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Star Kingdoms RAW novel - Chapter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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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랑[愛]
벼가 풍성하게 익어 고개를 숙이고 들판은 곳곳마다 황금빛 물결이 바람에 넘실거렸다.
바야흐로 10월, 쌀이 절로 익어 탐스럽게 열매를 맺는 시기였다. 대지가 풍요로워지고 활기가 가득 찼다. 가히 가을의 보석이라는 소리가 절로 입에서 튀어나올 정도로 아름답고도 풍요로운 분위기를 잔뜩 풍겼다.
무명은 보리 추수 때와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즐거워했다. 아무리 노예로 잡혀와 일하고 있다 해도 자신들의 땀방울이 서려있는 개간한 땅에 손수 모내기를 할 물꼬를 트고, 해충을 잡아가면서 이루어낸 성과였다. 벼가 고개를 깊이 내리면 내릴수록 덩달아 기분이 좋아질 만했다.
더군다나 이번 추수부터는 수확량에 따라 인간에게 질 좋은 음식의 배분이 있을 예정이었기에 모두들 기대감을 가지고 추수 때를 기다렸다. 무명의 상급에 관련된 말이 이소호칸을 흔들고 인간의 편의에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이마진과 공진희는 그간 두 번의 만남을 더 가지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수에르와 유기이는 둘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벼가 아련히 익어가듯 둘의 사랑도 더욱 깊이 익어가는 듯했다.
수에르와 이마진, 그리고 무명은 이를 계기로 상당히 친해지게 되었다. 이마진은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범어를 익히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매우 고단하고 고된 결심이었다.
범어는 발성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어려워서 배우는 것에 애로사항이 많았다. 하지만 이마진은 집념 하나만으로 아주 간단한 회화를 익히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범어를 듣고 이해하기 위해 무명에게 꾸준히 범어를 말해 주길 원했다. 오늘에 이르러선 아주 간단한 말을 하고 듣는 것은 할 수 있었다. 이마진이 범어를 배우면서 셋의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다.
이소호칸은 범족에 끌려온 지 이제 1년 2개월 남짓 된 열 살의 무명을 굉장히 신뢰하고 있었다. 어린 녀석이 혜안이 깊고 영특함이 넘쳐흘렀다. 1여 년 만에 범어를 다 떼고 능수능란하게 말하고 쓰기를 하는 아이는 범족 중에도 없었다.
범어를 다 떼자 이소호칸은 역사를 진지하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틈이 나면 수학을 가르쳤다. 수학은 이소호칸이 깊이 있게 알고 있는 학문은 아니었지만 무명이 앞으로 범족과 인간의 사이에서 조율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필요한 학문이라 생각했다.
무명은 배우는 것에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었다. 이소호칸이 엄격한 스승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높은 기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 이소호칸의 마음이 흡족할 정도로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은 작은 인간 아이의 수준을 넘는 것임은 분명했다.
하물며 범족 내에서도 이소호칸의 눈에 차는 자가 몇 없었는데, 무명의 경우는 상당히 예외적이라지만 이소호칸의 계속적인 기대를 받고 있었다.
무명은 수에르가 가르치는 악기 또한 능숙하게 다룰 정도로 가르침을 잘 받았다. 인간 숙소 부근에서 이제 무명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무명이 피리 부는 것을 모두가 즐겨 들었다.
외진 곳에 끌려온 아이들에게 애틋한 피리 소리를 듣는 것은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무명의 존재는 그들 가운데서 확실하게 자리 잡아갔다.
무명은 확실하게 이곳 생활에 적응했다. 주타와 고누가 여전히 무명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홀대했지만, 무명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생활에 충실했다.
남들보다 배는 더 열심히 배우고, 일하고, 습득했다. 다른 이들은 모두 현재에 만족하고 하루하루를 나태하게 보냈다면 무명은 의미 있는 하루를 만들기 위해 매일 노력했다.
벼가 충분히 고개를 숙이자 범들의 인도에 따라 아이들은 땅으로 나가 벼를 추수했다. 추수 때는 워낙 일손이 바빠 이소호칸의 허락을 받고 하루 종일 들에 나가 일을 했다.
푸른 하늘, 기분 좋은 햇살 아래 벼가 풍성하게 자란 것을 몇 움큼씩 쥐고 낫으로 베어 차곡차곡 쌓았다. 자신이 한 뼘 한 뼘 옮겨 심었던 작은 녹색 모종들이 이렇게 잘 성장해 주어 한 해를 보낼 수 있는 식량이 된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빼곡히 심어져 있던 누런 들판이 아이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황갈색 대지를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이 땅에는 후에 옥수수를 심을 예정이었지만, 지금부터 3-4개월 정도는 땅을 푹 쉬게 두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수확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을 꼬박 수백 명의 아이들이 들에서 고개와 허리를 꺾고 벼를 추수했다. 쉴새없이 개간했던 그 넓은 땅이 다시 벌거숭이가 되었다.
아이들은 추수가 끝나도 쉽사리 쉴 수 없었다. 탈곡이 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저마다 도리깨를 메고 널어놓은 벼를 신나게 쳤다. 추수 때보다 탈곡이 더욱 신나고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푸는 데에도 그만이었다.
아이들이 벼를 탈곡하여 낱알이 굴러 나오면 그걸 포대기에 채워 차곡차곡 쌓았다. 무명이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족히 천 석은 넘어 보였다.
쌀 포대기가 쌓이면 그걸 호인들은 양손에 하나씩 들어 옮겼다. 아이들 두세 명은 달려들어야 옮길 수 있는 큰 자루였지만 호인들은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탈곡마저 끝내자 그때야 아이들은 쉴 수 있었다. 도정은 남자아이들이 하지 않고, 인간 여자가 해야 하는 일이기에 그제야 무명은 두 발을 편히 뻗을 수 있었다.
추수 후 남은 볏짚단의 반은 마을로 옮겨졌고, 반은 변소 옆에서 오물과 같이 썩혀졌다. 추후 거름으로 주기 위한 작업이었다.
인생에서 첫 추수를 마치자 무명은 온몸이 뻐근하고 피곤함이 가득 차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고단함 가운데에서도 뿌듯한 만족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자신이 먹고 있는 밥.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키워내 직접 수확했다는 경험이 무명에게 너무나 소중하게 다가왔다.
물론 자신들은 노예와 같은 처지로 수확한 것을 소유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흘린 땀의 결실과 노력의 대가를 눈으로 직접 바라볼 수 있으니 그만큼 소중한 체험은 더 없을 터였다.
모두가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지만 무명만큼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생각했다.
‘우리들이 수확한 이 땅과 곡물들이 호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고 우리가 가졌으면… 우리의 것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들은 약자였다. 약자는 강자에게 이용당하고 결국 자신의 뼈와 살마저 강자에게 내주어야 했다. 무명은 그런 생각을 후회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 자신은, 그리고 이곳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약자이기에 이런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호인들에게 인간들이란, 인간들이 기르던 돼지와 소, 닭, 염소와 동일한 가치일 뿐이란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지할 수밖에 없었다. 무명은 통한의 눈물을 한 방울 흘리고서야 잠들 수 있었다.
***
추수가 끝나고 날씨가 조금씩 쌀쌀해지는 11월. 동쪽 지방의 겨울은 11월 하순에서 1월 초순으로 약 2개월도 채 되지 않게 짧았으나 백모봉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추위가 제법 매서웠다.
아이들은 모두 동계 준비를 위해 모포나 옷 등을 지급받았다. 거의 1년에 한 번 지급되는 옷이었는데, 이 옷을 이전 옷과 같이 껴입다가 날이 더워지면 모두 팔을 잘라내고 봄과 여름, 가을을 입었다.
이마진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옷을 지급받을 때 그에게는 뜻밖의 선물이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진희가 직접 와서 그에게 장갑과 양말을 선물해 준 것이었다. 그것도 이마진 것만이 아닌 같은 숙소 아이들 것까지 전부를 말이다.
또한 이마진에게는 목도리를 하나 더 해주었는데, 그 끝에는 아주 단출하지만 붉은 새가 수놓아져 있었다. 아이들은 장갑, 양말에 너무나도 기뻐했고, 이마진은 장갑과 양말, 목도리를 받고 날뛸 정도로 즐거워했다.
겨울을 보내기 위해 양말과 장갑은 정말로 필요한 것이었다. 매년마다 아이들 중 몇몇은 추위에 손가락과 발가락을 동상으로 잃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양말과 장갑이 있다면 그런 걱정은 덜 해도 되었다.
공진희는 겨울에 이마진과 아이들을 위해 1년 동안 자투리 천을 모아 천천히 장갑과 양말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모두 그녀의 따스한 마음씨에 감동했다.
겨울이 되자 아이들의 움직임이 극도로 굼떠졌다. 땅은 꽁꽁 얼어있었고 할 일 또한 마땅히 없었다. 일이라고 해봐야 고작 일주일이나 이 주일에 한 번씩 숲으로 나가 땔감으로 쓸 목재를 벌목해 오는 것이 다였다. 모두들 하루 종일 방 안에서 불을 피워놓고 옹기종기 앉아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무명은 겨울에도 계속해서 이소호칸에게 역사와 수학, 그리고 범족의 예절을 배웠다. 글과 역사를 배우는 것은 재미있었지만 수학과 예절은 상당히 낯설고 어려운 학문이었기에 이해도 잘 되지 않았고, 공부도 어려웠다. 또한 지금까지 전혀 관심이 없었던 학문인지라 이해도가 모자랐다.
이소호칸은 무명에게 체벌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체벌을이라 해서 과하게 구타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쥐어박거나 회초리로 때리는 것이었다.
워낙 글을 배웠던 때와는 다르게 공부에 진전이 없자 이소호칸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무명을 기대치에 이끌어내려 벌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소호칸의 손찌검은 상당히 매서웠기에 무명은 맞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공부했지만 쉽게 공부가 늘지는 않았다.
이소호칸도 이내 자신이 너무 기대감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범족 중에서 수학을 배우는 이는 거의 없었다. 간단한 덧셈, 뺄셈, 나눗셈, 곱셈조차 모르는 이가 태반이었다. 자신도 어렵게 이해한 학문을 종전과 같은 속도로 가르치려 하니 무명에게 너무 힘겨웠던 것이 분명했다.
이소호칸은 초반 빨리 진도를 나가던 것을 수정하고 다시 처음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배운 부분이라도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면서 무명이 이해할 때까지 반복해서 공부시켰다.
무명은 변화된 학습 방법에 처음에는 적응이 힘들었으나 이소호칸이 자신을 배려해 주고 있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으므로 그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성과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혼나지 않았어?”
근래 들어 이소호칸과 공부하고 나오면 울상을 짓던 무명이었다. 회초리를 맞았을 때는 슬프고 아파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었다. 수에르는 그때마다 무명을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요 며칠간은 무명이 싱글벙글하며 방 안에서 나오자 그도 한결 기분이 좋았다.
“요새는 어르신께서 너무 빨리 가르쳐주지 않으셔서 괜찮아요. 이전에는 하루에 모든 것을 다 가르쳐 주시고 그것을 못 하면 야단을 맞았지만 이제는 하루에 하나씩 가르쳐 주시고 이해하지 못하면 다시 알려주세요. 수학이라는 게 상당히 어렵지만 그 원리를 알면 그럭저럭 할 만한 것 같아요. 규칙이 있으니까요. 이런 규칙들은 이전에 배울 땐 보이지 않았는데 요즘은 천천히 알려주셔서 알 것 같기도 해요.”
무명이 활기차게 말하자 수에르는 무명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그런 건 배워서 어따 써먹는 거지? 대족장 어르신은 정말 많은 걸 알고 계신단 말이지. 무예에 쓰시는 시간도 부족할 지경인데 다양한 학문까지 고루고루 알고 계시니 나로서는 입 벌어지게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일전 무명이 숫자를 가지고 한창 공부할 때 궁금해서 수에르 또한 무명을 통해 수학을 잠깐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최악이었다. 덧셈, 뺄셈이야 어렵지 않게 해내긴 했지만 천 단위, 만 단위를 넘어가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배우기를 포기했었다. 그렇게까지 많은 숫자를 가지고 놀음을 해본 적이 없는 수에르에게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학문임에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이번 주 수요일 또 경계 근무 시간을 잡아 놓았는데 이마진에게 말해 줘봐.”
수에르가 능숙하게 손짓하며 말했다. 그 손짓의 의미는 이마진과 공진희의 만남에 대한 것이었다. 수에르가 보초 서는 틈틈이 이마진과 공진희는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는 무명이 따라가지 않아도 유기이의 인도를 받아 잘 만나고 다녔다.
“네. 그나저나 요즘은 형과 누나의 편지가 상당히 뜸하네요.”
“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만나서 말하면 되니까 편지 쓰는 게 뜸하겠지.”
수에르가 약간 아쉬운 듯 말했다. 둘의 편지를 보는 것은 상당히 기대되는 일이었으나 수에르의 말처럼 둘이 만나기 시작하고부터는 직접 만나 말을 전달하기에 편지를 쓰는 경우가 적었다.
하지만 편지가 한두 번 오고가는 것을 보면 더욱 애틋해진 둘의 사이를 확인할 수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긴 했다.
“자, 그럼 오늘은 새로운 곡조를 연습해 보자. 내가 요즘 너 때문에 곡을 쓰는 재미가 늘었단 말이지.”
피리 부는 수에르가 기쁜 듯 말을 이었다. 수에르는 지금까지 혼자서만 피리를 불고 노래를 만들어 왔는데 무명이라는 좋은 음악 친구가 생긴 뒤로는 합주할 수 있어 다양한 곡에 도전해 보고 있었다.
자신은 북으로 박자를 맞추고 무명이 피리를 불게 하거나, 피리 합주곡을 만드는 등 여러 가지 음악적 실험을 둘은 같이 하고 있었다.
“오오! 뭐지요? 너무 기대되는데요?”
무명은 즐거워하며 품에서 수에르가 준 피리를 소중히 꺼내었다. 그에게는 이 피리가 너무도 귀한 보물이었다. 이곳에 와서 받은 많은 것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무명은 피리에서 나오는 음악을 통해 어렵고 힘든 이 생활을 잘 적응하고 견뎌낼 수 있다고 믿었다.
둘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한시도 쉬지 않고 피리를 불며 이동했다. 둘의 걸음은 경쾌했고 즐거웠다. 피리의 고음이 나른하게 길가에 퍼졌다.
해는 높이 떠 정오를 알렸다. 시린 바람이 불었지만 따스한 햇살을 보온 삼아 손가락을 놀리는 데 열중했다.
============================ 작품 후기 ============================
2014-08-04 출판 본으로 본문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