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Star Kingdoms RAW novel - Chapter 94
0094 / 0124 ———————————————-
14. 순응[順]
“아, 그 의원 호인들 말이군. 내가 볼 때 이건… 철공님 스스로가 만든 병이야.”
“네?”
“네가 나가고 난 이후로 철공님은 여기에 고립되셨지. 그 이후부터 제대로 먹고 마시지도 않으셨어. 오로지 철을 두드리고 담금질을 한 후 그 물을 들이켜셨지. 그 물은 도저히 마실 수준의 것이 아니야. 네가 오고 나서는 그 물을 한동안 거의 마시지 않다가 네가 떠나고 난 이후로는 일전의 배로 그 물을 들이켜셨다. 그 독같이 쓴 물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마셨으니 몸이 이렇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
관엽은 측은한 눈빛으로 선고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명은 아무 말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벌써 죽을 고비를 내가 본 것만 해도 네 번이 넘는다. 피똥을 싸고 검붉은 가래를 토하고 숨이 막혀서 임종하시려는 것을 내가 그때마다 수발을 들어 살렸지. 종족이 다르지만 그래도 나는 철공님께 받은 은혜가 하나둘이 아니니 그대로 죽게 둘 수는 없었지. 네가 왔으니 이제 수발을 분담해서 해도 되겠구나. 오늘 내일 하시는 분이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보살펴 드려야지.”
말을 잇던 관엽은 선고우를 향하던 시선을 돌려 무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혼자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을 거 같다. 나는 믿지 않지만 인간 전체에 너에 대한 소문이 좋질 않아. 혼자 돌아다니다간 봉변을 당할 수도 있을 테니 뒤에 같이 다니는 분과 항상 함께 다니는 게 좋겠어.”
“네.”
무명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스스로도 느끼고 있는 바였다. 이후로 관엽은 무명에게 간병하는 데 필요한 이야기를 몇 가지 해주었다.
“철공님은 근래 하루 종일 주무시는 일이 잦아. 하루에 깨어계신 시간이 두 시진도 채 안 되지. 깨어나는 시간도 상당히 불규칙하고 말이야. 아마 네가 온 걸 알면 기뻐하실 거야. 말동무가 생기니 좋아하시겠지. 그리고 여기에 있는 화로의 불은 꺼뜨리지 마. 깨어나 잠들 때까지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워하시면서 불을 보시는 건 멈추질 않아. 나야 말이 안 통해서 뭐라고 하셔도 이해하는 게 어렵지만 눈빛만 봐도 이 불은 계속 지피라고 하시는 거 같아.”
관엽은 무명에게 간병에 필요한 도구들이나 위치를 알려주고 무명과 교대했다.
무명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관엽 또한 상당히 고되고 힘들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호인에게 이렇게 극진히 정을 쏟을 수 있는 것도 관엽이기에 가능할 터였다.
관엽의 눈 밑은 그늘졌고 얼굴은 피곤에 가득 차 보였다. 그것은 간병이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무명은 속으로나마 관엽에게 감사를 표했다.
관엽이 가고 나서 공방에는 수에르와 무명, 선고우만이 남았다. 적막한 공방 안에 장작 타는 소리만이 깊게 울렸다.
수에르는 적당한 곳에 걸터앉았고 무명은 선고우의 곁에 앉아 수건을 갈고 선고우의 털을 빗어주었다. 털을 빗을 때마다 힘없이 털들이 웅큼웅큼 뽑아져 나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픈 광경이었다.
화로의 불이 약해지자 무명은 장작을 가져다가 불길 안에 집어넣었다. 시뻘건 불은 나무덩이를 집어삼키며 그 몸을 불려 주변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후끈해진 열기가 무명과 수에르를 덮쳤다. 하지만 둘 중 누구 하나도 불평을 하는 이는 없었다.
순간 불쾌한 소리가 나며 고약한 냄새가 공방 안을 가득 채웠다. 몸을 가누지 못한 선고우가 누운 채로 대변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무명은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고 선고우의 몸을 돌려 대소변을 받고 치웠다. 그러곤 몸을 닦아주었다. 그 후에는 마른 수건으로 계속해서 흐르는 콧물을 닦아주고 얼굴을 닦아내었다.
“무…명이냐…….”
선고우의 수염을 가지런히 정리할 때 조용히 입이 열리며 갈라지고 힘없는 목소리가 나왔다.
선고우는 아픈 와중 용케도 무명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관엽과는 확연히 다른 손길, 냄새 그리운 무명의 것이었다.
“예, 어르신. 무명입니다.”
선고우가 힘겹게 어깨를 떨며 손을 들었다. 그는 눈꺼풀을 드는 것조차 힘겨운지 가느다랗게 눈을 뜨며 눈 주위를 움찔거렸다.
“이리 얼굴을 가까이… 네 얼굴을 좀 보자꾸나.”
선고우는 손을 들어 허공을 더듬어 간신히 무명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신의 얼굴 쪽으로 끌었다.
선고우의 입에서는 고린내가 풍겨왔지만 무명은 싫은 내색 없이 선고우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이제 눈조차 잘 보이질 않는구나. 저기 타오르는 불꽃을 제외하고는 전부 암흑뿐이야. 이리 가까이 너의 얼굴을 대어도 희미하게 보이는구나.”
영롱하던 옥색 눈동자가 총기를 잃어 흐리멍덩하게 풀려있었다.
“철공 어르신…….”
무명은 선고우의 얼굴에 자신의 볼을 가져대고 입으로 그를 불렀다.
“갑자기 헤어지고 나서 이 얼마 만에 보는 것이냐. 1년은 족히 넘은 거 같구나.”
“이제 2년이 되었습니다.”
“날이… 벌써 그렇게나… 지났구나. 부쩍 큰 거 같구나. 나는 이리 누워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다. 내 설마… 살아생전 너를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몰랐는데 말이다.”
선고우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중간 중간 가래가 끓어오는지 가래를 삼키며 말을 어렵게 뱉어내었다.
선고우는 말을 마치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제야 이곳에 무명이 아닌 다른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수에르도 있군.”
“그렇소, 영감. 이제 알아차리셨소? 코가 완전히 죽었습니다그려.”
“너도 2년 만이구나. 칼이 무뎌져 날을 갈기 위해 왔느냐?”
“무슨 섭섭한 소리를 하시오. 영감 보러 왔소. 앞으로 계속 무명하고 올 거요.”
수에르는 씁쓸하게 선고우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무명은… 그렇다고 쳐도… 너는 왜 한 번도 안 왔느냐? 내가 더 섭섭하구나.”
“면목이 없소이다. 하지만 영감, 영감님이 공방 이외에 외출을 금지 당했을 때 내가 찾아왔으면 만나 주었겠소? 안 그래도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영감이라 만나러 와도 만나주지 않았을 거 아니요.”
수에르가 농조로 말하자 선고우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웃으며 농을 받아주었다.
“어쩌다 이리되셨습니까?”
무명이 선고우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목소리에 안타까움과 침울함이 그득하게 묻어났다.
“죽어도 한참 전에… 죽었어야 하는 몸인데… 죽지 못해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구…나. 이제 이 끈질긴 삶도 얼마 남지 않았겠지.”
선고우의 시름이 그의 말을 중간 중간 끊었다. 수에르는 그런 선고우의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이라도 대족장님께 예장을 권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수에르가 말하며 벽에 기댄 몸을 일으키자 선고우는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이제 되었어. 나에게 더 이상의 기대를 부여하지… 말아주게. 이제 되었어. 한때 명예와 힘만이 삶의 전부라 생각했지만… 죽을 때가 임박해 오니 이제 그런 것들은 부질없게 느껴지는구나. 명예의 모든 것을 잃고 힘의 모든 것을 잃었다. 죽을 때 가져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영감…….”
“죽기 전에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게 생각해야지. 이 이상 다른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도 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는구나.”
선고우가 말을 단호히 끊자 수에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화로의 불이 번져가며 셋 사이의 그림자를 천천히 움직였다.
선고우는 무명을 놓아주고 다시 누워 고개를 돌려 살랑이는 불빛을 그득하게 주시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다 선고우는 다시 잠에 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관엽이 돌아오자 무명은 다시 장원으로 돌아갔다.
선고우를 간병하며 일주일이 흘러갔다. 수에르는 적막함을 견디기 위해 해금을 들고 와서 연주했다. 무명은 울지는 않았으나 해금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음속 깊이 감추었던 감정들이 해금 소리를 들을 때마다 수면 위로 떠올랐다.
선고우는 불을 바라보고 잠들고, 바라보고 잠들기를 반복하다 저녁에 깨어나 입을 열었다. 때마침 무명이 간병하고 있어 선고우는 무명을 통해 관엽을 부를 것을 부탁했다.
숨은 이전보다 가쁘고 몸 상태는 급격히 쇠약해지고 있었다. 선고우가 생각하기로는 지금이 마지막이라고 느꼈으리라.
관엽이 도착하자 선고우는 힘겹게 입술을 떼 공방에 있는 셋에게 감사를 전했다. 가장 먼저 수에르에게 감사를 표했고 그다음으로는 관엽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무명이 옆에서 관엽에게 감사를 표하는 선고우의 이야기를 통역해 들려주자 관엽은 눈물을 감추지 않고 울었다. 마지막으로 선고우는 무명에게 입술을 들어 말했다.
“말년에 와서 가장 고통스럽게 지낼 때 무명, 네가 있어서 그나마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다. 너는 나의 친구이자 보배 같은 아이다. 종족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너는 유일하게 나와 소통해 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그러한 재능을 알기에 이소호칸 형님이 너를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너에겐 고마운 마음이 가득하구나. 네가 있어 편했고 네가 있어 내 삶이 활력으로 다시 가득 찼다. 그걸 다시 잃고 싶지 않았다. 그걸 잃고 싶지 않았어…….”
무명은 선고우가 자신과의 시간을 잃지 않기 위해 이소호칸에게 직접 찾아간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선고우의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속 깊이 전해져 왔다.
선고우는 횡설수설한 이야기들도 가끔 했지만 대체로 이후의 일들에 대해 말을 남겼다. 공방의 관리는 관엽에게 넘기고 자신이 쓰던 물품들도 관엽에게 주겠다는 말들이 이어졌다.
선고우는 눈을 감으며 말을 맺었다.
“후회… 후회가 많은 일생이었다. 명예를 얻고 싶었으나 명예를 잃었고, 힘을 가지고 싶었으나 힘을 잃었다. 내 일생 전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 주질 않았구나. 마지막에… 마지막에 와서 간절한 바람은 노밀… 사랑하는 나의 아내를 간절히 보고 싶은 마음뿐이구나. 하지만 이 바람도 정처 없는 것이 되겠지…….”
수에르는 노밀이 나무사와 바뀐 것을 모르고 있으니 선고우의 말을 듣고 살짝 이상해했으나 정신이 워낙에 혼미한 상태에서 한 말이기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넘겼다.
무명은 선고우의 말이 얼마나 가슴을 저리게 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미어지고 미어지는 것. 사랑을 하지만 만날 수 없는 것. 그것을 가슴속 깊이 앓고 있는 선고우의 한마디가 너무나도 슬프게 메아리쳤다.
언제나 잃기만 한 이 늙은 호인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입을 열지 못했다.
하루 뒤 그는 고통에 신음하다 숨을 멎었다.
백모의 한 세대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선고우. 그는 그렇게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삶을 끝내었다. 참으로 허망하고 안타까움 죽음이었다.
그의 장례에는 그래도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과거의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었다.
선고우의 강력함을 알고 선망했던 자들은 모두 그의 장례에 찾아와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았다. 불구가 되어 명성이 퇴색되었다 해도 아직까지도 이소호칸만큼은 아니었지만 영향력을 가진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소호칸은 선고우의 장례식에 찾아오지 않았다. 예장이나 자진으로 죽지 않고 병에 의해 죽은 선고우는 부족 전체적으로 볼 때엔 나약함을 상징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마진츠와 이소호칸의 아내인 나무사가 장례에 찾아와 선고우의 넋을 기렸다.
장례식 한편을 계속 서성였던 무명은 나무사, 아니 선고우의 아내인 노밀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선고우가 계속 살아 주었으면 하는 그녀의 바람이 그를 괴롭힌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바람만큼이나 그녀가 선고우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선고우가 죽은 지금까지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의 눈물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결국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대족장 이소호칸은 동생의 넋을 기리기 위해 오지 않았다.
무명은 과연 그렇게까지 대족장이라는 직위에서의 위신이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이소호칸은 현명하고 강하며 통솔력이 있고 선망을 받는 지도자였다. 하지만 부족의 규율과 율법 그리고 자신의 명예에 대해 다소 지나치게 과중한 업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무명은 그러한 이소호칸의 면들에 염증을 느꼈다. 물론 겉으로 내색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소호칸의 위신은 친동생을 죽이고 이마진과 공진희까지 죽음으로 몰았기 때문이었다.
무명은 마음속 깊이 불신이라는 씨앗을 조금씩 키웠다.
============================ 작품 후기 ============================
2014-08-07 출판 본으로 본문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