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Star Kingdoms RAW novel - Chapter 55
0055 / 0124 ———————————————-
7. 초생[初]
백모봉에 다녀온 이후로 무명은 빠르게 변화된 삶에 적응했다. 오전에는 이소호칸과의 교육 대신 수에르가 무명의 수련에 도움을 주었다. 실상 알려주는 것은 몇 개 되지 않았다.
달리고, 걷고, 물체를 들고,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괴상한 자세를 하고 오래 버티기 등의 간단한 수련 방법 몇 가지를 알려준 뒤 계속 그것을 반복하게만 했다.
자신이 알려준 방법과 달리 꾀를 부리거나 틀린 자세를 취했을 때만 다시 와서 지도해 주는 것 외엔 수에르는 무명을 딱히 더 가르치지 않았다.
오히려 수에르는 반복되는 근력 훈련을 무명에게 시켜놓고 자신도 같이 동일한 체력 훈련을 한다든지, 간단한 무예 동작을 반복 수련했다.
이소호칸과의 교육은 일주일에 단 하루만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소호칸이 무명에게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것보다는 서로 간 담소를 나누고 덕담을 주는 정도의 시간이었다.
오후에 공방에서는 선고우의 곁에서 쇠를 두드리는 법을 어깨너머로 견식했고, 날씨가 풀릴 때마다 공방 사람들과 나가 목재나 원석 같은 재료를 구해왔다.
내년부터는 아이들을 위한 숙소를 대여섯 채 정도 더 짓기로 했기 때문에 겨울에도 재료를 모으는 데 분주했다.
공방 사람들은 숲과 밭을 일구는 아이들과 달리 그나마 인간의 군락 중에서 활기차고 생명력이 넘쳤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삶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고, 생산한다는 목표가 있기에 하루하루에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듯했다.
이 의미 부여와 동기 부여 때문에 공방은 범족들 사이에서도 약소하긴 하지만 대접을 받고 있었다.
선고우뿐만 아니라 공방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범인들이 선고우의 아래에서 대장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노년기를 맞이할 때가 되었거나 노년을 맞이한 범인들이었는데 대부분이 동쪽 지파의 병장기를 수리하거나 만드는 작업을 했다.
인간들은 말이 통하진 않았으나 그들을 위해 간간이 작업을 도와주고 일을 병행했기 때문에 병장기를 중히 여기는 범족 사이에서 상당히 도움이 된다 여겨졌고, 그만큼 대우해 주었다.
그러한 자들 중에 관엽은 단연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선고우를 통해 제철(製鐵) 작업과 주조(鑄造) 작업을 배웠는데 범족과 실질적으로 대화할 순 없었으나 천성적으로 눈치가 빨라 선고우뿐만 아니라 다른 범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
그는 작은 공방의 철광석에서 해면한 상태의 철을 생산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본래 이 일은 선고우가 맡고 있다 그에게 넘긴 작업이었다. 그는 이 일을 상당히 잘 해내 각 공방마다 좋은 철을 공급했다. 모든 원석들은 그의 공방에서 가공되어 단조되었다.
관엽은 무명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귀띔해 주었다. 철공 님 밑에서 수발을 들며 기술을 배우면 그만큼 편해진다는 이야기였다. 선고우의 기술력은 범족 중에서도 독보적이어서 일단 기술만 습득하면 공방의 한자리를 얻어 편하게 지낼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확실히 선고우의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지금은 병장기의 단조(鍛造) 작업(철을 계속 두드려 내구성을 올리는 작업)과 소입(燒入) 작업(담금질. 단조한 차가운 물에 급속히 식혀 내구성을 올리는 작업)만 몰두해 있었지만 금속을 다루는 데는 그만한 실력을 가진 자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특출한 재능을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 세공과 조각에도 조예가 깊어 예술과 미적 감각이 매우 뛰어났다. 선고우가 미려한 감각으로 마치 금속을 가지고 놀 듯 정련하는 모습에 무명은 놀라고 또 감격했다. 무명은 처음에는 선고우가 시키는 대로만 몸을 움직이고, 심부름을 하는 데만 급급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작업의 수순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수순을 무명은 글로 적어놓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고우가 시키기도 전에 작업의 수순으로 선고우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단조가 끝날 즈음이면 소입을 위해 물을 준비해 놓고, 소입이 끝나면 날을 갈기 위해 맷돌을 준비해 놓는 등 선고우의 마음에 꼭 들게 행동했다.
이래저래 오전 내내 몸을 혹사하는 데도 불구하고 무명은 배움의 생활에 만족하며 최선을 다했다. 무명은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좋았다. 잃은 것밖에 없는 이 삶에서 배움은 무명에게 큰 위안을 주는 것이었다.
이미 모든 것을 범족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무명은 꾸준히 배우고 얻어갔다. 그렇기에 몸이 노곤하고 힘든 와중에서도 미소 짓고 더욱 한발 내디딜 수 있었다.
***
무명은 사실 수련을 통해 호인들이 가지고 있는 파괴적이고 강력한 힘뿐만 아니라 그들이 취하고 있는 무기술을 배우길 원했다. 하지만 그들의 무기술을 배우는 것은 솔직히 말해 어불성설이었다.
한낱 인간인 자신에게 무기를 다루는 방법을 알려줄 너그러운 호인이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수에르조차 넌지시 꺼낸 무명의 말을 단숨에 묵살시킬 정도로 무기술을 알려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호인의 무기술은 쉽게 남에게 가르쳐줄 만한 것이 못 되거니와 인간에게 전수하는 것은 더욱 안 될 일이었다. 그렇기에 무명은 깊이 좌절했다.
무명이 이로 인해 한동안 애석함을 느끼는 것을 안 수에르는 병기를 다루는 법은 사정상 가르치기 어렵지만 백타(白打 :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신체를 사용하여 싸우는 기술의 총칭)를 알려주는 것은 괜찮을 거 같다며 넌지시 말을 꺼냈다.
무명은 기뻐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수에르는 백타를 가르치겠다는 것도 기본적인 육체가 단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무명에겐 아직도 한참 멀었다는 이야기였지만 무명은 실망하지 않았다. 싸우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일이었다.
수에르는 만일 때가 되어 자신에게 백타를 배우게 된다 할지라도 이건 반드시 비밀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백타는 병기를 다루기 전에 기본적으로 익히는 무예인데 모든 병기를 다루기 위한 기반이 바로 이 백타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마저도 인간에게 가르쳐주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무명이 너무나도 딱해 보여 그를 가르치는 데 지루하지 않게 백타를 겸했다 하면 어떻게 될 듯하여 수에르가 어렵게 내린 결단이었다.
무명은 목표가 생기자 매섭게 육체를 단련시키는 데 열중했다. 수에르가 내건 조건은 강가에 무명의 키만큼 길고 기둥처럼 둥글고 넓적한 돌이 있었는데 그걸 들고 백 보를 움직이면 충분히 몸의 단련이 끝났다고 인정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말이 쉽지, 돌을 들어 올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 겨우내 수련을 통해 어느 정도 근력이 붙었다고 생각한 상태에서도 그걸 들어 올리는 것 자체가 조금 지나친 과제였다.
크기는 무명만 했지만 무게는 족히 자신의 서너 배는 넘어 보였다.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이걸 들고 움직이는 것은 더욱 무리한 요구였다. 하지만 무명은 포기하지 않았다. 꾸준히 몸을 만들고 정신을 몸의 상태에 맞추었다. 원하는 것을 배우고 싶어 하는 실로 무서운 집중력이었다.
***
마침내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왔다. 공방은 한층 바빠졌다. 선고우가 오죽했으면 무명보고 오전에 나가지 말라 청할 정도였다. 그만큼 무명은 선고우에게 딱 맞는 손발이 되어주었다.
무명은 딱 한 번 선고우에게 혼난 것을 제외하고선 계속해서 칭찬을 받았다. 단 한 번의 혼남이었지만, 무명은 선고우에게 혼난 것을 빌미로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고 더욱 열심히 노력했다.
선고우에게 혼난 이유는 바로 ‘물’ 때문이었다. 소입 작업을 위해 떨어진 물을 보충해야 할 때가 도래하였는데 선고우는 매번 그 일을 자신이 해오다 그날은 무명에게 부탁했었다.
그 일은 간단한 일이었다. 요 근처 강가에서 물을 떠오라는 일이었다. 하지만 선고우는 말했다, 물을 뜰 때 강에서 바로 떠오지 말고 강가에서 10장은 떨어진 곳에 3척 정도의 구멍을 파고 그곳에 스며드는 물을 떠오라는 것이었다.
무명은 그 당시 아침 단련을 너무 혹하게 해서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 상태였다. 무명은 그 상태에서 꾀를 부렸다. 어차피 다 같은 물일 텐데 땅을 파서 나오는 물이나 강의 물이나 그게 그거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물통을 짊어지고 강에 다다라 땅을 파헤칠 준비를 하니 자기 자신이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옆에 물이 넘쳐나는데 뭐하러 땅을 파서 물을 길어야 하는지 의문이 든 것이다.
무명은 고심하다 결국 강의 물을 길어왔다. 하지만 그 것은 무명의 크나큰 오산이었다. 선고우는 무명이 길어온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미간을 심하게 구겼다. 그는 무명이 힘들게 길어온 물통을 발로 차서 엎어버리고 통을 던져 부수어 버렸다.
그리고 무명이 난생 처음 듣는 욕지거리와 분노로 무명을 혼냈다. 그 성냄에서 무명은 극도의 공포와 억압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죽음을 느낄 정도의 압력이 전해져왔고 그에 오줌을 찔끔 흘릴 정도였다.
무명은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고는 고개를 숙이고 계속해서 사과했다.
후에 선고우는 분을 삭이며 다시 물을 길어오라 말했다. 그러고는 강물을 마셔보고, 땅을 파서 그 속에서 샘솟은 물을 마셔보라 일렀다.
무명은 묵묵히 다시 강으로 가 이번에는 땅을 깊이 파고 물이 차오르는 것을 기다렸다. 그리고 샘솟아 오른 물맛을 보았다.
처음에는 물맛이 똑같다고 생각했지만 몇 번을 더 마셔보자 확실히 물의 맛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아주 약간이긴 하지만 달달하고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무명은 물을 길어 선고우에게 다시 가져다 주었고 선고우는 그 물을 받고 물었다.
“네가 방금 떠온 물과 이 물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느냐?”
무명은 허리와 고개를 깊숙이 숙여 공손하고 죄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미천하여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주 약간 맛의 차이가 느껴졌습니다. 지금 떠온 물이 강의 물보다 조금 달고 씁쓸합니다.”
선고우는 무명의 말을 듣고 이죽거렸다.
“그뿐만 아니다. 이 물은 시고 쇠 맛도 난다. 그리고 강의 물보다 더 맑다. 물의 차이가 소입하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아느냐? 네가 이전에 길러온 물은 그야말로 쓰레기다. 그런 물로 소입을 하다간 자칫 잘못하면 금속이 깨질 수도 있다. 너는 물의 차이를 모르고 꾀를 부렸다. 내가 너를 너무 칭찬하고 북돋아주니 너는 거기에 만족하고 네 잣대로 이 작업을 평가한 것이다. 나는 꾀를 부리는 자를 제일 싫어한다. 지금껏 내가 너를 아끼고 칭찬한 이유는 바로 네가 꾀를 부리지 않고, 진심으로 열심히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여타 다른 이가 나에게 이렇게 꾀를 부렸다면 그 자리에서 찢어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네 지금까지의 행실을 봐서 단 한 번만 용서해 주겠다. 결코 네 잣대로 생각하지 마라. 꾀를 부리는 것은 어떠한 것으로도 봐줄 수 없다. 또한 네가 이 물 맛의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너를 내쳤을 것이다. 네가 이 차이를 알아챘기에 나는 정말 단 한 번의 용서를 하겠다. 네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중에 그 쓰레기 같은 물과 이 물에 소입을 해보거라. 그럼 내 말뜻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선고우의 말에 무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그 이후로 무명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어도 절대 꾀를 부리지 않았다. 꾀를 부릴 것 같은 상황이 오면 정직하게 말했다, 자신에게 너무 벅찬 일이라고 말이다. 이 습관은 무명이 가진 노력하는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장점이 되었다.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고 꾀를 부리려 머리를 굴리는 것이 아닌 다른 이에게 도움을 받고, 다른 이와 같이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한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래에 비해 분명 무명은 특출한 아이였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짊어질 수 있는 그릇이 되기에 아직도 한참 멀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다른 이의 도움을 받는 것은 분명히 현명한 선택이었다. 즉 경청하고 귀 기울일 줄 아는 덕목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
백모 지파에서 맞는 두 번째 봄은 무명에게 처음 맞는 것보다 더욱 새롭게 다가왔다. 거침없이 바쁘고 어려운 나날이 계속되었지만 색다른 일들이 계속 벌어졌기 때문이다.
무명은 단단한 근골 사이에 탄탄한 근육을 가지게 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에르의 지도는 훌륭했다. 무명이 단기간에 그만큼의 육체를 구비하게 된 것은 수에르의 지도 경험이 없었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성과였다.
하지만 여전히 돌을 드는 것은 힘들었고, 든다 해도 열 발자국을 떼는 것도 무리였다. 무명은 애초에 이 과제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 보았지만 수에르가 단언하건대 훌륭한 육신을 가지면 이 정도는 단숨에 해낸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를 믿고 계속 수련을 이어나갔다.
이마진과 숙소의 일행과는 이제 거의 접점이 없어 만나기조차 힘들었다. 숙소가 달라지고 생활을 달리하니 점심시간에도 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마진과는 꾸준히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편지를 전달해 주기도 했다. 무명은 이마진과 공진희의 만남도 계속 주선했다. 이제는 이마진이 영내로 들어왔기 때문에 공진희와의 만남의 시간이 한결 더 늘었다.
둘은 편지를 계속 주고받으며 사랑을 확인했고 수에르와 그의 아내 유기이의 배려로 사랑을 계속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둘의 사랑은 더욱 깊어져 이 이상 거리낄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 와중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수에르의 아내, 유기이가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수에르는 이 기쁜 일에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헤벌쭉한 얼굴로 만나는 이마다 자랑을 하고 다녔다. 결혼하고 한동안 자식이 없어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자신의 자식을 아내가 잉태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미소가 절로 나올 따름이었다.
수에르는 무명을 만날 때마다 웃음을 지으며 행복해했고 무명에게 계속 자신의 자식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무명은 수에르에게 진심으로 축하해 주며 유기이의 순산을 기원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명은 놀랄 만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날 무명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이소호칸과의 만남을 위해 장원에 들어갔다. 수에르는 근래 들어 장원 앞까지만 데려다 주고 자신의 수련을 위해 병영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장원 안부터 이소호칸의 안채까지는 홀로 걸어가야 했다.
실상 장원 안에서는 무명에게 해코지할 만한 세력이 있을 수 없었기에 수에르가 안심하고 무명을 혼자 둔 것이었다. 이번처럼 혼자 가게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어서 무명은 안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른 새벽에 아주 작기는 했지만 여성의 기침 소리가 들린 것이 무명을 자극했다. 호인의 컬컬한 기침 소리가 아니라 분명 여린 기색이 묻어 나오는 여인의 기침 소리였다.
무명은 그 소리가 궁금해 안채로 향하던 발걸음을 잠시 돌려 장원 내 인간 여자 숙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명은 해가 아직 산등성이에 걸쳐져 있어 어두운 벽의 음영 뒤에 배를 부여잡고 기침과 구역질을 하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소리가 빠져나가지 않기 위해 입을 막고 안간힘을 쓰고 있긴 했지만 이 고요한 새벽에 밝은 무명의 귀는 그 소리를 잡아내었다.
곧 무명은 기침의 주인공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주인공은 이마진의 그녀, 공진희였다. 그녀의 안색은 상당히 파리해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무명은 서둘러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는 무명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고통에 괴로워하다 무명의 손길이 느껴지자 화들짝 놀랐다.
곧 그 손의 주인공이 무명임을 알고는 안심한 표정으로 숨을 내쉬었다.
“공진희 누나,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신 건가요?”
무명이 목소리를 내며 말하자 공진희가 화들짝 놀라며 무명의 입을 여린 손으로 막았다. 그 행위는 아주 조용히 이야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아, 그게 조금 몸이 안 좋은 거 같아서.”
공진희가 목소리를 아주 작게 깔며 무명의 귓가에 속삭였다. 무명 또한 목소리를 최대한 작게 하여 공진희에게 말했다.
“어디가 안 좋으신 거예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이셔요. 안 되겠어요, 수에르 형을 부를게요.”
무명이 수에르를 부른다는 말에 공진희가 놀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무명은 계속 공진희가 걱정된다고 말하며 도움을 청하겠다고 이야기했고, 공진희는 완곡하게 그것을 거절했다. 하지만 쇠고집 무명을 꺾을 수는 없었다.
“여기에 계셔요. 지금 수에르 형이나 다른 분을 불러올 테니까요.”
무명이 끝내 공진희를 부축했던 손을 놓고 장원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려 하자 공진희가 황급히 무명의 손을 붙잡았다.
“안 돼, 안 돼. 그건 안 된다, 무명아.”
“누나, 왜 그러세요. 아프시면 몸조리라도 잘 하셔야 해요. 제가 볼 때 지금 누나는 건강상에 큰 문제가 있어 보여요. 그렇지 않으면 이 새벽에 홀로 나와 안색이 허옇게 뜰 때까지 기침과 구역질을 하고 계실 이유가 없잖아요. 지금도 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몇 번이나 구역질을 하셨잖아요. 전 도저히 걱정이 돼서 누나 말대로는 못 하겠어요.”
끝내 무명이 공진희의 손을 뿌리치자 공진희는 입술을 깨물고 굳은 눈빛으로 무명에게 말했다.
“이건 누구에게도 말해 줘서는 안 돼. 가랑, 아니 이마진에게도 말해 줘서는 안 돼. 너, 내 비밀을 지켜줄 수 있겠니?”
공진희가 너무나도 진지하고 굳게 말하자 무명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빛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야위었지만 그 눈빛은 큰 결심을 한 듯 매우 곧고 정갈했다.
공진희의 말에 무명은 저절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명의 주억거림에 공진희는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이긴 했지만 마른 입술을 들어 어렵게 말을 뱉었다.
“나… 가랑의 아이를 갖게 된 거 같아.”
============================ 작품 후기 ============================
2014-08-06 출판 본으로 본문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