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Star Kingdoms RAW novel - Chapter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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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제[祭]
해는 져서 싸늘한 바람이 짓궂게 장작 위 불타오르는 불을 괴롭혔다. 불은 세차게 흘러오는 바람 사이에 몸을 꼬며 밤을 밝혔다.
불이 비추는 장막 안에 소녀 하나가 두 팔이 뒤로 묶인 채 장막을 지탱하고 있는 나무 기둥에 묶여있었다.
소녀의 머리와 어깨에 얇은 무명천 하나가 걸쳐져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오후로 넘어가면서부터 내린 비 때문에 날씨가 추워진 까닭에 무명천 하나밖에 걸치지 않은 그녀는 이를 부딪치며 바들바들 떨었다.
더구나 천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배는 보름달처럼 불러 있었는데 그녀가 만삭이라는 것을 그 크기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산고의 고통을 느꼈으나 무릎이 꿇려져 묶여있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었다.
시린 날씨에 배가 꿈틀거리며 고통이 느껴지는 것을 그녀는 홀로 감내하고 있었다. 추운 날씨였지만 그녀의 온몸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불꽃은 멀리서 바람에 휘둘리며 그녀의 그림자를 여러 조각으로 분산시켰다. 그녀는 어지럽게 움직이는 그림자를 보기 위해 머리를 슬쩍 들었다. 무명천이 그녀의 움직임에 천천히 흘러내려 속에 숨겨진 얼굴을 보였다.
눈물 자국이 그득하게 얼룩져있는 얼굴이 불꽃에 아른거리며 비쳤다. 핼쑥하고 처량함이 느껴지는 여인은 공진희였다.
공진희는 부르르 떨어가며 움직이는 그림자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내일이 밝아오면 자신은 죽게 된다는 것을……. 축제의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어느 정도 일정에 익숙해져 있었고, 어떠한 요리가 선보여질지도 알고 있었다.
이 막사는 공진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종 요리 재료가 같이 들어가 있었다. 미리 손질된 고기, 술을 담은 부대 등 동쪽 지파 각지의 다양한 식재료를 보관하고 있었다.
이 재료들은 모두 내일 축제 첫날에 요리되어 먹고 마실 것들이었다.
현명한 공진희는 자신이 이 재료들과 함께 요리될 것을 직감했다. 삶이 하루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공진희의 머릿속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연인인 이마진에 대한 걱정과 한탄만이 가득 메아리쳤다.
그것들은 추위와 산고의 고통을 넘어 계속해서 자신에게 몰아쳐왔다.
어제 보았던 그 끔찍한 장면. 자신을 포근히 안아주던 오른팔이 잘려 나가고 목에 올가미가 묶여 끌려나가는 이마진의 모습은 잊히지 않았다. 실성할 정도로 울며 그를 바라보았던 자신은 호인들에게 억제되어 방금 전까지 기절해 있었다.
공진희는 차라리 실성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한탄했다. 최악의 환경이었지만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을 저주했다. 도저히 제정신으로 견딜 수 없는 자신의 처지였지만 뚜렷이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었기에 더욱 고통스러웠다.
공진희가 선명해지는 기억을 조금 덜어내려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하며 숨을 골랐다. 뱃속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을 것이라는 처지를 모르는지 빛을 보고 싶다며 계속 몸부림을 쳤다.
또르륵, 공진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잡혀오면서 각오했었건만 눈물이 결코 마르는 일은 없었다. 생각하면 울고, 떠올리면 울었다.
눈물이 방울져 배 위에 떨어지는 순간 막사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불꽃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며 막사 밖의 그림자를 일렁이게 했다.
그들은 세 명으로 이루어진 호인 무리였는데 두 명의 손에는 하얀 포대가 들려있었다. 아니 언뜻 보기에는 하얀 포대였지만 군데군데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호인들은 서로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공진희가 묶여있는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공진희는 그들의 등장에 고개를 들지는 않고 눈만 살짝 떠 그들의 하반신과 끌 듯 들고 온 포대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포대를 공진희 앞에 던져놓고 손을 털며 나갔다. 마치 짐짝을 버리는 듯한 취급이었다.
공진희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미처 놔두지 못한 음식 재료이겠거니 생각하던 포대 입구로부터 미끄러지듯 머리를 내민 것은 시뻘겋게 물든 사람의 상체였기 때문이었다.
포대가 간간히 붉게 물들어있는 탓은 이 사람의 피인 듯했다.
공진희는 자신의 앞에 내팽개쳐져 엎드려있는 사람의 어깨에 눈을 둘 수 있었다.
익숙하게 보아왔던 흑색 머리카락 옆의 텅 비어있는 오른 어깨.
그것은 이마진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가랑이었다.
그녀는 붉게 물들어있는 이마진을 보며 눈물이 솟아오르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었다. 처참한 몰골이라지만 먼저 가랑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마진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로 엎드려 있었는데 공진희와 그녀를 묶은 기둥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자세히 보이지가 않았다.
공진희는 고개를 들어 상체를 왼편으로 틀었다. 두 손목이 모두 기둥 위쪽에 묶여있어 몸을 트는 것이 쉽지는 않았으나 입술을 악물고 이마진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마침내 공진희는 이마진의 얼굴을 스치면서 잠시라도 볼 수 있었다. 공진희는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흑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귀가 잘려있고 얼굴은 완전히 붉은 피로 범벅되어 있었다.
피 때문에 쉽게 인식하기는 힘들었지만 공진희는 이마진이 오감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자신을 똑바로 바라봐주던 빛나는 두 눈과 오뚝한 코 그리고 자신과 입맞춤하던 입술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했으나 공진희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저 상태라면 이미 죽었을 수도 있으리라. 코가 잘리고 입에서 피가 그득하게 흘러나오는 상태에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거 같았다.
하지만 확인해야 했다. 말라붙은 눈물 자국 위에 또 새로운 눈물로 길을 만들면서 공진희는 다시 몸을 틀었다.
종이처럼 매끈하고 약한 공진희의 손목이 밧줄과의 계속되는 마찰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살갗이 트고 찢어져 핏방울이 밧줄을 물들였다.
공진희는 낮게 흐느끼면서 이마진의 얼굴을 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아주 조금만이라도 더 가까웠으면 쉽게 볼 수 있었겠지만 그 거리가 참 애매모호했다.
순간, 이마진이 입술을 움직였다. 자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입에서 응고된 핏덩이를 뱉어내었다. 얕게 쿨럭이며 얼굴을 찡그렸다. 코에서 흐르는 피가 계속 입으로 흘러들어가 숨 쉬는 것을 방해하는 것 같았다.
공진희는 이마진의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그것을 보고 천지신명에게 감사했다. 그토록 처참하고 빈약한 환경에서 공진희는 이마진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기도하며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비록 눈물은 멈추지 않았으나, 죽을 운명이 뒤바뀌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것은 그녀에게 어떠한 것보다 더한 참 기쁨이었다.
가랑을 만날 수 있는 것, 이 순간에도 함께 할 수 있는 것, 공진희는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상황에 대해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공진희는 작지만 말라붙은 입술을 들어 가랑을 불렀다. 하지만 이마진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마진의 귀는 잘리고 그 속으로 피가 흘러들어가 굳어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진희는 이마진을 바라보며 그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알아챘다.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피의 양은 무시하고 숨을 쉬기 어렵다는 것도 예외로 친다 해도 포대 안쪽의 붉은 얼룩이 계속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진희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포대를 지켜보자 오른쪽 다리는 포대 안쪽의 형상이 보이는데 왼쪽 다리는 그렇지 못했다.
왼쪽 다리의 무릎 부근까지 푹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그 부분의 붉은 얼룩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고 공진희는 이마진의 왼쪽 다리가 잘려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생물이 상처를 입고 피가 많이 빠지면 죽게 된다는 것은 의학 지식이 없는 공진희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공진희는 어떻게든 이마진이 죽기 전에 자신이 곁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마진이 누워있는 두 자 정도의 거리는 쉽게 좁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진희는 무릎이 꿇려져있고 두 손이 뒤로 기둥에 올려 묶여있어 다가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마진이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여기서 소리를 친다 해도 이마진이 들어줄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혹여나 소리치는 자신에게 호인들이 와서 입에 재갈을 물린다면 더욱 안 될 일이었다. 어떻게든 소란스럽지 않게 이마진에게 다가가야 했다.
공진희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극심한 고통이 뒤따르겠지만 이마진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묶여진 무릎을 세우려 노력했다. 그랬다. 공진희가 그 자리에서 앞으로 엎어진다면 이마진의 얼굴 맡에는 닿을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만삭의 몸에는 힘이 없는 여인의 몸으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손목에 묶인 밧줄은 계속해서 공진희를 움직이지 못하게 괴롭히고 억지로 움직이려 하는 무릎은 아래 모래알에 가득 박혀 고통을 선사하고 있었다.
공진희는 움직임을 전혀 멈추지 않고 도전을 거듭했다. 그리고,
결국 공진희는 무릎을 세울 수 있었다. 이제 앞으로 넘어지는 일은 쉬운 일이었다. 불러온 배가 먼저 닿아 고통이 극심하겠지만 공진희는 용기를 내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하지만 불러온 배가 땅에 닿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바로 묶여있는 줄 때문이었다. 손목에 매어진 줄이 팽팽해지며 넘어지는 공진희를 고정시켰다.
공진희는 급작스럽게 팔의 근육이 당겨지는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팔은 줄에 의해 뒤로 치켜 올라가 온몸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까이. 시야의 바로 아래 이마진이 보였다. 하지만 공진희를 묶은 줄은 매정하게도 둘이 가까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치 허공에 고정된 듯 공진희는 끈에 매달렸다. 땀이 수없이 맺히는 상황에서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손목이 줄에 조여 크게 상처를 입으면서 흘러나온 핏물은 밧줄을 물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그녀의 가녀린 팔을 따라 빨간색의 선들을 만들어냈다.
공진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몸을 최대한 앞으로 숙였다.
임신으로 무거워진 몸이 더욱 앞으로 쏠렸다. 중력에 의해서 공진희의 두 손은 활의 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덜컥.
공진희의 몸이 한 번 앞으로 기울었다. 이마진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번개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강타하는 고통을 막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터져 나오는 신음을 혀를 깨물어 막았다. 손목이 빠진 까닭에 관절이 늘어나 앞으로 더 다가갈 수 있던 것이었다. 덕분에 공진희의 불러온 배도 땅에 닿고 그저 매달려있는 것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앞으로 조금이었지만 이마진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부족했다.
공진희는 결국 몸을 숙이며 기울였다. 중력이 길게 그녀의 팔과 줄에 작용했다. 팔꿈치와 어깨가 끊어질 듯 아프고 손목이 덜렁거리며 고통을 지속적으로 안겨주었지만 공진희는 팔에 가해지는 힘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아니 이젠 멈출 수도 없었다. 다시 몸을 뒤로 복귀시키는 것은 공진희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이제 어깨가 빠지느냐 팔꿈치가 빠지느냐, 둘 중 하나의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뚜두둑.
마침내 팔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리며 그녀는 앞으로 몸을 기울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2014-08-07 출판 본으로 본문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