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Star Kingdoms RAW novel - Chapter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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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제[祭]
흑요석 같은 그녀의 동그란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또르륵 흘러 볼을 가로질러 턱 아래로 떨어졌다.
입술 아래로 빨간 핏줄기가 눈물에 섞여 흘렀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두 팔에 전해져 왔지만 공진희는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 안쪽은 이로 인해 넝마가 되어있었다. 코에서는 흰 김이 가쁘게 내뿜어졌다.
팔은 어디가 빠진 것인지 잘 몰랐다. 그냥 온 팔의 근육이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공진희는 고통 속에서도 입가엔 미소를 지었다.
‘이런 고통 가랑이 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터.’
그녀는 그리 생각하며 이제 볼에 닿을 거리에 있는 이마진의 얼굴을 바라보며 파르르 떨었다. 그 얼마나 그립고 그리워하던 임의 얼굴이던가.
형편없이 잘려 나가고 일그러져도 공진희에겐 마음속으로 수천 수만 번을 그리던 임의 얼굴이었다.
공진희는 고개를 돌려 볼을 이마진의 잘려진 귀에 천천히 가져다 대었다. 이미 응고되어 말라붙은 피가 머리카락과 얽혀 차갑게 공진희의 볼을 맞이했다.
“가랑, 가랑…….”
조그맣게 숨을 쉬며 미동하는 이마진이었지만 그는 사랑하는 공진희가 지금 자신의 얼굴에 머리를 맞대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공진희가 작게 이마진을 불렀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절한 것인지 아니면 이미 온몸에 감각을 잃어 공진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알 방도가 전혀 없었다.
그저 공진희는 가랑을 수없이 되뇌었다. 입술로 혀로 눈동자로 온몸으로 마음으로 이마진을 간절히 불렀다.
* * *
그 울림은 마치 기나긴 꿈결에 스쳐 지나가는 희미한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빛을 잃고 소리와 냄새와 말을 잃은 상태. 오로지 무저갱 속의 끝없는 고통만이 느껴지는 정신 잃은 세계에서 선명하게 색이 다른 무엇인가였다.
그것은 잡힐 듯하면서도 결코 잡히지 않았다. 소리를 따라 하나 남은 왼손을 뻗어보면 타는 듯한 고통이 오른발에서 올라와 번번이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이 흑암 속에 농염한 안개가 피어올라 숨 쉬는 것조차 방해했다.
마치 물속 깊이 가라앉은 느낌. 포기하려 등을 돌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들리는 자그마한 외침. 들릴 리가 없는 소리. 하지만 그 속에는 분명 따스함이 온기가 가득 느껴졌다.
오로지 뇌리에 각인되는 것은 고통뿐이었지만 그 울림은 다시 한 번 뿔뿔이 흩어진 정신을 하나로 모을 수 있게 했다.
끊임없이 격통이 이어졌지만 다시 손을 뻗었다. 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이상 자신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 마음먹었다.
* * *
공진희는 아무리 불러도 반응하지 않는 이마진을 보고 가슴 깊이 갈증을 느꼈다. 슬픔만이 깊게 메아리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가랑이라 외치는 것을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감은 눈 기다란 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이슬 같은 눈물이 끝에 맺혀 크기를 키우다 무게를 못 이기고 볼을 지나 코를 넘어 이마진의 얼굴에 떨어졌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슬펐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공진희는 이마진의 상태를 생각하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눈물들은 계속 흘러 이마진의 얼굴을 타고 흘렀다.
* * *
그리고,
마침내 아무런 정처 없이 휘두르고 휘두르던 손의 끝에 물방울이 떨어져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따뜻한 물이 흘렀다.
그 어떠한 것보다도 따뜻한 온기가 감도는 물이 흘렀다.
물이 떨어진 곳이 손이 아닌 자신의 볼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열심히 손을 휘둘렀다 생각했지만 실제 손은 목에 단단히 동여매어져 있었다. 기나긴 고통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낸 것은 기적과도 같은 성과였다.
이마진은 텅 빈 눈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부르르 떨고는 입을 벌렸다. 아주 작은 움직임. 그 움직임은 마치 갓난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손가락을 움켜쥐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그 움직임이 아무리 작아도 놓칠 공진희가 아니었다. 그녀는 더 자신의 볼을 밀착시켜 작은 입술을 열었다.
“가랑, 가랑. 사랑하는 사람…….”
‘죽을 때가 도래하였기에 꿈꾸는 것인가. 내가 환상을 보고 듣고 있는 것인가. 눈이 멀었는데 어찌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인가. 귀가 멀었는데 어찌 그녀의 목소리가 온기가 내 곁에 있을 수 있는가.’
이마진은 이 믿을 수 없는 환각과도 같은 일에 이를 맞부딪치며 기뻐하지 못하고 오히려 공포감에 휩싸였다.
이마진은 이것이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면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라 생각했기에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공진희는 볼을 통해 이마진이 떨고 있음을 알아챘다. 천천히 얼굴을 움직여 볼을 비비며 공진희는 이마진에게 말했다.
“떨지 마세요, 가랑. 슬픔과 아픔이 공포로써 그대의 곁을 맴돈다고 해도 저 부야는 언제나 가랑 곁에 있을 거예요.”
그녀의 풀어진 머리칼이 작은 움직임에 스르르 이마진의 얼굴을 스쳐 턱 밑과 어깨에 흩어졌다.
이마진에게 그나마 강렬하게 남은 감각은 촉감뿐이었기에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흩어질 때마다 마치 수도 없이 많은 손가락이 그를 쓰다듬어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은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실로 그 온기는 베어진 코에서도 향기를 맡게 했다. 부야의 것이었다. 이마진은 그 순간 자신을 옭아매는 모든 고통과 억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가랑,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이마진이 진정됨을 느끼고 공진희가 얕게 속삭였다.
귀가 잘려 아직도 그 주위가 화끈거리고 있었지만 공진희의 목소리는, 부야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그것은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머리로 듣는 것이었다.
서로 맞댄 머리가 공진희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희미했으나 그 어떠한 것보다 선명했다. 이마진은 환청이라도 좋으니 공진희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었다. 그는 떨리는 목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대답은 할 수 없지만 듣고 있음을 확실하게 알리는 행동이었다.
공진희는 흔들려오는 움직임에 흥분을 감추지 않고 기뻐했다. 그녀의 숨소리는 벅차올랐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이 순간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가랑, 가랑. 사랑합니다. 가랑, 이 한마디 이 감정을 전하기 위해서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랑,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공진희의 기쁨이 행복함이 넘쳐 이마진에게 전해졌다. 순간 괴로움에 가득 차 접혀진 미간이 펴지고 피를 토해 내던 입이 구부러지며 올라갔다. 흉측한 모양새였지만 그것은 미소였다.
“부야가 살아있는 이유는 가랑 때문입니다. 제가 살아가는 희망은 가랑이 부야를 사랑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가랑, 그러니 계속 부야를 사랑해 주소서. 눈이 멀었다고 사랑조차 멀겠습니까.”
조곤하게 이야기는 공진희의 말에 이마진은 턱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없지만 이마진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달콤한 말에 기쁨으로 흐느끼고 있었다.
공진희의 따스한 입김이 따스한 콧바람이 이마진의 얼굴을 덮었다. 둘이 서로를 안고 수줍은 사랑을 나누던 그때처럼 변함없는 따스함이 느껴졌다.
“부야, 얼굴이 붉어집니다. 가랑과 함께한 날들이 너무나도 행복하기에 전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가랑이 속삭여준 모든 말과 행동이 노랫말과 춤처럼 제 귀와 눈에 맴돕니다. 이곳에 끌려오면서 제 눈물을 소매로 끊임없이 받아주셨던 일. 겨울철 빨래에 손이 갈라져 피가 나고 나무껍질같이 거친 제 볼품없는 손을 매만져 주시며 아파하셨던 일.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글로써 감정을 전해주신 일. 그리고 만나서 사랑한다 말해 주시던 일. 처음으로 입맞춤을 해주셨던 일…….”
벅차오르는 감정에 공진희는 말을 하다 말고 숨을 작게 헐떡이며 들이켰다. 눈물이 다시 흘러 이마진에게 닿았다.
“어찌 지금 그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을까요. 살아서 이야기해도 천 년이 부족할 것이고, 죽어서 이야기한다 해도 만 년이 부족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이생에서 만나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찰나(刹那)와 같이 짧을 것을 알기에 부야는 그것이 너무나도 한이요, 슬픔입니다.”
공진희가 흐느꼈다. 이마진은 그녀를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것도 할 수 없었다. 손은 묶여있으며 다리는 꿈쩍하지 않았다. 단지 부야의 말을 듣고 같이 흐느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참으로 얄궂지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이 부야, 이렇게 된 제 삶을 저주하고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축복하고 기뻐하나이다. 지금 이 순간마저도 천지신명께 감사하고 감읍합니다. 분명 가랑도 그리 생각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마진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진희와 자신의 마음이 닿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을 다했다. 하지만 그것도 점점 힘에 겨워지는 것을 느꼈다. 몸이 차가워지고 온몸의 근육이 움찔거리며 떨렸다.
부야의 말에 다시 자기 자신을 힘겹게 찾았지만 결국 몸은 죽음이라는 이름의 나락으로 계속해서 끌려가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은 공진희의 말로도 붙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스멀스멀 뱀처럼 두 사람의 시간을 조여오며 빠르게 엄습해 오고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느끼고 있었기에 공진희는 입을 쉬지 않았다.
“춘삼월 봄바람에 분홍 꽃 필 때에 부야를 안아주시며 평생 사랑해 주겠다고 하신 말씀, 저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그 말씀, 소녀에게 바꿔 주시겠습니까. 살아 평생이 아니라 죽어 평생 행복하게 해 주시겠다고? 그리하면 이생이 아니라 저승에서도 우린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다음 생애에도 우리는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진희의 말은 이제 울음이 거의 반이나 섞여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확실히 이마진에게 전해졌다.
이마진이 아직 숨을 놓지 않은 이 삶에 분명히 전한 전언이었다.
근육에서 잔 경련이 쉴 새 없이 움찔거렸지만 이마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정신을 모아 입안에 응고되어 뭉쳐있는 핏덩이를 볼을 움직여 뱉어내었다. 그러곤 열린 입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소리를 뱉어내었다.
“아…….”
이마진의 대답에 공진희는 옆으로 누워있던 고개를 돌려 이마진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 입맞춤은 길었다. 이마진의 미소가 영원히 굳을 때까지 그리고 그의 숨이 멈출 때까지 그녀는 입술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이마진의 볼과 자신의 볼을 맞대고 말했다.
“사랑해요, 가랑. 사랑해요, 가랑. 사랑해요…….”
* * *
“그냥 죽이면 될 것을 둘이 만날 시간을 주는 연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네.”
“그러게 말이야. 어쨌든 이제 날이 밝았으니 어서 참수하고 효수하지.”
올 때와 같이 두 호인이 투덜거리며 장막 안에 들어왔다. 장막 안에 비추어진 광경에 둘은 이를 물고 입술을 비뚤게 올릴 수밖에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자신들이 던져놓은 인간 소년의 얼굴 위에 소녀가 얼굴을 포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이, 설마 저거 죽은 거 아냐?”
한 호인이 말하자 옆에 있던 호인이 서둘러 달려 들어가 둘을 떼고 생사를 확인했다.
“아아, 남자는 죽었구먼. 여자는 살아있네. 잠을 자고 있는 거 같아. 어깨가 빠지긴 했지만 죽지는 않은 모양이야.”
“남자가 죽었다고? 뭐, 그나마 여자가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네. 저 소녀는 오늘 점심까지는 살아있어 줘야 하니까 말이야. 하마터면 크게 식겁할 뻔했구먼. 일단 어깨를 대충 맞춰놓고 다시 묶어놓지.”
호인 하나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여자는 이번 축제의 가장 귀한 음식이었다. 그녀가 죽게 된다면 상당히 골치 아프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안도한 것이었다.
다른 호인이 소녀를 다시 꿇어앉히고 어깨를 맞추었다. 그녀는 어깨를 맞추는 와중에 고통을 느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신음을 흘렸다.
“그럼 이제 어찌한다?”
“어찌하긴 뭘 어찌해. 남자가 죽었더라도 참수하고 효수해야지. 어차피 죽을 운명 아니었나.”
그 말을 듣고 호인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허리춤에 매어있는 대도를 꺼내 들었다. 그러곤 엎드린 채로 죽어있는 소년에게 도를 가져가 목을 깨끗하게 베었다.
소녀는 순식간에 일어난 그 광경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마치 간질에 걸린 것처럼 몸을 떤 후에야 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년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 줍자마자 시끄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호인은 난처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말했다.
“저거, 왜 저래? 야, 야, 일 커지기 전에 입을 막아.”
서둘러 한 호인이 소녀의 입을 막았다. 소녀는 입을 막자 실신한 듯 축 늘어졌다. 호인은 혹시 몰라 입안에 천을 넣고 재갈을 물려놓았다.
“무슨 일이야?”
밖에서 장막을 경계하던 한 호인이 와서 두 호인에게 물었다.
“아니 저 소녀가 갑자기 깨어나더니 우리를 보고 소리를 질러서 말이야.”
“죽인 건 아니지?”
“아니야, 아니야. 살아있다고. 재갈을 물려놓은 것뿐이야.”
“그럼 서둘러 나와. 먹을 거 몰래 가지고 나올 생각하지 말고.”
“아아, 알겠다고.”
두 호인은 소년의 몸과 목을 들고 장막에서 나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의 목은 긴 장대에 매달려 인간 숙소의 경계에 세워졌다.
그 아래엔 인간의 말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자는 축제를 앞두고 탈주를 모의하였으므로 목을 베어 효수함.]그 목 아래 표지판을 읽어 다른 인간들에게 전하는 슬픈 얼굴의 소년이 있었다.
============================ 작품 후기 ============================
2014-08-07 출판 본으로 본문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