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17
17화
최고 현자놈은 일단 열이 받긴 받았는데, 자존심 때문인지 별다른 행동을 보이진 않았다.
단지 대치 상태로 내 눈을 뚫어져라 보기만 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먼저 미련 없이 떠나는 시늉을 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그리고 세 발자국.
“잠깐.”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일부러 더 무관심한 얼굴로 뒤를 돌았다.
두 주먹을 꽉 쥔 현자가 입을 비죽거리는 게 여기서도 보였다.
아까보다 붉어진 얼굴로 입꼬리를 파들거리며 웃고 있었다.
“도사 놈들? 걔넨 너무 근본 있다? 알지?”
그리고 묘한 어필을 하기 시작했다.
“옴, 가르테, 언제까지 그런 구시대적인 주문을 외우고, 기를 느끼니 마니, 부적 문양 하나를 놓쳐서 다른 주문이 됐느니 어쨌느니…….
그리고 그거 부적 말이야. 그리면 또 말리느라 시간 걸리지, 쓰면 또 그려야 되지, 그럴 거면 그림이나 그리지 뭔 마수를 때려잡는다고 그러나?
거기다 종이 낭비, 먹 낭비에…… , 진정한 지구 시민이라면 환경을 생각해야지. 환경을.”
“…….”
“봐. 우리 마법사들은 그런 거 없다? 그냥 머릿속으로 딱! 수식 한번 외워서 집어넣으면 끝.
캐스팅만 하면 바로 되잖아. 쉽다 쉬워. 아이고, 편하다.”
“…….”
“그러니까, 내 말은.”
그녀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가르쳐 주겠다고. 마나 파도.”
오케이.
스멀스멀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여기서 기세등등하게 나가면 안 된다.
상대가 한 번 존심을 굽혔으면 이쪽에서도 굽히며 들어가 주는 게 인지상정.
예의를 차리며 허리를 폴더처럼 숙였다.
질끈 묶은 포니테일이 뺨을 스치며 흘러내렸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현자님.”
***
그녀가 데리고 온 곳은 존경각 동쪽에 위치한 넓은 모래판 위.
육일각이었다.
사방이 빽빽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공간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파도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여기는 수련 할 때나 오는 곳인데…….’
나 역시 직업이 도사인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게임을 진행했을 때 안방처럼 드나들던 곳이었다.
뒤쪽에 있는 나무 허수아비를 얼마나 후려 팼던지.
그런데 여기는 왜?
의아해하며 현자를 쳐다보자 그녀는 팔짱을 끼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가르쳐 준다고는 했지만 사실 그냥은 안 돼요. 아, 걱정은 하지 말고. 아까처럼 불가능한 미션은 안 줄 테니까.”
말도 안 되는 미션 준 건 아나보네.
눈썹을 들어 올리며 동의의 표시를 보냈다.
현자는 발로 흙바닥을 몇 번 탁탁 다졌다.
“이 스킬을 제대로 익힐 수 있는지 보는 거뿐이에요. 마나 좀 쓸 줄 안다고 막 가르쳤다간 우리 쪽 명예도 실추될 수 있으니까. 특히나 그쪽은…… 마나 협회에 정식으로 등록된 마법사도 아니고.”
“네.”
“그럼 시작해요. 첫 번째, 마나 구체 생성.”
마나 구체 생성은 마법사들에게 숨쉬기와 같은 것.
평가 기준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가벼운 축에 속했다.
거기다 나는 ‘그’ 현자 주서윤한테 꿀팁을 전수받은 사람인데 이정도야 못할까.
눈을 감고 집중하자 금세 손 위로 동그란 형체가 만들어지는 게 느껴졌다.
음. 만족스런 소리를 낸 그녀가 또다시 주문했다.
“그다음은 구체 굴리기. 일단 내 키만큼만 해봐요.”
구체 굴리기.
물론 진짜 돌돌 굴린다는 뜻은 아니고, 더 많은 양의 마나를 흡수해 손에 모인 구체를 눈덩이처럼 불리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마나를 포용할 수 있는가, 얼마나 지속시킬 수 있는가.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두 가지 자질을 모두 테스트 할 수 있기 때문에 마법사들 사이에선 잠재력을 가르는 지표가 되기도 했다.
근데 이건…….
‘안 될 거 같은데.’
머리를 긁적였다.
하는 방법은 대충 알고 있지만 제대로 마나 구체를 만들어보겠다, 생각해본 적도 없을뿐더러 이모아에게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마나통.’
그게 또 여기서 발목을 붙잡았다.
사용할 수 있는 마나량이 있어야, 그다음에 기술로 뭉치든 말든 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무기 말고 먼저 마나량이나 확보할 걸 그랬나.’
의미 없는 후회를 했다.
그러나 눈앞의 현자가 내 상황을 알아줄 리 있나.
멀뚱히 쳐다보는 눈을 보며 한숨을 집어 삼켰다.
‘그래도 일단 해보자고.’
사실 현 상태의 이모아가 얼마만큼 해낼 수 있을지 좀 궁금하기도 했다.
심호흡을 내쉬고 예민하게 공기의 흐름을 느꼈다.
주서윤에게 기본을 배웠으니 응용은 내 몫이다.
사방에 흩어져 있는 실낱을 손 위로, 한 점에 모이게, 구체적인 이미지로…….
후우우웅.
미약한 바람이 불었다.
느껴지는 무게의 차이는 없지만 손바닥 면적에 닿는 마나의 부피가 늘어나고 있었다.
출렁거리고 사늘한 감각.
된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감이 든 건 한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며 집중했다.
몸이 마나를 스펀지처럼 쑥쑥 빨아들이는 기분.
허공에 녹아들 듯 근육의 긴장이 이완됐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컥.”
순간적으로 장기를 압박해오는 고통과 함께 모였던 마나들이 흩어졌다.
파스슥.
‘끝났네.’
온몸의 기운이 쑤욱 빠져나갔다.
즉각적으로 탈진할 것처럼 손이 발발발 떨리기 시작했다.
마나를 끝까지 쥐어짜 사용한 몸에 무리가 온 것 같았다.
어지럽다. 이러다 기절하겠다.
머릿속을 울리는 위험도 덕분에 다급한 손놀림으로 마나 포션을 찾았다.
앞에 현자가 있고 뭐고, 정신없이 두 병이나 들이켜고 나서야.
“캬아.”
살 것 같다.
이제야 두 개, 세 개로 흐려지던 시야가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리고.
“…….”
“…….”
“너 뭐니?”
내 허둥지둥을 지켜보던 현자의 황당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게 아주 실질적인 이모아의 상태였다.
현자의 키만큼은 커녕, 머리통만큼도 마나를 응집시키지 못하는 몸뚱이.
역류성 식도염마냥 따끔따끔한 명치를 붙잡고 살살 쓸어내렸다.
그녀는 진정으로 의아하다는 얼굴로 내 어깨를 붙잡고 이리저리 뜯어보기 시작했다.
턱에다 주먹을 받치고,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중얼 거렸다.
“순간적으로 몸 주위에 흐르는 마나가 전혀 부족한 건 아닌데. 아니, 오히려 넘치면 넘쳤지…….
이정도 기운에 이 등급인 게 말이 안 돼. 중상급 서클 스킬도 사용할 수 있을 마나 양인데 왜 갑자기, 그걸 담는 그릇이…….”
대충 흘려들어도 오사장과 같은 결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뭔가가 이모아의 마나를 틀어막고 있다.
‘근데 그게 마나통에도 영향을 줬다고?’
새로운 정보에 덩달아 심각해졌다.
금줄, 저주, 어쩌고 했지만 그게 스킬에만 해당되는 줄 알았지, 마나와 관련된 전반적인.
각성에 대한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그리고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탐구심이 든 건 이 현자님께서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녀는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내가 앞에 있다는 것도 까먹은 것 같았다.
이래서인가? 저래서인가?
수많은 가설들이 흘러나오는 걸 잠자코 들어주는 것도 오 분 째.
뭔가 실마리라도 잡을까 싶어 내내 지켜봤지만 내가 정답을 내릴 수 없는 얘기들뿐이었다.
더 들어봤자 이런 카더라는 시간 낭비다.
그렇게 판단하고 덥썩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지금 진짜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렇게 됐습니다.”
“응? 뭐, 뭐가…….”
“테스트요. 뭐 다른 거 또 할까요?”
통과도 못해놓고 당당하게 선수를 치자 현자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는 게 불안했지만 크게 티내지 않았다.
그녀는 긴 침음을 내며 고심하다가 결국 툭 내뱉었다.
“이대로는 못 배워요.”
“…….”
“일부러 안 된다고 하는 게 아니고, 이 상태로는 억지로 스킬을 익히려고 해도 시간 낭비라는 소리예요.”
내 문드러지는 표정을 봤는지 현자가 급히 덧붙였다.
단호한 얼굴을 하는 그녀를 보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구체 만들기가 망한 후부터 이미 알고 있던 결과라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그러나 호락호락하게 돌아갈 거라면 여기 오지도 않았고.
“안 돼요. 저 이거 배워야 돼요.”
현자의 로브 소매를 붙들고 늘어졌다.
“아니, 그러니까…….”
“다른 퀘스트 주세요. 솔직히 이거 말고도 실력 테스트 할 방법은 많잖아요. 아까처럼 마수를 몇 마리 잡아오라고 하든가, 무슨 전리품을 얻어오라고 하든가.”
“자, 잠깐. 잠까안……!”
“이 스킬 배우기 전까지 저 안 감.”
단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만을 담아 말했다.
내 비장함을 느꼈는지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던 현자가 눈을 마주치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당혹스러움이 나에게까지 느껴져 조금 웃어 버릴 뻔했지만.
#
【MISSION】
▷ ‘마나 감응(P)’, Lv.7 달성하기.
― 분류 : 서브
― 남은 시간 : 2일 23시간 59분 59초
성공 시, 스킬 ‘마나 파도’ 습득.
실패 시, 습득 불가.
#
“알았으니까 이거 좀 놔요.”
새로 뜬 미션창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원하는 걸 얻어내자 금세 침착해진 태도에 현자는 귀신이라도 본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3일이에요. 그 안에 마나 감응을 7레벨까지 올려오면 충분히 스킬을 익힐 수 있는 마법사로 판단. 스킬 전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렵겠지만.
딱히 덧붙이지 않아도 현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현재 이모아의 패시브, 마나 감응의 레벨은 고작 1.
패시브답게 직접 사용해 올릴 수 있는 스킬은 아니었고, 마나를 사용해 행동을 취하면 그때마다 알아서 숙련도가 쌓이는 부류였다.
하지만 높은 등급의 마수를 상대한다고 숙련도를 많이 얻는 것도.
낮은 등급의 마수를 상대한다고 숙련도를 적게 얻는 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그저 무수한 노가다.
반복 훈련으로만 쌓이는 진짜 노하우.
그런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MISSION을 수락하셨습니다.】
노가다가 제일 쉬웠어요.
가볍게 퀘스트를 승낙하자 현자의 눈이 조금 동그래졌다.
이제부턴 시간 싸움이다.
“그럼 내일 봬요.”
고개를 꾸벅 숙이곤 잰걸음으로 성균관을 벗어났다.
“…… 내일?”
머리통을 긁적이며 중얼거리는 현자의 목소리를 가볍게 뒤로한 채.
***
“모아는 어때.”
화랑 길드의 심장부, 최고층 마스터실.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이겸이 가죽 의자에 몸을 묻으며 물었다.
차원을 완료하고 나서도 거의 하루 이상.
각종 비공식적 업무를 처리하고 길드에 도착한 지 겨우 5분이나 됐을까.
정말 한시도 쉬질 않는구나.
질린 표정을 애써 감춘 구서복이 최대한 예의를 차리며 답했다.
“오늘은 웬일로 잠자코 방에 계셔요. 잠깐 어디 나가는가 싶으시더니, 갑자기 뭔 공예에 빠지셨는지 뚝딱뚝딱. 시끄럽던데요.”
“공예?”
탁. 이겸이 손장난을 치던 펜을 놓는 소리가 들렸다.
앞을 바라보는 눈빛이.
‘싸늘하다.’
하필이면 역광이라 그늘진 얼굴이 더 무섭다.
순간 뒷골로 선연하게 떠오르는 공포감.
요즘 이겸은 이모아의 이름만 꺼내면 항시 이런 느낌이었다.
자기가 모르는 이야기만 나오면 바짝 가시를 세운 장미처럼 예민해졌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공포특집은 사절이다.
바짝 쫀 구서복이 애써 태연한 척하며 재빨리 추가설명을 덧붙였다.
“예. 갑자기 어디서 났는지 황동을 마구잡이로 공수해오시더니. 저는 무슨 청동기 시절로 돌아간 줄 알았다니까요, 글쎄. 아가씨가 그런 손재주가 있는지는 또 몰랐네.”
잠자코 구서복의 이야기를 듣던 이겸이 무언가 고심하는 것처럼 입가를 매만졌다.
저건 뭘 물어볼 게 있다는 신호다.
오랜 보좌의 결과로 눈치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 구서복이 입을 딱 다물었다.
서서히 이겸의 눈빛이 움직였다.
“뭘 만드는지 봤나?”
“당연히 봤죠.”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말투로 구서복이 답했다.
이겸은 잠자코 그의 답을 기다렸다.
기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나 궁금해요’가 써져 있는 이겸의 얼굴에 슬쩍 알 수 없는 승리의 미소를 지은 구서복은, 허리에 손을 얹고 누구보다 당당하게 발표했다.
“바나나?”
“…… 뭐?”
이겸의 시선이 천장을 배회했다.
“아니면 배? 초승달? 뭐 하여튼. 되게 길쭉하고 둥글고 휘어져 있고 그랬습니다. 미적 감각은 좀 떨어지시더라구요, 예.”
“…….”
“죄송합니다.”
묵묵한 시선에 스스로 쭈그러든 구서복이 뻣뻣한 정자세 그대로 굳었다.
별 의미 없이 시선을 던지던 이겸이 고개를 돌렸다.
깊은 한숨이 마스터실 안을 감돌았다.
나는, 그저…….
“특이사항 있으면 계속 보고 부탁하지.”
“예. 맡겨만 주십쇼.”
사각사각.
다시금 펜 소리가 시작됐다.
살벌한 침묵 속, 냉철함으로 무장한 화랑 길드장 이겸이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