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244
134화
스산하게 깔린 안개.
후텁지근한 공기.
그 사이로 비치는 암석 산의 검은 능선.
습한 숨을 한껏 들이쉬었다.
구드의 지배지에서는 약간의 물비린내.
그리고 이끼의 냄새가 났다.
살갗에 와닿는 안개의 느낌이 척척했다.
‘이런 느낌이었구나, 여기는.’
게임 속에서 수십 수백 번도 넘어섰던 장소지만 이곳의 향기를 오늘 처음 맡았다.
이모아 루트가 생긴 후부터 수많은 변수를 만나고, 또 한 치 앞도 모르는 미션들을 받아왔었는데, 익숙한 배경을 만나자마자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던 긴장감이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냉철한 눈으로 지배지 안을 훑었다.
가장 먼저 체크한 것은.
‘공간의 지형지물.’
1 관문 맵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시작 지점 양 사이드에 갈고리처럼 튀어나와 있는 쌍둥이 기둥이라 말할 수 있었다.
얼핏 보면 거대한 덩굴 모양 같기도 한데, 온 지형을 기어 다니는 구드가 오르내리며 공격하기 딱 좋은 석순이라 일부러 시작부터 놈을 멀리 유인해 싸우는 유저들도 많았다.
그리고 역시나 이곳에도.
‘체크.’
지형 한복판에 삐죽 솟아오른 두 기둥이 존재했다.
탑이 생성되었던 곳은 본래 시작 지점에서 좀 떨어져 있는 곳인지 보는 방향이 다르긴 했지만, 분명히 내가 아는 그 쌍둥이 기둥이 맞았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작은 암석 언덕이나 아슬아슬하게 깎여있는 징검다리.
주로 개선문이라 불리는 아치형 돌까지 모두 체크했다.
‘모든 구조는 그대로다.’
이곳이야말로 내가 알던 였다.
게임 속에서 보던 것과 한 치의 다른 점도 없는 그 전투 장소.
황토색 바닥 말고는 흔적도 없이 가라앉아 버린 탑의 중심에 우뚝 섰다.
이곳이 어딘지 파악하느라 바쁘게 눈을 굴리던 리오의 시선이 나를 따라 올라왔지만, 나는 그에게 눈길 한 번 줄 새 없이 호흡을 가라앉혔다.
가끔 먹구름 사이로 보이는 핏빛 하늘이 땅에 내리쬐었을 뿐, 사위를 꽉 채운 회색 공기는 적막했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구드 지배지인데 구드가 없잖냐.’
그 긴 몸이 어디 가려지지도 않을 텐데 지배지는 생명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황량했다.
그럴 리가 없으니 뒷목에 다시 바짝 힘이 들어가는 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습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혹시 제대로 스타트라인에 서야 시작되는 느낌?
작게 눈살을 찌푸리며 리오에게 턱짓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린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할 여유는 없었다.
단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향해보아야 했다.
일단은 항상 1 관문에 들어왔을 때 서 있었던 그 자리에 가 볼 생각이었고, 그다음에도 마수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겹쳐져 잘 보이지 않는 암석 산 하나하나를 뒤져볼 계획이었다.
그것도 안 되면…….
‘이제 행패 부리는 거고.’
우아한 소환이 불가능하다면 지배지고 뭐고 놈이 사는 곳을 다 부숴 버릴 생각이었다.
생각해 봐라.
집에 자기 발로 쳐들어온 침입자가 주인장 나오라고 있는 살림, 없는 살림 다 뽀개면 누구라도 화가 나서 나오지 않겠나?
적반하장의 끝장을 보여줄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로 바짝 따라붙은 리오는 내게 느껴질 정도로 주위를 경계하며 발소리를 죽였다.
땅이 울려라 퍽퍽 걷는 나와는 상반된 태도였다.
“여기는 ‘구드’라는 마수의 서식지예요. 최종 보스한테 가려면 총 3 관문의 시련을 넘어야 하는데, 그중에 첫 번째.”
조용한 목소리로 설명하자 조금 놀란 눈을 한 리오가 혼자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채희 님이 알고 계신 곳인가 보군요.”
“알다마다. 간교한 원죄의 상징이다, 카오스의 뱀이다 부르는 말들은 많은데, 나한텐 그냥 지렁이인 정도.”
“아…….”
“그러니까 너무 쫄지말라고. 표정 좀 풀고.”
너무 긴장하면 보일 것도 안 보이니까.
리오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앞서 나갔다.
“미리 좀 정보를 얘기해 두자면, 구드는 머리가 두 개인 뱀 마수예요. 한 놈이 혀로 몸을 휘감고 한 놈이 덥썩 무는 공격을 주로 쓰는 데 거기 걸리면 아주 골치 아파. 애초에 안 걸리는 게 제일 베스트지만, 사람 일은 또 모르는 거니까.”
“그럼 어떤 식으로 빠져나오는 게 가장 좋을까요?”
“대부분이 반사적으로 혀를 잘라내려고 하는데 흐물텅거려서 그런가 쉽지가 않아요. 무조건.”
리오의 콧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여길 쌔리면 아파서 냅다 풀고 도망갈 거예요.”
“코…….”
“그리고 대가리가 두 개라 그런지 양쪽 속성도 다른데, 왼쪽 빨간 놈은 주로 마주치면 저주거는 마력계. 오른쪽 초록 놈은 독 뿜고 이빨로 씹어대는 물리계예요. 초록이 다음에 빨강이한테 당하는 건 상관없는데, 빨강이한테 걸리고 초록이 만나면 그건 그 자리에서 즉……!”
사니까.
미처 말을 끝내지 못하고 뭔가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순발력으로 팔을 붙잡아 건진 리오가 아니었음 대지에 무릎이라도 꿇을 뻔했다고.
“뭐야?”
짜증 내며 바닥을 쏘아보았다.
보통 작은 돌조각이 대부분이라 보폭만 크게 걸으면 평지처럼 느껴지는 길인데, 내가 밟은 곳은 어쩐지 오목하게 흙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것도 그 부분만 조금 패여 있는 게 아니라, 육안으로 다 확인할 수도 없을 만큼 양옆으로 길게 뻗어져 있는 흔적이 보였다.
하나의 선처럼 보이는 그 흙더미는 꼭 잘 갈아놓은 밭의 도랑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근데 그래서.
“……이게 뭐지?”
쭈그려 앉아 조심스레 도랑을 살폈다.
폭은 내가 양팔을 벌린 것의 반 정도.
그렇게 좁은 넓이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구드가 지나간 흔적이라기엔 너무 작은 정도였다.
놈은 양팔이 뭐야.
‘내가 세 명 정도 모여 활짝 팔을 벌려야 겨우 입 면적을 잴 수 있는 크기니까.’
어쨌든 본래 구드의 지배지에서 볼 수 없었던 모양임은 분명했다.
뭔가 힌트라도 되는 것일까?
의심하며 무릎을 폈다.
“일단 한번 따라가 보자고요.”
이야기하자 리오는 거부할 이유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방패를 쥐었다.
그러나, 비장하게 출발한 것과 다르게.
“아무것도 나타나질 않네요.”
나를 따라 걷던 그가 긴장이 풀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시작했던 부근에서 얼마나 왼쪽으로 걸었을까.
흔적을 따라 쭈욱 걸었을 뿐인데 쌍둥이 기둥은 어느새 저어 먼 끝 오른쪽에서 조금 형태가 보일 정도였고, 끝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선은 가도 가도 그대로였다.
거기다 갈수록 짙어지는 안개에 이제는 방향 감각마저 상실해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알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더 가는 건 바보 같은 짓인가?’
생각하며 걸음을 멈췄다.
전진하며 알아낸 정보라고는 이 균일한 흙더미가 아주 길게 이어져 있다는 것뿐.
무엇으로 인해.
그리고 뭐 때문에 이렇게 큰 흔적이 만들어졌는지는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했다.
그냥 최종 보스가 장난치느라 만든 미스터리 서클 같은 거라고 치부해버리면 편할 텐데, 어쩐지 나는 이 흔적이 계속해서 찜찜했다.
많은 과정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달라지는 건 없다.’
잠시 고민하듯 입술을 깨물고, 어떤 실마리라도 찾아내기 위해 쉼 없이 주위를 살피는 리오의 팔을 붙잡았다.
“넉백기 같은 거 몇 개 있죠. 밀어내기 배웠잖아. 탱커의 완전 기본인데, 그거.”
“아, 이, 있습니다.”
얼굴을 들이대며 무섭게 물었더니 대답하는 표정이 조금 당황한 기를 띠었다.
허겁지겁 방패를 지면에 꽂고 확인시켜주듯 스킬을 시전하려 하기에, 손을 붙잡아 말리고 딱 한 위치를 집어 주었다.
“내가 하나, 둘, 셋! 하면 같이 스킬 쓰는 거예요. 놀라지 말고. 오케?”
“알겠습니다.”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들으니까.
리오를 도랑 근처에 세워두고 나는 조금 떨어진 공간에 섰다.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안개가 장막처럼 사이를 가렸지만, 그래도 흐릿하게 얼굴 정도는 분간할 수 있는 정도였다.
손날로 안개를 휘적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잘 될까 모르겠지만.’
뻐근한 목을 돌리며 리오에게 신호했다.
하나. 두울.
“셋!”
외침과 함께 쿠웅! 방패가 내리쳤다.
[밀어내기] 스킬로 발생한 충격파가 잠시 주변 안개를 옅게 거둬내고, 그와 동시에.“【염화】.”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앞으로 걸어서는 도통 알 수 없으니, 위에서라도 한 번 흔적을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조금 지면에서 떨어졌을 뿐인데도 선은커녕 리오의 정수리도 잘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지.’
가볍게 혀를 찬 뒤 [공중 뒤돌아 차기]로 체공 시간을 벌었다.
이제는.
‘바람 싸움이다.’
“【빛의 메아리】!”
파아아앗!
휘날리는 빛과 바람이 조금 더 안개를 걷어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는 계속해서 스킬을 쏟아부었다.
눈앞이 투명해질 때까지.
시야가 제대로 보일 때까지 [마나 파도]와 [빛무리], [화우]를 사방으로 쏟아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바람과 불길에 반짝이는 안개가 마른 아주 찰나의 사이에.
‘봤다.’
선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타악.
가볍게 착지한 나는 내 쪽으로 다가오는 인영에게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오지 마!!”
그 순간, 움푹 패여 있던 흙더미가 더 밑으로 풀썩 가라앉았다.
그건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듯이.
더 거대한 존재를 땅 밑에 숨겨 놓았다는 듯이 갈라지는 땅이 점점 더 큰 균열을 만들어내고,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본 흔적은 한 장소를 둘러싸고 빙빙 도는 원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탑.’
우리가 있던 탑이 존재했다.
구드는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먹잇감이 스스로 제 둥지에 들어오기를 아주 오랫동안.
느긋하게 배회하며 기다렸을 뿐.
사아아아아.
비단 같은 혓바닥이 마른 땅을 핥았다.
2부