바구니로 왔다. 유기이는 돌아온 무명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에르는 다른 범족과 다르게 너무 감성적이라 둘의 이야기를 듣고 가끔 집에 와서 부러워하기도 한단다. 나도 사실 둘이 굉장히 부러워. 하지만 나는 다른 범족 여자들보다는 많이 행복한 편이지.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고 있으니까. 범족은 워낙 연애라는 것이 전무해서 이런 게 너무 짠하게 다가오기도 해. 나도 연애를 해보고 싶기도 하고 말이야.”
무명은 그제야 유기이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하얀 털을 가지고 있는 동글동글한 얼굴의 범족 여인이었다. 털의 갈기는 모두 백색이었고 무늬는 없었다.
호인들의 얼굴이 워낙 남녀 구분 없이 비슷하게 생겨서 보통 다 자란 크기로 남성과 여성을 쉽게 구분하였지만 유기이는 얼굴에서부터 다른 호인 여자들과 달리 여성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긴 속눈썹과 깊은 푸른 눈, 그리고 겸손하면서 배려 있는 모습들이 호전적인 다른 호인과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대리… 만족인가요?”
무명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 단어를 선택하는 게 좋을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으나 걱정은 뒤로한 채 말했다.
“네가 참으로 영특하구나. 내가 많은 인간들을 봐왔지만 너만큼 재능 있는 아이를 본 적이 없는 거 같아. 수에르가 정말 입이 마를 정도로 칭찬할 만해. 맞아, 나와 수에르는 연애를 해본 적이 없지. 아니, 대부분 범족의 이성들은 연애라는 걸 거의 못 해봐. 특히나 범족의 남자들은 연애할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에 수련을 하지. 연애는 쓸데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하거든. 우리의 인연은 부모가 미리 연을 정해준 자와 결혼하거나, 고백을 통해 결혼하거나, 민족 축제인 성혼의 날에 짝이 지어지지. 내가 청혼을 받았을 때 나 또한 수에르를 많이 좋아하고 있었지만 그가 청혼하지 않아 계속 긴장하고 있었거든. 청혼은 남자만이 할 수 있으니까. 결국 내가 수에르의 청혼을 받아들여 우린 연애 없이 바로 결혼했지. 만약 수에르의 청혼이 늦었다면 아마 성혼의 날에 남자들이 결투를 벌여 승자 순으로 자신이 원하는 여자를 데려가서 결혼했을 거야. 어쨌든 난 저 둘이 잘되었으면 좋겠어. 수에르도 그렇게 바라고 있고… 그게 대리 만족이라면 대리 만족이겠지.”
유기이는 말을 마치고 씁쓸한 듯 미소 지었다. 자신들이 해보지 못한 연애를 이마진과 공진희를 통해 수에르와 유기이는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은 무명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마진과 공진희를 통해 자신이 이 생활에 얼마나 큰 위로를 받고 있는지 몰랐다.
둘의 사랑은 수에르와 유기이, 그리고 숙소의 아이들과 무명 자신에게도 삶의 활력이 되어주고 있었다. 오히려 감사는 이마진과 공진희가 아닌 무명이 해야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 작품 후기 ============================
2014-08-04 출판 본으로 본문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