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119
10화
P라는 간단한 어절 아래, 꽁꽁 숨겨 놓았던 진짜를 까뒤집자 공기가 일변했다.
발 빠르게 도망치려는 몸을 붙잡고 헬멧을 내동댕이쳤다.
퉁, 퉁, 투르르르…….
구르는 소리 아래로 나의 맨 얼굴이 드러났다.
아직 지지 못한 햇살이 딱 반절. 오른쪽 눈가 위로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눈이 마주치고, 어떤 말도 주고받지 못하는 시간들이 흘렀다.
아니. 어쩌면 멈춘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너…….”
건조한 목소리 끝이 사정없이 갈라졌다.
화면 켜진 단말기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알고 있었어?”
모욕. 수치심. 배신감.
그 저편에 묻힌 분노.
아무것도 모를 만큼 멍청이는 아니었다.
핏기없이 허옇게 질린 한미래가 묻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데도 아이와 쌓아 올린 유대 관계가 매 초마다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끝장이다.’
바짝 마른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몰랐어.”
그러므로 진짜를 말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그래. 왜 몰랐을까.
어딘가 멍한 머리 한구석으로 생각했다.
곱씹어보자면, 애초에 가정조차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션 수행으로 주워 모았던 P의 정보에서 한미래를 떠올리기에는 괴리감이 있었다.
몇 년 전, 홀연히 나타나 남들이 버린 의뢰까지 싹싹 끌어모아 처리한다고 하수처리장.
그다음은 돈 되는 곳은 모조리 달려가 생태계를 박살 낸다고 메뚜기.
그다음은 비로소 P라 불리던 사람.
어떤 개 같은 의뢰도 온몸 갈아가며 해치웠고, 그 애에게 의뢰하면 세상 못 할 일이 없을 거라고 침이 마르게 떠들어대던 속 시꺼먼 놈들.
‘P가 정말 한미래인가?’
두 눈으로 확인해 놓고도 두 명제를 동등하게 두지 못했다.
혼란스러웠다.
내가 되레 묻고 싶었다.
정말 너라고?
순간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내던져 부서진 파편처럼 기억이 몸을 찔렀다.
「“너인 줄 알았으면 안 왔을 거야.”」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온 사람처럼 축축했던 목소리.
「“의뢰를 받았어.”」
미묘하게 가면 같던 얼굴.
그건 P였을까. 한미래였을까.
지금은 알 수 없다.
나는 눈앞에 놓인 문제를 해명하기 급급했다.
“P를 찾으려고 여기까지 온 건 맞는데, 그게 너인 줄은 정말 몰랐어.”
너인 줄 알았어도…….
‘아마 나는 왔겠지만.’
섬광처럼 스쳐간 생각을 내뱉지는 않았다.
한미래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핏기가 맴돌도록 입술을 씹어대다가, 종내에는 달아날 것처럼 온몸에 힘을 주고 있던 그녀의 경계가 녹아내렸다.
아프게 붙잡힌 팔꿈치를 내칠 생각 역시 없어 보였다.
“나는 너한테 매번 제일 보여주기 싫은 모습만 들키네.”
곧 바스러질 낙엽처럼 한미래가 자조했다.
호선을 그린 입매에는 짙은 자기혐오가 고여 있었다.
***
우리는 자리를 옮겨 인파가 북적북적한 프렌차이즈 카페로 들어섰다.
어디 더 으슥하고 인적 드문 장소로 갈까 했는데, ‘오히려 사람이 많은 곳이 들리지도 않고 들키지도 않는다’며 한미래가 제안한 결과였다.
윤산영은 이런 분위기가 낯선 듯 어리숙하게 내부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중간에 낀 나는 잠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그 기묘한 그림을 바라봤다.
리오. 나. 그리고 한미래.
‘뭐냐. 이 괴상한 조합은.’
이렇게 만나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다.
사실, 리오를 꺼내오기까지도 고민을 많이 했다.
P를 만나러 가는 거니까 당연히 주변에 대기시켜 놨었는데 그 당사자가 한미래라.
그녀에게 손짓발짓으로 양해를 구하고 멋쩍게 데리러 간 리오 역시.
「‘가야되나, 말아야되나 수십 번 고민하다 그냥 기다렸어요.’」
하고 내게 조심히 속삭여왔다.
나는 오랜만에 진심을 담아 정말 잘했다고 그의 등을 토닥여줬다.
반면, 한미래는.
“경호?”
“아니. 내 제자.”
이런 빈 껍데기 같은 말로도 대충 상황을 넘겼다.
사실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건 반 친구가 데리고 다니는 어떤 놈 같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테이블을 골라 앉고, 각자 시킨 메뉴가 나와 앞에 하나씩 머그컵이 놓인 순간까지도 우리는 말이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놀러 온 중딩들 같아 보여서 그게 참 다행이었다.
묻고 싶은 것도, 말하고 싶은 것도 많았으나.
“이거 알아?”
결국, 입속에서 고르고 고른 말은 사무적 용건이었다.
마주 앉은 한미래는 흘긋 내 손바닥을 확인하고 메마른 표정을 지었다.
“응.”
그제야 문득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건 진짜.
‘P구나.’
턱을 한 번 쓸어내렸다.
긴장감에 손바닥이 축축했다.
“이 약의 공급처를 알고 싶어.”
“…….”
“P를 찾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야. 그 ‘위’를 알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고…… 직접 의뢰를 주고받으니 정체를 알고 있지 않겠냔 얘기를 들어서.”
이유도 없이 한미래의 눈치를 살폈다.
리오가 제 몫의 허브차를 홀짝이는 소리만 간간이 침묵을 깨트렸다.
한참이나 무표정한 얼굴로 속눈썹을 깜빡이던 그녀가 말했다.
“화랑이야?”
그놈의 길드.
한미래가 무슨 저의로 화랑의 이름을 꺼내는지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냥 개인적인 일이야. 그래서 얘랑 같이…….”
“그럼 못 해.”
단칼에 말꼬리를 자른 그녀는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뭐, 뭐를 못 한다는 거지?
영문을 몰라 또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한미래는 이번엔 식은 눈으로 내 손을 뿌리쳤다.
자꾸만 빠져나가고 잡히지 않는 게 꼭 액체 같은 고양이 같았다.
그러나 도망칠 수 없다.
‘이쪽은 2 대 1이니까.’
본능적으로 목표물이 벗어나려는 길을 가로막은 윤산영이 ‘이래도 되는 거죠?’라고 묻는 것처럼 어색하게 웃었다.
나이스 어시스트.
“사람들이 쳐다봐.”
복화술로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갑작스레 벌어진 소란에 사람들의 시선 몇 개가 이쪽으로 쏠려 있었다.
한미래의 소매 끝을 살며시 붙잡았다.
순순히 끌려 앉는 몸짓은 포기에 가까워 보였다.
아이, 참. 알았다니까. 떡볶이 말고 핫도그 먹으러 가자.
나는 주변에 다 들리도록 부러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연기는 안 되겠다.
“뭘 못 한다는 거야. 알려줘도 못 찾아갈 거라고? 우리끼리는 해결 못 할 거라고?”
나는 속삭이듯 물었다.
그러나 죄인처럼 숙인 고개는 답을 내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미래야.”
애원하듯 부르자.
“P라고 불러.”
뒤통수로 매정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P.
이제는 그 이름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건 즉 ‘의뢰’를 따르겠다는 말과도 같았다.
한미래와 이모아가 아닌 의뢰자와 계약자 간의 거래.
이분법적으로 나눠 분명한 선을 긋겠다는 태도.
하지만.
“싫어.”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P로 만난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 애의 얼굴이 한 시도 괴로워 보이지 않은 적 없었기 때문에.
“이 일을 파헤치면 네가 곤란해져? 그럼 그만두고.”
이 말은 진심이었다.
한미래의 고개가 조금 들어 올려졌다.
“근데 내가 못 할 거 같아서. 얼뜨게 비벼보다가 다칠 거 같아서 그러면 그냥 알려줘.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그리고 너도 알잖아. 나 피지컬 나쁘지 않다니까? 그, 공원에서도 우리 같이…….
중얼중얼 덧붙인 말은 혹여나 모든 것을 망칠까 걱정할 한미래를 위한 변명이었다.
나 한번 믿어보라고.
이번에도.
‘해내 보이겠다고.’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
오랜 시간을 견디고 돌아온 건 또 다른 물음이었다.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 봤다.
처음 시선을 나눴던 여름의 교실.
그때처럼.
“이유가 있었겠지.”
그래서 이것밖에 말할 수 없었다.
나는 한미래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한미래가 명암에 속해 있던 이유도.
P라고 불려야 했던 이유도.
이 세상에서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고, 독하다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어둠에 녹아들어야만 했던 이유도.
근데.
“네가 원해서 하는 일이야?”
이것만큼은 물어보고 싶었다.
돈이든, 명성이든.
그게 뭐가 됐든 네가 원해서 그 자리에 있는 거냐고.
그런데 왜 그렇게 괴로워하는 거냐고.
안타깝게도.
차라리 내가 바라던 것과 반대로, 한미래의 등이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
철퍽철퍽.
잿빛 눈들이 바짓단에 얼룩을 남겼다.
눈이 내린 지가 언젠데 날이 추워 그런지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하늘은 어느새 어둑해졌고, 추웠다.
나는 쥐고 있던 종이를 한 번 확인했다.
고이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휘갈겨져 있던 주소가 아른거렸다.
「“네가 상대하려는 건 한 사람이 아니야. 그 ‘위’는 조직이야. 그것도 뒷굴을 아주 꽉 쥐고 있는 구렁이들. 그쪽은 약만 파는 게 아니라 온갖 역겨운 것들로 손을 뻗고 있어. 사람을 상품처럼 굴리는 것쯤이야 간단하고.”」
그녀는 말하면서도 드문드문 적는 손을 멈췄다.
아직 이게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이어진 입술이 나직하게 경고했다.
「“조심해.”」
낮이 두려워지는 순간이 와.
그렇게 한미래는 떠났다.
내가 도와줄게.
내가 널 그 괴로움에서 빼내 줄게.
그런 어리석은 말은 간신히 참아냈다.
만약 내뱉었다면 한미래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모아라는 존재를 인생에서 아예 지워 버렸을 것이다.
적어도 그 애는 살아내기 위해 지옥까지 걸어간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얕은 호의 같은 건 모욕이자 기만밖에 될 수 없다.
한미래를 건져 올릴 수 있을 순간은 그녀가 손을 뻗어 잡아달라고 할 때뿐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모르면 몰랐지, 알아 버린 순간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수 없었다.
나직한 한숨이 입김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오늘 하루 종일 영문 모를 얘기만 듣고 있었을 리오의 어깨를 가볍게 주물렀다.
아니, 나도 이런 일이 될 줄 몰랐으니까 쌤쌤이긴 한데.
“오늘 고생했어요. 미션 뭐 달라진 거 있어요?”
“아니요. 아무것도요. 채희 님은요?”
“음…….”
짧은 침음이 울렸다.
리오가 물어본 이유는 아마도 내가 주소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 외에는 우리 둘의 진행에 다른 게 없었으니까.
그러나, 리오는 모르는 딱 하나가 있었다.
잠시 결정을 유보했던 미션창 하나를 위로 끌어올렸다.
#
【MISSION】
▷ 그림자의 새 주인
― 분류 : 서브
케케묵은 먼지들을 털어낼 때가 왔습니다.
‘???’의 목을 거머쥐고 그들의 새 주인이 나타났음을 선포하세요.
(*이 미션은 성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어두운 명성이 생겨납니다. 블랙마켓을 조금 더 저렴한 값에 이용할 수 있습니다.)
성공 시, ‘???’의 권한 위임.
실패 시, 뒷골목의 수배자.
#
“저도요.”
【MISSION을 수락하셨습니다.】
나는 P.
한미래를 알고 있다.
간단한 이야기였다.
네가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스스로 만든 현재를 책임지기 위해 불어나는 지옥 속에서 버티고 있는 거라면.
‘내가 그 세계로 가면 돼.’
나는 아무도 모르게 뒷골목의 왕이 될 작정이었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