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Star Kingdoms RAW novel - Chapter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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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랑[愛]
날이 추워지면서 모두가 추위에 몸을 움츠리는 계절이 왔다. 일주일 정도 비가 내리다 날씨가 급격히 추워지면서 대기가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질척해진 땅은 그대로 얼어붙어 미끄럽기도 했지만 울퉁불퉁 불규칙적으로 흙덩이가 튀어나와 얼어버렸기 때문에 넘어지기라도 하면 굉장히 위험했다.
이런 날에 밖에 나가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힘든 일이었지만 무명은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던 이소호칸과의 공부를 위해 밖에 나갈 채비를 단단히 하였다.
곧 문지방 너머로 커다란 인영이 비추어졌고 무명은 그 그림자를 보고 문을 슬며시 열었다. 칼같이 추운 바람이 들이치자 무명은 혹여 방 안 온도가 내려갈까 바로 밖으로 나왔다. 방 안 에는 아직 형님들과 아이들이 곤히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어, 잘 잤어?”
입에서 허연 김이 모락모락 나며 거대한 덩치가 말을 걸어왔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는 일 년 전만 해도 알아듣는 것이 불가능한 언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의미를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고 그에 맞는 대답도 가능했다.
“네, 수에르 형. 형도 잘 주무셨어요?”
무명이 밝게 화답하자 수에르는 거대한 하얀 손으로 무명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폭신한 흰 털이 잔뜩 나있는 따스한 손이 머리를 쓰다듬자 무명은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날이 많이 추워졌구나, 땅이 완전히 얼어붙었어. 가는 길이 모두 거칠게 얼어붙어 네 신발로 그 길을 걸었다간 발이 넝마가 될 거 같다. 오랜만에 목말을 타고 가자.”
수에르는 무명을 배려하며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무명은 자신을 아껴주는 수에르의 마음에 감동하며 손을 붙잡고 수에르의 목에 다리를 올려 그의 어깨에 탔다.
호인을 타는 인간은 모든 유래를 통틀어 그밖에 없을 터였다. 수북한 흰 갈기가 덮여있는 몸에 무명의 몸이 닿자 시린 바람에 식고 있던 몸이 따스하게 데워졌다.
수에르는 무명을 어깨 위로 태우고선 길을 걸었다. 비에 젖은 땅은 빙판이 되어있었고, 허리를 굽히고 추수하던 들판은 하얗게 서리가 내려있었다. 질퍽한 상태로 얼어붙은 땅은 흉기와 다름없었다.
수에르의 발은 털이 수북하게 나있고 발톱을 꺼내어 땅에 다리를 고정시키면 넘어질 일이 없었지만 조그마한 가죽신에 천을 덧댄 무명의 신발은 그런 길을 감당할 수 없을 터였다. 발바닥이 아무리 단련된 무명이라도 그 길은 아주 흉악한 날을 잔뜩 가지고 있었기에 안전을 결코 장담할 수 없었다.
무명은 수에르의 목을 붙잡고 그의 털 속에 숨겨져 있는 단단한 피부와 근육을 슬쩍 매만졌다. 힘이 가득 찬 건장한 몸이 느껴졌다.
무명의 몸 또한 어렸을 때부터 산행과 이곳에서의 노역으로 제법 탄탄하게 발달했지만 이소호칸이나 수에르, 아니 다른 호인들의 몸에 비하면 아주 약소하고 작은 몸이었다.
“수에르 형, 얼마나 수련해야 형 같은 몸을 가질 수 있나요?”
무명이 수에르의 갈기를 잡으며 말했다. 아무리 험한 험지라도 아주 가뿐히 이동하는 수에르가 부러워서 한 말이었다.
“범족 개개인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 피와 땀을 흘려가며 수많은 낮과 밤을 노력해서 자신의 육체를 단련하지. 이소호칸 대족장님처럼 선천적인 핏줄로 힘이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리 선천이라 할지라도 그만큼 노력하지 않으면 결코 경지에 이르지 못해.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음,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변하지 않는 형의 강건한 힘을 보고 조금 부러워서요.”
“그건 너와 내가 종족이 달라서 그렇게 느낄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수에르는 인간과 범족의 육체적인 차이가 크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말했지만 무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종족이나 신체의 차이 말구요. 제가 말한 것은 수련의 차이예요. 아무리 종족이 달라도 수련한다면 현재 자신보다 강해질 수 있는 여력이 있잖아요. 제가 형처럼 수련한다면 형에게는 미치지 못해도 상당히 강인한 몸을 가질 수 있겠죠.”
수에르는 무명의 말에 큰 손을 맞부딪히며 말했다.
“네 생각은 아주 훌륭해. 우리 범족에게도 핏줄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혈통에 따라 강함을 나누는 경우가 많지. 하지만 결국 그것도 수련의 차이로 넘어설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거든. 네가 나약한 인간이라 해도 수련한다면 충분히 강해질 수 있는 역량이 있지. 네가 노력한 결과만큼 나오는 것이니까.”
수에르는 평생을 수련하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수행, 수련하는 것을 일생의 자부심으로 삼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더 강해지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가기 위해 하루하루를 단련으로 살아가는 그들이었다.
수련과 단련으로 이루어지는 강(强)의 논리. 그것을 무명이 말하고 있던 것이었다. 수에르는 무명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너, 이런 말을 나에게 하는 것은 수련하고 싶다는 거지?”
너무 정곡을 찌른 탓일까? 무명은 놀라서 하마터면 수에르의 목에서 떨어질 뻔했다. 수에르는 무명이 중심을 순간 잃는 것을 보고 손을 내밀어 허리를 지탱해 주었다.
“조심해.”
“네……. 아니, 아니. 형 어떻게 제 마음을 바로 읽으신 거예요?”
무명은 다시 자세를 추스르고 말했다. 무명이 놀라는 모습을 보고 수에르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이 형이 너랑 같이 있은 지도 일 년이야. 척 하면 네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읽을 수 있다고.”
무명은 수에르에 말에 멋쩍은 듯 추위에 붉어진 콧잔등을 긁었다.
“그런데 웬 수련이야, 뜬금없이? 너는 지금 이소호칸 어르신과의 공부나, 나에게 악기를 배우는 것만 해도 하고 있는 게 많을 텐데 말이야.”
“그냥… 뭐… 수에르 형을 보면 문득문득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형이나 이소호칸 어르신이나, 강하기 때문에 약자에게 무언가를 베풀 수 있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강해지고 싶어요. 스스로 강해져서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어요.”
무명은 부끄러운 듯 살짝 볼을 붉히며 말했다. 수에르는 껄껄 웃으며 무명에게 대답했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돕는다. 이소호칸 님이 백모 지파를 다스리며 내건 말씀이지. 너도 어떻게 그분의 가르침을 꼭 닮아가는구나. 범족 대부분의 논리는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고 억누르며 영원히 강자로 살아가지. 그리고 힘 있는 자가 약해지면 다른 힘 있는 자가 그 자리를 꿰차는 형식이야. 하지만 이소호칸 님은 그래서는 종족 자체가 발전이 없다고 생각하셨거든. 백모 지파가 다른 지파에 비해 풍요롭게 사는 이유도 바로 그런 연유에 있다고 생각해. 그래, 너는 그런 우리 지파의 논리를 보고 강해지고 싶다는 거지?”
수에르가 부드럽게 말을 하자 무명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에르는 무명의 모습에서 기특함을 느꼈다.
“수련이라…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있지. 하지만 상당히 힘들 텐데… 나는… 아니, 어떠한 범족이라도 수련에 대해서는 결코 쉽게 생각하지 않아. 내가 취미 삼아 하는 악기를 너에게 가르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거다.”
수에르는 수련을 한다는 무명에게 먼저 엄포를 놓았다. 그만큼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수련은 평생을 두고 해야 하는 행위로 아이의 장난스러운 호기심만으로 시작할 것이 아니었다.
물론 무명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허튼소리를 할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으나, 확실히 해야 할 것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네, 도와주신다면 어떠한 수련이라도 달게 하겠습니다.”
무명이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비록 머리 위에 있어 그 움직임을 볼 순 없었지만 수에르는 무명의 말 투 하나하나에서 그의 굳은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무명의 도전과 용기,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해서 나오는 열정과 의지, 그리고 노력은 지난 일 년을 통해 잘 알고 있던 그였다.
어느새 둘은 장원에 도착했다. 해가 슬며시 떠 땅 위에 소복이 깔린 흰 서리들을 녹여내었다.
수에르는 무명을 어깨에서 아래로 내려놓고 자신을 바라보게 하였다. 그리고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강해지는 것에는 책임이 따른다. 너라면 잘해낼 수 있겠지. 네가 원한다면 내가 수련을 도와주겠지만, 수련을 하는 와중에 나를 형이라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나는 철저히 내가 교육받은 방식대로 너에게 강해지는 방법을 알려줄 거야. 네가 그것을 따라오지 못하면 나는 너에게 벌을 줄 것이다. 그게 내가, 그리고 우리 범족이 배워온 방식이다. 네가 수련에 대해 모든 것을 동의한다면 내일 아침에 내가 너희 숙소로 찾아갈 때 대답해 주기를 바란다.”
노란 호박색 눈을 바라보며 흑요석 색 눈동자를 마주친 무명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가 없었다.
무명이 이소호칸의 저택으로 등을 돌려 들어가는 것을 수에르는 한참이나 쳐다보다 걸음을 옮겼다. 자신 또한 계속해서 수련하기 위함이었다.
***
이소호칸과의 공부는 진도가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무명에게 여유를 주었다. 한번 습득한 것에서는 완벽한 이해도를 자랑하는 무명에게 원리를 알게 된 수학이나 틀이 확실한 예절 교육은 이제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무명아.”
이소호칸이 무명에게 포근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네, 어르신.”
무명이 공손히 대답했다. 이소호칸이 내준 문제의 정답을 맞힌 직후였기 때문에 혹여나 다른 실수가 있을까 조심스러운 모양새였다.
“고작 일 년이다. 길다면 길다고 말할 수 있는 기간이지만 내 생을 통틀어 봤을 땐 짧고도 짧은 기간이지.”
이소호칸은 찻잔을 들어 살짝 목을 축였다. 찻잔 표면에 일렁이는 김이 모락거리며 방 안에 향기를 넓게 퍼트렸다.
“그 일 년 안에 너는 내가 지극히 만족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스승 되는 자로서 제자에게 만족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워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너는 충분히 그런 칭찬을 들을 만하다. 자만해도 좋다. 너는 훌륭하다. 네가 범족이 아닌 것에 나는 상당히 슬프다. 네가 범족이라면 한낱 인간을 관리하는 자로 쓰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내 아들의 한팔이 되어줄 정도로 뛰어난 인재가 될 수 있을 텐데 너무도 아깝기만 하구나.”
“송구스럽습니다.”
무명은 고개를 숙이며 이소호칸의 말에 감사를 표했다. 자신이 이소호칸에게 공부를 배우며 이토록 크게 칭찬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이소호칸은 마음속으로 천 번을 넘게 감탄했지만 그것을 내색하진 않았던 것이다.
“내가 너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나는 네가 적어도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가르치려 했으나 네 배움이 빨라 이것을 일 년 안에 해냈으니 네가 나에게 더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말해다오. 내 성심성의껏 너를 가르치겠다.”
이소호칸의 말에 무명은 눈동자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어쩌면 이것은 하늘이 무명에게 내려준 기회일지도 몰랐다. 무명은 한참 고민하다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어르신, 어르신께 청하온데 저는 두 가지를 더 배우고 싶습니다.”
무명이 말하자 이소호칸이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엇이냐, 말해 보거라.”
이소호칸이 말하라 했지만 무명은 살짝 뜸을 들였다. 그만큼 깊이 고민하고 생각을 해야 하는 부탁이었기 때문이다.
“어르신, 혹여나 이 배움을 청하는 데 어르신께서 불편하실 수도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제 청을 한번 들어봐 주시겠습니까?”
이소호칸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무명은 자신의 의견을 입 밖으로 낼 수 있었다.
“첫째로는 범족의 강함을 배우고 싶고, 둘째로는 쇠를 두드려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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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4 출판 본으로 본문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