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104
104화
한미래가 떨어진 검을 느릿한 손길로 주워들었다.
쯧. 작게 울리는 혀 차는 소리.
흙 묻은 손잡이를 대충 털어낸 그녀는 여전히 내 옆에 서 있었다.
처음부터 그럴 마음이었다는 것처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졌다.
뭔가.
‘변했다.’
그것도 아주 크게.
그리고 그 작은 날갯짓이 어떤 해일로 몰아닥치게 될지 나는 아직 가늠할 수 없었다.
이태환은 피 묻은 손바닥을 혓바닥으로 핥아 올렸다.
붉어진 입가로 고개를 비틀었다.
“안 발랐네? 내가 준 독약.”
독약?
이태환의 말이 진실인지 헤아리기 위해 눈동자를 굴렸다.
한미래는 한순간도 빗겨나가지 않으려는 듯 살기등등한 눈으로 놈을 직시했다.
“아이고, 미래야. 미래야. 이 멍청한 새끼.”
이태환이 진정 안타깝다는 듯 한탄하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넌 벌써 모든 기회를 놓친 거야. 살아남아서 얌전히 우리랑 새 세상을 받아들일 기회, 그리고.”
놈이 찢어질 것처럼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날 죽일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
한미래의 검이 이태환의 손아귀에서 가루가 돼 흩날렸다.
고작 장비가 날아갔을 뿐인데, 내게는 아이가 검을 휘두른 수많은 시간들이 함께 휘발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들은 저놈의 앞에선 아무 의미가 없다는 듯이.
목 빗근이 욱신거렸다.
한미래의 소매를 붙잡아 살짝 당겼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달라는 신호를 느꼈는지 아이가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의뢰를 받았어.”
한미래는 뒷주머니를 뒤져 마디만 한 갈색 병을 내게 확인시켜 줬다.
어떤 라벨도 붙어있지 않은 약병이었지만 찰랑거리는 소량의 액체만으로도 존재가 불길했다.
“타베사 뿌리로 만든 마비약.”
타베사.
그건 익히 나도 잘 알고 있는 독초였다.
비록 효과 있는 물약으로 정제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조합법과 까다로운 재료를 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그만큼 마비 효과가 강력해 최소 스턴 쇼크.
낮은 등급의 각성자라면 즉사까지 이루게 할 수 있는 물약 중 하나였다.
입술을 짓이겼다.
‘명암 새끼들이 이걸 제조할 수 있을 만한 기술력도 가지고 있다는 소리지, 지금.’
중상. 혹은, 그 이상의 연금술 스킬을 가진 자만이 제대로 된 독약을 배합해 낼 수 있다.
도대체 어디까지 위험한 놈들인지 그 규모가 전혀 파악이 가질 않았다.
한미래는 그저 사실을 전달할 뿐이라는 것처럼 여전히 감정 없는 투로 말을 이었다.
“전달한 위치로 가서, 죽이지 않아도 되니까 거기 있는 사람을 딱 한 번 베기만 하면 된다고 했어.”
너인 줄 알았으면 오지 않았을 거다.
속삭였던 한미래의 목소리가 이제야 이해가 됐다.
상황에 맞지 않게 가슴이 찌릿거렸다.
내 옆을 단단히 버티고 선 단발을 보면 뱃속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헛되지 않았구나.’
한미래의 마음에 자그마한 틈이라도 내기 위해 노력했던 그 무수한 시간들.
경멸과 적대를 받아내며 꿋꿋이 부딪쳤던 진심들이.
투둑.
그녀가 경쾌한 소리로 마비약의 뚜껑을 땄다.
하나 남은 칼 위로 노란 기가 도는 형광 액체를 콸콸 쏟아부었다.
스며들지 못한 약들이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치지지직.
땅에서 돋아났던 연약한 생명들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한미래의 시선이 올곧게 이태환을 겨눴다.
“아무리 굴러도 목숨값으로 퉁 치는 의뢰는 안 받는 주의라서.”
그런 건 꼭 끝이 더럽게 끝나거든.
아이는 금방이라도 놈을 물어뜯을 준비가 됐다는 것처럼 전투태세를 취했다.
그 순간.
파학학! 아학학학!
웃음소리가 우레처럼 울렸다.
코미디라도 본 것처럼 이태환이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눈물까지 훔치던 놈은 가엾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너한테 진짜를 줬을까.”
이태환의 손안에서 또 다른 갈색 병이 찰랑거렸다.
동시에, 검은 연기들이 안개처럼 사방으로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놈의 마력이 섞여 있는지 숨쉬기 어려울 정도의 농도였다.
체내로 흘러드는 불순물을 거르기 위해 혈관 속에서 마력들이 활개 치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다르다.’
실종자 포탈 앞에서 부딪쳤던 때와 비교하면 압박감부터가 남달랐다.
놈이 바닥 위로 한 번 발을 구르자 융털 같은 검은 줄기들이 치솟았다.
암흑에 젖은 바닥이 파도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모든 어둠이 저 자식만을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조금 아쉽기야 하겠지만, 갈아치울 수 있는 나사에 미련 갖는 사람은 없지.”
이태환은 물건이라도 고르는 것처럼 나와 한미래에게 번갈아 손가락질했다.
“누구를 먼저 죽여야 재미있는 구경을 할 수 있을까.”
놈의 어깨 위로 올라탄 독수리의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이태환의 계약 소환수, 마족 코카서스.
소환수는 반드시 계약자의 등급보다는 낮지만, 가지고 있는 능력에 감응해 밀접한 공격력을 발휘하니 못 해도 A급 이상의 마수라고 생각하는 게 편했다.
서슬 퍼렇게 선 낫 위로 독약이 흘러내렸다.
“너.”
놈의 선택과 동시에 거대한 날개가 매섭게 상공을 갈랐다.
‘역시.’
역시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이태환은 낫을 든 채 한미래의 쪽으로 달려들었고, 인간의 시체를 쪼아 먹을 준비가 된 괴조(怪鳥)는 찢어지는 울음소리로 내 머리 위를 선회했다.
놈에게는 강령 스킬이 존재한다.
저 싸이코 새끼가 그렇게도 바라는 ‘재밌는 구경’을 위해서라면 한미래를 살해한 뒤, 그 시체를 이용해 나와 맞붙게 하는 장면이 가장 쉽게 떠올랐다.
또한, 소환수정도라면 내 발목을 붙잡을 수 있겠다는 놈의 가벼운 생각 역시.
그리고.
‘그 얕보는 생각이 네 목을 비틀게 될 거다.’
발끝에 힘을 줘 뛰어올랐다.
키이이이익!
괴조의 발톱이 스친 것만으로 어깨를 찢었다.
뜯긴 살점. 뼈까지 화끈거리는 감각이 온몸을 두드려 패고 있었다.
톱날 같은 부리가 상처를 파고들기 위해 발악했지만 쏜살같이 달려드는 빛무리에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빨갛게 달아오른 머리가 쉴 새 없이 진들을 쏟아냈다.
빛에 처맞은 괴조가 몸뚱이를 비틀대며 하강과 활공을 반복했다.
그 순간.
째앵―!
뭔가 깨부숴지는 소리.
본능적으로 돌아간 시선.
날이 선 이태환의 낫과 부러진 한미래의 칼날을 봤다.
아이는 빠른 손길로 단도를 꺼내 장비했지만 몰아쳐 오는 살인자의 공격을 모두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서서히 목을 졸라오는 검은 손.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해 얽혀가는 발까지도.
회로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지금 한가롭게 낭비할 시간이 없거든.”
은으로 세공된 로사리오를 코카서스의 눈알 위로 처박았다.
전투를 준비하기 전, 성당에서 얻어온 신성 장비였다.
‘이렇게 사용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고통에 몸부림치는 날개 끝이 사정없이 몸을 내리쳤다.
그러나 로사리오를 쥔 손에 힘을 놓지 않았다.
다른 장비면 모를까, 성수까지 발라온 신성 장비에 마족 괴수가 맥을 추리지 못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우드드득.
뭉쳐진 섬유 같은 것이 찢기는 감각이 느껴지고, 동공에서 흘러내린 피가 목걸이를 적셨다.
애꾸눈이 된 괴조의 발악을 지팡이로 틀어막았다.
“주인 잘못 고른 탓 좀 해.”
빛이 쏟아졌다.
철퍼덕.
비처럼 내리는 코카서스의 조각난 몸뚱이와 피를 맞으며 얼굴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찢긴 종이처럼 갈기갈기 분해됐지만 흑마법으로 얽힌 이 괴조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일시적으로 계약자와 연결된 마나의 흐름이 끊겼을 뿐.
공격받은 정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소환할 수 있게 되는 게 놈들이 가진 계약 소환수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소환수의 귀환은 계약자에게도 꽤 큰 타격을 입힌다.’
이것만은 불변의 법칙이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더라도 내상을 입었을 확률이 높다.
놈에게 회복할 찰나도 주어서는 안 된다.
괴조의 시체를 발끝으로 짓이겼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허벅지로 나는 달렸다.
“네 상대는 나야, 이 새끼야.”
이태환의 심장에 칼을 꽂기 위해.
한미래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아이의 목을 겨누던 날이 은하수처럼 퍼지는 빛의 물결에 의해 방향이 비틀려 후퇴했다.
가볍게 뒤로 물러서 대치한 이태환이 짝짝 두어 번 박수를 쳤다.
“눈물 나는 우정이야. 정말, 진심으로.”
빈정거림이 우스웠다.
곁눈질로 한미래의 상태를 확인했다.
딱 봐도 너덜거리는 팔과 다리.
목 뒤로 척척한 식은땀이 번들거렸다.
고통을 참는 건지 이를 악문 채 어깨를 부여잡고 있는 아이에게 작게 속삭였다.
“베였어?”
“방금.”
뗀 손바닥에 끈적한 피가 엉겨 실타래처럼 늘어났다.
근육이 드러날 것처럼 깊게 패인 어깨 주변이 독성에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시간문제였다.
마비약은 순식간에 혈관들을 타고 퍼져 한미래의 몸을 굳게 만들 것이다.
그래도 꽤 급 높은 각성자라 당장 생명에는 위협이 없을지라도, 이 전투 현장이라면 말이 달랐다.
벌써 팔을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지 뻣뻣한 자세로 어깨를 움찔거리는 그녀를 보며 단호하게 명령했다.
“가.”
몸을 움직여 한미래를 조금 더 이태환의 시야에서 숨기며 덧붙였다.
“사거리에 있는 편의점 근처에 구출팀 막사가 있어. 가서 해독제 달라고 해.”
“…….”
“얼른.”
단 1초의 시간도 아까웠다.
놈에게 머무는 경계의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한미래의 반대쪽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어디 대로변에 나뭇가지처럼 바싹 굳어 쓰러져@, 허망하게 마수에게 도륙되는 아이의 마지막 같은 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도.
‘나를 돕기 위해서.’
그런 건 이제 끔찍했다.
재차 재촉하자 한미래의 상체가 천천히 세워졌다.
이제 그녀가 떠나기만 하면 됐다.
이태환과의 마지막 전투는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고, 그 다음 모든 결과는 나의 몫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난 한 번도 내가 받아들인 의뢰의 다음을 생각해 본 적 없어.”
열기 가득한 손이 내 팔목을 붙잡았다.
“그 사람들이 그걸 가지고 무슨 짓을 하던 내 손을 떠난 문제니까. 내가 필요한 건 돈이었지 구질구질한 이면의 사연 같은 게 아니니까. 근데.”
“…….”
“책임감이 들어.”
이제야.
이런 상황을 마주치고 나서야.
반쪽짜리 입김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아직 시간 있어.”
말하는 왼쪽 입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빛을 잃지 않은 오른쪽 눈만은 형형하게 목표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명치끝을 누군가 송곳으로 후비고 있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비린 쇠 맛이 나도록 잇속을 짓씹었다.
이게 최선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그래. 해 보자고, 같이.”
변화하는 결의를 막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자유로운 다섯 손가락이 단도를 단단히 붙잡았다.
눈앞을 흐리는 검은 연기를 몰아내듯 깊은 숨을 내쉬었다.
네 개의 다리가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