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138
29화
“괜찮으십니까?”
무겁게 닫힌 문을 한 번, 나를 한 번 번갈아 보던 리오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럼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일 좋은 플랜 A는 페르세포네가 얌전히 석류가 있는 정원으로 안내해 주는 것이었지만 그건 기대도 안 했고.
리오는 내가 바라던 대로 아주 잘 움직여줬다.
만찬장에서 내쫓기는 상황 역시 페르세포네를 본 순간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바였다.
모든 것은 계획 아래 통제되고 있었으니 나쁠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런데…….
‘왜?’
나를 바라보는 리오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그 눈은 어딘가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안타까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무슨 말도 뱉지 못한 입이 어물거리다 결국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쓰기에는 벌어진 상황이 급박했다.
‘웨이브.’
제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마수들이 몰려오는 방식.
물론 명계의 마수는 포탈에서 쏟아지는 정체불명의 괴물 같은 게 아니라 신화 속에 등장하는 괴수들이다.
그래도 B+라니. 적절한 난이도를 줘서 다행이었다.
나야 걱정 없지만 리오에게도 천지가 개벽해야 깰 수 있는 정도의 차이는 아니었다.
남은 시간은 약 1분 30초경.
작전을 짜기에 긴 시간이 아님은 분명했다.
나는 최대한 리오를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빠르게 포지션을 나눴다.
“내가 석류 구해서 갈 테니까 달리면서 괴수들 시선 좀 끌어줘요. 몇 대 때리면 더 좋고. 왔던 길은 기억하죠?”
“네. 대충 기억합니다.”
“좋아요. 확실히 모르겠다 싶으면 일단 오른쪽 벽만 짚고 따라가요. 아, 그리고.”
진지한 손길로 무기를 장비하던 리오가 고개를 돌렸다.
명계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명시되지 않은 마지막 조건이 하나 더 있었다.
“뒤 돌아보지 마요.”
우리가 다시 지상 위로 오르기 전까지.
쿠구구궁.
지축이 뒤흔들리는 충격에 샹들리에가 삐걱삐걱 흔들렸다.
【첫 번째 웨이브가 발동하는 중입니다…… 】
【다음 Wave 까지 / 9분 59초】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한 인간들의 발버둥이 시작됐다.
***
두 발이 쉬지 않고 왕성 복도를 내달렸다.
컹! 컹컹!
생자의 냄새를 맡은 명계의 마수들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바짝 그 뒤를 쫓았다.
타닥, 타닥.
몰려오는 수십, 수백 개의 발소리.
도망갈 곳 없는 일자 복도에서 페르세포네의 번견들이 우리를 몰아세웠다.
“오른쪽!”
케르베로스 한 마리를 붙잡고 칼을 휘두르던 리오가 내 지시에 잠시 반 발자국 뒤로 몸을 물렸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운석들이 눈앞으로 쏟아졌다.
끼기잉! 맥없이 쓰러지는 지옥의 파수꾼들을 보며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페르세포네는 이 모습을 다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이렇게 우리가 가는 길목마다 딱딱 괴수들을 배치해놓을 수가 없으니.
리오를 앞세워놓고 그가 한 대 치는 마수들만 족족 주인의 곁으로 보내줬다.
버스도 태우는 겸, 그를 백업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굳이굳이 뒤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리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얘는 자꾸만 흘금흘금 돌아보려고 했지만.
“앞.”
단호하게 소리쳤다.
뒤를 돌아보면 명계를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건 사실이었다.
일명, 오르페우스의 저주.
좋게 물러났으면 모를까, 페르세포네에게 빈축을 산 지금에는 미로처럼 영원히 명계의 궁을 떠돌게 될지도 몰랐다.
퍼덕이며 날아오는 새끼 히드라를 쳐내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뽑아먹을 수 있는 건 죄다 뽑아 나가 준다.’
“리오.”
내 부름에 그가 멈칫 멈춰 섰다.
결코 고개를 돌리진 않는 모습에 미약하게 마음이 놓였다.
“나가서 봐요.”
그의 칼날이 답하듯 허공으로 솟구쳤다.
서걱. 썰려 떨어지는 케르베로스의 머리를 보며 갈림길 옆으로 몸을 틀었다.
혼자 보내는 게 불안하긴 하지만 적어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리오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니까.
뛰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석류가 자라고 있는 안뜰 정원은 이 명계에서도 가장 지상과 가까운 곳, 서쪽 첨탑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챙, 챙, 채앵!
금방이라도 찌를 것처럼 목 끝에 맞닿는 얇은 칼날을 곁눈질로 노려봤다.
허락되지 않은 침입자를 막아선 기사 동상들이 줄지어 사브르를 빼 들었다.
중앙 광장.
병영이 있는 왕성의 무투장 한가운데.
잘게 떨리는 날붙이의 끝이 하나의 원으로 모여 구심의 목표물을 겨눴다.
사방에 가시처럼 박혀 있는 적의.
살의.
그러나.
‘나는 이미 한 번 살아남은 사람이다.’
정해진 결말을 깨부수고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
운명 같은 건 믿지 않는 사람.
그러므로 두 번, 세 번이라고 못할 것 없다.
말했듯이 싸움은 기세다.
그게 호시탐탐 날 죽일 기회만 노리는 빌런에게든지,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려는 신에게든지 상관없다.
다만.
“마지막에 누가 웃나 끝까지 해보자고.”
집중력을 잃지 말고.
【마나슬롯의 영향으로 시전 스킬 ‘그레이스’에게 ‘화우’의 효과가 깃듭니다.】
【새로운 스킬 정보가 등록됩니다…… 】
【‘심판(Judgement) (β’】
파아아앙―!
한계까지 끌어당긴 활시위가 튕겨 나간 탄력감에 전율했다.
정확히 상대를 조준한 빛의 화살이 적들의 이마 정중앙으로 비처럼 내리꽂혔다.
‘저지먼트.’
이게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심판이다.
머리가 박살 나 부스러진 기사들의 동상을 짓밟고 앞으로 향했다.
***
허억, 허억.
모자란 숨으로 폐부가 찌그러들었다.
되삼키는 침에도 목구멍이 따갑고, 이내 비릿한 피 맛까지 감돌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결코.
‘멈출 수 없다.’
성가시게 뺨을 쳐오는 마수의 날개를 붙잡아 꺾고, 허벅지를 물어오는 짐승의 이빨을 거세게 털어내면서도 달렸다.
수많은 괴물들의 배를 가르고 튀어 오른 피가 눈앞을 가려도 멈추지 않았다.
다짐했으니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약속했으니까.
‘멈춰 서지 않기로.’
남대문에서 패인 흉터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요. 내가 안 쫓아오는 것 같아도 끝까지.”」
채희 씨는 그렇게 말했지만 혼자 도망치듯 달아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가 나를 걱정해서라는 것도.
내가 마수들을 상대하기 역부족인 등급 때문이라는 것도 알지만.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당신에게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카앙!
바닥을 찍은 검 날이 지표면에 우뚝 박혔다.
갈라진 땅에서 빛이 솟구쳤다.
갑작스러운 성력聖力에 키에에엑! 마수들의 괴로운 울부짖음이 불거졌다.
사실, 아직 채희 씨에게는 말하지 못한 비밀이 하나 있었다.
이 세계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내게도 한 가지 목표가 생겼다.
나는.
‘정상에 오를 당신을 가장 앞에서 바라보고 싶다.’
그래서 이곳의 누구와도 연을 만들지 않겠다는 철칙을 깨트렸다.
스스로 가두고 있던 담장을 부수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 순간 깨달았으니, 사실은 두려웠던 것뿐이다.
‘내가 또다시 아무도 구하지 못하게 될까 봐.’
“위대하고 자유로운 수호자의 빛이 응답할 것이니.”
나는 깨지지 않는 방패가 될 것이다.
【Lv.2 영광(靈光) / 태양이 사라져도 내리쬐는 빛이 되리라.】
필요한 그 순간, 단 한 번이라도.
‘목숨을 바쳐 당신을 구해낼 것이다.’
눈이 부시게 터지는 섬광과 함께 백골의 증표를 단 월계수 방패가 마수를 막아섰다.
퉁, 투웅!
거세게 부딪히는 압력에도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채희 씨에게 향할 마수들을 최대한 붙잡아 놓는 것뿐.
최선을 다해야 했다.
일순, 무례를 무릅쓰고 가르침을 달라 무릎을 굽히던 내 앞에 곤란하다는 듯 함께 무릎을 꿇어앉던 송새벽 마스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전장의 방패에게는 어떤 두려움도 없어야 하지만,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두려움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내가 무너지면 전부가 무너진다는 두려움.’」
「‘내가 흔들리면 전부가 흔들린다는 두려움.’」
「‘가장 선두에 서고 가장 마지막에 쓰러질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호기롭게 할 수 있다 공표했지만, 수년간 검을 들어왔던 버릇을 한순간에 고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나는 더 노력해야 했다.
온몸에 멍이 들고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부딪치고 달려들어야 했다.
막아내야 했다.
방패가 되기 위해서라면.
그때, 몰아치던 둔통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공격이 멈췄다.’
황급히 방패 위로 고개를 들어 상황을 파악했다.
신기루처럼 어떤 마수의 모습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닥을 내려다보았을 때 나는 비로소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명계의 영역이 끝났구나.’
내가 선 곳은 저승과 명계의 경계선이었다.
죽일 듯이 달려들던 명계의 마수들은 공격할 목표물을 잃어 일제히 왕성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직 채희 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마수들이 향하는 곳은…….
‘채희 님.’
스스스슥.
메마른 모래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움찔거리는 발끝을 멈춰 세우기 위해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쥐어야 했다.
돌아보면 안 된다.
그녀는 반드시 도착할 것이다.
알고 있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음에, 믿고 있지만.
“……젠장.”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분노했다.
그때.
드득, 드드드.
땅이 조금씩 흔들렸다.
눈앞에서 휘날리는 먼지 폭풍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느끼자마자 목덜미 너머로 짜릿하게 소름이 돋았다.
‘온다.’
마수들의 퍼덕이는 소리.
수많은 발소리.
그리고.
“리오오오!!”
채희 씨의 우렁찬 목소리가 아득한 곳에서 나를 불렀다.
“달려, 앞으로 달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목소리가 등 뒤에서 소리쳤다.
두두두두! 컹! 컹!
이번에는 뒤통수에서 맹렬하게 느껴지는 마수들의 인기척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달리라니까 뭐해!?”
채희 씨의 손이 내 팔목을 거세게 붙잡아 끌어당겼다.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던 발걸음에 이내 힘이 실리고, 우리는 같은 보폭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기다렸던 그녀의 등이 보인다.
“이거 얼른 쪽 빨아먹고 씨는 뱉어요.”
다급한 상황인 것 치고 침착하게 말하는 채희 씨를 보며 붉은 석류 한 알을 받아 들었다.
“아, 그리고 이것도.”
품 안에서 주섬주섬 꺼낸 영문 모를 반지 하나 역시.
정교한 세공과 중앙에 박힌 녹음의 보석만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었다.
키에에엑! 캬아아!
반지의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괴수들의 바둥거림이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저승의 경계로 들어온 지 한참 되었는데도 공격이 사라지질 않아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채희 님, 설마…….”
“어, 그거 맞아요.”
“이런 걸 가져와도 되는…….”
“뭐 어때요.”
그녀가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얼굴로 방긋 웃었다.
“이제 튀면 그만인데.”
그 가벼운 말투에 답지 않게 따라 웃고 말았다.
톡.
입안에서 굴리던 석류알을 터트렸다.
달콤한 핏빛 즙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맹세했다.
‘그녀의 빛나는 방패가 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뒤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