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Star Kingdoms RAW novel - Chapter 86
0086 / 0124 ———————————————-
12. 목숨[命]
“되었다. 그것만큼은 내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 염에서 인간의 선처를 받아들인 전례가 없을 터. 네가 평소 나에게 가르침을 받기에 이렇게 선처를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소호칸이 손을 내저으며 단호히 말을 끝냈다. 그로서는 이 정도의 선처만 해도 크게 무명에게 양보해 준 것이었다. 무명이 아닌 다른 자였다면 귀담아듣지도 않고, 선처를 고려조차 하지 않았을 터였다.
“너는 이로 만족하고 일어나 내 명을 받으라. 사실을 늦게 말한 벌을 주겠다.”
이소호칸이 이어 말하자 무명은 엎드린 채로 잠시 있다 손을 천천히 움직여 상체를 들고 일어났다.
이마에 모래알이 박혀 붉은색 핏방울이 살짝 맺혀있었고, 얼굴은 흙먼지로 뿌옇게 덮여있었다.
“백모의 이름으로 명하니 앞으로 별채에서 거하면서 내게 배움을 얻어 인간을 조율하는 관리인으로서 준비하라. 저 소년의 무리, 잘못된 생각을 가진 인간과 어울려 네가 못된 생각을 가질 수 있으니 나는 벌로써 너를 그들과 떼어놓겠다.”
이 명령은 어찌 보면 벌이 아닌 이소호칸의 자상한 배려로 보였다. 하지만 무명은 그 벌에 가슴 한편이 시리도록 차갑게 느껴졌다.
자신이 이소호칸에게 배움을 얻는 이유는 인간으로서 범족과 보다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여 인간을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형편없이 초라해진 이마진 앞에서 상기되는 그 말은 무명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자신은 결국 이소호칸의 말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이 너무나도 강하게 들었다. 같은 종족인 인간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단지 명령을 받아들여 인간을 노예로서 더욱 잘 부리게 만드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에 역겨움을 느꼈다.
하지만 무명은 그 모든 것을 가슴 깊숙이 삼켜 버리고선 고개 숙여 말했다.
“무명, 그 명을 온전히 받들겠습니다. 하오나 명을 받들기 전에 감히 선처의 부탁 하나 올려도 되겠습니까?”
“무어냐, 말해 보아라.”
“저 소년을 효시에 처하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살아서 소녀와 만나 같이 있게 해주십시오.”
그것은 무명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보잘것없는, 하지만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저 소년은 이미 말을 하지도, 보지도, 듣지도, 맡지도 못한다. 그런데 소녀와 만나게 하는 연유가 무엇이냐?”
이소호칸은 고개를 기울이며 무명에게 물었다. 다 죽어가는데 소녀를 만나보았자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터였다.
“소녀도 내일이면 죽게 될진대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것이 낫지 않느냐.”
무명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소호칸은 결론을 지어 말했다. 무명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제가 사랑을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으나 사랑한다면 그 어떠한 순간이라도 만나고 보고 싶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 소년과 소녀가 어떤 연유로 사랑을 하게 되었을지는 모르나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서로 만날 수 있게 배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범인들은 일반적으로 연인 관계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잘 모르고 결혼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태생적으로 힘이 강하고 건장한 남성을 지극히 우월하게 보기에 여성은 무조건적으로 남성을 존경해야 하는 체제였다.
그렇기에 서로 간에 사랑은 찾기 힘들었고, 무명의 말에 깊이 수긍하기 어려웠다.
대족장인 이소호칸 또한 무명의 말에 수긍하기 어려워 의문을 던질 정도였으니 범족이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감정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수에르만큼은 무명의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저미어왔다. 수에르와 유기이는 범족에선 드물게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제대로 전할 수 있는 부부였다. 무명의 말이 가지는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견뎌왔지만 무명이 마지막 부탁을 내뱉을 때 수에르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흘러내리는 눈물을 수에르는 빨리 소매로 훔쳐내었다. 자신이 이마진의 처지가 되었을 때 가장 사랑하는 유기이를 만나고 싶을 거란 것. 무명의 말에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에르가 소매를 들어 눈가를 비비자 곁에 있던 우메르가 기척을 읽고 수에르에게 물었다.
“왜 그러는 겐가?”
“눈에 먼지가 들어간 듯합니다.”
수에르는 평소 같으면 되도 않는 변명을 했지만 우메르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칠칠맞지 못하기는…….”
우메르의 말에 수에르는 웃음으로 답했지만 웃는 것이 웃는 게 아니었다. 마음은 일그러질 정도로 일그러졌고,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만일 자신 하나의 안위만을 생각할 것이었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뛰쳐나가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내인 유기이가, 아들인 온주로가 그의 마음 한편을 계속해서 붙잡고 있었다.
지켜야 하는 것과 저버려야 하는 것의 갈등 속에서 수에르의 마음은 조각조각 나는 듯했다.
“그것이 너의 원이라면 그렇게 하마. 하지만 너는 다시는 저 인간 무리와 섞이지 못할 것이다. 명심하라.”
“명심하겠습니다.”
무명이 고개를 숙이고 정중히 답했다. 이소호칸은 그런 무명의 모습을 보고 얕게 고개를 끄덕인 후 이어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럼 수에르와 무명은 서둘러 근신 명령을 이행하도록 하라. 둘의 근신의 금제를 푸는 것은 차후 내가 다시 명을 내려 전하도록 하겠다.”
이소호칸이 손을 휘둘러 수에르와 무명 둘에게 말했다.
둘은 이소호칸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여 명을 받았다.
이소호칸에게 작별 인사를 나눈 무명과 수에르는 이전과 같이 우메르의 인도에 따라 별채의 마당을 떠났다.
무명은 떠나기 전에 널브러진 이마진을 흘깃하며 쳐다보았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무명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떨어져 나간 두 귀, 처참히 베여 핏물이 쏟아져 나오는 코, 입에서 침처럼 떨어지는 핏줄기, 사발의 빈 공간처럼 둥글게 파인 두 눈, 납작하게 짓이겨진 다리. 잘려진 팔…….
그 모습이 이마진을 보내는 마지막 모습이라는 것에 무명은 다시 한 번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저 차디찬 모래 바닥이 이마진의 피로 붉게 물들어가는 것이 타는 듯한 마음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무명은 이내 고개를 돌려 자리를 떠났다. 오늘 얻은 상처는 그 어떠한 것도 채워줄 수 없는 큰 공허와도 같았다.
그렇게 결코 잊을 수 없는 허무를 가지고 무명과 수에르는 정신없이 걸어 유기이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도착했다.
어떤 정신으로 도착했는지 몰랐다. 머릿속에 정리되지 못한 생각들이 혼란스럽게 아우성치는 탓에 우메르와 헤어져 집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했던 둘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하늘이 티 없이 맑았지만 오는 길에 점점 구름이 끼더니 지금은 갑작스레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날씨마저 이상하게도 급격하게 우울하고 음울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곧 유기이가 인기척에 문을 열었지만 침묵은 계속되었다. 셋 사이의 적막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비가 내리네.”
유기이가 문밖으로 손을 내밀어 빗방울을 만지면서 말했다.
“방금 전까진 햇살이 그윽했었는데 구름떼가 몰려와 시린 비를 내리고 있구나. 그렇게 가만히 서서 비를 맞지 말고 어서 들어와.”
문을 크게 열며 유기이가 둘을 불렀다. 하지만 수에르와 무명은 망부석처럼 빗방울을 맞으며 고개를 더욱 깊게 숙일 뿐이었다.
“바보.”
유기이는 둘이 미동조차 하지 않자 문밖으로 나와 무명을 오른손으로 안고, 수에르를 왼손으로 안았다. 가을의 끝 무렵, 갑작스레 내리는 시린 빗속에서 한 몸이 된 셋은 우두커니 슬픔을 공유했다.
“들어가자. 이러다 누군가 우리를 보기라도 하면 이상한 의심을 사게 될 거야. 슬프고 아프지만 여기에서 비를 맞고 서있는 건 진짜 바보짓이야.”
유기이가 작은 목소리로 무명과 수에르의 귓가에 말했다.
유기이가 두 손으로 수에르와 무명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집 안쪽으로 걷게 했다.
한 걸음이 천 걸음같이 더디고 느렸지만 유기이의 인도에 둘은 걸음을 옮겨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유기이는 풀썩 주저앉았다. 그녀 또한 힘들고 어려웠으리라. 남편인 수에르의 죽음까지도 각오했을 터였다. 단단하게 맺은 마음이었건만 수에르가 살아 돌아오자 안도감에 힘이 풀린 듯했다.
비에 젖은 털과 옷에서 물방울이 방 안으로 떨어졌다. 유기이는 입을 열었다.
“수건으로 물을 닦아내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는데…….”
유기이가 다리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수에르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무겁게 입술을 들었다.
“잠시… 조금만이라도 이대로 있고 싶어.”
고개를 숙인 수에르의 말은 깊게 잠겨있었고, 돌리기 어려운 말이었다. 유기이는 그럼 무명이라도 갈아입어야 하지 않을까 하며 무명을 바라보았다.
무명은 유기이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울었다. 비에 젖은 오른쪽 옷소매로 입가를 막고, 왼쪽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채로 흐느꼈다. 정말로 아이처럼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무명은 큰 소리를 내지 못했다. 혹여 소리가 새어나갈까 소매로 입을 틀어막고 처절하게 흐느꼈다.
무명이 소리 내어 울지 않자 유기이가 무명 앞으로 기어가 품에 안았다.
“소리 내어 울어도 돼. 빗소리가 네 울음소리를 가려줄 거야.”
유기이의 말에 무명은 입을 틀어막던 소매를 떼고 얼굴을 한없이 찡그러뜨리면서 목 놓아 울었다. 지금까지 참고 참아오던 울음이었다.
큰 울음소리에 자고 있었던 온주로가 깨어나 같이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유기이는 우는 온주로를 달래지 않았다.
“흐으, 흐으으. 흐으으으…….”
울다가 지친 무명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흐느꼈다. 이제는 울 수 있다는 안도감에 눈물이 한도 끝도 없이 나왔다.
머릿속에 가득 차있는 것은 불쌍한 이마진의 모습과 공진희의 묶여있는 모습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울음은 더욱 가중해서 성대에서 터져 나왔고, 눈물은 폭포같이 동공에서 쏟아져 나왔다.
수에르는 계속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그의 몸이 살짝 떨리는 것을 유기이는 무명을 안은 채로 볼 수 있었다.
수에르 또한 울고 있었다.
젖은 털끝, 떨어지는 빗방울에 섞여 수에르의 눈물 또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무명에 비해 흘리는 눈물은 적었지만 유기이는 지금까지 태어나 남편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성인이 된 남성 범족은 결코 울지 않는다. 그것은 죽는 순간까지 통용되는 것이었다. 웃으면서 죽음을 맞으면 맞았지, 결코 눈물을 보이는 경우는 없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부모가 죽고, 자식이 죽어도 성인 남성 범인은 울지 않았다. 우는 것은 그 자체로 나약함이라 생각했기에 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풍조가 깊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여 성인이 아닌 어린아이라도 어느 정도 철이 들면 결코 울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유기이는 어렸을 때부터 수에르의 곁에 있어왔던 소꿉친구라고 해도 수에르의 눈물을 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자신의 손으로 예장할 때마저도 수에르는 울지 않았다.
수에르의 눈물을 본 유기이는 남편과 무명이 얼마나 크나큰 상처를 입게 되었는지 직감했다. 무명이야 원체 나이가 어리고 인간인 탓에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수에르가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유기이의 관점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감정에 동조되어 유기이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둘의 가슴에 큰 공허가 생겨나게 된 것을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슬픔이 파도 물살처럼 그녀에게도 몰아쳤다. 그렇게 비가 떨어지는 세상 아래 무명이 아이처럼 울었고, 수에르는 목석같이 울었으며 유기이는 둘의 눈물을 받아 울었다. 어린 온주로는 셋의 울음에 감응하듯 목소리를 높여 울었다.
슬피 우는 울음소리가 시린 빗소리에 공허하고 처량하게 차곡차곡 묻혀갔다.
============================ 작품 후기 ============================
2014-08-07 출판 본으로 본문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