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135
26화
일렁이던 죽음의 강이 잘 닦인 거울처럼 매끄러워졌다.
수면 위로 닿을 듯이 떠오른 저승사자의 발아래에는 그 무엇도 비치지 않았다.
산 자와 죽은 자의 분명한 경계.
모든 어둠을 다 지녔음에도 그림자만큼은 가지지 못한 자가 오만한 얼굴로 말했다.
“구천의 관리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인가.”
구름마저 가라앉게 만드는 음산한 목소리.
“모르면 산 채로 요단강 건너겠나? 볼 일이 있으니까 온 거지.”
나에게는 그저 ‘쑈하네’ 싶을 뿐이었다.
분위기 잡고 말하면 쫄 줄 알았나 본데, 그쪽이 저승사자면 이쪽은 도깨비사자였다.
삼도천에 들어온 순간부터 언제쯤 등장하실까 궁금해하고 있었더니.
‘같은 핫바리 심부름꾼끼리는 붙어도 무서울 게 없다 이 말이야.’
말하면서도 내 신세가 좀 처량하긴 했다.
물론 옆에서 내가 한마디 할 때마다 히익! 거리며 추임새를 넣는 뱃사공에게는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난 그쪽 염라한테는 전혀 관심 없고, 명계 가려고 온 거니까 조용히 보내주는 게 어때.”
말 그대로 저승의 주인은 염라.
내가 갈 명계의 주인은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였다.
저승 역시 혼을 인도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건 주로 동물에 한정된 것.
명계는 동물과 식물, 하다못해 작은 미생물까지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생물의 죽음을 관장하는 곳이었다.
저승보다 조금 더 포괄적이고 넓은 세력의 장소인 것도 당연했다.
‘어쨌든 둘 다 삼도천을 건너야 갈 수 있긴 한데.’
그 사이에 저승사자를 반드시 마주치게 된다는 게 문제였다.
네 말은 씨알도 안 먹힌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자의 눈빛을 맞받아쳤다.
싸움은 기세다.
저쪽에서 먼저 지저분하게 선빵을 쳐 왔으면, 이쪽도 밀리지 않고 수를 던져야 한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맘에 안 든다고 배부터 뒤집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예의이신지? 요즘 저승 유교는 이렇게 돌아가나?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게 멸망해 버렸나?”
그것이 고작 재앙의 주둥이를 나불대는 것뿐이더라도.
“삿된 자가 감히 삼도천을 건너려 하니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샷댼 쟈가 갸믜.”
턱주가리를 내밀고 얄밉게 도발하자 저승사자의 안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사시나무처럼 떠는 건 내가 아니라 뱃사공.
그리고 불안한 눈으로 내 팔목을 꼭 쥐어오는 리오의 손이었다.
이래도 되는 거예요? 리오는 눈으로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명백한 자신감이 있었다.
‘명줄도 안 끊긴 사람을 뭐 어떻게 할 건데.’
저승사자는 산 자를 건드릴 수 없고, 산 자는 저승사자를 건드릴 수 없다.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 다른 차원의 존재였다.
그건 볼 수는 있지만, 결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아직’까지는.
“어디 외교 문제로 발발하게 해줘? 명계 손님 저승사자가 가로챘다고.”
그러므로 의미 없는 논쟁은 이제 관두고 싶었다.
저승사자와 도깨비들끼리 유감이 있는 거지, 명계와는 어떤 사이도 아니니 가는 길을 막는 건 분명한 월권이었다.
그걸 저 사자 놈들도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냥 자기네 영역 들어오니까 심술부리러 온 거라고, 지금.’
뻔히 보이는 속셈에 기가 찼다.
만약 내가 조금만 얼뜨기처럼 굴었다면, 이들은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산 제물을 곱게 돌려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봐.
딱 보기에도 상황이 자기 마음대로 굴러가질 않으니 살벌한 얼굴을 하고.
“네가 지명받은 이송자인가?”
갑자기 하청 업체 꼽 주잖아.
부름을 받은 뱃사공이 배 위로 고개를 처박았다.
벌벌 떨리는 등이 모르는 사람이 지나가다 봐도 한마디 할 정도로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예, 예. 그렇습죠. 예.”
“뱃삯은 얼마나 남았지?”
“그, 그것은…….”
“…….”
“7, 73년하고도 엿새 정도 남았습니다.”
여기서 뱃삯이라 하면 이 사공이 몇 날이나 더 망자들을 실어 옮겨야 할지 묻는 것이었다.
업보를 치르는 저승식 봉사라고 해야 할까.
뱃사공이라 하더라도 한낱 망자에 불과하니, 관리자에게 일개 직원이 찍소리도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뭐, 어쨌든. 뱃사공의 대답을 듣고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사자가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곧 눈앞의 죄인을 심판하기라도 할 것 같은 자세를 보며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
‘뭐냐.’
저 불안한 몸짓.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불길함에 무어라 외치기도 전에 저승사자의 손날이 허공을 베었다.
“안타깝게 되었구나.”
동시에.
빠직.
깔끔히 두 동강 난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는 것만 빼면 모든 게 괜찮았다.
“이런 미친.”
물에 빠지며 작게 읊조렸다.
겨우 저 검은 강에서 건져져 나왔다 싶었더니 밑으로 몸이 쏠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권력 남용? 지금 이거 대박 권력 남용 아니냐?
동동 뜬 뱃머리라도 붙잡으려 허둥거리는 내 팔을 잡아 지탱한 건 역시나 리오였다.
허리 부근까지 밖에 잠기지 않은 그가 나머지 한 손으로는 부서진 배를 붙들었다.
‘어떻게?’
생각하며 발을 힘껏 밑으로 내디뎌봤다.
아무리 버둥대도 내 밑은 물일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저승사자의 표정이 찰나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너무 짧은 시간이라 내 착각인가 여겨질 정도로 단숨에 불과했지만.
“우습군.”
그건 분명 나를 보며 하는 소리였다.
똑똑히 마주친 시선이 끝까지 업신여김을 잃지 않고 멀어졌다.
“야, 어디 가, 이 미친놈아! 배 붙여놓고 가!”
야아아악!
바락바락 대드는 목소리와 함께 사방을 잠식했던 어둠이 거둬졌다.
“해와 달이 있는 이상 네가 원하는 것을 쉬이 이루진 못할 것이다.”
신의 음성처럼 하늘에서 울리는 목소리와 더불어, 다시 안개의 강으로 돌아온 삼도천 위.
동동 떠 있는 몸들은 각기 다른 탄식을 뱉어냈다.
“저런 싹바가지 없는 놈을 봤나.”
“아이고, 새로 배 뽑으려면 또 몇백 년은 할부로 대출 받아야 하는데, 아이고, 아이고오…….”
“이제 저희는 어떻게 건너가야 됩니까?”
리오의 현실적인 질문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명계까지 얼마나 남았죠?”
“족히 이십 리 이상은 더 가야 하지요…….”
뱃사공은 부러진 배를 다친 자식새끼 보듯 아련한 손길로 쓰다듬으며 답했다.
이십 리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다만 아직 한참 남았다는 건 알겠다.
깊은 빡침을 되삼키는 내 얼굴을 살핀 리오가 일단 양쪽 밑판을 가까이로 끌어모았다.
뱃사공과 내가 뱃머리 양 끝에 똑같은 꼴로 대롱대롱 매달린 게 참 웃기기도 했다.
아니, 사실 안 웃겼다.
“저 사자 이름이 뭔 줄 알아요?”
내가 묻자 사공은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소리로 훌쩍이며 고개를 돌렸다.
“이, 이름 말입죠? 알고 있긴 한데, 헌데 그건 또 왜…….”
아까의 문답 시간으로 한 번 혼쭐이 난 뱃사공이 주춤대며 되물었다.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쉽게 대답해주지 않을 모양새였다.
나는 정색을 하고 답변했다.
“패 버리려고.”
아무 이유도 없이 미션 때문에 싸우는 건 사실 좀 그랬는데, 손수 이유를 만들어주셨으니.
‘이제는 거리낄 게 없다.’
영 떨떠름하던 마음에 도화선이 당겨지는 순간이었다.
***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내가 이 은혜는 나중에 꼬옥 갚을 테니까.”
“뭘. 혼백끼리 서로 돕고 사는 거지.”
겨우 뭍에 닿자마자 천에 먹은 물을 죽죽 짜냈다.
후줄근한 조선시대 뱃사공과 풀셋팅 정장 차림인 회사원의 애틋한 격려를 보고 있자니 상식선이 붕괴되는 것 같았다.
저승에서도 저체온증으로 죽는 게 가능한가?
아니, 애초에 삼도천에 떠있는 이상, 나도 실존적으로는 죽은 사람 아닌가?
두 다리로 죽음의 강을 가로지르는 리오에게 해달처럼 둥둥 매달려 존재론적 고민까지 맞닿았을 무렵.
「“저, 저기……!”」
「“뭐야?…… 차?”」
삼도천 한가운데서 만난 은인이었다.
뿌윰한 안개를 뚫고 다가오는 헤드라이트 앞으로 얼마나 손을 휘저었던지.
그 역시 망자 이송자 중 하나였는데, 앞자리에는 이미 물뱀에게 물어 뜯겨 너덜너덜해진 망자 하나를 싣고 있었다.
멀리서 배가 난파된 걸 보고 ‘얼마나 대단한 악인을 만났기에 배까지 풍비박산 났는지 궁금해서 가까이 왔다’는 말에는 부장님 개그 리액션 하듯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악인이라는 소리냐?’
“이제 명계로 가시는 겁니까?”
한 차례 인사치레를 마친 뱃사공이 꾸물대며 다가왔다.
“그래야죠. 근데, 배는…….”
“그냥 받아들여야죠. 예, 예. 그나마 깔끔히 잘렸으니 수리 값 흥정 정도는 해볼 수 있을 겁니다. 예.”
“미친놈 하나 잘못 만나서 셋이 고생이네.”
“쉿, 쉬잇!”
내 말에 뱃사공은 경기를 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래봤자 있는 거라곤 바싹 마른 땅이나 안내를 따라 저승 입구로 들어가는 망자들밖에 없는데, 한참이나 예민한 미어캣처럼 경계하다 허리를 수그렸다.
“어디서든 입조심 하셔야 합니다. 명계의 손님이시긴 하나 삼도천을 통한 몸. 저승은 온 길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거 모르십니까. 안 그래도 도깨비 손님이라고 미운털 박혀 있는데, 사자님들에게 더 큰 화를 입기라도 하면…….”
“이미 망한 거 같은데.”
“하이고…….”
뱃사공은 리오 쪽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배는 버리고 가도 된다는 사공의 우울한 말투에 포기하지 않고 이리 끙끙.
저리 끙끙댈 때부터 호감 만땅인 눈으로 쳐다보더니.
‘뭐냐. 이 묘한 유대감.’
그 유대감을 만든 정체가 나라는 게 기분이 영.
“알았으니까 이제 가요. 우리가 갈 길이 좀 멀어. 아저씨 말마따나 어차피 다시 저승 찍고 가야 되니까, 그때…….”
두 사람의 끈끈한 시선을 휘적이는 손으로 방해하며 대충 마무리 인사를 내뱉었다.
말 그대로 우리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다.
저승은 경유 지점일 뿐이고, 그 옆 동네인 명계까지 가려면 또 한참을 걸어야 했다.
그런데.
‘보지도 않네?’
그래도 같이 강에 표류한 전우애가 있는데 뱃사공의 시선은 미묘하게 나를 비껴갔다.
어딜 보는 거야? 관자놀이?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부르려던 순간.
“마중 나오셨나 본데요.”
사공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몸을 틀었다.
“환영합니다, 필멸자시여. 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누가 봐도 방금 신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키톤 복식.
명계의 신하가 리오와 내 쪽으로 정중히 손을 뻗었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