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136
27화
덜컹덜컹.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맡기며 생각했다.
‘저승 사람들은 죄다 컨셉에 미친 건가?’
게임 속에서는 맵 특색이려니, 그냥 넘겼는데.
어디 로맨스판타지에서나 볼법한 벨벳 시트를 눈길로 쓸었다.
마차 천장까지 푹신한 천으로 도배돼 있었고, 팔걸이나 창문틀은 은은한 백금으로 장식되어 화려함보다는 차분한 우아함을 느끼게 했다.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풀 한 포기도 없는 이곳에서 즐길 거리가 고전적 롤플레잉밖에 없는 거라면 인정이었다.
불안하게 출렁거리던 나룻배에 비하면 천국 같은 초대라는 건 분명했다.
그런데.
“…….”
“…….”
“불편하신 곳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그게 당신이라면.’
내뱉고 싶은 말을 꾹 삼켰다.
비단 오프숄더를 입은 로마 남정네가 때마다 기계적인 멘트를 발산하니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알고 있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까 더, 이 느낌이…….
‘이질감 어쩔 건데.’
현실에 대한 게슈탈트 붕괴가 올 것 같았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리오 역시 가시방석에 올라있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해 보였다.
이야기라도 하고 싶은데 눈치가 보여서, 원.
안내인은 자세를 고치려 잠깐 뒤척이는 몸짓에도 득달같이 웃는 얼굴을 했다.
옆으로 째진 가는 실눈이 우리를 묘하게 감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원래 저런 캐릭터가 배반의 아이콘인 건 국룰.
나는 아주 몰래, 정말 정적인 발동작으로 톡톡 리오를 건드렸다.
아주 다행히도 눈치를 챙긴 그가 슬며시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괜찮아요.’
우리는 제대로 가고 있으니까.
입으로만 벙긋거리자 리오는 긴장감을 들켜 민망하다는 것처럼 작게 웃었다.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빛 하나 들지 않는 척박한 땅 위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밤이었다.
‘왕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라.’
천천히 안내자의 말을 곱씹었다.
하데스가 날 기다린다고?
이것 또한 상당한 의문이었다.
아무리 티켓을 얻어 간다 하더라도 명계의 왕을 만나는 건 쉬운 게 아니었다.
특히나 이렇게 직접 마중을 나온다던가, 마차를 보내오는 일은 꿈도 못 꿀 일이지.
산 채로 명계를 넘어오는 건 순리에 대한 도전이라고 사자 놈들처럼 달려들지나 않으면 몰라.
끔찍한 상상 가운데 도출되는 가능성은 결국 두 가지였다.
‘명계에 도깨비 파워가 그만큼 세다든가.’
아니면.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부드럽게 멈추고 문이 열렸다.
자연 친화적으로 만들어진 저승 입구와는 달리 명계의 왕성 입구는 미끈하게 잘 닦여 있었다.
길게 늘어선 신전 기둥들은 지배자의 위엄을 드러내듯 그 개수를 셀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역시.’
위압감이 남다르다.
지하 세계의 왕을 경배하는 긴장감이 공기 중에 감돌았다.
이쪽으로. 안내자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뻣뻣이 굳은 어깨를 털며 리오의 가까이 바짝 붙었다.
“아무것도 먹지 마요. 어디에 있든, 누가 건네든 절대.”
그에게 암령처럼 속삭였다.
리오가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봤지만, 모르는 척 가볍게 지나쳤다.
걷는 내내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렸다.
별 이유가 없어 명계에 방문한 지 좀 되긴 했지만 내부 구조만큼은 빠삭했다.
내 예상대로라면, 우리가 지금 향하는 곳은.
“필멸자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만찬장이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를 위해 만들어진 거대한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기나긴 만찬 테이블의 끝.
왕좌에 앉아 있던 명계의 왕이 일어섰다.
“기다리고 있었다, 지상의 아이들아.”
어두컴컴한 명계에서 보기 드문 진줏빛 소매가 팔락였다.
순간, 바짝 마른 침이 나도 모르게 크게 삼켜졌다.
정체를 눈치채자마자 모든 상황의 수를 계산하기 위한 머리가 열이 오를 만큼 팽팽 돌아갔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하데스가 아니라.
‘페르세포네.’
봄과 씨앗의 관리자이자, 명계의 또 다른 주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위는 겨울이었지.’
작게 혀를 찼다.
지하로 들어온 이후부터 감각이 희미해진 탓에 잠시 까먹고 있었다.
어떤 식물도 생장하지 않는 겨울은 페르세포네가 명부를 통치하는 시간이었다.
다만, 내가 매번 명계에 왔을 때 만났던 NPC가 하데스라 이번에도 당연히 그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다소곳이 테이블 곁을 지키던 시종은 옆으로 나란히 앉으려는 나와 리오를 갈라 안내했다.
페르세포네를 중심에 두고 마주 보게 된 우리는 짧게 시선을 나눴다.
금식기가 두어 번 맑은 소리를 내며 유리잔을 두드렸다.
“시작하지.”
부드러운 명령에 시종들은 짜 맞춰놓은 톱니바퀴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내 눈앞으로 착착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구이 요리, 윤기가 자르르 흘러내리는 빵과 덩어리 치즈, 포도주와 설탕 가루가 반짝거리는 각종 디저트까지.
갓 만든 것처럼 뜨끈한 김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들이 고소했다.
만일 내게 이성이란 게 없었다면 벌써 접시째 와구와구 손에 쥔 음식들을 퍼먹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손이 좀 떨리긴 하는데.
‘원효대사 해골물이라고 이거.’
든든하게 먹고 오길 잘했지.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명계와 음식의 연관성을 안다면 뻔한 레파토리였다.
‘먹으면, 돌아갈 수 없다.’
반면, 본인의 태도를 살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페르세포네는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게 정말 오랜만이라 조금 부족할지도 모르겠구나. 자아.”
리오의 그릇 위로 미트 파이 같은 걸 크게 덜어준 손길이 어서 먹어보라는 듯 부추겼다.
그 모습이 들뜬 아이처럼 순진해 보이기도 했다.
어색하게 감사를 표하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리오는 포도주가 담긴 와인 잔을 한 번, 그리고 확인하듯 내 눈을 한 번 쳐다봤다.
나는 작고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신 페르세포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일부러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저희를 기다리고 계셨다구요.”
“그럼. 그대들이 여정을 떠나기 시작한 그때부터.”
“그걸 어떻게……?”
묻는 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페르세포네의 칼이 노릇하게 구워진 육질을 주욱 갈랐다.
살갗이 툭 터져 새어 나오는 즙.
그것을 검지에 묻혀 맛보는 페르세포네의 모습이.
“허가도 내지 않은 명계의 티켓이 발부됐으니 모를 수가 있을까.”
소름 끼쳤다.
테이블 위에 누워 있는 게 내가 된 것처럼.
“그것도 도깨비들의 영토에서. 두 장씩이나.”
명계의 왕이 작게 덧붙였다.
나는 순간 아주 얇은 칼날이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그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싹하고 싸늘했다.
‘처용 이새끼 미쳤나?’
그런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 망할 도깨비가 아닐 수 없었다.
난 그래도 당당하게 명계행 티켓을 건네길래, 적어도 두 영토의 합의 된 커넥션이 있었다든가.
아니면 아주 오래전에 관광 겸 비즈니스의 목적으로 구매라도 했다든가.
그런 줄 알았지.
‘그냥 도깨비 인장만 박은 위조 티켓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거 아니냐, 지금.’
이래서 도깨비 놈들이랑 얽히기 싫었던 거다.
될 대로 되겠지 무책임하게 내던진 것인지 아니면 나를 지나치게 믿는 건지 모를 처사였다. (물론 백 퍼센트 전자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다면 페르세포네가 마차까지 보내며 우리를 이렇게 곱게 싸 들고 온 이유도 조금 이해가 됐다.
‘빨리 보고 싶으셨던 거지. 이 미친 침입자들의 얼굴을.’
왕이 섬뜩하게 웃었다.
“무엇을 원해서 왔지?”
즉각 답하지 못한 입이 딱 다물렸다.
목구멍이 모래라도 삼킨 것처럼 까끌 거렸다.
태초부터 유아독존.
사회성을 기를 새도 없이 지하세계에 군림했던 하데스보다는 말이 통하는 인물이라 그나마 낫겠다는 판단이었는데, 어딘가 돌아간 눈을 보고 있자니 그것도 영 틀렸구나 싶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얻을 게 있는 입장으로서 최대한의 공손함을 꾸며내 말했다.
“석류 한 알을 얻어가고 싶습니다.”
석류 한 알.
그것이 저승사자와 맞짱을 뜰 수 있게 만들면서도, 명계에 속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지하의 모든 음식은 섭취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의 피와 살갗에 흐르기 시작한다.
몸의 일부분을 이루게 된다는 건 그 세계에 속하게 되었다는 뜻이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면 그것은 죽은 것과 같았다.
다만 석류가 다른 음식들과 구별되는 이유는 특별히 지상의 빛을 받아 키우는 과일이기 때문이었다.
지하의 흙과 지상의 햇빛.
그 두 세계로 자라난 유일한 존재.
“음.”
하지만 페르세포네는 지루한 숨소리로 대신 답변했다.
내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석류를 바라는지 궁금해하는 기색도 없이 테이블 위를 토독, 토독 일정한 속도로 두드렸다.
답이 틀렸나?
너무 다짜고짜 본론을 들이댔나?
아니, 근데 먼저 물어 봤…….
한참을 필사적으로 고민하던 순간.
“또?”
영문 모를 꼬리가 잡혔다.
리오에게 묻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들었지만 페르세포네의 고개는 여전히 내게로 향해있었다.
은백색의 눈동자가 사슬처럼 시선을 옭아맸다.
“나는 ‘네’가 무엇을 원해서 여기까지 왔느냐 묻고 있다.”
누군가 몸을 꿰뚫어 심장을 손으로 쥐고 있는 것처럼 가슴 안쪽이 저려왔다.
명계의 왕은 정확히 ‘나’를 보고 있었다.
‘리오’를 보고 있었다.
말문이 막힌 두 얼굴을 보며 페르세포네는 고아한 미소를 지었다.
“막대한 부. 압도적인 힘. 권력.”
“…….”
“곡식과 함께 자란 이가 햇살과 바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듯, 인간이란 존재는 하물며 탐욕하지 않을 수 없지. 도깨비왕에게 무엇을 빌었지? 무엇이 너희를 명부의 앞까지 서게 만들었느냐.”
진실을 털어놓으라 호령하는 고압적인 목소리는 명백한 지하 군주의 것이었다.
압도적인 기에 의식하지 않아도 살이 떨렸다.
이게 정말 게임 속이었다면 답변 하나로 미션의 성패가 달라질 분기점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A부터 D로 나눠진 선택지도, 눈에 보이는 호감도 게이지도 없다.
여기부터는 오로지 몇만 시간 이 세계를 핥아먹으며 벼려온 윤채희의 직감과 정보의 싸움일 뿐.
폭풍전야 같은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수백, 수천 갈래의 답변이 나무줄기처럼 머릿속을 타고 뻗어 나갔다.
나는.
“제가 진짜 원하는 건…….”
아득히 먼 곳을 응시하던 뿌연 초점이 단 하나.
페르세포네의 위로 상을 맺었다.
“신은 못 주는 건데.”
비틀린 웃음이 입꼬리를 깊게 패었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