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150
41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서야, 오히려 머릿속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이 현실에 존재했던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선명하고 또렷했다.
어긋남.
비틀림.
혼란.
혼돈.
‘그게 내가 바라왔던 거니까.’
내가 알고 있는 게임 속 이야기와 같아서는 절대 이모아를 살려낼 수 없다.
새로운 루트. 새로운 미션들과, 새로운 엔딩.
내게 필요한 건 이 세상에 없는 이야기였다.
반면, 내 답을 들은 사제의 얼굴은 미묘하게 구겨졌다.
한 치 앞을 모르고 불에 달려드는 나방을 보듯 딱히 여기는 것 같다가, 불신과 의심이 혼재된 얼굴로 나를 깊게 탐색했다.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읽어보려면 읽어보라는 심보였다.
나는.
‘더 이상 물러설 길이 없다.’
침잠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여호안은 딱딱히 굳었던 표정을 풀고, 피로하다는 듯 눈두덩이를 마사지하며 말했다.
“타로로 들려드린 이야기는 전부 사실이에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목숨을 노리는 놈들이 시시각각 판을 치고, 하물며 삼도천까지 건넌 처지에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받아들이긴 어려웠다.
딱히 놀랍지 않은 정보에 화제를 바꾸려던 차.
“……딱 하나, 말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 빼고는.”
【진실입니다. (남은 사용 횟수: 1회)】
이건 좀 흥미로웠다.
자세를 고쳐 앉고 다음 말을 기다렸으나 여호안은 그 뒤로 오랫동안 침묵했다.
티백을 빼지 않아 녹조처럼 변한 찻잔을 다 비워낼 동안에도 그녀는 나를 계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이야기가 세계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어느 날 갑자기 툭 솟아오른 돌부리를 파낼지, 말지.
자신이 아는 굴레를 되돌릴지.
‘흐르게 놔두어야 할지.’
그리고 마침내.
“그것 외에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요.”
천기를 누설하듯 정결한 단어로 속삭였다.
“그때 당신을 만난 뒤로도 수십 번 더 신탁을 받으려 해봤지만 불가능했어요. 백지처럼 하얗다가도, 구름 속처럼 뿌옇기만 한 길을 끝도 없이 걷다가 돌아오는 게 전부였죠. 저는…….”
그녀가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아직 답이 내려지지가 않는군요.”
나는 즉시 대항하듯 맞받아쳤다.
“그냥 놔둬요. 보이지 않고 불투명한 그대로.”
“…….”
“가능성은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어야 비로소 생기는 거 아닌가요.”
여호안의 눈썹 끝이 엷게 떨렸다.
무엇을 숨기려는지 지그시 감은 눈으로 말했다.
“만약 그 끝이 파멸이라면?”
“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죠.”
“이미 알고 있는 방향성마저 잃는다면…….”
“더 나은 결말을 만들 수도 있구요.”
또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거기에 대해서는 분명한 할 말이 있었다.
“저는 저를 아니까요.”
당신들이 내내 누구냐고 묻기만 하는 윤채희를, 나는 아니까.
누구보다 살고 싶은 마음.
끝을 보고 싶은 마음.
이모아, 이겸, 윤산영…….
더 나아가 내가 아는 이 모든 세계에게.
‘다른 엔딩이 있기를 바라왔으니까.’
바꿀 수 있고, 그래야만 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반드시.’
그녀의 한쪽 손을 끌어당겨 붙잡았다.
여호안은 잠시 놀란 눈을 했지만, 얌전히 내게 붙잡힌 채 시선을 맞췄다.
“이해관계가 일치하면 된다고 했죠. 저랑 사제님은 목표가 같아요. 저는 결국 살고 싶고, 그러려면 이 말도 안 되는 세상을 구해야 하고. 그러니까…….”
두 손으로 여호안의 손을 소중히 그러쥐고 말할 생각이었다.
‘제발 자물쇠 푸는 방법 좀 알려 달라고.’
그때, 자수정이 촘촘히 박힌 볼드 팔찌가 덜그럭대며 떨어졌다.
그녀의 흰 팔목이 드러나고, 내 입에서 멍하니 튀어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눈?”
팔찌 아래. 손목에 그려진 감은 눈 모양.
그건 분명 명암의 표식이었다.
그것도.
‘상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간부의 표식.’
일순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 당황을 감지한 여호안은 부드럽게 붙잡힌 팔을 뺐다.
다시 떨어진 팔찌를 주워 문양을 감추고, 한쪽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놀랐나요?”
놀라긴 개뿔.
“당신 뭐야.”
기절하는 줄 알았다.
심장이 발끝과 하이파이브를 치고 왔다.
당장 목덜미 위로 지팡이를 처박고 흉흉한 살기를 내뿜고 있음에도, 특유의 나긋한 미소만을 짓는 얼굴이 이제는 섬뜩하게 느껴졌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
지금까지 진실만을 말해주며 미묘한 신뢰감을 쌓게 만들고. 묻지 않아도 척척 궁금한 것들을 알려주었으면서.
‘명암이라고?’
어떤 정보를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처음부터 끝까지 꾸며낸 이야기였나?
아니. 하지만 는 시스템에서 운용되는 아이템이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럼, 진실을 미끼로 이모아를 불러들여 살해하기라도 하려고?
반대로.
‘이 여자가 명암이라면, 놈들은 도대체 나에 대해 어떤 정보를…….’
아찔함에 현기증이 일었다.
자물쇠고 뭐고 당장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쳐들었다.
선 성향이 떨어져 고위 스킬도 사용하지 못하는 지금, 기본이 S급 이상인 명암 간부 놈들을 상대하게 된다면 예정된 건 끔살 엔딩이었다.
그때.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는 여호안의 손이 나를 감쌌다.
어떠한 방어도 갖추지 못했으면서, 내가 공격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는 듯 나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살갗 위로 지팡이의 뾰족한 끝이 점점 더 파고들고 있었다.
“소속만 되어 있을 뿐, 저는 그들의 편이 아닙니다.”
【진실입니다. (남은 사용 횟수: 0회)】
【거짓말 탐지기가 파괴되었습니다.】
내게는 이 모든 상황이 더 거짓말 같았다.
순간 공격할 의지를 잃은 손이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럼 그 표식은 뭔데요.”
긴장감에 지친 쉰 목소리로 물었다.
여호안은 표식 위를 몇 번 지워내듯 문질렀다.
발갛게 달아오를 뿐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신탁 사제에 대한…… 우대 같은 것이라 말하면 될까요.”
그녀는 또다시 사제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었다.
“종종 신탁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 건 맞지만,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믿어 주세요.”
진실된 눈빛.
그러나 여전히 바짝 돋아난 경계는 풀리지 않았다.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이제 여호안이 ‘진짜’를 말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그렇지만, 도대체…….
“왜 하필 명암입니까?”
무슨 속내인지 알 수 없었다.
이 여자를 진짜 믿어야 하는지 전혀 확신이 들지 않은 건 물론이고, 이렇게 한 치의 거짓말도 하지 않는데 의심스러운 인간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사상을 검증하듯 들이대는 잣대에도 그녀는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제 선택은 언제나 굴레를 따르는 쪽으로 향해요.”
“…….”
“세계의 질서를 되찾을 확률이 두 개로 나뉜 건 아주 오래전의 일입니다. 당신이 나타난 이후로는 더더욱 격렬하게 부딪치고 있고…….”
그녀가 나의 눈치를 살피듯 한 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저는 성공 확률이 높은 쪽에 힘을 실었어요. 그게 명암이었을 뿐이에요.”
말하는 여호안의 눈빛은 확고했다.
“그 새끼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알고 있습니까?”
어금니를 꽉 깨문 턱에 힘이 들어갔다.
꽉 찬 노기를 느낄 게 분명한데도, 여호안은 태평스럽게 흘러내린 내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었다.
미지근한 손길이 뺨을 그러쥐었다.
“모를 리가요.”
마치 아이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
여호안은 이해를 바라는 사람처럼 설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는 현실을 구하는 방법이 억압에 의해서든지, 힘에 의해서든지…… 복종의 방식으로 행해져도 상관하지 않아요. 그게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
질서와 균형을 되찾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관심 없다고.
그걸 위해서라면, 어떤 악도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고 운명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제가 무표정한 얼굴로 덧붙였다.
“원래도 세계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나요.”
보이지 않는 권력이 눈에 보이는 ‘등급’으로 나뉘었을 뿐, 어디든 희생당하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고.
그러니까 그냥.
‘설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내게는 그 말이 그렇게 들렸다.
그렇다면야.
“자물쇠.”
책상을 짚고 여호안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뽀얀 지문 자국이 더덕더덕 묻은 유리판 위로 입꼬리가 찢어지게 웃고 있는 내가 비쳤다.
아마 그녀가 보기에는 좀 무서운 형국이었을 것이다.
“알려주세요. 당신이 건 이 저주 푸는 방법.”
투기가 형형한 눈은 결코 웃고 있지 않았다.
누군가 희생되어야지만 굴러가는 운명이라는 게 제대로 된 것일 수가 없다.
그 틀에 박힌 정신머리를 싹 다 부숴 버리는 게 내가 원하는 일이었다.
그 사이에서 몇 번이나 베이고, 찢기는 고통을 느껴도 상관없이.
‘제대로 된 엔딩.’
그것을 위해서라면.
여호안은 기필코 그 길을 택하겠냐는 듯이, 한동안 나를 올려다보았다.
팽팽한 대치.
끊어질 것 같은 숨소리가 닿을 듯이 오가고.
“알겠습니다.”
결국 거부할 수 없는 의지를 받아들인 사제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드르륵.
체념하듯 의자를 밀치고 일어난 여호안은 천천히 사무실을 배회하며 장식되어 있는 성물들을 매만졌다.
시선으로 좇는 그녀의 뒤통수에서 설명이 이어졌다.
“주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약. 인印한 사람들의 동의가 모두 필요해요. 그 당시 의식을 행한 사람들은 모두 셋. 저, 이겸 씨, 그리고…….”
“이해운 총장.”
선수 쳐 답변하자 여호안은 놀란 듯이 뒤를 돌았다.
가까이 다가와 무언가를 확인하듯 명치께 위로 살포시 손을 얹더니.
“역시, 당신은 이모아가 아니군요.”
재차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그래서?”
뒤로 무르려는 팔목을 붙잡은 채 물었다.
워낙 자그마한 체구 때문인지 내가 여호안을 조금 내려다보는 위치였다.
위를 향한 그녀의 시선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름이라는 건, 그 사람의 모든 본질이 응집된 강력한 주술 중 하나예요. 다른 사람의 인을 풀 방법이 저한테는 없어요.”
아이씨…… 이거 거짓말 탐지기를 사, 말아?
그 짧은 순간 수도 없이 고민했다.
여기까지 뭘 위해 왔는데, 방법 하나 얻지 못한다면 너 죽고 나 살자 식으로 세계를 갈아엎을 상상도 마쳤다.
그러나 즉시 이어진 뒷말에 의해 심란함은 싹 날아갔다.
“대신 술식을 약하게 만들 수는 있죠.”
그녀의 손 위로.
기억에서 보았던 그 장면처럼 찬란한 빛이 모여들었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