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109
109화
“끝나자마자 집무실로 와.”
“아, 알았다니까.”
“어디 가지 말고, 꼭.”
“진짜. 꼭!”
참자.
참자, 윤채희.
몇 번이고 확인받기 위해 뒤도는 등치를 밀어내며 나는 온 힘을 다해 웃는 얼굴을 만들어냈다.
화랑 길드, 빈 회의실 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이겸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그 모습이 주인에게 혼난 검은 래브라도 같아 안쓰럽기도 했지만, 눈물의 상봉을 마친 그에게는 화랑의 길드마스터로서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밖에서 곤란한 얼굴로 대기하는 길드 간부들을 보며 이겸을 배웅했다.
“이따 봐.”
터엉.
닫힌 미닫이문.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어…… 그러니까…….”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당혹스런 시선은 딱히 둘 곳이 없고, 심기불편으로 똘똘 뭉쳐 있는 공기에 질식할 것 같았다.
넓은 8인용 책상의 중앙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몇 번 바짝 마른 침을 삼켰다.
나는, 결국.
“미안합니다.”
넙죽 허리를 숙였다.
본격, 이모아 청문회.
주서윤과 권해이, 구서복.
이렇게 네 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회의실은 살벌하다 못해 추웠다.
이왕 칠 거라면 사고는 크게, 사과는 빠르게.
윤채희의 오랜 모토대로 고개를 조아렸으나, 여전히.
“…….”
“…….”
방 안은 침묵으로 가득 했다.
심지어, 그 권해이마저도.
머쓱한 입꼬리를 집게손가락으로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이겸을 어찌어찌 달래 제 자리로 돌려놨다 했더니…….
‘더 큰 게 남아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들을 곁눈질로 살폈다.
실망과 걱정, 속상함 같은 것들이 혼재돼 범벅인 얼굴들을 보자니 몇 개 남아있던 변명도 먼지가 되어 날아갔다.
이모아는 할 말이 없는 게 당연했지만, 윤채희는 살짝 울컥했다.
‘내가 얘 안 살렸으면 너네 지금 마주 앉아있지도 못했다? 어?’
그러나, 이모아는 이모아.
작게 목을 가다듬었다.
긴장한 입이 까끌거렸다.
“정말, 정말 죄송해요. 걱정하게 만들어서.”
이건 나의 진심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
“저한테는 꼭 필요한 일이었어요.”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했다.
지금은 단호함이 필요할 타이밍이었다.
그 정도 확신이 아니었다면 당신들의 믿음을 배신하고 움직이지도 않았을 거라는 강한 표현.
윤채희가 이모아로 살기 위해 꼭 필요했던 일.
“응? 언니이. 아저씨.”
눈썹을 팔자로 추욱 늘어트리고 최대한의 송구함을 담아 눈을 깜빡거렸다.
병 주고 약 준다고, 이번에는 장화신은 고양이 컨셉이었다.
그나마 가장 가능성 있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던 주서윤의 무릎을 붙잡아 애교 부리듯 흔들었다.
“하.”
팔짱을 낀 채 굳은 태도를 유지하던 그녀의 숨이 탁, 터졌다.
자세를 몇 번 고쳐 앉은 서윤은 여전히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었지만 그저 콧잔등을 찡긋거리기만 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번엔 모아 네가 정말 잘못했어. 그건 알지.”
질책하는 눈빛이 새까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우리는 며칠 동안 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어. 그 시간이 어땠는지 알면 지금 이렇게 못 해.”
꾹꾹 눌러 담은 근심과 썩어 문드러지던 시간.
그 표정을 보며 입이 딱 다물렸다.
죄책감이 사지를 채찍처럼 내리치는 기분이었다.
죄송하단 말을 꺼내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진심이 알알하게 닿아왔기 때문에, 더더욱.
“그래도.”
서윤의 뜨거운 품이 나를 조심스레 안았다.
“돌아왔으니까 됐어.”
그녀의 목소리에 희미한 물기가 어려 있었다.
떨어지는 온기를, 주책맞게 붙잡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을 정리하듯 깊은 한숨을 내쉰 서윤은 그대로 뒤통수를 몇 번 쓰다듬고는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벌떡 일어난 권해이가 따랐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씩씩대며 손가락질을 했다.
“나 너 때문에 아침마다 신문도 읽었다. 잘 알아둬. 이 권해이가, 신문을!”
그렇게 쿵쿵, 성냈다는 표시를 잔뜩 내며 나가는 듯하다가.
“진짜 짜증 나.”
투덜대며 나를 한 번 꼭 끌어안고 이마에 딱밤 놓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손가락 말고 주먹으로 때린 거 아니냐?
핑 도는 이마를 마구 부비며 쓰으읍, 아픈 기를 참았다.
이제 남은 것은.
“…….”
여전히 목석같이 앉아있는 구서복이었다.
내가 사라진 후부터 내내 이 상태였다는 건 살짝 언질을 받아 알고 있었다.
차라리 평소처럼 우다다다, 원망을 쏟아내기라도 했다면 이 정도로 어렵지는 않았을 텐데.
주서윤도 떠났는데 냉기가 가득한 방 안.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물었다.
“삐졌어요?”
구서복이 순간 책상을 내리치며 발끈하고 억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삐진 게 아니라……!!”
“이제야 봐주네.”
그 눈을 들여다보며 턱을 괴었다.
흔들리는 시선으로 나를 살피던 구서복은 다시 고개를 떨어트렸다.
“진짜, 진심으로, 죄송해요.”
“…….”
“정신 차리고 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이 그거였어요. 아, 그래도 아저씨한테는 말했어야 했는데.”
물론 뻥이다.
의자를 끌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 없어요. 절대. 진짜 절대.”
물론 세상엔 예외란 게 있긴 한데요.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모두 진심을 다한 이야기였다.
나는 이리저리 고개를 피해대는 구서복의 눈을 마주치려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한참을 가만히 얼굴을 손바닥에 파묻고 움직이지 않던 구서복이, 마침내 웅얼거렸다.
“이런 일이었으면 사고고 뭐고, 아가씨 뒤꽁무니만 따라다녔을 거예요.”
“아, 그건 좀…….”
“아가씨!!”
억울한 목소리가 또다시 천장을 찔렀다.
“장난이에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구서복의 어깨를 두드렸다.
살벌했던 분위기가 녹자 가슴이 조금 일렁거렸다.
생각보다 나는 훨씬 더, 그들에게 다정함을 의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저씨.”
더더욱 굳은 마음이 쌓아 올려졌다.
이렇게 넘어갈 수 있는 것도 그들이 이모아를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약속 잘 지키잖아요, 저.”
이모아는 누구에게도 무너지지 않을 위를 향해야 했다.
단단한 눈빛으로 속삭였다.
“이제 걱정할 일 없게 만들게요.”
구서복은 그 뜻을 다 알지 못할 스스로의 다짐이었다.
한참 내 시선을 바라보던 그가 결국 휴우, 누가 봐도 졌다는 신호의 한숨을 내뱉었다.
누그러진 손길이 머리 위에 얹혔다.
“이번에도 속는 셈 치고 믿어봅니다.”
구서복은 한층 후련한 얼굴로 회의실을 빠져나가며 종알거렸다.
“아니 근데, 아가씨, 학교 몇 번만 더 빠지면 진짜 유급인 건 알죠? 이겸 동생이라고 소문 쫙 났는데 같은 학년을 한 번 더 다니면 얼마나 쪽팔…….”
***
♪♬♪♩―.
종소리가 울렸다.
담당 과목 선생님이 채 나가지도 않았는데 집에 갈 생각으로 들뜬 아이들은 벌써부터 가방을 챙기고, 일어나서 사물함을 열고…… 왁자지껄했다.
그리고 나 역시.
“끝났다…….”
교과서를 책상에 처박는 손길에 이제는 한 줌의 어색함조차 없었다.
체감상 꽤 오랜만의 등교였지만 여전히 학교는 지루했다.
똑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
똑같은 수업, 짜인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일상.
뭐, 나쁘지 않은 행복이었다.
그러나.
‘흉 지겠는데.’
대각선 앞자리에서 고요히 흔들리는 단발을 봤다.
움직일 때마다 살짝 드러나는 목덜미에 꽤 큰 자상이 남아있다.
한미래.
「“그러고 보니 네 친구가 왔었어.”」
주서윤에게 전달받은 말을 듣고, 나는 정말이지 말 그대로 놀라 뒤집어질 뻔했다.
일단 1번. 한미래가 나를 친구라고 말했다는 점.
2번. 괜찮다고 직접 전해주러 왔다는 점.
그리고, 3번.
“……안녕.”
먼저 인사를 걸어주게 됐다는 점.
같이 하교하자는 하나의 엉김을 ‘선약이 있다’는 말로 밀어내고 걷던 길이었다.
누군가의 말소리에 화들짝 놀라 쳐다보자 거기에는 한미래가 서 있었다.
한결같이 묘하게 뚱한 얼굴이긴 했지만.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상처는 좀 괜찮아?”
내가 물으면.
“나쁘지 않아.”
아이가 답했다.
그럴 때마다 속에서 나비가 날갯짓 하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간질거렸다.
긴 언덕을 내려오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함께였다.
나는, 결국 꽤 오랫동안 고심하며 마음에 품고 있던 말을 꺼내기로 결심했다.
인간관계는 타이밍이니까.
실은.
지금이 아니면 하지 못할 것 같아서.
“미래야. 너만 괜찮으면 나는…….”
네가 우리 길드에 왔으면 좋겠어.
그리고 흐르는 짧은 적막.
사실 거절당할 확률을 70%정도 깔고 내뱉은 말이긴 했다.
이번 일로 명암에 들어가지 못한 한미래가 어떻게 될지 나는 알 수 없었고, 아이가 변하는 모습을 가장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미 서사는 바뀌었고, 그대로 진행되어야 할 이야기라면.
‘든든한 받침대가 되어주고 싶다.’
그러다 내 전력이 되어주면 더 좋고. 아님 말고.
그러나.
“생각해 볼게.”
한미래는 꽤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놀란 고개로 홱 소리가 나게 그녀를 쳐다보자, 아이는 별거 아니라는 얼굴로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내일 봐.”
작은 미소가 떠난 뒤에도 계속 시야 앞에 머물렀다.
나는 한 박자 늦게, 얼떨떨하게 속삭였다.
“내일 또…….”
보자고.
***
그리고 발길이 향한 곳은, 역시.
「여인숙, 장기 투숙 환영」
익숙하고 낡은 나무판때기 앞.
리오의 거처였다.
평소라면 망설임이고 뭐고, 대장군처럼 쳐들어갔을 녹색 철제문 앞에서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오는 내내 생각했다.
답하지 못한 마지막 문자를.
「생일 축하해요. 채희 님」
“후우…….”
가방끈을 틀어쥐며 기합을 넣었다.
리오를 안 볼 것도 아니고.
맞아야 할 매면 그냥 빨리 맞는 게 나았다.
끼이익, 낡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그러나.
“…….”
“아, 안녕했는지.”
열자마자 이렇게 딱 맞닥뜨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검을 닦으려던 차였는지 한 손에는 이 빠진 검을, 한 손에는 낡은 헝겊을 들고 있는 리오를.
그리고.
‘대체 누가 침묵은 금이라고 했냐.’
금 아니고 쓰레기다. 쓰레기!
또다시 살벌한 적막의 구렁텅이에 처박힌 나는 애써 방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열심히 벽지를 살피는 척했다.
저기 끝이 좀 더 까진 거 같기도 하고…….
상황을 회피하는 나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진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리오가 먼저 운을 뗐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네요.”
“하하. 너, 너도.”
너도는 무슨.
말하면서도 조금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딱 봐도 너덜너덜한데 장난하냐, 윤채희?’
리오는 여기저기 붕대를 두르고 깨진 흔적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그 남대문 포탈에 있었던 게 분명한데.’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조심스레 물었다.
“치료는…….”
“일부러 안 받았습니다.”
리오는 그렇게 말하고는 설명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나는 파들파들 떨리는 입꼬리로 애써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이미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대화의 맥이 팍팍 끊기는구나, 아주.
1초가 1시간 같은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걱정했습니다, 많이.”
안개처럼 가라앉은 목소리로 리오가 말했다.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눈을 굴리는 사이, 갑자기 일어선 리오가 장롱 문짝을 열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들고나온 건.
‘오 마이 갓.’
끝이 조금 뭉개진 케이크 박스 하나.
나는 홍수처럼 밀려드는 죄책감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연약한 잇속을 짓씹었다.
꾸역꾸역 목이 멘 목소리가 귓속을 꿰뚫었다.
“채희 님은 언제든지 저를 찾으실 수 있지만, 저는 알려주시지 않으면 찾아갈 수 없으니까요.”
그건 어떤 체념.
나를 아는 사람의 감내.
혹은.
“그렇게 사라지지 마세요.”
적어도, 그렇게는.
애원처럼 들리기도 했다.
윤산영은 내게 조금 애원하고 있었다.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서로의 숨소리만이 우리가 이 현실에서 살아있음을 체감하게 만들어주는 공간.
나는 케이크를 조금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박스 옆에 붙어 있는 초를 꺼내 느릿한 손길로 꽂았다.
뭘 하냐는 것처럼 의아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눈썹을 까딱거렸다.
“사실 줄 거 있어서 왔었어요.”
“어떤…….”
“근데 안 줄래요.”
가볍게 가방을 두드리자 갑옷의 사슬 소리가 찰그랑 울렸다.
리오는 잠시 동그랗게 눈을 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긍했다.
그 얼굴을 보며 성냥에 불을 켰다.
“리오. 윤산영.”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랭킹 1위가 될 거예요.”
그 무엇도 이모아를 흔들 수 없게.
그 어떤 것도 나를 방해할 수 없게.
확신이 담긴 얼굴이 은은하게 빛났다.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내가 이 세계를.
이겸을.
리오를.
그리고,
나를.
‘구해낸다, 반드시.’
후욱. 숨이 촛불을 꺼트렸다.
비로소 윤채희의 시작이었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