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227
117화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정상에 선 자)】
익숙한 업적 창을 껐다, 켰다 반복하며 테이블 위로 손가락을 두드렸다.
탁, 탁. 느리고 일정한 속도는 이 상황이 얼마나 지겹고 무료한지 나타내는 지표였다.
하지만 그런 내 상태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이.
오랜만에 눈앞에 놓인 김치찌개와 불고기, 각종 나물 무침 등의 화려한 집밥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구서복은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쭝얼쭝얼 소리 내어 읽어주고 있었다.
여기 싸인하라면 하고.
지장 찍으라면 찍고.
그 의미 없는 행위를 반복하다 은근슬쩍 젓가락이라도 뻗으려고 하면…….
“이거 진짜 급한 일이라니까요, 아가씨!”
야무진 손길이 내 손등을 콱 붙잡았다.
지지 않겠다는 듯 부릅뜬 눈을 바라보며 결국 아무 양념도 묻히지 못한 젓가락 끝을 물었다.
옆에 앉아 있는 이겸에게 도와달라는 것처럼 간절한 시선을 보냈으나 그 역시 서류들에 파묻혀 내게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보였다.
끄으으윽.
고통에 몸부림치던 나는 결국 콰앙! 흔들릴 정도로 유리 식탁을 내리치곤 벌떡 일어섰다.
“복수해요, 지금? 한국인은 밥심인 거 모르냐고!”
씩씩대는 목소리로 묻자 구서복은 되레 억울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제가 복수를 왜 해요? 저야말로 지금 배고파서 죽겠거든요?”
“근데 맛있는 밥 차려놓고 왜 이래. 내가 랭킹 1위 딴 게 파격적인 일인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화랑 주인장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세상은 똑같이 돌아갈 건데 뭐가 이렇게 시키는 게 많냐고!”
우리 엄마도 밥상머리 앞에선 딴짓하는 거 아니라고 했어!!
미처 지르지 못한 소리를 꿀꺽 삼킨 채 식탁 구석구석에 포진해 있는 서류들을 쓸어내려 버렸다.
꺄아아악!
나풀대는 종이들 속에서 구서복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어떻게든 섞이게 두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게 조금 안쓰럽긴 했지만, 배고픔에 눈이 먼 한 마리의 짐승 앞에선 동정심도 사치일 뿐이다.
허겁지겁 흰 쌀밥부터 입에 쑤셔 넣자 달큰한 맛이 몰아친다.
‘크흑. 맨밥이 이렇게 맛있는 거였나.’
조금 눈물을 훔쳤다.
그러니까, 지금은 선발전이 종료되고 약 3일 후.
신경 쓰던 모든 일이 마무리되자 이모아의 몸뚱이는 차근차근 밀렸던 필수 요소들을 채우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해결했던 건 첫째.
‘잠.’
광화문에서 이겸이랑 이야기를 나눴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다시 눈을 깜빡 떴을 때 내가 누워 있던 곳은 낯선 방 안이었다.
익숙한 화랑의 방도, 며칠 묵었던 구서복의 아파트도 아닌 곳.
회사 숙직실처럼 침대라고 하기도 뭐한 딱딱한 철제 베드가 몇 개 늘어져 있는 방안을 멍한 얼굴로 둘러보고 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권해이와 눈을 딱 마주쳤었다.
그리고 그녀는 곧장.
「“으아아아악!!”」
귀신이라도 본 사람마냥 우렁찬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이냐고 허둥지둥 달려온 익숙한 얼굴들에 의해 나는 몇 번이나 머리가 헝클어지고, 바람 빠진 풍선 인형마냥 안겨 다녀야 했다.
왜 이렇게 격하게 환영하는지 몰랐던 나는 그 이유를 좀 진정된 나중에서야 들을 수 있었다.
「“이틀 내내 잠만 잤어.”」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이겸 역시 안도감이 담뿍 담긴 얼굴이었다.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쫓겨난 다른 사람들 대신, 당당히 보호자 의자에 앉은 그는 침대 맡에서 이마를 슥슥 쓸어 넘겨주며 말했다.
‘이틀?’
SSS씩이나 돼서 또 이틀이나 누워 있었단 말인가?
그동안 잠도 못 자고 여기저기 뛰어다녔던 건 맞지만, 끝까지 랭킹 1위의 가오를 지키지 못하고…….
어쨌든.
뒤이어 방문한 힐러 각성자에게 대충의 검진을 받고, 자꾸만 좀 더 쉬라고 눕히는 극성 보호자에게 앉은 자리에서 뜀뛰기로 건강함을 인증하고 나서야, 나는 누워 있는 동안 변한 세상을 살피러 나갈 수 있었다.
잠들기 전보다 천재지변이 변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거리는 좀 더 일상적인 모습을 되찾은 채였다.
곳곳에 쌓여 있던 건물 잔해들이 깨끗하게 치워지고, 지저분하게 끊어져 있던 전깃줄들 역시 대강이라도 보수가 된 곳이 많았다.
그리고 또 하나 기가 막히게 달라진 점이 있었다면.
「“누나, 누나! 여기 싸인해 주세요!”」
「“언니, 안 아팠어요? 어떻게 그렇게 빨리 날아다녀요?”」
「“저한테두 빛 한 번만 보여주면 안 돼요? 네에?”」
어딘지도 모르고 돌아온, 아마도 임시 구호소일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허리에도 안 오는 어린아이들이 우다다 팬싸인회를 열었다는 것이었다.
이겸 아니고 나?
손짓으로 몇 번이나 물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내게 종이와 펜을 들이밀었다.
초롱초롱한 눈빛들을 무시하지 못하고 얼떨떨하게 둘러싸여 있던 사이, 경호를 자처하며 뒤를 쫓아다니던 이겸은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짓곤 먼저 건물 안에 들어갔다.
「“애들이 너 깨어나길 오래 기다렸어.”」
그런 말을 덧붙이고선.
나는 거기서부터 뭔가 미묘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고작 랭킹 1단계.
그래봤자 내내 ‘우리들의 영웅’, ‘황제’ 별명을 달던 이겸도 건재하고, 타이틀만 랭킹 1위지 아직 표면적으로는 16살에 불과한 이모아에게 뭘 그렇게 큰 관심과 책임이 맡겨질까 싶었던 것이다.
근데,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 인기는 뭐 그렇다 치더라도.
“그럼 따악 여기까지만. 여기까지만 싸인하시고 밥 드세요. 이게 뭐냐면 각국에 주요한 메인 포탈이 터졌을 시 정보를 공유한다는 협정인데, 일단 기본적으로 한국, 일본, 중국 탑 랭커들, 그리고 유럽 연합이랑…….”
“스탑.”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자 구서복이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칼을 죽죽 끌어내렸다.
밥이나 먹으라는 식으로 그릇을 땅땅 두드리니 그제야 축 처진 등으로 의자에 앉는다.
드디어, 다시 이 셋이 모인 식탁.
“따라 하세요.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아…….”
“음. 많이 먹어.”
마지막으로 서류 한 장에 서명을 휘갈긴 이겸까지 자리를 정리하자, 완벽한 식사 자리가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미지근하게 식은 김치찌개를 한 입.
바싹 구운 스팸 한 점, 계란프라이까지 입에 한가득 넣어 씹으니 천국이 따로 없는 기분이었다.
달그락대는 식기 소리를 감상하며 테이블 위로 턱을 괴었다.
이렇게 다 같이 모여 밥을 먹었던 게 마지막으로 언제였더라.
‘구서복 아파트를 빠져나갈 때까지만 해도 마주 앉아서 밥 먹을 장면은 또 없을 거 같았는데.’
이겸을 살리고, 이모아를 살리고, 또 내가 살아남기 위해 척을 지는 것까지 각오하고 벌인 일이었다.
여러 폭풍들이 지나가고, 앉은 자리가 달라지고, 또 많은 것들이 사라졌어도.
‘우린 여전히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고 있다.’
그걸 생각하면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켠이 뿌듯해져 왔다.
진공청소기마냥 음식들을 빨아들이던 입이 조금씩 느려질 무렵, 아직도 축 처져 있는 구서복에게 우물대며 물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전달할 일들이 많은 거예요? 진짜 나 모르게 화랑 마스터 계승, 뭐 이런 거 진행되고 있는 거 아니죠?”
에휴우.
구서복이 즉각 기가 찬다는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길드장님도 옆에 떡하니 계신데 무슨 소리세요, 진짜. 화랑 관련 일 한 개도 포함 없이, 그냥 전부 랭킹 1위가 해오던 일이에요.”
그리고 아가씨가 잠들어 계신 사이에 더 밀리기도 했고.
그가 투덜대며 입속에 밥을 더 밀어 넣었다.
“아가씨도 곁에서 보신 게 있으시니 조금은 알고 계시겠지만, 사람들이 길드장님한테 기대하는 바가 얼마나 컸었어요? 뭐, 그때는 길드장님 혼자 SSS등급 랭커셨고, 거의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고 있다시피 하셨으니까 그럴 만도 한데. 어쨌든.”
밥을 먹는 내내 주섬주섬 끌어모았던 옆자리 서류를 팡팡 친 구서복이 선포하듯 검지를 치켜들었다.
“그걸 이제 아가씨가 나눠 가지신 거라구요. 대한민국에 태어난 두 번째, 아니. 세 번째? 어쨌든, SSS급 랭커시자 공식적으로 랭킹 1위가 되신 아가씨가!”
그리고, 나는.
“아, 예에…….”
듣는 듯 마는 듯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떡거렸다.
한 귀로 흘리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는 구서복은 성난 치와와처럼 입술을 말아 올렸다.
뒤따르는 송곳 같은 잔소리에 두 귀를 틀어막고 국이나 후루룩 들이켜 댔다.
아, 김치 더 없나. 뻔한 핑계를 대며 자리를 벗어나려던 찰나.
“길드장님, 그건 말씀해 주셨어요?”
구서복의 그 한마디에 들썩이던 엉덩이가 딱 멈췄다.
무슨 말이냐고 묻는 것처럼 이겸과 그를 번갈아 바라보자, 이겸은 눈썹을 까딱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직 말 안 했어.”
“왜 안 하셨어요. 안 그래도 다른 랭커 분들이 한 번은 제대로 회의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성화시던데.”
“뭔데? 뭔데요?”
“모아가 깨어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조금 더 회복되면 이야기해보려고 했어.”
“에이, 그래도 얼른 하셨어야죠. 그거야말로 이제 아가씨가 주도해서 진행해야 할 일이잖아요. 1위 없으면 거기선 아무 결정도 안 나는데.”
“아니, 계세요? 저 여기 있거든요? 뭐냐니까?”
“그래도…….”
콰앙!
떡하니 옆에 있는 날 두고 지들만 아는 이야기를 나누는 둘을 큰 소음으로 갈라놨다.
땡그렁. 떨어진 숟가락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음산하게 속삭였다.
“뭐냐고.”
시선을 맞춘 채 눈치를 보던 이겸의 입에서 결국 답이 토해져 나왔다.
“메인.”
그가 복잡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모아, 너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5대 길드 마스터들과 10위 안에 드는 랭커들이 꾸준히 진행해오던 미션이 한 가지 있었어. 서브, 돌발, 차원으로 나뉘는 다른 미션들과는 다르게…….”
“메인.”
답을 가로챈 내 목소리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다른 설명을 덧붙이려는지 다시 입을 뗀 순간.
“에이, 뭐야.”
김이 잔뜩 빠진 얼굴로 코를 훔쳤다.
난 또, 내가 모르는 중요한 일이라도 남아 있는 건가 했더니만.
이겸과 구서복을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선언했다.
“나는 그거 안 할 건데.”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