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24
24화
“…… 제발 가라, 집에 가.”
호숫가 보이는 창가자리에 앉아 삼킬 수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는 잠실, 석촌호수 앞 카페.
산책로를 따라 걷는 사람들은 오후가 될수록 더 바글바글해졌다.
오순도순 소풍을 나온 가족들, 손을 꼭 붙잡고 걷는 연인들, 친구들, 사람들…….
꺄아아아―.
옆에 붙어 있는 놀이공원에서 즐거운 비명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졌다.
‘포탈이 터질 것이다.’
이제 불과 30분 후.
그 ‘잠실 참사’가.
행복이 가득한 얼굴들 사이에 딱딱히 굳은 건 나뿐이었다.
그 기사를 마주한 건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 식사 때였다.
땡그랑!
입에 물고 있던 젓가락 한 짝이 식탁 아래로 떨어졌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진짜 손에 힘이 풀리는구나.
나는 그걸 불과 어제 깨달았다.
‘……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냐.’
말 한마디 나누지 않으면서도 식사만큼은 꼭 같이하는 이겸이 앞에서 버석하게 물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서는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내가 뭔가 감추고 있는 게 티가 났는지, 이겸은 나를 날카로운 얼굴로 응시했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밥도 다 씹지 못한 채 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대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심장이 뛰었다.
미리 준비해 둔 생존 키트를 확인했다.
체력 물약 300세트, 마나 물약 500세트, 해독제 50세트, 마비약 10세트, 뽀득뽀득 닦은 지팡이…….
그리고, 가장 안쪽에 숨겨놨던.
“…….”
빳빳한 종이를 손안에서 굴렸다.
얼마나 매만졌는지 명함 끝이 조금 헤져 있었다.
「백골 강민희」.
‘이걸 쓸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금 문양이 둘러진 앞면을 몇 번 쓰다듬다가, 명함을 뒤집었다.
적혀 있는 번호를 꾹꾹 스마트폰 위로 입력했다.
‘지금이라도…… 대피하라고 해볼까.’
앉아 있는 다리가 달달 떨렸다.
빨대 끝은 신경질적으로 씹어대 찌그러진 지 오래였다.
잠실은 원래도 유동인구가 많긴 하지만, 이건 타이밍의 실패였다.
세상이 스펙타클 생존 서바이벌로 변하든 말든 사람들의 일상 유지만은 끝내줬다.
하필이면 시기도 오늘.
광복절과 대체 공휴일 사이에 낀 이 주말에.
상위 각성자 다량 보유국.
대한민국의 국민들답게 연휴다 싶으면 즐거움을 찾아 쏟아져 나왔다.
물론 개중에는 헌터들도 섞여 있겠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오히려 더 안전하다 여기는 인간들도 있을 것이다.
그게 맞는 말일 수도 있다.
이번에는 단연코 틀린 생각이었지만.
“그래…… 다 자기 운명이지 뭐…….”
차라리 보지 말자 싶어 머리를 감싸 쥐고 엎드렸다.
왜 예언자들이 미치는 줄 알겠다.
알면서도 방관한다는 게 이렇게 처참한 기분일 줄 몰랐다.
사실, 정말 바늘구멍만큼의 가능성이긴 하지만, 막으라면 막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나한테는 이겸이 있으니까.’
비록 냉전 중이기는 해도, 이모아가 절박하게 얘기하면 속는 셈 한 번쯤은 넘어가 줄법한 놈이었다.
적어도 여기 들어와서 내가 본 이겸은 그랬다.
못 믿을 게 뻔하지만, 포탈이 터질 바로 앞에 배치 정도는 시킬 수 있었겠지.
그럼 적어도 대피 시간은 벌 수 있을 테고, 피해 인원도 대폭 감소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뭔가 바뀌면.’
잠실 참사는 애카에도 영향을 끼치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만약 참사 자체를 막아 서사를 바꾸면 적어도 수천, 수만 명의 목숨을 구하게 되겠지만…….
‘그만큼 후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분명히.’
종로만 생각해봐도 그다음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고민 많은 머리를 마구 털어냈다.
내가 잠실 참사에서 목표하는 것은 오로지 ‘이모아의 사망 플래그 회수’.
그것도 스토리를 최대한 바꾸지 않는 선에서.
주서윤과 이겸의 관계가 틀어진 이유가 뭔지.
그것만 알아내서 비틀면 된다.
나머지는 전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거면.
그거면 되는데…….
“바아.”
문득 맞은편 테이블의 아기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의 등에 매달려 꼬물거리는 손.
나와 눈이 마주치고 오동통한 팔을 쭈욱 내밀어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꺄! 아기가 웃었다.
“저기요.”
“아, 네?”
“제가, 그러니까, 지금 제가 말하는 게 진짜 이상하게 들리는 거 아는데.”
아기의 엄마와 눈을 마주쳤다.
“도망치세요. 여기서 최대한 멀리.”
삐이이―.
에에에엥!
삐! 삐! 삐! 삐!
가지각색의 사이렌 소리가 모두의 핸드폰에서 울렸다.
늦었어.
그 소리가 나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송파 올림픽로 240, 잠실동 40-1 S-SS급 포탈 신호 감지. 위험 지역에서 즉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반경 3km 이내 민간인의 이동이 제한됩니다.】
【대피 경보 발령/ 강동구, 강남구, 광진구, 성동구, 중랑구 주민 여러분들은 대피, 외출 자제 등 안전에 주의 바랍니다.】
【긴급 재난 문자/ 서울 전역의 시민 여러분들은 안전에 유의하시며 방송 청취가 가능한 라디오 등의 수신기를 소지하시길 바랍니다.】
카페 안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변했다.
넘어지고 짓밟히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비명, 울부짖음, 악에 받친 목소리…….
내 앞에 앉아 있던 아이의 엄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무슨 악마라도 보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이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은 그녀가 나를 거세게 밀치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치인 어깨가 힘없이 덜렁거렸다.
통창 바깥으로 시꺼멓게 뒤덮이는 상공이 보였다.
“좀만 참지. 쓸데없이 오지랖은 왜 부려서는.”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카페 한가운데.
나는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발끈을 다시 질끈 묶었다.
길거리에 달리는 사람들이 모두 개미처럼 느껴졌다.
엄지로 누르면 찍, 하고 터져 죽을 것 같은. 그런 사람들.
느린 발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내가 갈 곳은 포탈에 가장 인접한 1차 방어선.
이겸과 길드 화랑이 도착해 있을 그곳이었다.
***
쩌저적!
콰르르르릉―!
“무슨 하늘에서 수박 갈라지는 소리가 나냐…….”
구서복은 밤처럼 새까만 연기에 뒤덮인 상공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어디서 이런 걸 봤더라.
목성을 확대하면 이런 느낌이었나.
가스 같은 어둠이 이글이글.
타오르듯 빠르고 매섭게 흘러갔다.
스킬이 번쩍거릴 때마다 마수와 헌터들이 실루엣이 어렴풋이 비쳤다.
재난이다.
아무리 쳐줘도 판타지스러운 장면이 이제 더 이상 영화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모든 게 현실이었다.
“아저씨!”
지금 이 목소리처럼.
“아저씨이이!”
내가…… 잘못 들었나?
구서복은 결코 여기서 들려선 안 될.
존재해서는 안 될 익숙한 목소리에 심장이 발끝에 떨어진다는 기분이 뭔지 체감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이내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하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구서복. 너 이거 정말 노이로제야. 아가씨가 여기 있긴 왜 있냐, 이 멍청아.”
그리고 스스로에게 현실을 자각시켜 주기 위해 뒤를 돌았다.
업무 스트레스다.
요즘 아가씨한테 이리저리 치인 일이 너무 많아서, 환청까지 들리는 거다.
이번 일이 끝나면 연차라도 내서…….
“아가씨……?”
눈앞에 있는 게 실체인지 허상인지 몰라 서서히 손을 뻗었다.
환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흔히 SF영화에 등장하는 교감 방법처럼, 손가락과 손가락이 맞닿는 순간…….
“아아악!!”
소스라치게 놀란 몸이 벌러덩 뒤로 넘어갔다.
진짜다.
진짜 아가씨가 여기에 있다.
저 쓰레기라도 씹은 것 같이 떫은 얼굴이 그 증거였다.
벌벌 떠는 몸 앞에 아가씨가 쭈그려 앉았다.
“이겸은요.”
“여, 여기,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서로의 질문이 엇갈렸다.
우르르릉! 콰앙!!!
낙뢰가 내리치는 소리가 하늘과 귀를 찢었다.
아가씨는 이 상황에도 하나도 겁먹지 않은 사람처럼, 태연하게 내 질문에 답했다.
“하필 잠실에 있었는데 다들 여기 있을 것 같아서 왔어요. 다른 데 가는 것보다 안전할 거 같아서.”
“그, 그, 그건 잘하셨는데…….”
“이겸 어디 있냐구요.”
포탈은 이미 열렸다.
길드장님은 이미 고공에서.
죄다 집합된 S급 이상 헌터들과 함께 교전 중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잘 버티고 있다.
그 결과로 1차와 2차, 경계선 근처에 배치된 나는 여유가 있기도 했고.
물론, 머리 위는 난리였지만.
‘여기까지 왔으면 아가씨도 모르지 않을 텐데…….’
묻는 기운이 어딘가 싸늘했다.
번쩍!
또다시 번개가 내리쳤다.
이건 길드장님의 스킬이 분명했다.
아가씨의 옆얼굴 위로 잔상처럼 남은 빛이 어룽거렸다.
“위, 위에 계시죠.”
“주서윤도 같이요?”
“네? 부길드장님이요? 갑자기 부길드장님은 왜…….”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라.
그런 기운이 풀풀 풍기는 시선에 눈을 한 바퀴 굴렸다.
“부길드장님은 2차 방어선에 계세요.”
“뭐? 왜요?”
“저야 모르죠. 길드장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으니까.”
그 순간, 아가씨의 얼굴이 황망으로 물들었다.
아주 보기 드물게 패닉에 빠진 모습이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입술을 아득 깨물고, 난처한 표정으로 하늘과 땅을 번갈아 바라봤다.
뭐가 그렇게 이상한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아가씨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려는 순간.
“조심.”
짧은 부름과 함께 몸이 뒤로 팍, 떠밀렸다.
파르르르륵!!
울퉁불퉁하고 긴 혀가 위협적으로 그 사이를 갈랐다.
점성 있는 액체가 튀며 아스팔트 도로를 녹였다.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그냥 산화될 뻔했다.
뒤로 거리를 벌리면서도 곁눈질로 공격한 놈의 정체를 살폈다.
설화 S급 마수, 섬니.
온몸이 독으로 흘러내리는 녀석은 거대한 두꺼비 마수였다.
턱힘이 좋아 섬니의 입안으로 끌려 들어간 생명체 중 뼈가 되어 나오지 않는 것들이 없었다는.
이놈이 여기까지 내려왔다는 건, 1차 방어선이 뚫렸다.
즉, 앞쪽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아가씨!!”
그러므로, 아가씨가 있을 곳은 아니다.
다시금 목표를 조준해 휘날려오는 혓바닥을 진공으로 쳐내며 아가씨의 쪽으로 향했다.
용케도 피하긴 하는데,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것처럼 심장이 조였다.
그러나 한발 먼저.
내 쪽으로 도착한 건 아가씨였다.
“전 2차 방어선으로 갈게요.”
“예?! 아니, 가실 거면 저랑 같이……!!”
“여기나 잘 막아요. 이따 봐요.”
말릴 새도 없이 앞으로 튀어나간 아가씨는 순식간에 멀어졌다.
아가씨! 아가씨이!!
있는 힘껏 울부짖었지만, 모습이 점점 보이지도 않게 됐다.
퉤엑!
생각할 시간도 없이 눈앞으로 섬니의 독침이 한가득 쏟아졌다.
여기도 저기도 난리가 났다.
“망했어. 다 망했다고!”
거의 울면서 진공 범위를 열었다.
이제 아가씨의 모습은 어디도 보이지 않았다.
마수들이 몰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