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Star Kingdoms RAW novel - Chapter 84
0084 / 0124 ———————————————-
12. 목숨[命]
“원하시는 대답을 전부 해드렸습니다. 그러니, 제 연인을 살려주신다는 약속을 지켜주십시오.”
이마진은 온몸이 흔들리는 가운데에서도 이 단 한마디만큼은 놓치지 않고 또렷하게 말했다.
이소호칸은 심드렁하게 코 옆으로 가닥가닥 나온 긴 수염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대답했다.
“나는 네가 흑막을 알려줄 경우에만 그것을 보장했지, 이 이야기에 대해선 네게 보장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냉정하게 말을 마친 이소호칸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소호칸이 한낱 일개 인간에게, 그것도 장원을 무단으로 침입한 자에게 우호적으로 대할 필요성은 전무했다.
“무, 무슨 말을 하는…….”
이마진이 당황하여 말을 이으려 하자 이소호칸이 단호히 끊었다.
“내가 너에게 지켜야 할 약속은 없는 것이다. 난 너에게 지켜주어야 할 것이 단 한 가지도 없다.”
이소호칸이 무미건조하게 말하자 이마진은 한동안 아무 말도 잇지 못하다가 텅 빈 눈두덩이 위의 눈썹을 팔자로 구부리며 외쳤다.
“개자식! 망할 놈의 자식! 저주하고 증오한다! 이 생을 넘어서까지 너를 욕할 것이고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순간 이마진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악에 차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그는 온 힘을 다해 이소호칸을 흉보았다.
이소호칸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저주의 말에 미간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주변의 범인들도 소년이 이소호칸에게 무슨 말을 내뱉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표정과 어감을 통해 욕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던 것이다.
보다 못한 범인 하나가 이마진의 입을 막기 위해 다가갔지만 이소호칸은 인상을 쓰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마진을 건드리지 말라고 행동했다. 그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몇 분 정도가 흐르자 이마진은 목이 쉬어 더 이상 말을 내뱉지 못했다. 일전에도 비명을 질러 목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많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마진의 목소리가 끊어지자 이소호칸이 한쪽 입가를 올리며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느냐?”
이소호칸의 얼굴은 비릿한 미소로 일그러졌고 이어지는 웃음으로 이마진을 조롱했다.
“하하하하! 이제 네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으니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겠구나.”
이소호칸은 손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대고 혀를 내밀었다. 그러곤 손으로 혀를 당기는 척을 했다. 그것은 명백히 혀를 뽑아내라는 명령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마진을 조롱하는 행위였다.
“가증스런 혀를 뽑아버려라!”
범어로 이소호칸은 말을 했고, 이마진을 지금까지 고문했던 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소호칸의 명을 듣자마자 허리춤에서 두툼한 집게를 꺼내 들었다. 묵색 광택이 도는 철로 된 집게였다.
“대족장님, 그래도 혀를 뽑는 것은 조금 이르신 판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더 들을 말이 있을지 모르는데 이리 혀를 뽑으시면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되지 않습니까.”
고스보치가 이소호칸의 명을 듣고 앞으로 나서서 진언했다. 그의 진언에 혀를 뽑으려 하던 범족도 잠깐 움직임을 멈추었다.
“되었다. 이제 저 소년에게 들을 말은 더 없다. 이미 판단을 내렸다. 배후를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설혹 있다 해도 주도한 녀석이 저 녀석임은 분명하다. 저 녀석의 머리를 인간들 앞에 걸어놓아 본보기로 만들면 이러한 일은 다시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이소호칸이 똑 부러지게 결단을 내렸다. 고스보치도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물러났다.
“혀를 뽑아 말을 잃게 하고, 코와 귀를 뚫어 소리와 후각을 잃게 해라. 오감 중 오로지 고통만 느낄 수 있게 해라.”
이소호칸이 마지막으로 명을 내리자 범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진에게 다가갔다.
이마진은 범어를 알지 못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몰랐다. 그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소리에 집중하듯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렇게 이마진은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또다시 억제되었다.
* * *
수에르와 무명은 우메르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하지만 장원을 벗어나기 직전 무명은 걸음을 멈추었다.
“응?”
무명의 발소리가 끊기자 뒤를 따라오지 않는 무명을 보고 우메르는 의문을 던졌다. 수에르 또한 우두커니 서있는 무명을 바라보며 입술을 살짝 들었다 놓았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입에서 나오지 않은 듯했다.
“왜 거기 멈춰있나?”
우메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무명은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입을 열고 대답했다.
“가야 해요.”
아주 자그마한 소리였지만 그 소리를 내기 위해 무명은 어마어마하게 큰 용기를 내야만 했다.
“응? 뭐라고?”
우메르가 잘 들리지 않는 무명의 목소리에 다시 물었다. 무명은 우메르의 물음에 다시 또박또박 답했다.
“돌아…가야 해요.”
“어딜?”
우메르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물었다. 무명의 말은 주어와 목적어가 빠져 있었기에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시 별채로… 돌아가야 해요.”
무명이 문장을 완성하자 수에르는 눈을 감았고, 우메르는 아랫입술을 쭈뼛 내밀며 의문을 표했다.
“아니, 갑자기 서서 영문 모를 말을 하는데 무슨 소리인 거야? 왜 별채로 돌아가야 하는 건데? 정확하게 그걸 이야기해 줘야 하지 않겠나.”
우메르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면서 무명에게 다가갔다. 무명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의미가 가득 담긴 행동이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곳에 있던 소년, 제가 잘 알고 있는 형입니다.”
“뭐?”
우메르는 무명의 말에 놀라며 반문했다. 수에르는 눈을 뜨고 무명이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지그시 지켜봤다.
“설마 이번 사건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니겠지? 너나 수에르가 그 아이를 도와주지는 않은 거지?”
“도와주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설마 이러한 일을 벌이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무명은 우메르의 물음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우메르는 무명의 대답에 안도하는 듯했다.
무명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소년이 제 지인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채에서 계속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돌리긴 했으나 어떻게든 선처를 구할까 합니다. 고통스럽게 죽는 것보다 단번에 죽여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무명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우메르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하지만 너희 둘은 근신 상태이기에 지금 돌아간다는 것도 조금 그렇고, 돌아간다 해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네가 가서 단순간의 죽음을 내려달라 부탁하여도 바뀌는 것은 없을 거 같다.”
수에르가 우메르의 말에 맞장구 쳤지만 무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아직 수에르 형의 집에 도착하지 않았으니 근신이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근신이라는 것은 도착 후에 내려지는 것이겠지요. 설혹 결과를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지금 다시 돌아가 선처를 부탁하지 않는다면 제 일생을 후회하게 될 거 같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제 지인을 위해 선처를 부탁드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무명이 말하자 우메르가 난처한 듯 입술을 내밀었다. 우메르는 마음 같아선 명을 받은 대로 무명을 데리고 곧바로 수에르의 집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무명이라는 소년이 마음을 다해 부탁하는 것을 바로 거절하는 것이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무명의 말에 수에르가 자신과 같이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기에 우메르는 수에르에게 선택을 떠넘기는 것을 선택했다.
우메르는 넌지시 수에르에게 물었다.
“수에르, 자네 생각은 어떤가? 자네 말대로 가봤자 바뀔 것은 없을 텐데 이대로 자네 집으로 가는 게 어떨까?”
수에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우메르의 기대와는 다른 문장이었다.
“그렇게 생각은 했으나 무명이 저리까지 말한다면 선처를 부탁하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확실히 저희가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근신 처분이 적용된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지인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인간이나 저희 범족이나 동등한 것 아니겠습니까.”
수에르가 금세 말을 바꾸자 우메르는 더욱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수에르는 바로 무명의 의견에 동조하고 싶었으나 처음 우메르와 뜻을 같이하지 않고 무명을 옹호했다면 우메르는 둘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대로 수에르의 집으로 이끌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수에르가 한 번 우메르의 편을 서줌으로 우메르가 자신에게 선택을 양보하게 만든 것이었다.
우메르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는 그만이 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수에르는 이마진에 대한 호의를 내색하지 않기 위해 일생일대의 연기를 계속 펼치고 있었다.
“뭐, 수에르 자네도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어쩔 수 없기야 하지만 나는 이 일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일절 책임질 수가 없네.”
우메르는 아니꼬운 듯 허락하며 말했다. 무명은 감사를 표하며 수에르와 우메르에게 허리를 굽히고 인사했다.
“제 억지스러운 부탁을 들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우메르 님, 그리고 수에르 형.”
“네가 억지스럽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나 보구나. 하지만 일단은 돌아가서 선처를 구해보도록 해라.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일 테니 말이다.”
우메르는 그리 말하며 몸을 돌려 다시 별채로 걸어갔다. 무명이 그 뒤를 따랐고, 수에르가 같이 걸었다.
무명은 이마진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어떻게 선처를 부탁해야 할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며 지나온 길을 다시 걸었다.
* * *
별채에 진입하자 무명의 얼굴은 물음표로 가득 찼다. 마진츠가 앉아있던 상석의 자리는 주인이 바뀌어 이소호칸이 앉아있었고, 이마진의 몰골은 일전보다 확연히 변해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에르가 대족장님을 뵙습니다.”
수에르는 이소호칸을 보자마자 권상의 예를 올렸다.
수에르가 먼저 인사하자 우메르 또한 인사했다. 우메르는 이소호칸이 별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별로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둘의 권상 다음으로 무명이 허리를 숙여 이소호칸에게 인사했다.
“무명이 어르신을 뵙습니다.”
이소호칸은 수에르와 무명이 돌아온 것에 대해 고개를 꺾고 궁금증을 자아냈다. 손을 들어 인사를 받은 이소호칸은 우선 우메르에게 물었다.
“수에르와 무명의 근신 처분을 위해 장원을 나가는 중으로 알고 있는데 무슨 연유로 별채에 돌아온 것이냐?”
우메르는 이소호칸의 물음에 살짝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다름이 아니고 무명이 저 소년과 평소 알고 지내던 사이라 하며 지인으로서 선처를 부탁드리고자 하여 다시 걸음 했습니다.”
우메르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우메르의 대답을 들은 이소호칸의 시선은 무명에게 향했다. 고스보치, 마진츠 그리고 별채 안뜰에 있는 수 명의 범인들의 시선이 모두 무명에게 집중되었다.
“네가 저 소년을 알고 있다고?”
============================ 작품 후기 ============================
2014-08-07 출판 본으로 본문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