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Star Kingdoms RAW novel - Chapter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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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공방[工]
선고우는 수차례 탄식하면서 쇠 맛 나는 쓰디쓴 물이 든 호리병을 들어 연거푸 마셨다. 그러고는 술기운이 몸 가득히 퍼지는지 탁자에 엎드려 금세 늘어졌다.
그의 입에서는 슬픈 메아리가 가득 울렸다. 무명은 한참이나 잠든 선고우의 모습을 애처롭게 보고 있다가 그가 완연히 잠에 들자 그 큰 몸을 들쳐 공방 한편에 멍석이 깔려있는 곳에 뉘였다.
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었지만 무명이 거대한 몸집의 선고우를 옮길 수 있는 것은 그게 한계였다. 둘러업었다고 할지라도 선고우의 두 다리가 땅에 질질 끌렸다. 이 상태로는 멀리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무명은 적당한 타협선을 찾았고, 결국 그것은 근처의 멍석 위가 되었다.
두 발을 쭉 펴게 눕히고 이불 대용으로 다른 멍석을 몸 위에 덮었다. 혹여나 바닥이 차 잠을 설칠까 무명은 아직 열기가 채 식지 않은 화덕에서 숯덩이를 몇 개 집게로 꺼내어 쇠 그릇에 넣어 선고우의 옆에 두었다. 훈훈한 열기가 그릇 밖으로 흘러들어 선고우의 몸을 데웠다.
무명은 그 자세로 한참을 선고우 곁에 쪼그려 있으며 그의 자는 모습을 지켜봤다. 자는 모습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술 냄새가 격하게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지만 무명은 참고 그를 곤히 지켜보았다.
눈을 감고 숨소리에 가느다랗게 떨리는 수염은 무명의 가슴 한편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선고우는 잠에 들어서야 종일 찌푸리고 있던 얼굴을 폈다. 추억과 꿈속에서만 그가 아늑하게 생각하는 삶인 듯했다.
풀어진 표정은 이소호칸과 꼭 닮았다. 다만 힘을 잃어 불구가 된 그의 모습이 이소호칸의 위풍당당한 모습과 비교가 되어 한없이 처량하게만 보였다.
무명은 억압받고 있는 자신의 삶을 선고우를 통하여 투영하며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그리 쓴 물을 들이켜는 이유를 이제야 마음속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한참이나 선고우를 바라보던 무영은 바짓단을 털어내고 일어났다. 무명의 얼굴에는 눈물 한 방울이 맺혀 또르르 볼을 타고 턱 아래로 떨어졌다.
소매로 눈물을 훔쳐낸 무명은 선고우를 다시 한 번 흘낏 쳐다보고서는 발을 돌려 숙소로 향했다.
***
시간은 변함없이 흘러갔다. 생활상 중에 변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수에르를 따라 가끔 오전에 사냥을 나가서 사냥감을 잡는 일이다.
관엽이 특별히 신경을 써준 덕에 무명은 덫을 넓은 지역까지 놓을 수 있었고 매번 많지는 않지만 빈손으로 돌아오는 때는 드물었다.
무명은 사냥감을 잡을 때 반드시 공진희에게 먼저 나누어 주었다. 그녀는 홀몸이 아니기에 가장 많이 챙김을 받아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착한 공진희는 무명이 잡아온 고기들을 혼자 먹지 않고 다 같이 먹었다. 그래도 무명이 준 고기 덕분에 공진희는 많지는 않지만 영양소를 습득할 수 있었는지 근래에 들어서는 혈색이 많이 좋아지고 있었다.
또 다른 것으로는 선고우가 공방 일에 대해서 조금 더 본격적으로 무명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작업을 할 때 이렇게 작업을 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해 주고, 그걸 적게 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만이 하던 작업을 하나씩 무명에게 넘기기 시작했다.
일전에는 결코 그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았던 작업이었다. 무명에게 일의 할당이 늘자 저번보다 배는 더 바빠졌다. 하지만 일에 대한 의욕은 무명이 작업에 참여하면서부터 배는 증가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했던가, 실수만 연발하던 무명도 시간이 점차 지나자 익숙해지더니 이제 한 사람 분의 일을 어느 정도 능란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렇게 만든 것은 모두 선고우의 욕설 어린 노기 때문이었지만 무명은 역시나 빠르게 적응했다. 이와 같이 적응에 힘을 보탠 것이 수에르와의 기본적인 체력 훈련 덕분임을 무명은 모르지 않았다.
공방일은 고되고 또 고되었다. 일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근력이 필요했다. 상당한 작업량에 몸과 정신이 온전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근력 수련으로 이미 몸이 다져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공방의 작업들은 근육을 계속 사용하는 일들이 대부분이어서 수련의 연장선이 되기도 했다.
능률이 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홀로 하던 일을 둘이 하니 선고우는 일을 할 맛이 나는 듯했다. 더욱이 무명이 보조로 호흡을 딱딱 맞추어주니 작업에 열의가 더욱 더해졌다.
선고우는 무명으로 인해 말라붙었던 자신의 삶이 조금씩 젖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물론 이전의 영광의 시간들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초라한 것이었지만 조그마한 것에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수련과 일을 반복하는 사이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봄에서 여름이 지나 가을이 다가오게 된 것이었다.
최근 들어서 무명은 변화한 생활에 완연히 적응하여 일상에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뭐, 여유라고 해봤자 사치를 부리거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주어진 일과 시간을 능률적으로 쓰는 방법을 익힌 것이었다.
여가시간이 조금씩 생기자 무명은 그때마다 수에르와 배웠던 피리를 연습하는 한편, 다른 것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의 수련이었는데, 수에르가 알려주지 않는 것을 수련하는 것이었다.
무명은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수에르와 함께 연병장을 지나쳐 이동했다. 장원 안에서의 행동은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에 무명은 연병장을 지나치면서 범족들이 수련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런 무명에게 가장 호기심을 끌어올린 것은 그들이 병기를 다루는 법이었다.
어떤 때는 각자 병장기를 쥐고 똑같은 수천, 수만 번의 행동을 반복한다든가, 다른 이와 대련을 하면서 병장기를 놀렸는데 그런 모습들이 무명에게는 너무나 매력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수에르는 결코 병기를 다루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무명이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아주 간략하게 몇 마디 설명을 해줄 뿐 병기를 직접 쥐게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무명은 시간이 날 때마다 눈을 감고 수에르가 단편적인 이야기를 해준 것을 떠올렸다.
‘우리의 무술은 패(敗)를 중심으로 강(强)으로 연결되어 있지. 그래서 강력한 일격으로 상대를 단번에 양단하는 거야.’
범족은 단 한 번을 정확하게 베기 위해서, 단 한 번의 격(格)을 위해 똑같은 동작이 몸에 완벽하게 자리 잡을 때까지 그것을 익혔다.
무명은 그러한 그들의 수련 방법을 뇌 속에서 계속 되뇌고 되뇌며 하루에도 족히 수만 번의 행동을 생각의 그림으로 그려 수련했다.
비록 실제로 몸을 움직이며 수련할 수는 없지만 생각으로는 그 어떠한 것도 가능했다. 무명은 그렇게 남는 시간을 모두 병장기를 다루는 법을 생각으로 익히는 데 주력했다.
워낙에 눈썰미가 좋은 무명이기에 범족이 수련하는 것 하나하나를 머릿속으로 정확히 그려놨다가 똑같이 따라 그리며 수행했다. 이 수련 방법이 효과가 있을지는 그로서도 의문이었지만 그래도 꼭 배우고 싶은 것을 공부한다는 것에 만족하며 꾸준히 머릿속 수행을 계속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병행한 것은 바로 모의 대련이었다. 눈을 감고 자신의 앞에 낮에 봤던 대련하던 범인을 상상으로 복사해 놓고선 행동 하나하나에 따른 대책을 세우는 것이었다.
상대 범인의 행동과 왜 그렇게 자세를 취했는지, 왜 대응 방법을 그렇게 했는지, 대련에서 졌다면 왜 대련에서 지게 된 것인지를 깊이 있게 궁리했다.
이러한 스스로의 학습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굉장히 이익을 보고 있었다. 수에르와의 수련이나 선고우와의 공방 작업을 할 때 이 수련을 하기 전보다 굉장히 움직임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었다. 즉, 쓸모없는 잔 행동들이 배제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소호칸이나 수에르, 선고우처럼 오랫동안 수련을 한 범인들을 보고 있으면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쓸모없는 동작이 없었다. 자신의 몸을 사용하는 데 가장 최적한 동작을 미리 무술 수련을 통해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행동에도 군더더기가 쫙 빠져 있었던 것이었다.
무명은 무술을 상상으로나마 체득하고 있었지만 수만 수십만 번의 상상력이 그의 행동 자체를 조금씩이나마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실전과도 같은 범족들의 훈련 방식을 그대로 머릿속에 각인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무명을 발전시켰다.
날씨가 가을에 접어들자 추수에 다들 바빠졌다. 공방은 곡간을 더 증설하기 위해 바쁘게 돌아갔고 여자들은 곡물을 옮기고 겨울을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어졌다.
공진희는 배가 아주 천천히 불러오고 있었으나 용케 잘 숨기고 있었다. 그녀는 지난여름 초에 만난 것을 마지막으로 이마진과의 만남을 꺼렸다. 이마진이나 수에르에게는 만나는 것의 위험성이 크니 한동안 서면으로만 응답하자 말을 해두었지만 무명은 공진희 그녀가 임신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임을 넌지시 느낄 수 있었다.
이마진은 약간의 불만을 가졌지만 공진희의 결정에 순순히 따랐고, 수에르는 요 근래 유기이의 임신에 최대한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유기이가 잉태한 새로운 생명에 수에르의 정신은 모두 쏠려 있었다. 수에르의 머릿속은 온통 유기이와 유기이의 뱃속의 자식에게 집중돼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고 모든 일을 가정에 일순위로 두었다. 빼먹지 않고 수련하던 피리 교육도 근래에는 뜸해졌다. 무조건 수에르가 집으로 달려간 까닭이었다.
무명은 그런 수에르의 모습을 보며 부러워했다. 이마진도 공진희에게 매일같이 달려가 보듬어주고 아껴주어야 하는데 이를 비밀로 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하지만 이를 섣불리 알릴 수도 없었다. 이미 도망친 아이들을 끓여 찢어 먹는 광경을 두 눈으로 본 무명은 공진희 누나가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알릴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어떠한 파급효과가 찾아올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곳에 오래 있던 관엽에게 물어보아도 인간 여자가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기에 모험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무명은 이마진에게조차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진희는 배를 무명천으로 동여매어 불러오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그 크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배가 부풀러 오르고 있었다.
공진희는 이를 악물고 배 속의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배를 꽉 조였다. 그리고 밥맛이 없고 헛구역질이 나는 와중에도 식사를 꾸역꾸역 먹어 살을 불렸다. 살이 조금이라도 쪄야 배가 불러오는 의심을 덜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같은 숙소에서 지내는 아이들에게는 어찌 숨길 수가 없었다. 공진희가 그렇게 조심하고 조심했지만 숙소에서 같이 지내는 아이들은 알아차렸던 것이었다.
몇 달째 달거리를 안 하는 까닭도 있었고 배가 불러오는 모습이 겉으로도 확연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배가 불러오면서 공진희는 이 아이를 낳지 말까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었다. 아니면 몰래 낳아 죽일까라는 생각도 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가랑의 자식이지만 범족 속에서 도구처럼 사용되는 인간들의 모습에 그녀의 강직한 마음도 계속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아이를 낳아도 양육을 감당을 할 수가 없는 위치에 있었기에 공진희의 마음고생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고민이 날로 커져가는 때에 숙소의 아이들이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처음 공진희는 무조건 부정을 했으나 결국 계속해서 홀로 이 비밀을 간직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임신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숙소의 여자아이들도 그녀가 이마진과 함께 만나고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다 알고 있었기에 임신 사실에 대해서는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 단지 그것이 그녀와 이마진의 사랑의 결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순진하고 순박한 아이들은 친언니처럼 따르는 공진희가 임신에 대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알자 성심성의를 다해 돕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2014-08-06 출판 본으로 본문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