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Star Kingdoms RAW novel - Chapter 80
0080 / 0124 ———————————————-
11. 손실[失]
무명이 근심하는 가운데에서 힘들게 말을 마쳤다. 입이 바짝 마르는지 말이 끝나자마자 무명은 물 잔을 들어 물을 벌컥 마셨다.
스산함이 방 안 깊숙이 맴돌았다. 무명이 말을 마치고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수에르는 정좌하여 눈을 감고 생각했고, 유기이는 조용히 바닥을 바라보며 사색하는 듯했다.
마침내 수에르가 입을 열었다. 아주 무겁고 느린 한마디를 내뱉었다.
“살 수 있다면 사는 것이 좋겠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 내가 몸담고 있는 범족의 이상(理想)과 념(念)은 이마진을 따라 그의 곁에서 명예롭게 죽는 것이라 말하고 있지만 나와 유기이, 아들 온주로를 봐서라도 생문(生門)이 있다면 그것을 택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내 안에서 서로 모순된 의견들이 대립하나 나는 무명의 말을 택하겠다. 네가 말한 대로 이마진과 공진희의 선택에 맡기겠다. 유기이의 생각은 어때?”
수에르가 유기이에게 되물었다. 유기이는 생각을 정리하는 듯 잠시 침을 삼키며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입술을 들며 답했다.
“나 또한 수에르와 비슷한 생각이야. 우리의 관습으로는 친우와 함께 죽는 게 옳은 선택이겠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기정사실이었어. 하지만 나 또한 수에르의 뜻을 따르겠어. 우리가 스스로 사문(死門)으로 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유기이는 말꼬리에 이르러서 방구석의 온주로를 바라보았다. 포근하고 따스한 눈길이었다. 그녀 또한 죽음을 재촉하여 수에르와 온주로 곁에서 떠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앞으로 기로는…….”
무명이 조곤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차분하고 조용히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이마진 형과 공진희 누나의 선택에…….”
* * *
아침 해가 고요히 산등성이를 넘어 떠올랐다. 구름 몇 점이 해 주위에 넘실거리며 노랗게 물들었다.
날이 온전히 밝자 수에르의 집 앞은 다양한 손님들로 북적였다.
수에르나 무명, 유기이는 손님들을 반갑게 여기지 않았으나 그들은 흙발로 집 문 앞까지 와서 내부의 셋에게 외쳤다.
“수에르는 나와 족장님의 명을 들으라!”
진중한 목소리의 울림이었다. 수에르는 고개를 들어 몸을 일으켰다. 무명도 수에르를 따라 일어났다.
수에르가 방문을 열자 무장하고 있는 대여섯의 호인이 수에르를 바라보았다. 그들 모두 수에르가 평소 즐겨 입던 곤색의 소복을 입고 있었다.
수에르는 발을 문 바깥으로 내밀며 입을 열었다.
“이른 아침부터 여긴 무언 일로 오셨습니까?”
수에르가 능청스럽게 말하자 문 앞의 호인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수에르가 이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 심중이 불편한 듯했다. 그는 수에르보다 덩치는 작았으나 상당히 굳센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무명은 가끔 그를 장원 내에서 볼 수 있었다. 분명 수에르의 몇 없는 상급자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면식이 있는 얼굴이었다.
무명이 그를 기억해 내고 있을 때 그는 손에 들린 은색 실로 마감된 서신을 활짝 펼치며 말했다.
“내 대족장님의 명을 가져왔으니 당장 예를 갖추고 이를 들으라.”
그는 수에르에게 진지한 어조로 하대하여 말했다. 수에르는 고개를 숙여 그자가 들고 있는 서신에 권상의 예를 올렸다.
“텐두린의 아들 수에르는 지금 당장 대족장님의 명을 받아 장원으로 오라. 무명과 동행하여야 하며 일시적으로 둘에게 제한한 근신 처분을 철회하는 바이다.”
“소인(小人) 수에르는 대족장님의 명을 받들겠사옵나이다.”
그자가 서신을 접자 그제야 수에르가 고개를 들고 눈동자를 굴렸다.
“한데 이렇게 많은 인원이 같이 오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우메르 형님? 이 정도 서신은 시종에게 전달하여도 제가 찾아뵐 텐데요. 아이들은 다 무장하고 있고… 표정이 험악해 보입니다.”
수에르가 말하자 우메르라는 자는 눈을 치켜뜨며 뭔가 의심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는 곧 그 기색을 지우고 수에르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로 말했다.
“어제 장원 안에 잡혀있는 인간 여자아이를 비호(庇護)하러 대족장님께 갔다고 하던데 사실이냐?”
“네, 사실입니다.”
수에르가 당황하지 않고 대답하자 우메르는 살짝 고개를 둘러대며 말했다.
“어제 저녁에 인간 남자 하나가 그 여자를 구하기 위해 장원에 침입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여자의 자식의 아비일 거라고 추측하더군. 대족장님이나 고스보치 님은 자네가 여자아이를 비호한 탓에 장원에 들어온 남자아이를 도와준 것이 자네가 아닐까 의심하고 계시네.”
“그게 말이 됩니까? 전 그 여자아이를 무명과 함께 비호한 탓에 내내 둘이서 자택에 근신하고 있었습니다.”
수에르의 말을 듣고 우메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
“나도 말은 안 될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어쨌든 대족장님께서 이리 명을 내리셨으니 고분고분히 따라와 주게나.”
우메르는 그렇게 말하고 상체를 돌려 마당 밖으로 걸어갔다.
수에르와 무명은 집 안의 유기이에게 목례하고 우메르를 따라나섰다.
상대적으로 호인들의 걸음걸이가 빠른 탓에 무명은 거의 뛰듯 그들을 쫓았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같이 무거웠지만 무명은 마음을 굳세게 다지고 그들을 따라 이소호칸의 장원으로 향했다.
장원 안에 들어선 둘은 이소호칸의 별채 마당으로 인도되었다.
별채의 뜰에는 이소호칸이 아닌 다른 이가 상석에 앉아서 수에르와 무명을 맞이했다.
“이른 아침부터 수고가 많으십니다, 우메르 님.”
그는 마진츠였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일어나 수에르와 무명, 그리고 둘을 인도해 온 우메르를 맞이한 마진츠는 인사 후 바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대족장이신 아버지께서 지금 축제 준비를 위해 다른 이들과 만나고 계셔서 제가 염치를 무릅쓰고 상석에 앉았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제가 아버지를 대신하라는 명령을 내리셨기에 행한 일입니다.”
마진츠는 총명하게 반짝이는 옥빛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근신 중인 수에르 님과 무명을 이 자리에 데리고 온 것은 어제 저희 장원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진츠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제 장원에 인간 남자가 침입을 해왔습니다. 연유는 장원에 감금되어 있는 인간 여자아이를 구출하려고 장원의 벽을 넘은 것입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인간 남자가 여자를 구출하기 전에 그를 구속할 수 있었지요. 본래 아버지께서 직접 녀석을 추궁하려 했지만 보시다시피 선약이 있으신지라 무명을 불렀습니다.”
마진츠는 말을 마치고 시녀들을 불러 손짓했다. 시녀들은 사전에 마진츠와 이야기가 되어있는지 그의 손짓을 보고 서둘러 움직였다.
“아버지를 제외하면 무명 이외에는 인간의 언어를 할 줄 아는 이가 없어서 말입니다. 아니안이 있기야 하지만 그녀를 예까지 오게 하는 것보단 무명을 데려오는 게 나을 거 같아 수에르 님과 함께 불렀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별채 건물 뒤에서 호인 하나가 동아줄 하나를 끌고 나왔다. 그 끝에는 이마진이 왼손과 목이 한데 묶여 개처럼 끌려나오고 있었다.
무명은 굽어지려 하는 눈살을 애써 펼쳤다. 볼살이 떨리려는 것은 송곳니로 입술 안쪽을 깨물어 간신히 참아내었다.
그 광경을 본 수에르 또한 마음이 흔들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에르와 무명은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밤새 다리 한쪽을 저며 놨는데도 신음만 내지르고 말 한마디도 내뱉지 않더군.”
마진츠의 말에 무명은 이마진이 땅에 질질 끌려오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른 다리의 무릎 아래쪽이 너덜거렸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걸레짝이 되어있었다.
무릎 위쪽을 흰 천으로 동여매놓아 더 이상 피가 흘러나오진 않았으나 피부는 갈기갈기 갈라져 있었고, 안쪽 근육은 짓이겨져 형체를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힘줄들은 찢어진 천 조각처럼 덜렁거리며 핏방울을 떨구어 내었다.
저 정도라면 이미 충분히 고문한 상태라 볼 수 있었다. 이마진은 용케 기절하지는 않았는지 끌려나오면서도 미약하지만 신음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제정신을 유지하지는 못하는지 고개는 푹 고꾸라진 채였다.
이마진이 가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무명의 마음은 심란하게 뒤집혀졌지만 어떻게든 감내하려 애썼다.
이마진이 마진츠의 앞에 무릎 꿇려지게 된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으나 무명에겐 천 년 만 년과도 같은 흐름이었다.
“그럼 무명, 말을 전해줄 수 있겠나? 같은 인간이어서 거부감이 들진 모르겠지만 네게 통역을 부탁하고 싶구나.”
마진츠가 무명에게 묻자 무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못하지만 수락의 의미였다.
“정신 차리게 물 좀 뿌려 주십시오.”
이마진을 손으로 가리키며 마진츠가 말했다. 여시종들이 물동이를 가져오자 이마진을 끌고 온 호인이 물동이를 들어 이마진의 얼굴에 뿌렸다.
이마진은 세차게 뿌려진 물줄기를 맞고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약하게 저었다. 동아줄이 왼 손목과 목에 같이 매어있어 상당히 괴이쩍게 보였다.
“전해다오, 네 녀석은 왜 어제 장원의 벽을 넘은 것인지. 여자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답하겠지만 경황 설명부터 확실히 들어야겠다.”
무명은 순간적으로 목이 메어왔지만 이를 악물었다. 이마진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여기에 왜 왔는지 묻습니다.”
무명이 말하자 이마진이 낌새를 눈치채고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아는 목소리, 아는 언어가 귀에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마진은 퉁퉁 불어 터진 얼굴을 들어 무명을 쳐다보았다. 그리운 얼굴, 목소리였다. 눈꺼풀이 부풀어 잘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들어 무명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무명은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과도 같았다. 하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고 눈을 마주쳤다. 이마진에게 어떻게든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있었다. 말로는 할 수 없는 무언의 전함이었다.
이마진은 무명의 눈동자를 고요히 바라보았다. 단 몇 초였지만 둘은 분명히 서로의 의사를 교환했다.
이마진의 대답이 늦자 마진츠는 옆의 범인에게 말했다.
“재갈을 물려놓은 것도 아닌데 말을 하질 못하니 흐음…….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아직 부족함이 있나 봅니다.”
마진츠의 말을 듣자 이마진의 목줄을 잡고 있는 호인은 꿇려있는 이마진의 오른 다리 무릎 아래쪽을 짓밟았다.
“끄어어어!”
이마진의 처량하고도 사나운 고통의 외침이 장내에 길게 울려 퍼졌다.
============================ 작품 후기 ============================
2014-08-07 출판 본으로 본문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