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166
57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원을 막는다니요.”
황당함을 숨기지 못한 도 학이 전서구를 붙잡고 핏대를 올렸다.
5대 길드의 마스터들에게만 주어진 채본 연결 직통 라인.
상대에게서는 정해진 답변만 반복하는 AI처럼 무뚝뚝한 목소리만이 돌아왔다.
―「말 그대로입니다. 이번 중구 S급 포탈에는 타 길드의 지원을 허가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이유가 뭐냐고 묻고 있습니다. 저희도 수용할 만한 근거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화랑은 충분히 강한 길드이지만 소수정예로 운용되고 있습니다. 보통 사이즈도 아니고, 엑스트라 규모의 포탈을 그들끼리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시는 분이 왜!”
열이 오른 얼굴을 벅벅 비빈 도 학이 잠시 숨을 가라앉혔다.
감정을 드러내는 건 독이 될 뿐이다.
그는 최대한 이성적인 설득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채본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논리.
그들을 책임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할 만큼…….
“시민들이 다칠 겁니다.”
그러나 절박한 심정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학은 원래도 그런 사람이었다.
이성적인 정보보다는 직감을 신뢰했고, 뒤로 감춰진 뜻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순간들을 신뢰했다.
연락을 나누는 지금 이 시간에도 포탈에서는 마수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송출되는 중계 카메라는 현장감을 전하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철퍽.
렌즈 위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진액이 튀었다.
“많은 사람이 죽고, 무너질 거라고요.”
―「…….」
“그걸 저희가 왜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겁니까?”
하늘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땅 위로는 검기와 마력 섞인 주문이 난잡하게 뒤섞였다.
고작 브라운관 하나 덧씌워진 전투 장면일 뿐인데, 학에게는 유달리 아득한 광경처럼 느껴졌다.
살갗이 녹아 흐르는 와중에도 맞서 싸우는 각성자들의 모습이 처절하게 시야에 잡혔다.
학은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찾았다.
종종 포탈에 함께 들어가던 주서윤 부길드장, 이겸의 곁에서 사무를 도맡던 보좌관, 구출대를 만들었을 때 함께 회의하던 길드원들과…….
‘이모아.’
연이의 친구이자, 이겸의 하나뿐인 가족.
아이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생생한 비명소리 때문에 음성을 막아 버린 중계처로 인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은 충분히 전해져왔다.
순간 가슴이 찌릿거렸다.
‘연이보다도 어린 나이일 텐데.’
보통 아이들처럼 평범한 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교복을 입어야 할 때 도복을.
연필을 쥐어야 할 때 검을 쥐었다.
자신의 동생을 볼 때에도 학에게는 미안함과 죄책감, 안쓰러운 감정이 섞여들어 어쩔 줄 모르는 순간들이 많았다.
자신이 SS등급 랭커가 아니었다면 연이는 다르게 자랐을까, 참 많이도 상상해왔었다.
그렇다면 이겸은.
‘그 사람은 어떨까.’
학과 겸은 참 비슷한 점이 많았다.
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학은 그렇게 생각했다.
일견 랭커, 길드장이라는 직책. 그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꽃이 피고 지는 모든 순간에 무상했지만 단 하나.
‘저 애.’
본인의 세상을 이루고 있는 저 애만큼은, 무엇을 척지더라도 지켜낼 맹수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저 얼굴을 마주하면 무슨 마음을 갖게 될지.
학은 쉽게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누가 보아도 앳된 얼굴이 넘어진 사람의 몸 앞을 망설임 없이 막아섰다.
마수의 산성이 쏟아져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다음 공격을 위해 거리를 벌린다.
마치 이 싸움만을 위해 각오한 사람처럼 몸을 내던졌다.
지팡이를 휘두르고, 나동그라지고, 다시 일어나 덤볐다.
몰아치는 공격에 몇 바퀴 화면이 돌아간 카메라가 지지직거리더니 곧 송출을 멈췄다.
자연스레 뉴스 앵커에게로 넘어간 화면은 ‘속보’ 표시를 띄운 채 줄줄이 자막을 이어나갔다.
그중 하나의 헤드라인이 학의 시선을 옭아맸다.
[이겸은 어디에?]후우. 작게 한숨을 내쉰 상대방은 지루하다는 듯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화랑은 몇 번의 기회를 주었음에도 채본의 소환에 제대로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즉 국가에 대한 반기라고 판단, 현 시간부로 위험분자로 분류되었고 모든 조력은 같은 수준의 죄명으로 판단됩니다.」
“총장님!”
도 학이 소리쳤다.
그는 차오르는 분기를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몇 번 거친 숨을 내쉬다가 이야기했다.
“이건 과한 처사입니다. 이겸 길드장은 포탈이 등장했던 시작부터 지금까지 몇십 년간 자신을 바쳤던 사람이에요. 단 한순간도 빠지지 않고 국가에 헌신했던 헌터라구요. 사정이 있을 겁니다. 잠깐의 작은 불찰이 모든 걸 망가트리는 이유가 될 수는…….”
―「작은 불찰.」
반복하는 어투에 학의 안면이 긴장감으로 빳빳이 굳었다.
상대에게서 조소하듯 엷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 더 위험하죠.」
“……예?”
―「그가 실수했던 적이 있었나요?」
순간 아찔함이 머리를 휘저었다.
학이 답을 내놓지 못하고 어물거리는 사이,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랭킹 1위입니다.」
“그건…….”
―「화랑의 길드장이고, 우리나라의 안보 그 자체입니다. 그게 어떤 무게를 지녔는지 알고 있는 각성자라면, 저희의 처분이 과하지 않다는 걸 이해할 겁니다.」
“…….”
―「이겸이 배반한 대한민국을 상상해 본 적 있습니까?」
대뜸 들이닥친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이겸이 없는 세상.
그가 보호하지 않는, 한국.
잠시 전서구 너머가 소란스러워졌다.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습니다만, 적당한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대기해주시면 좋겠군요. 인접한 지역에 지원이 필요하면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저!”
―「도 학님.」
몸조심하세요.
진정으로 안부가 걱정되어 하는 말이 아님을 학은 알고 있었다.
명백한 경고.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
일방적으로 끊긴 통신을 보며 그는 허탈하게 손을 내렸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 이겸을 끌어내기 위해 저 안에 갇힌 사람들을 이용하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구할 수 있으나, 구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그건 채본에서 중요한 판단을 내릴 때마다 유구히 선택해오던 방식이었다.
학 역시 그게 최선의 선택이라 여겼을 때가 있었다.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피해가 적은 쪽을 고르는 게 맞다고.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가늘고 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대와 소를 나누는 것은 무엇의 기준인가?’
그걸 어떤 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가 진정 지켜야 하는 건…….
“오빠.”
바깥에서 소란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린 연이 슬그머니 장지문을 열어젖혔다.
당장에라도 적진에 뛰어들 것 같은 완벽한 무장태세.
높아진 언성에 불길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바라보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학은 일그러진 얼굴로 연을 마주했다.
“연아.”
그가 자신의 하나뿐인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아득한 곳에서 새카만 구름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학이 지켜내야 할 것들은, 전부 이곳에 있었다.
그러니.
“이해해라.”
그것밖에 바랄 수 없는 자신이 초라하고 부끄러웠다.
***
“지원은 아직인가?”
파삭!
얼음 결정이 된 마수들이 하늘에서 눈처럼 쏟아져 내렸다.
주서윤의 외침에 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답을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선 유지해!”
누군가 명령한 것이 무색하게, 화랑이 처음 정해놓은 방어선 뒤로 점점 밀려나고 있었다.
전력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숨 쉴 틈도 없이 광역기들이 몰아치고, 바글바글하게 모여있던 마수들은 누군가 지우개로 밀어 버린 것처럼 전멸했다.
그러나 텅 빈 부분도 잠시.
꾸루루륵.
꾸륵.
늪지대에서 공기방울 터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하늘은 다시 암녹색으로 채워졌다.
죽이는 숫자보다 더 빠르게 마수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 정도 속도라면 대피한 시민들의 거리를 곧 따라잡을 것이다.
더불어 포탈 영향권인 반경 너머로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그거야말로 대참사였다.
‘이 미친 새끼들.’
욕이 절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서울 한가운데에서 벌어진 S급 대형 포탈.
주변에 있는 유명 길드들만 하더라도 수십 개였다.
포탈이 발생한 지 벌써 몇십 분이 흘렀는데, 어떤 지원도 오지 않는다는 건 누군가 뒤에서 수를 쓰고 있다는 뜻과도 같았다.
이런 일을 벌일 만한 권력을 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이해운.’
그래. 그 여자.
채본이 별것도 아닌 포탈 지원에 이겸을 극구 동원시키려 했을 때부터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이제는 누가 먼저 패를 던지느냐의 싸움이었다.
이해운이 화랑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고, 그건 화랑의 쪽도 마찬가지였다.
이 포탈은 수단일 뿐.
‘진짜 보스전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그 사이에서 죽어 나가는 건 힘없는 사람들이었다.
“허리 숙여요!!”
아타르에게 발목이 붙잡혀 버둥거리고 있는 여자에게 소리쳤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는 걸 확인한 뒤, 팔을 휘감고 있던 금형의 룬 문자를 그대로 쏘아 보냈다.
마수의 발아래. 거대한 진이 펼쳐진다.
‘성운星雲.’
쿠구구구―!
육중한 운석들이 아타르의 머리를 무차별적으로 직격했다.
폭발의 반동으로 머리통이 날아간 마수에게서 튕겨져 나온 여자는 이미 한쪽 발이 썩어 절뚝거리는 상태였다.
내가 다가가 부축하자, 그녀는 이미 초점을 잃은 눈으로 눈물만을 주룩주룩 흘렸다.
으으. 으으으……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맴돌았다.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해야지만…….’
이런 광경을 수도 없이 마주한 인간이 그토록 잔혹해질 수 있을까.
목이 따갑게 침을 되삼켰다.
감상에 젖을 시간 같은 건 없다.
“정신 차려요. 앞으로 똑바로 걸어가요. 쉬지 말고. 알겠어요?”
“으, 으흐윽…….”
“멈추지만 않으면 벗어날 수 있다구요. 도망칠 수 있다구요, 여기서.”
얼른.
어깨를 붙들고 채근하자 절뚝, 절뚝.
하나의 지시를 입력한 그녀의 걸음이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귀가 멀 듯한 전투 소리.
살이 녹아내리는 지독한 냄새.
그 사이로 여자가 걸어간다.
미처 구하지 못한 사람들의 내장이 아타르의 점액질과 함께 흘러 발끝에 닿았다.
짓무른 상처 위로 물약을 쏟아붓고, 다시 지팡이를 고쳐 쥐었다.
‘포기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대로 발버둥 치고,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버틸 것이다.
그 순간.
“……저게 뭐야?”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잠시 현실감이 멀어진다.
익숙한 노란 판넬.
어떤 것에도 미련이 남지 않았다는 듯 무용한 얼굴.
거대한 아타르의 늪 속으로, 그녀가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