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Star Kingdoms RAW novel - Chapter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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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목숨[命]
무명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이마진의 텅 비어버린 왼쪽 눈을, 그 공허에 가득 찬 눈을 바라보게 된다면 더 이상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무명은 허리를 펴고 몸을 돌려 마진츠에게 이마진의 말을 전했다.
마진츠는 약간 아니꼬운 듯 이를 드러내며 표정을 찌푸렸다.
“남은 눈도 도려내 뽑아주지요.”
결국 마진츠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마진에게 고통을 더하는 문장이었다.
마진츠의 말을 들은 범인은 한순간의 지체함 없이 이마진의 얼굴을 다시 붙잡았다.
이마진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두꺼운 오른손에 머리와 어깨를 잡혀야 했다.
이마진은 곧 자신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려 하는지를 알아챘다. 마지막 남은 빛을 앗아가려는 것, 오른쪽 눈마저 송두리째 뽑아가려는 것. 아무리 각오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이마진이 처음으로 신음 소리를 크게 내며 갖은 애를 쓰면서 저항했다. 몸은 아까보다 더욱 뒤틀렸고 다리는 격하게 버둥거렸다.
앞으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공포감은 그 어떠한 이유보다 그를 저항하게 만들었다.
이마진의 저항은 일전과 마찬가지로 부질없었다. 이마진은 폭풍 앞의 허수아비처럼 힘없이 범인의 손에 억제당했다.
“끄아아아아!”
차마 듣기 어려운 신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진츠가 불쾌해하며 말했다.
“혹여 손님들이 들을까 두렵습니다.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입을 막고 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마진츠의 말을 듣고 범인은 허리춤에서 재갈을 꺼냈다. 그때 보다 못한 무명이 이마진에게 외쳤다.
“말하세요! 말하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을 겁니다.”
무명의 진심이 담겨있는 말이었다. 무명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강인한 마음을 가진 무명이라도 도저히 이마진의 모습을 보고 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마진을 보며 내뱉는 무명의 말에 수에르는 몸을 미약하게 떨었다. 수에르 자신 또한 멀리서나마 이마진을 보면서 마음이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만 최대한 마음을 잡고 평정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명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기에 수에르는 방금 그 말에 진심이 가득 담겨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수에르는 질끈 눈을 감았다.
무명의 말에 순간적으로 범인은 경직하였고, 이마진 또한 잠시 몸부림을 멈추었다.
이마진은 입술을 부르르 떨 뿐 그 입술에서는 아무런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범인은 낌새를 살펴보더니 결국 꺼낸 재갈을 이마진의 입에 물리고 핏방울이 맺혀있는 단검을 들어 종전과 같은 방법으로 오른쪽 눈을 도려내었다.
그 모습을 본 무명은 마치 자신의 눈을 도려낸 것처럼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너무도 힘겨웠다. 자신이 이마진 대신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러한 선택을 한다면 여태껏 이마진이 감내해 온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무명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타들어가는 갈등 속에서 이마진을 대해야 했다.
이마진의 양쪽 눈은 이제 둥그렇게 파여 텅텅 비어있었다. 그 핏빛 흑암과도 같은 안쪽에서 붉은 물방울들이 방울져서 양쪽 볼 가운데에 몇 줄을 이루며 흘러내렸다.
마치 괴기에 가까운 것이라 그것을 바라보는 무명의 입에서는 어떠한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정녕 입을 열지 않을 것인가? 참으로 고집이 세군.”
마진츠가 이마진의 강직한 의기에 두통이 나는지 이마를 짚으면서 허탈하게 말했다. 아버지의 대행을 훌륭히 이행하기 위해서는 소년의 심문이 효과적으로 진행되어야 했다. 하지만 녀석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으니 마진츠는 초조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마진츠는 초조함에 사로잡혀 더 강력한 고문을 이행하거나 저 소년에게서 대답을 이끌어내지 못할 것을 인정하거나의 기로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마진츠가 잠시 고민에 빠질 때에 이마진은 거의 실성한 듯 입에서 낮은 저음을 약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이마진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온몸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혀 흘렀다. 고통뿐만이 아니라 상실감에 휩싸여 있는 듯했다.
“귀는 막히지 않았으니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지금 대답하지 않는다면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통 속에서 죽게 될 것이다.”
마진츠는 이리 말하며 무명에게 곁눈질을 보냈다. 무명은 고개를 푹 숙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마진에게 마진츠의 말을 전했다.
마진츠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최후의 결단으로 저 아이가 대답하지 않는다면 고문으로 죽이겠다는 것이 그 결정의 내용이었다.
“숨기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뒤따르며 죽게 될 겁니다.”
무명의 목소리는 심히 잠기고 강약이 어지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마진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 가는 것이 눈에 환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마진은 무명의 말을 듣고 저음의 신음을 내던 입을 닫았다. 입술 안에서 이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무명의 귀에 들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떠한 감정과 느낌을 가지고 있을지, 얼마나 큰 공포를 안고 있을지 무명은 쉬이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때, 이마진이 붉게 물든 입술을 열었다.
“그토록 너희가 듣고 싶다면 내가 말할 것은 단 한 가지다.”
이마진이 입을 열자 좌중이 모두 그의 말에 집중했다. 인간 언어의 뜻을 알 리가 없는 마진츠조차 귀를 쫑긋하며 세웠다.
이마진은 잠시 주춤하며 말을 가다듬었다. 순간 마당이 적막으로 가득 찼다.
“나는 나의 연인을 곤경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리고 그것에 실패했지. 내가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이마진이 덤덤하게 말을 뱉자 모두의 시선이 무명에게로 돌아갔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무명에게 통역을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무명은 따끔한 그들의 시선을 느꼈다. 이 말을 그대로 통역해도 좋을지 머리를 굴렸다. 무명은 더 이상 고통스러운 이마진의 모습을 보는 것이 고역에 가까웠다.
무명은 이마진이 차라리 단숨에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로 인해 정신이 피폐해져 있었다.
무명은 이마진이 마진츠의 질문에 순응하여 대답하는 어감으로 통역하기 위해 단어를 선택하고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무명은 이마진의 입술의 떨림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의 입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작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움직임은 하나의 뜻을 명백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그것은 말이었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무명과 이마진만이 알 수 있는 인간의 언어. 그중 하나의 단어가 이마진의 입술에서 무음으로 메아리치고 있었다.
‘괜찮아.’
이마진은 끊임없이 입술로 그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분명 이마진은 전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사를, 뚜렷하게.
무명은 그 입술의 움직임을 읽어내고 울컥 눈물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소매로 틀어막았다.
이마진은 이 상황에서도 고통과 억압이 자신을 깊숙이 잡아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명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결코 그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무명과 다른 이들을 위해서 간신히 속삭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무명은 결국 이마진의 말 그대로 토씨 하나 틀림없이 전했다. 그것이 이마진이 원하고자 바라고자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할 수 있었던 결단이었다.
“네가 연인을 구하러 왔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일을 설명할 수는 없을 터. 무언가 네게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
마진츠는 이야기하며 품에서 조악한 단도를 꺼내어 이마진 앞에 던졌다.
이마진은 볼 수 없었지만 무엇인가 자신 앞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네가 가지고 있던 단검과 물품들, 그것 모두 너 혼자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분명 너에게 도움을 준 자가 있을 터. 이를 말하라.”
마진츠는 이마진에게 말했고, 무명은 마진츠의 말을 그대로 통역했다.
이제 무명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마진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이마진의 입술을 본 무명은 이 일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것… 모두 내가 준비한 것…이었다. 도움 받은 것은 없다…….”
이마진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무명이 통역하자 마진츠가 으르렁거렸다.
“사실이 아니다. 네가 도움을 받지 않았으면 결코 이곳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누가 너를 도왔는지 소상히 말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똑같은 말을 계속 추궁하자 이마진은 피로 물든 붉은색 이빨을 번득이며 실소했다.
“난 번복하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이마진은 이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그의 얼굴 면면히 비추어졌다.
“후, 입을 열지 않을 모양이로군.”
마진츠는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 고통을 가해서는 이마진의 입을 열게 할 수 없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상대는 이미 각오를 굳힌 상태. 죽음의 각오를 한 상대를 심문하여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없었다.
“인간 주제에 의기 하나는 봐줄 만하군요. 하지만 대답하지 않을 당신은 이제 필요가 없습니다. 약속대로 고통 속에서 죽게 해 주겠습니다.”
마진츠가 다음 말을 이으려고 한 순간 호인 하나가 곁에 다가와서 귓속말로 전언했다.
마진츠는 그 호인의 말을 듣고 인상을 구부렸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명, 수에르 님. 이제 두 분은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이 이상 이 아이를 심문해 봤자 아까와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될 듯합니다. 곧 아버지께서도 돌아오실 터이니 이 일에 관련해서는 이젠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자택에서 근신 처분을 계속 이행하라는 것입니까?”
수에르가 묻자 마진츠는 긍정을 표하며 대답했다.
“오실 때와 같이 우메르 님께서 배웅해 주실 겁니다.”
수에르는 이마진을 계속 지켜보고 싶었다. 여기에 있고 싶다, 터져 나오는 말을 간신히 목 뒤로 넘기고 묵묵히 마진츠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어떠한 행동을 하기보단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좋을 거 같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우메르 님 부탁드립니다.”
마진츠가 곁에 서있던 우메르에게 말하자 우메르는 수에르의 곁으로 다가가 눈짓했다.
“가세나.”
수에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우메르의 뒤를 따랐다. 수에르는 이마진의 앞에 있는 무명을 불렀다.
무명은 수에르의 곁으로 다가갔다. 고통받는 이마진을 두고 참으로 떨어지기 힘든 발걸음이었지만 무명은 결심을 내리고 이마진으로부터 멀어졌다.
뒤로 돌아 이마진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눈에 새기고 싶었으나 간신히 참아내었다.
둘은 우메르의 뒤를 따라 별채 마당을 벗어났다.
수에르와 무명이 별채로부터 멀어지자 순간적으로 고요함이 흘렀다. 이마진 또한 무명이 떠난 듯한 느낌을 받았고 주위 분위기가 변한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둘이 떠나자 마진츠는 이마진에 대해 마무리하기 위해서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의 별채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진츠, 이제 그만 자리를 비워다오.”
문이 열린 별채의 안쪽에서 거대한 인영이 바깥쪽으로 발을 꺼내며 말했다.
긴 흰색 갈기를 가진 그는 옥색 눈동자를 빛내며 밖으로 나왔다.
마진츠는 그 목소리에 따라 고개를 뒤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진츠의 아버지이며 동쪽 지파의 대족장인 이소호칸이었다.
마진츠는 별채 안에서 아버지가 뜬금없이 나오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적지 않게 놀랐다. 분명 전해 듣기로는 다른 지파의 이들과 만나러 가셨다 들었는데 별채 안에 계실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진츠는 곧 정신을 차리고 상석을 비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소호칸은 그런 마진츠를 보며 뚜벅뚜벅 걸어 상석에 올랐다.
아들인 마진츠에게 자리를 양보받은 이소호칸은 상석에 몸을 굽혀 앉았다.
이소호칸이 상석에 앉자 좌중에 있는 범인들이 공손히 권상의 예를 올렸다. 이소호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예를 받아주었다.
자리에 앉은 이소호칸의 옆에는 별채에서 따라 나온 이가 있었는데, 그는 이소호칸이 신뢰할 수 있는 자, 고스보치였다.
고스보치는 공손히 상석에 앉은 이소호칸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생각하나, 고스보치.”
이소호칸이 턱을 괸 후 옆으로 다가온 고스보치에게 물었다.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무명과 수에르가 저 아이를 도와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방금 전 수에르의 태도에서는 전혀 그걸 읽지 못했고, 다른 이들도 수에르가 근신 처분을 받고 이동한 사실이 없다 증언하니 의심이 많이 풀리긴 했지만 아직까지 가장 의심되는 이들은 저 둘뿐입니다.”
“아버지, 설마 무명과 수에르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마진츠가 고스보치의 말을 듣고 물었다. 이소호칸이 그렇다며 긍정을 표하자 마진츠는 이소호칸과 고스보치가 왜 별채 안에서 상황을 보고 있었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수고했다, 마진츠. 너를 제외하고서 여기 있는 자들은 모두 무명이나 수에르가 의심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 하지만 그 상태에서 둘을 심문한다면 다소 편파적으로 시야가 일그러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아무 사정을 모르는 너에게 이 일을 일임했던 것이다.”
이소호칸이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가 보기엔 어찌 느꼈느냐? 저 소년의 배후로 무명과 수에르가 지금 의심받을 만한 행동을 보여 주었느냐?”
이소호칸이 묻자 마진츠는 당황하여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소자는 둘에게 의심스러운 면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의심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의심스러울 것이 많지요. 특히나 무명이 통역한 내용은 제가 인간의 언어를 알 수 없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생각합니다. 혹 그렇기에 아버지께서도 별채에 계셨던 것 아닙니까?”
“그래, 그렇기 때문에 내가 별채에 있었던 것이다. 배후자인 무명이 통역을 한다면 분명히 내용을 왜곡하리라 생각했지. 그래서 별채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버지, 무명이 통역에서 왜곡한 부분이 있었습니까?”
============================ 작품 후기 ============================
2014-08-07 출판 본으로 본문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