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Star Kingdoms RAW novel - Chapter 91
0091 / 0124 ———————————————-
14. 순응[順]
장원 안쪽은 분노한 선고우가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가관이었다. 잘 정돈되어 있던 대로와 장원이 쓰레기로 가득 차있었다. 축제도 축제 나름이라지만 이렇게 흐트러져 있는 모습에 선고우는 기가 찰 따름이었다.
그는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겨 장원 깊숙이 들어갔다. 중간 중간 눈이 마주치는 자가 몇 있었으나 선고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형인 이소호칸의 거처로 걸어 들어갔다.
이소호칸은 때마침 거처에서 손님들이 떠나는 것을 일일이 배웅하고 있었다. 그곳은 인파로 북적였고 시끄러웠다.
선고우는 그 중심으로 천천히 발을 절며 들어갔다. 불구가 된 이후로 인파가 있는 곳은 꺼리던 선고우였지만 오늘만큼은 굳은 결심을 하고 걸음 하였기에 지팡이를 쥔 손을 더욱 굳히며 이소호칸에게 다가갔다.
“그럼 잘 가시오, 베헤므 족장.”
이소호칸이 웃으며 백모 지파의 여덟 족장 중 한 사람인 베헤므에게 이별의 말을 던졌다.
베헤므는 권상의 예를 올리고 이소호칸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곧 멈추었다. 그가 뒤로 물러서자 뒤에 기다리던 순번에 상관없이 한 인영이 튀어나와 이소호칸에게 외쳤기 때문이다.
“형님!”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백모의 자식들은 곧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장 내에 남아있던 다른 지파의 범족들은 그가 이소호칸에게 형이라 존대하는 것으로 그 정체를 가늠했다.
“선고우?”
이소호칸이 고개를 길게 빼며 진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의 이름을 의문조로 되뇌었다. 설마 이 자리에서 동생을 볼 줄은 상상하지 못했는지 이소호칸의 얼굴은 약간 황당한 표정이었다.
“동생, 선고우 늦게나마 형님의 생신을 축하드리며 문안 인사드립니다.”
선고우의 말에는 가시가 박힌 듯 매우 거칠었지만 그래도 그는 대족장인 형에게 권상의 예를 올리며 말했다.
이소호칸은 갑작스러운 동생의 등장에 약간 뜸을 들이다가 권상의 예를 받으며 말했다.
“그래, 네가 여기까지 걸음 할 줄은 몰랐구나. 우리가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한 지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이리 보니 반갑구나. 내 너를 위해 술과 고기를 보내었는데 잘 받았느냐?”
이소호칸은 당황하긴 했어도 이내 그 기색을 지워버리고 선고우에게 여유롭게 답했다. 하지만 선고우는 여전히 말에 적의를 담아 이야기했다.
“형님 덕에 이 못난 아우는 구차하게 삶을 연맹하고 있습니다.”
“…….”
이소호칸은 선고우의 말에 침묵으로 응대했다. 명백히 그것은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축제의 송별 자리에 죄송하지만 이 아우가 형님께 하나 묻겠습니다.”
이소호칸은 뜸을 들이긴 했지만 침묵 속에서도 선고우의 물음에 답했다.
“…무얼 말이냐?”
“이 동생에게 얼마나 빼앗아야 만족하실 겁니까?”
순간 선고우가 난입하면서 줄어든 북적임이 온연히 고요해졌다.
선고우는 고개를 들어 이소호칸과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했다. 그 살기 짙은 마주침은 이곳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가라앉혔다.
이소호칸은 대답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선고우를 보았다. 이소호칸의 대답이 없자 선고우는 다시 운을 떼었다.
“형님, 제가 어떠한 처지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다리를 잃고 저는 제 삶과 명예를 빼앗겼습니다. 누구에게나 깔보이는 제 처지가 저를 비굴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장원에 들어오는 데에도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제지를 당했습니다. 그놈이 말하더군요, 장원이 지금 북적이니 손님 외에는 들여보낼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소호칸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제가 외인입니까. 형님의 아우인 선고우입니다. 제가 아무리 불구가 되었더라도 형님을 뵙기 위해 이 자리에 오는 데까지도 비굴해져야겠습니까.”
이소호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은 어떻게 했느냐?”
“힘으로 뚫고 왔습니다.”
선고우는 적막 속에서 깊게 울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침울함이 가득 찬 대답이었다.
“무명을 장원으로 데려간다 하셨습니까?”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은 음침하기 그지없었다. 이소호칸은 선고우의 말에 그가 무엇을 말할지 예측할 수 있었다.
“내가 그리 명했다.”
선고우는 분노와 적의를 지우지는 못했지만 최대한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형님. 제 일생의 마지막 부탁이 될지 모릅니다. 무명, 그 녀석을 제게서 빼앗지 말아 주십시오.”
무명을 아는 자들은 선고우의 말에 놀랐고 모르는 이들은 무명에 대해 알기 위해 조용히 수군거렸다.
이소호칸은 익히 무명에게서 선고우의 공방에서 대장일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듣고 있었지만 선고우가 이리 무명에게 깊은 정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소호칸은 자신이 이미 내린 명을 철회할 수는 없었다.
“네가 왜 그 아이에게 신경을 쓰느냐?”
“이 아우에게 이제 남은 것은 그 녀석뿐입니다. 백모 지파에서 그 누구도 저를 신경 쓰지 않고 말조차 붙여주지 않을 때 오직 그 녀석만이 저와 말을 나누고 함께해 주었습니다. 업화에 몸을 사르는 듯한 고통의 인생 속에서 그 소년은 제게 단비와도 같은 것입니다. 제게서 빼앗지 말아 주십시오.”
“불허한다. 나는 그 아이에게 내린 명령을 철회할 생각이 없다.”
“하다못해 이전처럼 오전에만 와있어도 이 아우는 만족할 것입니다. 마지막 청이라고 생각하고 들어 주십시오.”
이소호칸의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동생의 모습이었다. 그 동생이 얼마나 마음이 상한 채로 삶을 연명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소호칸은 고개를 저었다. 많은 이의 눈이 모인 상태에서 명을 철회한다는 것은 위신이 폄하되는 일이었다.
만일 눈이 모이지 않은 곳에서 청을 하였다면 선고우의 뜻대로 했을지 모르나 지금 이 자리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불허했다.
“불허한다. 이미 결정하여 끝난 사항이다.”
“형님, 정녕 이 아우에게 단 하나의 온정도 베풀지 않을 것입니까?”
선고우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의 말에는 이제 독기가 서려있었다.
“그렇다면?”
선고우는 자리에서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결사를 표명하는 결의가 보이는 행동이었다.
“이 자리에서 자진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제 이 처지로는 더 이상 삶을 연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선고우가 빨갛게 물든 오른손을 들어 말했다. 그 네 가닥의 두꺼운 손가락 끝에는 손톱이 서슬 퍼렇게 튀어나와 있었다. 이는 예장을 허락해 달라는 무언의 외침이었다.
“…….”
이소호칸은 갑작스러운 선고우의 태도에 말을 잇지 못하고 그를 지켜봤다.
그 순간 대열의 뒤쪽이 소란스러워지며 남색 도포를 입은 다섯의 범인이 사람들의 대오를 뚫고 들어왔다.
“대족장 어르신, 큰일입니다. 정문의 초병을 맡고 있던 마하루가 현재 공격을 받아 중태에 빠져 있습니다. 외람되오나 장원에 침입자가 있는 듯합니다. 서둘러 이 자리를 정리하시고 전투 태세에 돌입할 것을 간언 드립니다. 현재 고스보치 님도 병력을 정비하여 이곳으로 오신다고 합니다.”
============================ 작품 후기 ============================
2014-08-07 출판 본으로 본문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