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149
40화
옛날 할머니 집에서나 보았던 올록볼록 패턴 유리문 위에는 또다시 ‘철학관’이란 스티커가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었다.
뭐 어디서 돌팔이라는 소리라도 들은 건지…….
어쩐지 한이 맺혀 보이는 글자 너머로 대충 안을 살폈다.
빛은 새어 나오고 있는데, 조각난 그물처럼 뿌옇게 보이는 유리 덕분에 사람의 형체는 가늠할 수 없었다.
문 틈새에 바짝 붙어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개미 발소리도 안 들리는구먼.’
같잖은 염탐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어떤 것이든 문제 해결 방법은 일단 들이박는 것뿐이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계세요.”
밖에서 들었던 것처럼 철학관 내부는 고요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 안.
벽 한 면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두루마리 족자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복잡한 한자로 쓰여 있어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 옆에 놓인 이집트식 벽화나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신화 느낌의 그림 등을 보아 대충 ‘별의 별걸 숭배하고 있구나’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초록 부직포가 깔린 테이블 위로 놓여 있는 황금 잔과 삼발 솥.
이 토속적인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뱀 머리 동상 같은 것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 공간의 주인은 머리카락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문을 이렇게 활짝 열어놨으니 오래 외출할 것 같지는 않은데.
생각하며 어정어정 사무실을 뒤졌다.
손때 묻은 구슬 같은 걸 헤집다가 문가 바로 옆, 탁상에 놓인 명함꽂이를 발견했다.
딱딱한 스노우지를 하나 뽑아 들었다.
『누구도 운명보다 현명할 수는 없다 / 五行철학관, 사제 여호안』
그토록 찾던 이름이 여기에 적혀 있다는 게 조금 낯설었다.
그때.
달칵.
어딘가의 문이 열렸다.
이 사무실 한 칸이 전부라고 생각해 꼼꼼히 살피지 않았던 책장 뒤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자박자박 새어 나왔다.
긴장감에 침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다급히 지팡이를 붙잡고 전투태세를 취했을 때, 발목까지 덮는 검은 원피스 자락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다음.
“아.”
인기척을 느껴 조금 놀란 기색을 표한 여자가 곧 나긋이 인사를 건넸다.
“오셨군요.”
들고 있던 명함이 바닥으로 나풀, 떨어졌다.
어깨까지 부드럽게 떨어지는 갈색 웨이브 머리.
둥글게 뻗은 눈썹.
어딘가를 꿰뚫어 보는 눈매.
그리고, 나를 확인사살 시켜주듯 팔목에 찬…….
‘보랏빛 팔찌.’
나는 저 모든 것들을 마주한 적 있다.
흐릿한 베일에 감춰져 있긴 했지만, 이 선뜩한 인상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혼란스러운 머리 대신 주둥이가 마구잡이로 생각하는 말들을 토해냈다.
“당신, 그때 그…….”
타로집 여자.
여호안이 수긍하듯 작게 미소 지었다.
***
“…….”
“…….”
달각.
찻잔을 놓는 소리 외에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여호안은 내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려주겠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띤 채로 내내 앞에 놓인 구슬들을 닦았다.
그 태연스러움에 문득 부아가 치밀었다.
뭐? 오셨군요?
‘진짜 내가 여기 올 줄 알고 있기라도 한 사람처럼.’
처용이 가까이에 있다고.
이래서 인간들은 안 된다, 눈이 먼 거 아니냐 핀잔 먹이듯 이야기했을 때에도 ‘뭐래’ 싶었지만 그게 이런 상황을 뜻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욕실의 수챗구멍처럼 지저분하게 생각이 엉켜 들었다.
그럼, 그 타로 가게 역시 내게 접근하기 위해 파 놓았던 함정인가?
의도적으로 주변을 맴돌고 있던 것인가?
그때 이야기했던 것들은, 아니, 그 전에.
‘도대체 왜, 이모아의 앞에 나타난 건지.’
조용히 나만의 상점창을 열었다.
【1,500 다이아 소모.】
【‘거짓말 탐지기’를 구입하셨습니다.】
【남은 사용 횟수는 5회입니다.】
업데이트 한 번 구질구질하다고 욕했었는데, 이걸 이런 식으로 써먹게 될 줄 몰랐다.
흘러내린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작게 기합 넣듯 주먹을 쥐고, 아무것도 가려지지 않은 시선에 똑똑히 눈을 맞췄다.
“내가 여기에 올 줄 알고 있었습니까?”
여호안은 기다렸다는 듯이 부드럽게 대꾸했다.
“네. 알고 있었어요.”
【진실입니다. (남은 사용 횟수: 4회)】
탁.
참았던 숨이 터졌다.
차라리 거짓이길 빌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는 것은, 그럼.
‘내가 여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했던 수많은 일들도…….’
등줄기부터 싸한 소름이 쭉 돋았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짐작으로 빚어낸 우연일 뿐이다.
이를 악물고 다음 질문을 던졌다.
“이모아, ……나를 일부러 타로 가게로 유인한 겁니까?”
“그건…… 글쎄요. 답해드리기가 조금 애매하네요.”
찻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여호안은 곤란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제가 모아 씨와 이야기 나눌 순간을 바랐던 건 맞지만, 모든 굴레가 맞물릴 때까지 기다렸을 뿐이에요. 시간, 장소, 개연성…… 그리고 그 일을 만들어 내기 위해 탄생한 모든 의지까지.”
필연은 그렇게 만들어지죠.
그녀가 속삭였다.
“저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어요. 직접 발걸음하신 건 모아 씨가 아니던가요. 그때도.”
지금도.
동의를 구하듯 되묻는 말 위로 거짓말 탐지기의 알림 문구가 떠올랐다.
【진실입니다. (남은 사용 횟수: 3회)】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울혈을 남길 때까지 주먹을 꽉 쥐었다.
닉값 못하는 기계가 고장 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여호안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날 찾아온 건 ‘너’라며 상기시켜주기까지 하면서.
바짝 마른 입안을 침으로 축였다.
식은땀에 등이 젖을 정도로 많은 생각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러나 뇌리에 박힌 하나의 전제만은 결코 달라지지 않았다.
정말.
‘어떤 것들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라면?’
내가 나의 의지로 바꿨다고 생각한 일들 역시 ‘필연’적이었고, 예정된 엔딩을 따라 걷고 있는 거라면?
나는 나도 모르게 정해진 수레바퀴 안에서 쳇바퀴처럼 달리고 있었을 뿐이고, 놈들이 말했던 것처럼…… 내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면.’
잠깐 필름 끊기듯이 시야가 점멸했다.
숨쉬기가 어려워 아가미를 여는 물고기처럼 입을 벌렸다.
패닉이 온 호흡이 가팔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턱받침한 채, 가만히 내려다보던 여호안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이번에는 제게 가르쳐 주세요.”
그 목소리는 더 이상 나긋하게 들리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죠?”
으득. 무언가를 참으려 자각 없이 씹은 볼 안쪽에서 비린 맛이 감돌았다.
그건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쉴 새 없이 내게 반복되었던 질문과 같았다.
사방에 바늘이 깔린 것처럼 공기가 예리하고 날카로워졌다.
자칫 움직이기라도 하면 터질 것 같은 분위기를 음미하던 여호안은 구겨진 명함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아까 내가 쥐고 있던 것이었다.
“제가 왜 점술가. 혹은 예언자가 아니라 사제라 불리는 지 아시나요?”
사제, 여호안.
처음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다.
그녀는 적힌 글자를 아주 소중한 손길로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곤, 아주 먼 곳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듯 까마득한 얼굴로.
“예언은 바뀔 수 있지만, 신탁은 어떤 선택을 해도 결국 그 결말로 치닫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흐리는 말끝에서 명확한 시선이 느껴졌다.
타로 가게와는 달랐다.
이번에는 확실히,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깊숙한 그 너머를 꿰뚫어 보는 것처럼.
정말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어긋나더군요.”
칼자루를 쥐고 윤채희를 찔렀다.
이 사람은, 내가 이모아가 아닌 걸 알고 있다.
그건 이제 의문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이모아는 죽어야만 하는 ‘운명’을 부여받은 아이예요. 그건 어떤 세계든, 누구의 세상이든 달라지지 않아요. 수십, 수백 번을 다시 태어나도 이모아가 이모아인 이상 영혼에 새겨진 길은 지워지지 않고, 결국에는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게 정해진 결말이죠. ……의식을 행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구요.”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여호안은 이걸 듣기 위해 온 게 아니냐는 것처럼 되묻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묘하게 차오르는 분기에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이, 이해한다는 태도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적선하듯 툭.
“인을 하지 않았다면 그 아이는 더 빨리 죽었을 거예요.”
내가 가장 듣고 싶어 하던 대답을 내놓았다.
【진실입니다. (남은 사용 횟수: 2회)】
“……뭐라구요?”
거짓말. 아니, 거짓…….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반문했다.
여호안은 담담하게 고개를 주억거렸고, 탐지기 역시 네가 듣고 있는 게 ‘진실’이라 말하고 있었다.
부정하고 싶은 것은 나뿐이었다.
나는, 여태껏.
‘이 여자가 채본의 끄나풀이기 때문에 이모아를 봉인했다고 생각했다.’
국가를 위협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단순히, 이 미친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그런데.
“이모아가 속한 세계선의 파괴는 예정되어 있는 운명입니다. 위대하신 창조자가 그걸 원하시니까요.”
애초에 정해져 있는 죽음을 늦추기 위해 봉인된 거라면…….
“이 아이가 몰고 오게 될 불행은 자명했어요. 봉인은 그걸 유보시킬 유일한 방법이었을 뿐,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또 그렇게 했을 겁니다.”
“…….”
“저는 이 세계를 지켜내기 위한 단 하나의 가능성을 위해 동의했고,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어요.”
준비 시간을 벌어주었던 거죠.
세계에게도, 이모아에게도.
여호안이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뚫어질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사늘한 눈매가 추궁하듯 끈질기게 나를 쫓아왔다.
“그런데 비틀리고 있어요. 이 세계를 구할 궤도들이.”
당신 때문에.
뒷말은 잇지 않았지만 나는 마치 후드려 맞은 것처럼 그 말을 곱씹었다.
“처음에는 잠시 튄 불티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더군요.”
세계의 경계를 나누듯 촘촘한 속눈썹 사이로 무한히 펼쳐진 밤하늘이 있었다.
여호안의 눈에 담긴 별들이 나를 응시했다.
“당신은 누구죠?”
세계가 재차 되물었다.
“무엇 때문에 정해진 균형들을 비트는 거죠? 어떤 일도 가늠할 수 없는 카오스의 상태로 돌아가면서까지.”
천천히 숨을 가라앉혔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점점 더 명료해졌다.
내가 가야 할 길.
만들어야 할 엔딩.
이 세계에 들어오기 전부터, 간절히 원했던 단 하나의 결말.
“정해진 운명 같은 거 안 믿는 사람.”
나는 이모아에게 주고야 말 것이다.
이 아이가 살아남는 최종 엔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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